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그 소원 이뤄 줄게
재현과 혜운의 배웅을 나온 민영은 종이봉투에 차곡차곡 담은 반찬 통을 하나씩 꺼내 보여 주며 혜운에게 보관 방법을 설명하고 있었다.
“섞박지는 오늘 아침에 담은 거라 하루나 이틀 밖에 뒀다가 익으며 냉장고에 넣고, 오이 무침이랑 호박 볶은 거는 바로 냉장고에 넣어야 한다?”
“네, 어머니.”
“아참! 호박 식혜! 제일 중요한 걸 빼먹었네.”
민영의 재촉에 영철이 냉큼 가게 안으로 들어가 페트병에 담아 둔 호박 식혜 두 병을 가지고 나와 혜운의 품에 안겨 주었다.
“이것도 집에 가자마자 냉장고에 넣고.”
“네. 감사합니다, 어머니. 잘 먹을게요.”
“더 챙겨 주고 싶어도 너무 많으면 혼자서 다 못 먹으니까…. 다 먹으면 와서 더 가져가.”
이렇게 많이 챙겨 주고도 부족해서 더 주고 싶어 하는 민영의 모습은 예전과 하나도 다르지 않았다.
혜운은 고개를 끄덕이며 민영의 손을 잡았고, 민영은 혜운의 손을 두 손으로 감싸며 다독였다.
“생일 축하한다. 언제 이렇게 컸을까….”
혜운이 갓 세상에 태어났을 때부터 지켜봤던 민영이기에, 감회가 새로운 듯했다.
그녀 덕에 자신도 누군가를 엄마라 부를 수 있었다. 많이 의지했고, 그래서 늘 감사했다.
민영의 말에 혜운은 눈물이 날 것만 같아서 입술을 굳게 다문 채 미소를 지었다.
“어서 가. 엄마 저녁 장사 준비해야 돼.”
“가 보겠습니다, 어머니.”
재현과 혜운이 차에 오르자 민영은 운전석 쪽으로, 영철은 조수석 쪽으로 다가왔다.
“저 갈게요.”
“그래. 운전 조심하고.”
재현이 민영과 인사를 나누는 사이, 혜운도 창문을 내려 영철에게 인사를 건넸다.
“아버님, 다음에 또 놀러 올게요.”
“혜운아, 이거.”
“이게 뭐예요?”
“얼마 안 돼. 가서 재현이랑 맛있는 거 사 먹어.”
“어머! 아버님!”
영철이 혜운에게 건넨 건 반으로 접힌, 한눈에 봐도 현금이 든 편지 봉투였다. 혜운이 깜짝 놀라 영철의 손을 붙잡으려 하자 그가 차에서 멀찌감치 물러서며 손을 흔들었다.
“조심히 가!”
차가 출발한 후, 혜운은 사이드 미러로 점점 멀어지는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골목을 완전히 빠져나갈 때까지, 두 사람은 계속 그 자리에 서서 지켜보고 있었다.
“아버지가 뭐 주셨어?”
“용돈….”
“우와. 우리 아버지 주머니에서 돈 나오는 일이 거의 없는데. 좋겠네?”
혜운은 봉투를 가슴에 꼭 안은 채, 고개를 뒤로 돌려 민영의 반찬이 가득 담긴 종이봉투를 바라보았다.
이렇게나 자신을 예뻐해 주는 두 사람이라서 너무 감사했고, 그래서 죄송했다.
그들이 아무 조건 없이 건네주는 따뜻한 애정 덕분에 혜운은 그 어느 때보다 마음이 묵직했다.
혜운과 재현은 혜운의 집에서 두 번째 생일 파티를 열었다.
거실에 조그만 테이블을 펴고, 그 위에 혜운이 가장 좋아하는 아이스크림 케이크와 따뜻한 차를 두고 마주 앉았다.
“매일이 오늘만 같았으면 좋겠다.”
웃고 있는 혜운의 모습을 볼 때면 재현도 덩달아 행복했다. 자신의 기분은 그녀의 기분에 따라 좌우되는 일이 많았고, 이젠 그것이 익숙했다.
재현은 케이크에 초를 꽂고 불을 붙여 주었다. 아른거리는 촛불에서 도통 눈을 떼지 못하는 혜운의 모습이 너무도 사랑스러웠다.
“무슨 소원 빌 거야?”
재현의 물음에 혜운은 아무런 대답 없이 눈을 감았다. 입술을 오물거리며 소원을 비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자니, 당장 입을 맞추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 순간, 혜운이 눈을 뜨며 후, 하고 촛불을 껐다.
