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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 지나친 관심 (6/50)
  • 06. 지나친 관심

    배가 고프다는 말에 재현은 혜운을 학교 근처의 단골 우동 가게로 데려갔다.

    “김치 우동?”

    “응.”

    “이모님, 저희 김치 우동 하나, 비빔 만두 하나, 유부 초밥 하나 주세요.”

    주문을 마친 재현은 컵과 물병을 챙겨 테이블로 돌아왔다. 혜운은 그 모습을 바라보다 저도 모르게 웃어 버렸다. 두 사람이 주문하는 메뉴는 늘 한결같았다. 세 가지 모두 혜운이 가장 좋아하는 것이었다.

    “왜 웃어?”

    “아니 그냥.”

    “실없긴.”

    재현은 테이블 위에 수저를 놓아 주고 물도 따라 주었다. 어느 식당에 가도 빼먹지 않고 하는, 몸에 배어 있는 행동이었다.

    “할머니한테 도착했다고 전화 드렸어?”

    “전화 안 받으셔서 메시지 남겨 뒀어. 너 만나고 들어간다고. 아직 성당에 계신가 봐.”

    “잘했어.”

    무덤덤한 칭찬도 듣기 좋았다. 재현에게 칭찬을 받으면 진짜 착한 일을 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저녁 시간대가 지나서인지 가게 안은 한산했다. 주인아주머니가 틀어 놓은 TV에서는 주말 연속극이 한창 방영 중이었다. 주말 연속극 속 여주인공은 왜 그리 하나같이 시련과 고난이 끊이지 않는 것일까에 대한 주제로 재현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주문한 음식이 테이블에 차례로 도착했다.

    “축구 보러 못 가서 어떡해?”

    “다음에 보러 가면 돼.”

    “오늘 경기 이겼을까?”

    “졌을 확률이 조금 더 높겠지?”

    냉정한 재현의 말에 혜운이 웃으며 앞 접시에 우동을 한 젓가락 덜어 입 안에 넣고 호로록 면발을 당겼다.

    뜨거운 면발을 잔뜩 입에 넣으려던 재현이 인상을 찌푸렸다.

    “아 뜨거!”

    “괜찮아? 그 뜨거운 걸 그냥 입에 넣는 사람이 어디 있어.”

    혜운은 찬물이 든 컵을 재현에게 건넸고, 물을 단번에 들이켠 재현이 혀끝으로 아랫입술을 쓸었다.

    “봐 봐. 데었나 보게.”

    혜운이 고개를 쭉 내밀어 재현의 입술을 가까이에서 보려고 다가가자, 재현이 상체를 뒤로 젖히며 도망가려 했다.

    “됐어. 괜찮아.”

    “이리 가까이 와 보라니까.”

    혜운은 저도 모르게 재현의 팔을 붙잡아 확 끌어당겼고, 마지못해 끌려온 재현은 머쓱한 듯 고개를 돌렸다. 혜운은 손을 뻗어 재현의 아랫입술을 살짝 끌어 내려 입술 안쪽 연한 살이 데이진 않았는지 확인했다. 입술이 빨갛게 익어 조금 부풀긴 했지만 물집이 잡히거나 하진 않아 그나마 다행이었다.

    “덤벙거리지 말고 천천히 먹어. 누나가 후 불어서 식혀 줄까?”

    “까분다.”

    혜운의 놀림에 재현이 정색을 하며 미간을 구겼다. 혜운은 아랑곳하지 않고 앞 접시에 우동과 국물을 담아 재현의 앞에 놓아 주었다.

    “전부터 느낀 건데, 너 입술 되게 빨갛다. 나보다 더 빨간 거 같아.”

    “신혜운이 언제부터 내 입술에 그렇게 관심이 많았을까?”

    “아니, 관심이 아니라… 그, 그냥 그렇다고. 피부가 하얘서 그래 보이는 건가….”

    재현의 입술을 유심히 보았던 걸 자신의 입으로 자백한 꼴이 되어 버려 당황한 나머지, 구차한 설명을 덧붙이고 말았다. 양쪽 귀에 불이 나는 것처럼 뜨겁게 달아올랐다.

    혜운은 전투적으로 식사를 하는 재현의 모습을 내내 힐긋거리며 훔쳐보았다.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좀처럼 타이밍을 잡을 수 없어서 몇 번이나 입술을 달막였다.

    “할 말 있으면 해.”

    “어?”

    “뜸 들이지 말고 하라고.”

