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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 네가 내 친구라서 정말 다행이야 (7/50)
  • 07. 네가 내 친구라서 정말 다행이야

    혜운은 자신에게 먼저 알은체하는 성재를 향해 고개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다행히 때마침 버스가 정차했고, 혜운은 속으로 안도했다.

    “저 이번에 내려야 돼서요. 안녕히 가세요.”

    다시 인사를 건네고 버스에서 내리는데, 성재가 뒤따라 내렸다.

    “잠깐 얘기 좀 하자.”

    혜운은 어쩔 수 없이 걸음을 멈췄다. 거리를 좁히며 다가오는 그가 부담스러웠지만, 피하면 더 집요하게 군다던 이야기를 들었던지라, 주눅 들지 않고 마주 섰다.

    “혜운이 여기 사는구나. 나는 저 건너편 단지에 살아.”

    “아, 네.”

    “내일 등교할 때 여기서 만나자. 기다릴게.”

    “아뇨, 기다리지 마세요. 그리고 저… 선배님 이러시는 거 부담스러워요.”

    “내가 너한테 뭘 어떻게 했다고 부담스러워? 사귀자는 것도 아니고, 그냥 아침에 같이 학교 가자는 건데. 넌 내가 말 거는 것도 싫어?”

    “갑자기 저한테 관심 있다면서 억지로 친해지려고 하는 게 불편해요. 죄송합니다. 먼저 가 보겠습니다.”

    혜운은 최대한 예의를 갖춰 알아듣게 말했다. 이 정도 얘기했으면 자존심이 상해서라도 자신에게 관심을 끊겠지 싶었다. 허리까지 숙여 공손하게 인사를 하고 돌아서는데, 그가 다시 혜운의 앞을 가로막고 섰다.

    “너랑 맨날 붙어 다니는 그 남자애 때문이야?”

    “아뇨. 저는 선배님이 불편한 거예요.”

    “맞네. 걔 때문. 왜? 걔가 너 남자도 못 만나게 하냐? 친구 사이라기에는 너무 유난스럽다.”

    재현에 대해 비아냥거리는 그 순간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어 이를 아득 무는데, 저쪽에서 낯익은 사람이 자신을 향해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는 게 보였다.

    “신혜운, 거기서 뭐 해?”

    재현이었다. 혜운은 재현이 너무 반가워서 손을 흔들며 달려갔다. 그러자 재현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재현아, 너 되게 반갑다.”

    “아프다고 야자까지 땡땡이친 사람치곤 표정이 너무 해맑은데?”

    재현을 보는 순간 긴장이 탁 풀어지면서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혜운은 아무렇지 않은 척 돌아서서 성재를 바라보았다. 그 자리에 서서 자신을 바라보던 성재가 마지못해 발길을 돌렸고, 혜운은 저도 모르게 긴 한숨을 내쉬었다.

    “진짜 어디 아픈 건 아니지?”

    “꾀병이었어.”

    “신혜운 요즘 진짜 이상하네. 꾀병 부리고 야자 쨀 줄도 아는 애였나?”

    “얼른 가자.”

    혜운은 재현의 소맷자락을 꼭 잡고 옆에 바짝 붙어서 걸었다. 재현이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듬직했다.

    “그 선배가 너한테 한 번만 더 집적거리면 말해.”

    “내가 알아듣게 얘기했어. 걱정하지 마.”

    “대화가 통하는 상대가 아니란 소문이 자자해서 그래.”

    “무관심으로 일관하면 제풀이 꺾여서 떨어져 나간대. 며칠 저러다 말겠지.”

    “며칠? 난 1분도 싫은데?”

    그 후로 재현은 성재에 대한 말을 꺼내지 않았다. 혜운도 성재와의 만남이 두 번 다 불쾌했기에 더는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손에 들고 있는 거 뭐야?”

    “어? 이거? 아무것도 아냐.”

    재현의 물음에 혜운은 잽싸게 종이 가방을 등 뒤로 감췄다.

    “아무것도 아닌데 왜 숨겨? 너 나 몰래 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거야?”