“말하면 안 이뤄질까 봐 말 못 하겠어.”
“나한테만 얘기해 줘.”
“그럼 너 먼저 말해 봐. 내 생일날 얘기해 주기로 했잖아.”
혜운의 제안에 재현은 씩 웃으며 아이스크림 케이크를 다시 박스에 담아 주방으로 가져갔다.
“이것만 먹을 거지? 냉동실에 넣어 놓고 올게.”
“딴청 부리지 말고 빨리.”
혜운의 재촉에도 재현은 아랑곳하지 않았고, 냉동실 구경까지 꼼꼼하게 한 후에야 느릿하게 걸어 자리로 돌아왔다.
“근데, 정말 내가 이뤄 줄 수 있는 소원이야?”
고개를 끄덕이자 혜운은 여전히 의아해했다. 재현은 그런 혜운에게 은근슬쩍 다가가, 뒤에 숨기고 있던 작은 종이봉투를 건넸다.
“선물 먼저 꺼내 봐.”
혜운은 조심스럽게 종이봉투를 만지작거렸다. 봉투 가운데에 묶인 리본을 풀 때도, 봉투 안에서 선물 상자를 꺼낼 때도, 아주 소중한 것을 다루듯이 한껏 집중했다.
선물 상자를 열어 안에 담긴 선물을 확인한 혜운은 재현을 바라보며 배시시 웃었다.
“내가 해 줄게.”
재현의 선물은 목걸이였다. 혜운을 위해 특별히 주문 제작한, 세상에 단 하나뿐인 목걸이였다.
‘다시 찾은 행복’이란 꽃말을 지닌 은방울꽃 모양의 작고 앙증맞은 펜던트에 혜운의 탄생석인 다이아몬드가 촘촘하게 박혀 있는 디자인이었다.
혜운은 목걸이를 꺼내 재현에게 건네주었고, 재현은 그녀의 뒤에 앉아 목걸이를 채워 주었다.
“보자.”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잘 어울렸다.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아름답고 예뻤다. 혜운은 작고 가는 손가락으로 펜던트를 만지작거리며 수줍게 웃었다.
“잘 어울려?”
재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혜운은 자리에서 일어나 현관 쪽에 놓인 전신 거울 앞에 섰다. 재현도 혜운의 뒤를 따라가 거울을 보는 혜운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상체를 이리저리 돌리며 확인하던 혜운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뒤돌아 재현을 마주 보았다.
“마음에 들어?”
“응. 너무 예쁘다. 고마워.”
재현은 자신의 입술을 검지로 톡톡 가리켰고, 혜운은 순순히 입을 맞추었다. 재현은 그런 혜운을 품에 꼭 끌어안고 가만히 등을 다독였다.
“내가 빌었던 소원은, 앞으로도 지금처럼… 너랑 행복하게 사는 거. 내가 바라는 건 그것뿐이야.”
그녀를 행복하게 해 주고 싶었다. 그녀가 행복하면, 나 역시 행복해지니까.
앞으로도 쭉 그렇게 살고 싶었다. 함께 밥을 먹고, 함께 잠을 자고, 함께 산책을 하고, 함께 첫눈을 맞고, 뜨거운 여름을 견디며… 모든 순간을 그녀와 함께하고 싶었다.
혜운은 고개를 들어 재현을 바라보았다. 손끝으로 그의 볼과 눈썹을 매만지며 눈을 깜빡였다.
“그 소원… 이뤄 줄게. 나도 너랑 같은 소원 빌었거든.”
혜운은 발꿈치를 세우며 입술을 내밀었고, 재현은 고개를 숙여 그녀에게 입을 맞췄다.
동화 속 해피엔딩처럼, 영원히 행복하게 살고 싶은 소원은 오직 신혜운만이 이뤄 줄 수 있는 것이었다.
피곤하니까 얼른 집에 가서 쉬라는 말에, 재현은 피곤하기 때문에 여기서 자고 가겠다며 샤워까지 하고 거실 한복판을 차지하고 누웠다.
마치 제집처럼 뻔뻔하게 굴었지만 그가 밉진 않았다. 요즘 들어 재현의 집과 자신의 집을 오가며 함께 밤을 보내는 날이 많아서 그리 놀랄 일도 아니었다.
이제는 오히려 혼자 자려고 누우면 집이 너무 조용하게 느껴져 어색했다. 늘 혼자였는데, 고작 몇 달 사이에 그의 존재감이 이만큼이나 커졌다.
