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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더 뜨거우면 위험해 (49/50)

49. 더 뜨거우면 위험해

혜운과 재현은 혜운의 집 창가 테이블에 마주 앉아 도시의 야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제 여기서 야경 보는 날도 얼마 안 남았다. 신혜운, 서운하겠네?”

“우리 새집도 야경 멋있어서 괜찮아.”

사흘 후면 신혼집으로 이사를 가게 된다. 결혼식까지 앞으로 남은 시간은 단 일주일.

재현과 한 가정을 이루고, 자신이 그의 아내가 되고 그가 자신의 남편이 된다는 게 여전히 믿어지지 않았다.

재현을 다시 만난 날부터 그와 연애를 하고 청혼을 받았던 모든 순간이 아득하게만 느껴졌다.

먼 길을 돌아오는 동안 어느 순간부터는 재현을 다시 만나는 걸 포기했기에 이런 순간을 맞게 될 거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만약 그날 우리가 다시 만나지 못했다면, 우린 지금쯤 어떤 모습일까.

난 여전히 너를 원망하고 그리워하면서 살아가고 있겠지. 넌 마음의 짐을 끌어안은 채 괴로워하며 살아갈 테고.

아니면, 어떻게든 다시 만났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우린 다시 만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겠지? 반드시 다시 만날 거라고, 과거에 내가 말했던 것처럼….

“무슨 생각해?”

재현의 물음에 혜운은 조용히 웃으며 턱을 괴고 재현을 바라보았다.

“내가 너랑 진짜 결혼하게 될 줄이야….”

혜운의 말에 재현도 웃음을 참지 못했다.

“신기하지?”

“우리 어렸을 때 생각하면, 도무지 믿기지가 않는다.”

재현과 함께했던 모든 순간들이 파노라마 필름이 되어 머릿속을 빠르게 스쳐 지났다.

재현과 자신은 서로의 첫 번째 친구로 만나 남매와 친구 그 어느 사이를 유지하며 함께 자랐다. 어느 순간부터는 서로를 좋아하게 되었고, 그 마음을 채 꽃피워 보지도 못한 채 그렇게 헤어져 긴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결국에는 다시 만나 일주일 후면 부부가 된다. 경선의 하얀 미사보를 머리에 얹고 결혼식을 흉내 내던 게 엊그제 같은데, 그게 현실이 된다니…. 혜운은 감격스러웠다.

재현은 손을 뻗어 혜운의 머리를 얌전히 쓰다듬어 주었다.

“내가 잘할게.”

믿음직스러운 그의 말에 혜운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던 그의 손을 두 손으로 감쌌다.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

혜운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모두에게 힘들었던 시간이 지나고 난 후, 비로소 맞이한 행복이 훨씬 더 크기에 그가 더는 미안해하지 않길 바랐다.

“결국… 다시 만났잖아.”

재현이 일어나 옆으로 다가오더니, 혜운을 안고 머리에 입을 맞췄다. 혜운은 그의 허리를 두 팔로 감싸 안은 채 깊게 숨을 들이쉬며 지금의 평온함을 만끽했다.

“고마워. 나 기다려 줘서.”

“응.”

“고마워. 나 다시 받아 줘서.”

“응.”

“고마워. 나랑 결혼해 줘서.”

혜운은 고개를 들어 재현을 보았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숙이며 혜운에게 입을 맞췄고, 그의 부드럽고 달콤한 입맞춤에 혜운의 얼굴에는 점점 미소가 번졌다.

단 한 번도 다른 사람을 마음속에 담아 본 적 없고, 사랑해 본 적 없었다.

오직 재현에게만 허락되었던 마음이었고, 사랑이었다. 그렇기에 흔들림 없이 그곳에 깊은 뿌리를 내리고 무럭무럭 자랄 수 있었다.

혜운은 깨달았다.

생각했던 것보다 하재현을 아주 많이 사랑하고 있구나, 라고….

* * *

무더위가 절정에 달한 8월.

혜운과 재현은 유아 세례를 받고 고등학교 때까지 다녔던 성당에서 혼배 미사로 결혼식을 올렸다.

혜운과 재현의 혼배 미사에는 예상보다 많은 하객들이 찾아와 주었다.

가족들과 가까운 지인들만 초대해 조용히 진행하려 했지만, 소식을 전해 들은 동네 친구들과 오랜만의 민영과 영철을 보기 위해 찾은 그들의 지인들까지 모여 예배당을 가득 채웠다.

작은 동네가 두 사람의 결혼으로 소란해졌다. 마치 이곳에 온 동네 사람들이 모인 것만 같았다.

