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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따뜻한 아침 (31/50)
  • 31. 따뜻한 아침

    재현은 잠결에 메시지 도착 알림을 듣고 눈을 떴다. 자신의 품에 안겨 잠든 혜운이 깰까 조심스레 일어나 앉았다.

    깊이 잠든 건지, 다행히 혜운은 미동조차 없었다. 아이처럼 한껏 몸을 웅크린 채 색색 고른 숨을 내쉬는 혜운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재현은 혜운의 어깨 위에 이불을 꼼꼼히 덮어 준 후, 뒤꿈치를 들고 살금살금 걸어 휴대폰을 올려 둔 식탁으로 향했다. 메시지를 보낸 사람은 나연이었다.

    「이제 네 차례야. 행운을 빈다.」

    운명의 디데이.

    나연이 결국 폭탄을 던진 모양이다. 이후 상황은 파악할 수 없었지만, 어느 정도 짐작은 갔다.

    「고생했다.」

    짤막한 답장을 적어 보낸 뒤, 재현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자신의 차례였다.

    조금은 걱정스러웠지만, 혜운을 생각하면 힘이 났다. 굳게 먹은 마음을 다시 한번 다독이며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휴대폰을 내려 두고 다시 침실로 가려다가 문득 자신이 입고 있던 바지가 눈에 들어왔다. 혜운이 잘 때 입으라면서 건네준, 혜운이 가진 옷 중에서 가장 큰 사이즈의 줄무늬 파자마였다.

    자신에게 종아리가 절반 이상 드러날 정도로 짤막한 사이즈의 옷을 입혀 놓고 혜운은 무척이나 즐거워했다. 배를 잡고 발을 동동 구르며 숨이 넘어갈 것처럼 웃던 그 표정이 다시 떠올랐다.

    재현은 누웠던 자리로 돌아가 잠든 혜운을 바라보았다. 평온해 보이는 그녀를 보고 있으니 자신의 마음도 평온해지는 것 같았다.

    지금처럼 자신의 앞에서 무장 해제 되는 그녀를 볼 때면, 가슴 저 깊은 곳에서 벅차오르는 느낌을 받곤 했다.

    자신이 함께하지 못하고 놓쳐 버린 그 순간에도 혜운은 참 아름답게 자라 주었다.

    이렇게 예쁘고 사랑스러운 너를 두고, 나는 왜 그리 먼 길을 돌아왔을까….

    “흐음….”

    잠결에 뒤척이던 혜운이 반대쪽으로 돌아누웠다. 재현은 그녀의 맞은편에 누워 계속 그녀를 바라보았다. 좋은 꿈이라도 꾸는 건지, 얼굴 가득 번진 옅은 미소가 못 견디게 사랑스러웠다.

    재현은 조심스레 다가가 입을 맞추었다. 그러곤 손을 내밀어 그녀의 도톰한 입술과 가지런한 눈썹, 숱이 풍성하고 긴 속눈썹과 희고 말간 볼을 차례로 만지며 두 눈에 가득 담았다.

    이마 아래 잔털도 사랑스럽고, 요정처럼 뾰족한 귀도, 턱 아래 난 작은 점도 사랑스러웠다. 어느 곳 하나 예쁘지 않은 곳이 없었다.

    재현은 혜운의 작은 손을 꼭 잡고 손등을 엄지로 부드럽게 쓸다가, 자신의 뺨 위에 올려 두고 눈을 감았다. 그녀의 따뜻한 온기가 자신의 마음속으로 밀고 들어오는 것만 같았다.

    이 손을 다시 잡기까지, 참 오랜 시간이 걸렸다.

    재현은 혜운의 손을 꼭 쥐며 다짐했다.

    두 번 다시, 절대 놓지 않겠다고.

    누구 하나 마음 아프지 않도록, 모두에게 축복받을 수 있도록, 끝까지 노력하겠다고.

    눈을 뜬 혜운은 오늘따라 왜 이리 몸이 무거운가를 생각하다가 어젯밤 일을 떠올리곤 양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뭘 제대로 하지도 않았는데 왜 이렇게 피곤하고 온몸이 뻐근한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너무 긴장을 해서 그런 건가, 생각하다가 머릿속에 선명하게 남아 있는 순간들이 눈앞을 스쳐 지나자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덮고 있던 이불을 돌돌 말아 끌어안은 채 침실을 나선 혜운은 주방에 있는 재현을 발견하고 벽에 등을 기대고 서서 그를 가만히 지켜보았다. 언제 일어난 건지, 그는 옷을 말끔하게 다 차려입고 뭔가를 요리하고 있었다.

    도마에서 칼질하는 소리, 보글보글 국이 끓는 소리, 전기 압력 밥솥에서 밥 짓는 소리…. 집 안이 온통 따뜻한 소리로 가득했다. 마치 자신의 주방에서 요리하듯 익숙해 보이는 그의 뒷모습에 어쩐지 웃음이 났다.