    “아무것도 아니라니까.”

    평소 같았다면 뺏어 가서 기어이 확인하고도 남을 텐데 어쩐 일인지 그에 대해서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아무래도 재현이 평소와는 조금 다른 것 같았다.

    아파트 앞에 도착한 혜운이 재현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지만, 재현은 생각에 잠긴 듯 굳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잘 가.”

    “어. 그래. 들어가.”

    손을 흔들고 돌아서는데, 재현은 여전히 아까 그 표정 그대로 서 있었다. 혜운은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아 재현에게 다시 다가갔다.

    “재현아.”

    “나한테는 네가 절대로 보면 안 될 비밀 같은 게 없는데…. 좀 서운하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말이 재현의 입에서 나오는 순간, 혜운은 머릿속이 하얘졌다.

    “아니 난 그게 아니라….”

    “쫄기는. 농담한 거야. 들어가.”

    농담이라고 말했지만 혜운에겐 전혀 농담처럼 들리지 않았다. 당황해서 말문이 막힌 혜운이 어쩔 줄 몰라 하자, 재현은 혜운의 등을 떠밀어 공동 현관 안에 밀어 넣고 돌아섰다. 재현의 뒷모습을 지켜보는 혜운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아 한 걸음도 내딛을 수가 없었다.

    집에 돌아온 재현은 농구 한 게임 하자는 진현의 제안에 집 근처 공원으로 향했다. 가볍게 몸만 풀려던 게 어느새 승부욕에 불이 붙어 티셔츠가 땀으로 흠뻑 젖을 때까지 코트를 뛰었다.

    승부욕이라면 두 사람 다 둘째가라면 서러운지라 경기는 좀처럼 끝나지 않았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 누구 하나 먼저 코트에 쓰러질 때까지 계속 되었다.

    “하아! 더는 못 뛰어!”

    오늘 경기는 결국 진현이 백기를 들면서 끝이 났다. 진현이 바닥에 드러눕자 재현은 농구공을 깔고 앉아 누워 있는 진현을 내려다보았다. 형을 이긴 기분을 잠시라도 만끽하고 싶어서였다.

    “역시 10대는 다르구나. 하재현 남자네!”

    진현의 그 말에, 재현은 그에게 남자로 인정받은 기분이 들어 내심 뿌듯했다.

    “중간고사 끝나고 바로 진로 상담이지?”

    “어.”

    “생각해 둔 학과 있어?”

    “아직.”

    재현은 아직 진로를 결정하지 못했다. 자신이 뭐가 되고 싶은지 찾지 못한 것이다. 영철과 민영, 진현 모두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천천히 찾아보라고 응원을 보내고 있지만 점점 초조한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형은 왜 수학 교육과에 갔어?”

    “수학 선생님이 되고 싶었으니까.”

    “수학이 좋아서?”

    “어. 재밌어.”

    “와…. 우리 형이지만 참 대단하다.”

    일찌감치 수학을 포기한 재현의 입장에선 좀처럼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

    “형, 나랑 농구하자던 목적이 이거구나?”

    “겸사겸사. 네가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재현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어서 함께 운동을 하자고 했던 모양이다. 그래도 덕분에 스트레스가 해소되었으니 잘된 일이었다.

    “식당 물려받을까?”

    “인마, 그게 어디 보통 일인 줄 알아? 물려받으려면 엄마랑 아버지가 할머니한테 배웠던 것처럼 하나부터 열까지 싹 다 제대로 배워서 해야 돼. 대충 물려받아서 할 생각이면 아예 꿈도 꾸지 마라.”

    “알아. 할 거면 제대로 해야지. 그냥 생각만 해 본 거야.”

    진현은 재현의 손을 잡고 바닥에서 일어섰고, 재현은 농구공을 챙겨 진현과 함께 걸었다.

    “혜운이는 광고 쪽으로 진로 결정한 거 같더라.”

    “형한테 그런 얘기도 해?”

    “내가 먼저 물어봤지. 목표가 있어선지 계획도 구체적이더라고.”