샤워를 마친 혜운은 거울 앞에 서서 뽀얀 김이 서린 거울을 닦고 보디로션을 바르고 있었다. 그때, 노크와 동시에 욕실 문이 덜컥 열렸다.
“잠깐만, 잠깐만!”
혜운이 문을 닫으려 했지만 재현은 말릴 새도 없이 안으로 밀고 들어왔다. 다시 나갈 생각은 전혀 없어 보였다.
“내가 발라 줄까?”
마치 이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사람처럼 잔뜩 신이 난 얼굴로 물었다. 혜운은 하는 수 없이 로션을 그에게 건넸다.
“등만 발라 줘.”
“내가 또 이런 건 기가 막히게 바르지.”
손바닥에 보디로션을 덜어 놓고 혜운의 등에 발라 주었다. 손이 워낙 커서 그런지, 서너 번 스치고 나니 금세 끝나 버렸다.
“됐어. 나머진 내가 바를게.”
혜운이 로션을 달라고 손을 내밀었지만, 그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또 한 번 로션을 덜어 혜운의 양팔에 쓱쓱 문질렀다.
“엉덩이도 발라 줄게.”
그는 웅크리고 앉아 양손으로 엉덩이를 빙글빙글 돌리며 발라 주었다. 혜운은 젖은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꾹꾹 누르며, 자신의 엉덩이로 찰흙 놀이를 하는 재현을 힐끔 노려보았다.
“방금 입술이 닿았던 거 같은데, 기분 탓이지?”
“어. 기분 탓이야.”
왼쪽 엉덩이에 잠깐 닿았던 건 분명히 그의 입술이었지만, 그는 아주 태연하게 거짓말을 했다. 가끔 엉덩이를 깨물기도 하기에, 혜운은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 주기로 했다.
벌떡 일어선 재현이 이번에 선택한 곳은 허리였다. 그의 손은 허리를 지나 배로, 배에서 가슴으로 점점 올라왔고, 온몸에 스치는 그의 손길에 혜운은 곤란해지기 시작했다.
이미 아래쪽에는 뜨거운 기운이 서서히 몰렸고, 혜운은 천천히 숨을 고르며 간신히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때, 자신의 등허리에 눌려 있던 그의 묵직한 남성이 몸집을 키우고 있는 게 느껴졌다. 재현의 손이 그녀의 가슴을 부드럽게 쓰다듬고 움켜쥘 때마다 점점 커지다 못해 이제는 쿡쿡 찔러대기 시작했다.
“내 등에 닿아 있는 네 똘똘이도 점점 커지는 것 같은데, 이것도 내 기분 탓이야?”
“아니. 그건 맞아.”
“곧… 작아지는 거지?”
혜운의 희망 사항에 재현은 말도 안 된다는 듯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걔도 양심이 있으면 이제 좀 작아져야 하는 거 아냐?”
“똘똘이도 자기만의 방식으로 네 생일을 축하해 주는 거야.”
말이나 못 하면….
혜운은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며 연신 가슴을 주무르고 있는 그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포개었다.
“나 좀 놔줘.”
“날 물고 안 놔주는 건 너잖아.”
재현의 손이 순식간에 아래로 향하더니 혜운의 여성을 손바닥 전체로 감쌌고, 그와 동시에 어깨에 입을 맞췄다. 거울에 비친 재현의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켜보는 혜운은 입이 떡 벌어졌다.
“못 하는 소리가 없어.”
혜운의 타박에도 재현은 아랑곳하지 않고 중지를 세워 길게 위아래로 움직이다가, 솟아오른 돌기를 집중적으로 굴렸다. 혜운은 저도 모르게 헉, 하고 가쁜 숨을 토해 냈다.
재현은 다른 한 손으로는 여전히 자신의 가슴을 움켜쥐고 있었는데, 그의 손길에 이리저리 뭉개지고 일그러지는 제 가슴의 모양을 지켜보고 있는 게 너무나 쑥스러웠다.
차마 보고 있을 수가 없어서 고개를 돌리자, 재현이 혜운의 턱을 손끝으로 밀어 올리며 다시 거울을 마주 보게 했다.
거울을 통해 재현과 시선이 닿아 있는 동안, 검지와 중지 사이에 민감한 돌기를 끼우고 위아래로 움직이던 그의 손놀림이 점점 더 빨라졌다.
“하아….”