    혜운은 조용히 걸어 그에게 다가갔다.

    “일어났어?”

    막 팔을 뻗어 재현의 허리를 감싸 안으려는데, 먼저 눈치를 챈 그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물었다.

    “아, 들켰다.”

    맥이 풀려 버린 혜운이 시무룩해하자, 재현이 혜운의 이마에 입을 맞춰 주곤 헝클어진 머리칼을 귀 뒤로 단정하게 넘겨 주었다.

    “잠은… 잘 잤어?”

    재현의 물음에 혜운은 고개를 끄덕여 대답했지만, 실은 자다 깨다를 반복했다. 여러모로 깊게 잠들기 어려운 밤이었기 때문이다.

    재현과 한 침대에서 자는 것도 신경 쓰였고, 무엇보다 그가 자꾸만 자신의 얼굴을 만지작거려서 깰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재현이 미안해할까 봐 내색하진 않았지만, 그곳이 쓰리고 아파서 몹시 불편했다.

    “얼른 씻고 올게.”

    어젯밤 일이 떠올라 쑥스러워진 혜운은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며 욕실로 향했다.

    서둘러 세수와 양치를 하고 나와 옷을 챙겨 입은 혜운은, 다시 한번 재현의 뒤로 다가가 그의 허리를 두 팔로 꼭 끌어안고 등에 찰싹 달라붙었다.

    “새벽 다섯 시부터 바쁘네?”

    “아침 차려 주려고. 네가 제일 좋아하는 미역국 끓였어.”

    “우와! 하재현 요리 좀 하네?”

    혜운의 칭찬에 재현이 어깨를 으쓱였다. 혜운은 고개만 쏙 내밀어 그와 눈을 맞췄다.

    “냉장고에 먹을 게 별로 없더라. 뭐 먹고 살았냐?”

    “야근이 잦아서 먹고 들어올 때가 많아. 배달시켜 먹을 때도 있고, 할머니가 반찬 보내 주시면 그거 먹기도 하고. 혼자 사니까 끼니 챙기는 게 제일 번거롭더라.”

    “너 예전에 아침은 꼭 밥으로 먹었잖아.”

    “그거야 할머니가 옆에서 챙겨 주셨으니까. 매끼 밥 차리는 게 이렇게 귀찮고 힘든 일인 줄 독립하고 나서 알았지.”

    재현은 혜운의 뺨을 살짝 꼬집더니 고개를 돌려 쪽 소리가 나도록 입을 맞췄다. 혜운은 그런 재현을 바라보며 웃음을 참지 못했다.

    “왜 웃어?”

    “아니 그냥….”

    좋아서.

    이렇게 함께 있는 것도 좋고, 별것 아닌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좋고, 보고만 있어도 좋고….

    혜운은 차마 쑥스러워서 그것까진 말하지 못했다.

    외롭고 쓸쓸하지 않은 아침이 너무 오랜만이라서, 혜운은 지금 이 순간이 그저 행복했다.

    “간 볼래?”

    혜운이 고개를 끄덕이자, 재현이 숟가락에 국물을 조금 떠서 입으로 호호 불어 건넸다. 먹어 보니 간이 딱 맞았다.

    “맛있다! 어머니 밑에서 맛있는 것만 먹고 자라서 그런지 요리도 잘하네?”

    재현이 웃으며 냄비 뚜껑을 닫고 불을 껐다.

    “오늘 저녁에 부모님 찾아뵙고 전부 다 말씀드릴 거야. 우리 얘기도 전부 다.”

    혜운은 재현의 손을 잡고 살랑살랑 흔들었다. 마음의 준비는 되어 있다고 생각했지만, 걱정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특히 민영의 반응을 예상할 수 없어서, 그 부분이 가장 걱정이었다.

    다 잘될 거라고, 그러니 걱정하지 말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차마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없었다. 막연한 희망만을 붙들고 행복 회로를 돌리는 것보단,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해서 민영의 마음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 또한 중요했기 때문이다.

    그저, 어떤 상황이 닥치더라도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 되어 주고 흔들리지 않으면서 노력하는 게 최선의 선택이자 최상의 계획이었다.

    “내일 토요일이니까, 나도 오늘 퇴근하고 내려가서 할머니한테 말씀드려야겠다. 너랑 만난다고.”

    혜운이 재현의 두 볼을 양손으로 감싸자 그가 슬쩍 고개를 기울이더니 손바닥에 입을 맞췄다.

    “내일 바로 올라올 거지?”

    “응, 저녁 전에 올라올게.”

    “내가 데리러 갈까?”

    “아냐. 버스 타고 다녀올 거야. 저녁때 만나.”