    역시 재현은 눈치가 빠르고 촉이 좋았다. 어쩌면 자신의 속을 꿰뚫어 보는 재주가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재현아.”

    “응.”

    “나 너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해.”

    “그냥… 듣기만 해. 내 말 뒤에 아무 말도 붙이지 않겠다고 약속해 줘.”

    재현이 고개를 끄덕여 대답을 대신했고, 혜운은 작게 숨을 몰아쉬며 용기를 내보았다.

    “오늘 정말 고마웠어. 생각지도 못했는데 널 만나서… 너무 기뻤어.”

    조금은 쑥스럽지만 이 말을 꼭 해 주고 싶었다. 오늘 이 말을 하지 않는다면 평생 후회할 것만 같았다. 네가 내 곁에 있어 줘서 얼마나 다행인지, 얼마나 고마워하고 있는지 꼭 말해 주고 싶었다.

    “네가 내 친구라서 정말 다행이야.”

    만약 혼자였다면, 이라는 가정은 하고 싶지 않았다. 함께 자라는 동안 재현은 자신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고, 재현이 아니었다면 지금과는 다른 사람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재현은 약속한 대로 혜운의 말을 가만히 들어 주었다. 아무런 표정 변화도 없이 그저 눈만 깜박였다. 평소였다면 징그럽게 왜 이러냐고 재현이 질색을 했겠지만 고맙게도 순순히 듣기만 했다.

    혜운은 떨리는 마음을 숨을 크게 한 번 몰아쉬는 것으로 다독이곤 다시 젓가락을 들었다.

    재현에 대한 마음이 점점 커져만 간다. 하마터면 너를 좋아한다고 말할 뻔했다. 혜운은 다시 고개를 들어 재현을 볼 용기가 나지 않아서, 식사를 마칠 때까지 고개를 들지 못했다.

    * * *

    재현은 오늘도 어김없이 혜운과 함께 등교했다. 혜운이 6반 교실 안으로 들어갈 때까지 지켜보고 서 있다가, 들어간 것을 확인한 후에야 자신의 교실로 들어가 가방을 던져 놓고 복도에 삼삼오오 모여 있는 친구들에게로 향했다.

    “하재현, 너 어제 신혜운이랑 같이 저녁 먹었냐?”

    “어.”

    “학교에 소문 쫙 났어! 둘이 엄청 다정해 보였다고. 사귀는 거 아니냐고.”

    “그래?”

    재현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손끝으로 턱을 긁적이며 다시 교실로 들어가려 했다. 그러자 몇몇 녀석들이 재현을 도로 붙잡아 세웠다.

    “아, 왜.”

    “밥만 먹었냐?”

    “우동 먹었다, 우동! 비빔 만두랑 유부 초밥도 같이 먹었다. 됐냐? 인간들이 왜 이렇게 남 밥 먹는 거에 관심이 많아? 그리고 나 원래 다정해. 본성이 아주 착해, 내가. 몰랐어?”

    재현의 대답에 다들 어이가 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하긴, 하재현이 신혜운 한정으로 다정한 놈이긴 하지.”

    “그래서 오해를 부르는 거고.”

    자기들끼리 주고받는 이야기를 듣자 하니 기분이 나빠지기 시작했다.

    혜운과 밥을 먹는 게 자기들하고 무슨 상관이기에 저 난리인 건지, 사귀면 사귀는 거지 왜 자기들이 이러쿵저러쿵 말을 만드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니,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생각할수록 열받는 일이었다. 자기들이 뭐 하나 보태 준 것도 없으면서, 자신이 혜운을 좋아하면 안 된다고 누가 법으로 정하기라도 한 것처럼 지나친 관심을 보이는 게 불쾌했다.

    “중간고사가 코앞인데 공부들은 안 하고, 누구랑 누구랑 사귀나 그런 거나 관심을 가지고 앉았다. 쯧쯧. 내가 신혜운하고 사귀든 말든, 니들도 관심 좀 꺼라. 어?”

    막 걸음을 옮기는데, 무리 중 한 녀석의 말이 재현의 발목을 붙잡았다.

    “둘이 사귀면 재밌어지긴 하겠다.”

    “왜? 뭐가 재밌어지는데?”

    재현이 가까이 다가가자 녀석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가셨다.

    “그렇잖아. 너희 둘이 사귀면 그동안 너한테 여자애들 쪽지 전해 주던 혜운이만 중간에서 이상해지니까. 여자애들은 혜운이한테 뒤통수 맞는 꼴이 되는 건데 가만히 보고만 있겠냐?”