슬픈 일이 있을 때는 자신의 일처럼 함께 슬퍼해 주었던 사람들이, 오늘은 한마음으로 축하를 보내며 두 사람의 새 출발에 축복을 빌어 주었다.

혜운은 웨딩드레스 대신 단정한 하얀 원피스를 입었고, 재현은 짙은 남색 슈트를 입었다. 옷차림은 보통의 결혼식만큼 화려하지 않았지만 두 사람의 얼굴에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미소가 얹어져 그 자체만으로도 빛이 났다.

혜운은 연보랏빛 히아신스 부케를 손에 들고, 재현이 프러포즈하면서 선물해 주었던 웨딩 슈즈를 신고 재현에게 향했다.

두 사람이 손을 꼭 잡고 새하얀 버진 로드를 걷는 순간, 두 사람의 손가락에 끼워진 혼인 반지가 눈부시게 반짝였다.

그렇게 두 사람은 영원한 사랑을 약속하며 진정한 부부로 거듭났다.

이틀 간격으로 태어나 때로는 남매처럼, 때로는 친구처럼 함께 자랐던 두 사람은 긴 시간을 건너 사랑을 확인했고, 이제는 한 가정을 이루었다.

혜운은 생각할수록 이게 정말 현실인가 싶었다. 꼭 꿈속인 것만 같아서, 옆에 있는 재현의 손을 만지며 몇 번이나 확인했다.

지금 돌이켜 보면, 참 숨 가쁘게 달려온 시간이었다.

불과 몇 달 전만 하더라도, 기약 없는 기다림에 지쳐 재현과의 재회는 포기한 상태였다.

그와 다시 만나게 된 후, 재회의 기쁨보다는 걱정과 염려가 앞섰고, 연인이 되고 나서도 마음의 짐을 쉽게 내려놓을 수 없었다.

괜찮다, 조금 더 기다리자, 서로를 다독이며 또 한 번 기약 없는 기다림이 시작되었지만, 그래도 이번엔 혼자가 아닌 재현과 함께였기에 견딜 수 있었다.

조바심이 나지 않았다면 그건 거짓이다. 민영이 영영 마음을 열지 않으면 어떡해야 하나, 어떤 노력을 해야만 할까 끊임없이 고민했다.

심적인 불안함을 해소하는 방법은 오직 하나, 재현이었다. 그와 소소한 데이트를 하고, 시답지 않은 이야기를 나누는 모든 시간들이 혜운에게 힘을 주었다.

내 첫사랑이자 유일한 사랑인 그와 이제 부부가 되었다.

힘들었던 순간이 존재했기에, 더욱더 단단하고 강해진 사랑이었다. 그와 함께라면 뭐든 해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혼배 미사가 끝난 후, 별관에서는 혜운과 재현의 결혼을 축하하는 의미에서 성당 신자들이 직접 준비한 간단한 피로연이 열렸다.

재현과 혜운은 손을 꼭 잡고 테이블을 다니며 모든 하객들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 난 후에야 비로소 가족 테이블에 앉아 잠깐의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가족 테이블에는 민영과 영철, 경선이 앉아 있었는데 그들도 두 사람과 마찬가지로 하객들에게 인사를 다니느라 이제 막 식사를 시작한 참이었다.

“혜운아, 뭐 좀 먹을래?”

“아니. 나 물 한 잔만.”

재현은 혜운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생수를 가지러 걸음을 옮겼다. 그사이 혜운은 구두를 살짝 벗고 퉁퉁 부은 발에 자유를 주었다.

“자.”

“고마워.”

재현은 생수 뚜껑을 열어 건네고, 혜운은 단숨에 반병을 비웠다.

“와…. 너무 힘들어. 결혼식 두 번은 못 하겠다. 그치?”

“방금 결혼한 신부가 신랑한테 할 소리냐?”

“말이 그렇다는 거지. 뾰족하긴.”

혜운이 웅얼거리며 눈을 흘기자, 투닥거리는 둘의 모습을 지켜보던 경선과 영철, 민영이 동시에 미소를 지었다.

“혜운아, 배고프지 않아? 뭐라도 좀 먹지 그래?”

“괜찮아요, 어머니. 지금은 아무것도 생각 없어요. 이따 안면도 가서 먹어도 될 거 같아요.”

“갈 때 음식 싸 가지고 가. 엄마가 챙겨 놓을게.”

“감사합니다, 어머니.”

혜운이 배시시 웃자 민영에 혜운의 어깨를 다독여 주었다.