    재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자, 혜운은 장난삼아 그의 엉덩이를 토닥토닥 두드렸다. 눈이 휘둥그레지는 그의 반응이 무척이나 귀여웠다.

    “아침부터 이러기야?”

    “아니… 한번 만져 보고 싶어서.”

    이번에는 더 짓궂게 그의 엉덩이를 손 안에 가득 움켜쥐자 재현은 기가 막힌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

    “너 왼쪽 엉덩이에 점 있지 않았어? 어렸을 때 본 거 같은데.”

    “별걸 다 기억하네.”

    “잘 있나 나중에 확인해 봐야겠다.”

    혜운이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웃자, 재현이 눈매를 가늘게 만들며 서서히 다가왔다. 뒷걸음질 쳤지만, 아일랜드 바에 가로막혀 도피로가 완전히 차단되었다.

    “왜, 왜 이래. 아침 안 먹어?”

    혜운의 물음에도 그는 의미심장한 미소만 지은 채, 두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감싸며 바짝 끌어당겼다. 점점 진지해지는 재현의 표정에, 혜운의 심장은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고개를 숙이며 다가오는 그와 입을 맞추는데, 동시에 그의 커다란 손이 티셔츠 안을 들추고 들어와 느릿하게 파고들었다. 혜운이 그의 손목을 잡고 저지하려 하자 슬쩍 입술을 떼어 놓고 마치 허락을 구하듯이 가만히 바라보았다.

    혜운이 잡았던 손을 놓자, 그의 입가에 아주 잠깐 미소가 스쳤다. 재현의 손은 점점 위로 올라와 그녀의 가슴을 그러쥐었다. 혜운의 숨소리가 조금씩 커지기 시작했다.

    옷 안에서 움직이는 그의 손을 내려다보고 있자니 기분이 묘했다. 재현은 그런 혜운의 턱을 살며시 손끝으로 받쳐 올리곤 입을 맞추었다. 혜운은 두 팔로 그의 목을 감싸며 중심을 잡았다.

    입술 사이를 가르고 들어오는 그의 혀끝이 혜운의 혀를 단번에 찾아내어 옭아맸다. 부드럽게 쓰다듬고 빨아 당기며 이리저리 헤엄쳤다. 그의 입술 새로 흘러나온 나지막한 신음에, 혜운도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재현의 손은 가슴에만 머물지 않고 등을 쓰다듬기도 하고, 옆구리부터 허리까지 오르내리기를 반복했다. 옷을 입고 있지만, 벗고 있는 것만 같았다.

    예민한 중심부에 피가 몰리는 게 느껴져 난감했다. 아까부터 자신의 아랫배를 쿡쿡 찔러 대던 그의 남성 또한 점점 부풀고 있는 게 느껴졌다. 순간, 지난밤의 일이 눈앞을 스쳐 지났고, 다시 그곳이 쓰린 것 같아서 몸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그때, 재현이 옷 안에서 손을 빼더니 입술을 떼고 혜운을 내려다보았다. 그러곤 옷을 단정히 아래로 끌어 내려 주고,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 주며 슬쩍 웃었다.

    “난 출근 준비하러 집에 가야 돼. 이따 밥 다 되면 미역국이랑 같이 챙겨 먹어.”

    저 혼자만 몸이 달아올랐던 것 같아 민망한 것도 잠시, 태연한 그의 표정에 약이 올랐다. 혜운은 아랫입술을 꽉 깨문 채, 여전히 웃고 있는 재현의 옆구리를 꼬집었다.

    그러자 재현이 웃으며 혜운을 품에 안은 채로 엉거주춤 걸어 의자에 앉혀 주고, 차 키와 휴대폰을 챙겨 들었다.

    “같이 먹으면 좋을 텐데.”

    “붙잡지 마. 여기서 더 가면 멈출 자신 없으니까.”

    재현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농담처럼 말했지만, 혜운의 귀에는 왠지 무시해선 안 될 경고처럼 들렸다.

    “갈게. 나오지 마.”

    혜운은 아쉬운 마음에 일어나 그의 뒤를 따랐다.

    “운전 조심하고.”

    “응. 이따 전화할게.”

    가볍게 입을 맞추고 현관문을 나서는 재현을 지켜보며, 그가 문을 닫을 때까지 손을 흔들어 배웅했다. 문이 닫히자, 혜운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갑자기 집이 허전해졌다. 늘 혼자 있는 게 익숙했던 집인데,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공허함에 한기마저 느껴졌다.

    혜운은 주방으로 돌아가, 그가 끓여 두고 간 미역국 냄비를 한 번 열어 보곤 식탁 의자에 앉았다.

    사람의 욕심이란 게 참 무서웠다. 그를 다시 만난 것만으로도 좋았는데, 이제는 아예 하루 종일 함께 있고 싶어지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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