    “그랬구나.”

    진현에게 그런 이야기까지 할 정도로 혜운과 진현이 가깝게 지내는 줄은 미처 알지 못했다. 여섯 살이라는 나이 차 때문인지 사춘기를 지나면서는 예전처럼 막역하게 지내는 사이가 아니었기에 더 의외였다.

    “넌 몰랐어?”

    “어? 어. 그런 얘긴 안 해 봐서.”

    “너희들은 가장 친한 친구 사이면서 그런 얘기도 안 해 본 거야?”

    “진지한 건 어색해.”

    “하긴, 너희들 나이엔 그럴 수 있지. 어른이 되면 달라질 거야.”

    가장 가까운 사이라고 생각하지만 어쩌면 그리 가깝지 않은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을 하고 나니 괜히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혜운에 대해서는 모든 걸 알고 싶고, 그 누구보다 가까운 사이이고 싶기 때문이다.

    하지만….

    “네가 내 친구라서 정말 다행이야.”

    내내 머릿속을 맴도는 혜운의 그 말이, 자꾸만 재현에게 브레이크를 걸었다. 친구 이상으로 욕심내지 말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친구로 남아야 하는 걸까. 혜운이가 원하는 건 그것일까. 만약 내가 좋아한다고 말한다면, 지금의 우리 관계를 잃게 될까.

    그동안 너무 행복 회로만을 돌리며 전부 좋은 쪽으로 생각하고, 관계를 단순하게 생각했던 것에 걱정이 앞섰다.

    혜운과의 관계가 변하는 것은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것이기에, 생각을 거듭할수록 조금씩 두려워졌다.

    고백을 하고 혜운과 사귀면서 얻게 될 행복과, 지금의 행복. 함께 가질 수도 있고 하나만 가질 수도 있고 둘 다 잃을 수도 있다. 재현은 그 모든 변화의 가능성이 이제야 걱정되기 시작했다.

    “하재현.”

    “왜.”

    “너 혜운이 좋아하지?”

    정곡을 찔린 재현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그저 앞만 보고 걸었다.

    “많이 좋아하냐?”

    “그게 형 눈에는 보였어?”

    “너무 훤히 보이더라. 혜운이한테서 눈을 못 떼던데 뭐.”

    “내가 그랬구나…. 근데 그건 수학 시간에 내 앞에 앉아서 그래 보였을 거야.”

    “아니. 수업 시간뿐만 아니라 넌 늘 그랬어.”

    “혜운이도 알고 있을까?”

    “글쎄. 정 궁금하면 직접 물어봐.”

    진현의 말에 재현은 피식 웃었다.

    “사실… 좀 헷갈려. 혜운이가 점점 좋아지는 게 어느 날 갑자기 이성으로 호감이 생겨선지, 아니면 친구로서의 호감을 오해하고 있는 건지. 정확히 구분이 안 돼.”

    “그걸 구분하는 게 의미가 있나? 둘 다일 수도 있잖아.”

    진현의 말에 재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단 한 번도 이성에 대해 진현과 이런 얘길 나눠 본 적이 없어서 가뜩이나 쑥스러운데, 그 대상이 신혜운이라 더 민망했다.

    그러나 자신과 혜운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사람이기에 진현이라면 답을 찾아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너 하루에 혜운이 생각 얼마나 해?”

    과연 그걸 수치화할 수 있을까? 틈만 나면 생각하는데, 이걸 어떻게 설명하지.

    아침에 일어나면서부터 잠들기 직전까지 혜운을 떠올리고 있는 요즘, 이 얘길 진현에게 한다면 왠지 놀릴 것만 같아 입을 떼기 어려웠다.

    “답 나온 거 같은데?”

    진현의 말에 재현은 또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재현은 확실하게 깨달았다. 꽤 오래전부터 혜운을 이성으로 좋아하고 있었다는 것을.

    “다 컸네, 자식.”

    진현이 재현의 엉덩이를 툭툭 치고는 저만치 앞서 걸었고, 그런 진현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재현은 머릿속을 가득 메운 혜운의 생각에 바보처럼 웃어 버렸다.