사제지간으로 만나 사돈지간이 된 경선과 영철은 농담 삼아 사돈이 되자던 말이 현실이 된 것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며 연신 즐거워했다.

신기하고도 놀라운 두 집안의 인연은 혜운과 재현이 결혼을 하면서 완성된 게 아닐까 싶었다.

“난 아까 당신이 계속 눈물 날 것 같다고 해서 펑펑 울까 봐 걱정했더니, 너무 좋아하던데?”

영철의 말에 민영이 쑥스러운 듯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었다.

“신부님 앞에 선 두 사람 뒷모습 지켜보는데 왜 그렇게 기쁘던지…. 자꾸 웃음만 나더라고요.”

혜운도 내심 식장이 눈물바다가 되지 않을까 예상했었다. 서로가 가진 아픔을 잘 알기에, 이런 순간이 오면 누군가에 대한 그리움으로 눈물이 나지 않을까 싶었는데 오히려 그 반대였다.

민영과 영철은 내내 웃었고, 혜운도 울지 않았다. 경선에게 인사를 올리면서 잠깐 울컥하긴 했지만 경선이 미소로 인사를 받아 주었기에 참을 수 있었다.

행복한 순간이 더 떠올랐다. 그리고 그때를 함께한 그리운 그 사람들이 혹시 두 사람의 결혼식을 지켜보았다면, 그들도 하늘에서 함께 웃고 있을 것만 같았다.

혜운은 자신의 옆에 앉아 손을 꼭 잡고 있는 재현을 바라보며 그의 넓은 어깨에 기대어, 사랑하는 사람들의 미소와 그들과 함께하는 지금 이 순간을 두 눈에 담았다.

그리고… 언젠가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게 된다면 가장 먼저 떠오를 이 순간을, 가장 행복한 순간으로 기억될 이 순간을, 다시 한번 마음 깊은 곳에 담았다.

해가 저문 뒤 한낮의 더위가 한풀 꺾인 바닷가에는 서늘한 바닷바람이 불었다.

혜운과 재현은 평편한 모래사장 위에 돗자리를 깔고 앉아 밤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유난히 환하고 커다란 보름달이 잔잔한 바다를 비추었고, 찰랑이는 물결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으니 하루의 피곤이 사라지는 것만 같았다.

“신혼여행은 역시 안면도야.”

혜운의 말에 재현이 웃으며 혜운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신혼여행은 뒤로 미뤄 두고 대신 안면도 별장에서 휴가를 보내기로 했다. 재현이 서두른 탓도 있지만, 애초에 8월은 극성수기라 예약이 쉽지 않아 아예 미루기로 한 것이다.

“우리 나중에 휴가 때마다 안면도로 오자.”

“지겹지 않을까?”

“난 여기가 제일 좋아. 여기서는 이렇게 우리 둘만 있을 수 있잖아.”

사람들로 북적이는 곳을 좋아하지 않는 혜운에게 여행은 그리 관심 없는 여가 활동 중 하나였다. 혼자 집에서 쉬는 게 제일가는 휴가라고 생각했는데, 이곳은 달랐다.

“나중에 아이 생기면 좌대 낚시하러 가야겠다.”

“오, 그거 재밌겠네. 근데 그 전에 재현이 네가 아버님한테 낚시를 제대로 배워야 할 거 같아.”

재현이 이를 악물며 힐끗 노려보았지만 전혀 무섭지 않았다. 혜운은 그런 재현의 입에 살짝 입을 맞추고 어깨에 기댔다.

“재현아, 넌 딸이 좋아? 아니면 아들이 좋아?”

“난 딸이든 아들이든 상관없는데, 무조건 널 닮았으면 좋겠어.”

“왜?”

“널 닮으면 되게 예쁠 것 같아서. 신혜운 닮은 꼬마들이 집에 옹기종기 모여 있으면… 너무 행복할 것 같아. 엄청 사랑스럽겠지?”

재현은 그 순간을 상상하고 있는지, 눈빛이 촉촉해지고 입가엔 미소가 번졌다.

“아이가 생기면 해 보고 싶은 게 너무 많아. 같이 축구도 보러 가고 싶고, 자전거도 가르쳐 주고 싶고, 책도 읽어 주고 싶고….”

“우리 하재현 씨, 좋은 아빠가 되겠네? 믿고 낳아도 되겠어.”

혜운의 말에 재현 웃으며 손을 꼭 잡았다.

“나는 나중에 아이가 생기면, 일보단 아이를 우선순위에 두고 싶어. 재택근무로 조정해서라도 아이가 자라는 모습을 가장 가까이에서, 가장 먼저 보고 싶어. 넌 어때?”