가장 예민한 곳을 공략당한 혜운은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려 세면대를 붙잡아야 했다. 그사이, 재현은 입고 있던 옷을 벗어 욕실 밖으로 던져두고, 다시 뒤에 바짝 다가와 허리를 끌어안았다.
재현의 탄탄한 가슴 근육이 등에 바짝 닿았다. 그의 까슬한 음모와 커다랗게 부푼 분신이 등허리와 엉덩이에 스칠 때마다, 자신의 허리 아래쪽 근육이 바짝 수축하는 게 느껴졌다.
아까 로션을 발라 줄 때부터 젖어 들기 시작해, 이미 충분하게 젖은 여성의 입구에 다시 한번 재현의 손이 다가왔다.
지금 바로 삽입을 해도 되는지 확인을 마친 그는 수납장에서 콘돔을 꺼내 남성에 씌운 후, 혜운의 골반을 잡아 살짝 뒤로 당기고 조심스레 밀어 넣었다.
“아읏….”
빈틈없이 묵직하게 밀고 들어오는 압박감은 침대에서 느끼는 것과 달랐다. 그를 받아들이기에 충분할 만큼 흠뻑 젖었음에도 지나치게 좁고 빠듯한 그곳은, 그가 조금만 움직여도 견디기 버거울 만큼의 자극을 만들어 냈다.
재현이 움직일 때마다 자신의 엉덩이와 그의 아랫배가 부딪치며 만들어 내는 찰박거리는 소리와, 그의 남성을 받아 내고 있는 그곳에서 만들어진 야릇한 마찰음이 욕실 안에 제법 크게 울렸다.
혜운의 골반을 붙잡고 치받던 재현은 앞으로 상체를 숙인 채 세면대를 붙잡고 중심을 잡던 혜운을 일으켜 출렁이는 가슴을 양손으로 그러쥐었다.
욕실 거울에는 이미 뿌연 김이 다시 서려 있었다. 그 바람에 거울에 비친 두 사람의 모습은 마치 하나처럼 겹쳐 보였다.
혜운은 다시 한번 손을 뻗어 거울을 닦았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너무도 낯설었다. 열기에 달아오른 얼굴도, 살짝 풀린 눈매와 벌어진 입매도 모든 게 낯설었다.
밝은 조명 아래서 자세히 보게 된 재현의 표정도 혜운의 기분을 묘하게 만들었다. 힘줄이 바짝 선 그의 목덜미는 한번 깨물어 보고 싶을 만큼 색정적이었다.
봉긋하게 부풀어 오른 자신의 가슴을 감싸 쥔 그의 손도, 그의 손가락 사이사이 비집고 나온 가슴 역시 자극적이었다.
“하윽….”
재현의 움직임이 빨라지고 삽입이 깊어질수록, 두 사람의 입술 사이에서는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신음이 연신 쏟아졌다. 이미 몸은 녹아 버릴 지경이었고, 점점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다.
혜운은 자연스레 엉덩이를 바짝 치켜들며 그의 깊은 삽입을 도왔다. 그러자 재현은 한 손으로 클리토리스를 비비며 반쯤 허리를 숙인 채 강하게 쳐올리며 거친 숨을 뱉었다.
“재현아….”
혜운은 당장 재현과 입을 맞추고 싶었다. 혜운이 옆으로 고개를 돌리자 그가 입을 맞춰 주었다. 혜운은 그의 뜨거운 입술을 가르고 들어가 도톰한 혀를 빨아 당기며 부드럽게 쓸었다.
“흐흣!”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던 혜운이 먼저 절정을 맞이하고 앞으로 고꾸라지듯 고개를 숙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역시 혜운의 등에 얼굴을 묻은 채 가쁜 숨을 토하며 파르르 몸을 떨었다.
여전히 그의 남성은 그녀의 몸속에 머물러 있었다. 혜운은 고개를 돌려 재현을 바라보았고, 아직 여운을 느끼고 있는 그의 나른한 표정에 마른침을 삼켜야 했다.
“이제 좀 놔줘….”
혜운의 간절한 부탁에 재현이 희게 웃으며 천천히 남성을 빼냈다. 하지만 그의 손은 여전히 혜운의 가슴을 움켜쥔 채 놓아주질 않았다.
“로션 괜히 발랐다. 어차피 또 씻어야 되는데. 그치?”
그저 신이 나서 묻는 재현이 얄미워, 혜운은 그의 팔뚝을 살짝 깨물었지만 그는 전혀 괘념치 않았다.
혜운은 문득 또다시 씻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또 씻어야 할 일이 생길 것이라는 걸,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