    재현과 진현은 곧장 집으로 올라가지 않고 1층 식당으로 들어갔다. 마감을 마치고 영철과 민영이 마주 보고 앉아 소주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우리 아들들. 이리 와.”

    재현이 영철의 옆에 앉고, 진현이 민영의 옆에 앉아 영철과 민영의 빈 잔을 채워 주었다.

    “방금 전에 재현이 목소리 듣고 싶다고 고모한테서 전화 왔는데. 고모가 우리 재현이 보고 싶어 죽겠대. 오늘도 너 호주로 보내라고 난리였다.”

    결혼 후 호주로 이민을 간 고모는 재현을 유난히 예뻐했다. 결혼 전까지 한집에 살았던 고모는 엄마의 손길이 필요할 때마다 민영을 대신해 유치원 학예회도 와 주고, 초등학교 때까지 선생님 상담도 다녀 주었다.

    “재현아, 진지하게 호주로 유학 가는 것도 한번 고려해 봐. 형이 생각하기에 거기서 공부하면서 견문을 넓히는 것도 괜찮을 거 같다.”

    진현은 그동안 고모가 꾸준하게 유학을 제안했던 이유와 일맥상통한 입장을 내놓았다.

    “엄마도 진현이 생각이 좋은 거 같은데? 일단 고모가 있으니까 걱정 없고.”

    “싫어. 난 여기가 좋아.”

    재현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자신의 의사를 분명히 밝혔다.

    “나도 싫어. 왜 자꾸 우리 막내를 호주로 보내려고 그래?”

    영철이 자신의 편을 들어 주자, 재현은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살갑게 굴었다.

    “대학 가기 싫으면 안 가도 돼. 우리 아들 하고 싶은 거 해.”

    “역시 우리 아버지가 최고.”

    재현이 엄지를 치켜세우자, 그 모습을 지켜보던 민영이 손을 뻗어 재현의 어깨를 찰싹 때렸다.

    “이놈 자식, 공부 열심히 해서 대학 갈 생각은 안 하고! 당신도 애한테 자꾸 바람 넣지 말아요. 저러다 진짜 공부 때려치우면 어쩌려고 그래요?”

    “엄마, 나 그냥 대학 안 가고 식당 일 배우는 건 어때? 진짜 제대로 배울게.”

    민영의 매운 손이 또 한 번 날아들자 재현은 잽싸게 영철의 등 뒤로 숨었다.

    “군대를 먼저 다녀오자. 그럼 되겠다.”

    진현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재현은 입술을 꾹 다물고 원망스레 쳐다보았다. 그러자 진현이 큭큭 웃으며 영철과 민영의 빈 잔을 또 한 번 채웠다.

    “너무 애한테 부담 주지 마. 아빠는 우리 아들 믿어.”

    “당신이 매번 이렇게 재현이를 감싸기만 하니까 저놈 자식이 저런 소릴 하는 거예요.”

    민영의 타박에도 영철은 그저 허허 웃으며 재현의 입에 김치전을 넣어 주었다.

    “엄할 땐 엄하고, 따끔하게 혼낼 땐 혼내기도 해야 하는데. 이래도 허, 저래도 허. 어쩜 저렇게 사람이 무른지….”

    “언제는 내가 그래서 좋다며? 자상한 당신의 모습이 너무 멋지다고 편지 써 주던 사람이 이민영 씨거든요?”

    “어휴, 내가 말을 말아야지!”

    민영이 진저리를 치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자 영철도 들고 있던 술잔을 도로 내려놓고 그녀의 뒤를 따랐다. 아옹다옹하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 꿀이 떨어지는 두 사람의 모습에 재현은 웃고 말았다.

    만약 혜운이와 자신이 결혼을 하면 민영과 영철처럼 살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가지가 뻗어 나가자 재현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찬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자신이 상상하는 미래에 반드시 혜운이 함께할 거라는 확신은 대체 어디에서부터 나오는 건지 제 자신이 생각해 봐도 우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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