“나도 너랑 같은 생각이야.”

바쁜 부모님 아래에서 자랐던 재현과, 부모의 부재 속에서 자랐던 혜운이기에 통하는 부분이었다.

“우리 너무 웃기지 않아? 아직 생기지도 않은 아이 걱정하고 있는 거?”

“그럼… 일단 애부터 만들까?”

재현이 허리를 바짝 끌어당기며 코끝을 맞대자, 순간 흡, 하고 숨을 들이켠 혜운은 마른침을 삼키며 그의 가슴을 살짝 밀어냈다.

“왜, 왜이래…. 오늘은 안 괴롭히고 안고만 있겠다고 했잖아!”

피곤해하는 혜운에게 재현이 먼저 나서서 약속해 놓고, 그는 전혀 그런 말을 했던 기억이 없다는 듯 천연덕스럽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말한 ‘안다’랑 네가 받아들인 ‘안다’의 의미 사이에 간극이 상당한 거 같은데?”

“너….”

“살짝 조정하자. 그래도 첫날밤인데 어떻게 그냥 보내? 그건 말도 안 되지.”

순진하게 그 말을 믿었던 내가 바보지….

혜운은 그의 어깨를 살짝 깨물고 자신의 허리를 감싸고 있던 팔을 떼어 내고 잽싸게 일어났다.

“도망가시겠다?”

혜운은 재현의 물음에 단호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봤자 내 손바닥 안인데?”

생각해 보니 여기서 도망갈 곳이라곤 별장뿐.

혜운이 망연자실해 하는 사이, 어느새 살금살금 거리를 좁히며 다가오던 재현이 미소를 지었다.

“오늘 아주 뜨거운 밤 한 번 보내 보자.”

“충분히 더워. 더 뜨거우면 위험해.”

시원한 바닷바람에도 살짝 땀이 배어날 정도로 아직까지 더운 날인데 얼마나 더 뜨거운 밤을 보내자는 건지, 혜운은 벌써부터 긴장되었다.

이 긴장감은 막연히 두렵다기보단 묘한 기대감을 포함하고 있어 심장이 두근거리고 입 안이 바짝 말라 가기 시작했다.

그때, 재현이 혜운의 손을 덥석 잡더니 혜운을 번쩍 안아 들었다. 혜운은 떨어지지 않으려 자동으로 그의 목을 두 팔로 감쌌고, 재현은 만족스럽게 웃으며 별장을 향해 거침없이 걸음을 옮겼다.

“가만히 누워만 있어. 내가 다 알아서 할게. 절대 피곤하게 안 해!”

“하재현, 내가 속을 만한 거짓말을 해.”

“역시. 너는 나를 너무 잘 알아.”

아무래도 반격을 준비해야 할 것 같았다. 이대로 순순히 당하고만 있을 순 없었다.

자신이 더 그를 피곤하게 만들어야겠다고 다짐하며, 혜운은 그 어느 때보다 뜨겁게 달아오를 첫날밤을 준비하기로 했다.

“재현아.”

“응?”

“사랑해.”

“그래도 안 놔줄 거야. 어림없어.”

얕은수를 쓰는 줄 알고 딱 잘라 말하는 그가 귀여워서 혜운은 그의 뺨에 쪽 소리가 나도록 입을 맞췄다.

“내가… 너 진짜 행복하게 해 줄게.”

재현의 얼굴에 점점 환한 미소가 번졌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으니, 울컥할 만큼 가슴이 벅차올랐다.

“혜운아, 아까 그 말 한 번만 더 해 줘.”

“무슨 말?”

“그 있잖아. 그… ‘사’로 시작하는 말.”

“음… 뽀뽀해 주면 다시 말해 줄게.”

재현은 찰나의 망설임도 없이 혜운에게 입을 맞췄다.

“이제 해 줘.”

“하재현.”

“응?”

“…사랑해.”

혜운의 고백에 그가 수줍게 웃더니 혜운의 눈을 바라보았다.

“사랑해.”

그의 고백은 늘 혜운을 가슴 뛰게 만들었다.

지금 이 순간 자신이 느끼고 있는 행복함과 그를 향한 자신의 사랑, 그리고 그에게서 전해지는 따스함을 가슴에 새겨 넣으며 혜운은 재현의 목을 꼭 끌어안은 채 다시 한번 그에게 입을 맞췄다.

한낮의 폭염보다 뜨거운 두 사람의 밤이, 그렇게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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