    “신혜운 완전 나쁜 년 되는 거지.”

    상황 파악을 제대로 하지 못한 눈치 없는 한 녀석이 옆에서 거드느라 ‘나쁜 년’ 소리를 하는 순간, 재현의 표정은 싸늘하게 굳어 버렸다. 재현은 어금니를 꽉 다물며 ‘나쁜 년’이라 말한 녀석을 향해 돌아섰다.

    “말 가려서 해. 누구보고 년이야?”

    당장이라도 주먹을 날릴 것처럼 바짝 다가서자 녀석은 사색이 되어 어쩔 줄 몰라 했다.

    “미, 미안. 아니 나는… 말이 그렇다는 거지. 말실수한 거야!”

    “야, 야, 재현아. 말실수한 거 가지고 왜 그래. 그만해.”

    재현은 움켜쥐고 있던 주먹에 힘을 풀고 녀석의 어깨를 슬쩍 감싸 쥐었다.

    “니들도 한 번만 더 뒤에서 신혜운 얘기 함부로 지껄이다 나한테 걸리면, 알아서 해.”

    “알았어, 절대 안 해. 기분 풀어, 인마.”

    무리 중 가장 성격이 유들유들한 녀석 하나가 분위기를 풀어 보려 애썼고, 재현은 더러웠던 기분을 털어 내며 복도 창 쪽 벽에 기대섰다. 더는 혜운이 전해 주는 편지도 받아 주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저 새끼 또 왔다.”

    “뭐야. 이번엔 신혜운이야?”

    ‘신혜운’이란 이름을 듣자마자 재현은 친구들의 시선이 향한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멀끔하고 훤칠하게 생긴 한 남학생이 혜운을 앞에 세워 두고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 남학생은 예쁜 여학생들의 뒤꽁무니를 쫓아다니며 치근덕거리는 것으로 유명한 3학년 선배 박성재였다.

    “똥파리 꼬였네. 혜운이 조심해야겠다.”

    “재현아, 네가 안테나 잘 세우고 다녀. 저 새끼 완전 집착 쩔고 손버릇도 나쁘대. 아버지가 송운지청 지청장이라 눈에 뵈는 것도 없다더라.”

    “조만간 저 새끼 자기가 신혜운 찍었다고 학교에 소문내고 다닐 건데. 어쩌냐, 재현아?”

    한마디씩 건네는 친구들의 말이 전부 다 사실이라서, 재현은 점점 머리가 아파 왔다.

    혜운은 난생처음으로 꾀병을 부리고 야간 자율 학습을 뺐다. 모범생까지는 아니지만 나름대로 성실하게 학교생활을 해 온 혜운이기에 어떤 핑계로 야자를 뺄지, 꾀병을 어떻게 부려야 할지 한참을 고민했던 참이다.

    담임 선생님에게 허락을 받으면서도 들킬까 봐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지 아직도 그때만 생각하면 손이 벌벌 떨렸다.

    혜운이 꾀병까지 부려 가며 야자를 뺀 이유는 재현의 생일 선물을 사기 위해서였다. 혜운이 살고 있는 소도시에서는 구하기 힘든 물건이라, 시내에 위치한 가장 큰 규모의 백화점까지 다녀와야 했다.

    버스 뒤편 출입문 바로 옆에 앉은 혜운은 재현의 선물이 담긴 종이 가방을 품에 꼭 끌어안고 설레는 마음에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재현의 생일 선물로 뭘 사야 할지 골머리를 앓다가 진현에게 정보를 얻어서 준비한 참이다. 진현은 재현이 갖고 싶어 하던 운동화와 모델명, 사이즈 정보까지 고스란히 넘겨주었다.

    “엄청 좋아하겠지?”

    이 선물을 받고 무척이나 기뻐할 재현의 모습을 상상하자 저절로 웃음이 새어 나왔다. 같은 모델로 자신의 것도 하나 사려다가 너무 노골적으로 보일까 봐 사지 못했다.

    안 그래도 어제 재현과 함께 밥을 먹은 걸로 오늘 아침부터 아이들의 이야깃거리가 되었기 때문에 더는 긁어 부스럼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내려야 할 정류장에 도착한 혜운이 벨을 누르고 출입문 앞에 서 있는데 누군가 곁에 가까이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유리창에 비친 모습으로 누군지 확인한 혜운의 표정은 점점 어두워졌다.

    “혜운아, 어디 갔다 와?”

    그는 아침에 자신을 찾아왔던 3학년 선배 성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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