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공가의 여우 황녀님 (106)화 (106/123)
  • 106.

    그다음 여우가 돌아왔을 때는.

    ……그때도 약간의 소란이 일어났다.

    대공가의 보좌관이나 고용인들 모두가 현관 앞까지 나와서 몰려든 것이다.

    그들로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무려 일주일이 넘도록 여우가 없었으니까!

    갑자기 여우가 보이지 않으면 수상하기에 여우의 건강이 안 좋아져서 전문가에게 잠시 맡겨 놓았다는 핑계를 댔었다.

    그 때문에 걱정이 가득한 고용인들이 여우를 보자마자 격한 반응을 보인 것이다.

    “여우님. 드디어 오셨네요! 너무 보고 싶었어요. 괜찮으세요?”

    “아네사. 뒤로 물러나. 나도 좀 가까이서 보고 싶어.”

    “제가 이 자리 차지하려고 몇 시부터 여기 나와 있었는데요. 양보 못 하죠. 그죠, 여우님?”

    여우를 빤히 쳐다보는 아네사의 입이 헤벌쭉 늘어졌다.

    ‘모두 걱정해 줘서 고마워……. 고마운데 좀 부담스럽네? 하하하…….’

    에리스텔라가 하필 대공가의 고용인들의 애정에는 한없이 약한 편이라는 점이 문제였다.

    차마 걱정 어린 애정을 뿌리치지 못하고 꼼짝도 못 하고 있을 때였다.

    “당분간 안정을 취하는 게 좋다고 하니 내가 데려가지.”

    다행히 하인리시온의 구조 덕분에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 후로 며칠 동안 에리스텔라 황녀의 행동으로 인한 소란이 일어났지만. 정작 에리스텔라는 대공가에 돌아온 덕분에 무리해서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지 않고 지낼 수 있게 되었다.

    ‘후아. 이제야 좀 편하네.’

    ***

    하지만 에리스텔라가 돌아온 여파가 끝난 건 아직 아니었다.

    한낮의 시간이었지만 에리스텔라는 황녀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외출하자.”

    대공가에 오자마자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면 이상하니까.

    아직은 몇 번 더 보여 줄 필요가 있어서 하인리시온과 함께 마차를 타고 저택을 나설 때였다.

    저택 앞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에리스텔라가 창문을 열어 확인하려 할 때였다.

    “네가 온 날부터 온갖 사람들이 찾아오고 있어서 그래. 괜히 얼굴 보여 주면 더 모여드니까 가만있어.”

    하인리시온의 경고에 에리스텔라가 잡고 있던 문고리를 내려놓았다.

    마차는 계속 움직이는데.

    “우리 진짜로 황녀 전하랑 잘 안다니까요! 아 말이나 한 번 전달해 줘요! 그럼 분명 우리를 맞으러 달려올 테니까요!”

    “미쳐 버리겠네. 내 황녀 전하를 만나기만 하면 이 일을 다 따지고 말 거야.”

    바깥에서 따지는 목소리가 귀에 쏙쏙 꽂혔다.

    뭔가 자꾸만 귀를 기울이게 되는데.

    ‘말투가 낯익은데?’

    그냥 무시하고 지나가기에는 신경 쓰였다.

    아주 살짝만 열어 볼까.

    틈새로 바깥 상황을 살펴볼 때였다.

    “어……?”

    에리스텔라가 놀란 눈으로 점점 멀어지는 저택 앞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큰일 났네.”

    오늘 외출은 안 되겠다. 그보다 당장 마차를 돌려야겠다.

    ***

    아델라시아 대공가에서는 갑작스러운 오찬이 준비되었다.

    하인리시온과 에리스텔라 황녀, 그리고 소니아와 뒤늦게 소식을 받고 온 샬롯까지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맞은편에는 저택 앞에서 난동을 부리던 두 명의 남자와 한 명의 여자 그리고 남자인지 여자인지 알 수 없는 사람 한 명이 있었다.

    하지만 오찬 분위기는 한눈에 보기에도 개성 강한 네 사람의 분노로 흉흉하기 짝이 없었다.

    “저희가 며칠 동안 저택 문도 못 밟아 보고 매일같이 찾아오는 동안 여기서 편하게 지내셨겠죠.”

    에리스텔라에게 서운함을 토로하는 남자가 커다란 덩치와는 다르게 새침하게 고개를 휙 돌렸다.

    “나는 전혀 몰랐어. 알았으면 당장 마중 나갔지.”

    에리스텔라가 열심히 달래며 해명했다.

    이건 정말 흔치 않은 모습이었다. 어느덧 하인리시온은 그 모습을 흥미진진하게 구경하고 있었다.

    “저희한테 어떻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

    하지만 고작 몇 마디 해명으로 넘어갈 생각이 없다는 듯 그들은 원망을 토로했다.

    “그럼 그동안 왜 안 찾은 거예요? 저희를 그동안 까맣게 잊고 계셨던 거죠?”

    “우리가 고작 이 정도밖에 안 된다니. 그 사실이 더 서글픕니다!”

    그들은 분통을 터트리며 가슴을 주먹으로 쾅쾅 쳤다.

    “당장 수습할 일들이 많아서 그런 거지 내가 정말로 곧 연락하려고 했어.”

    에리스텔라가 네 사람에게 열심히 해명하고 있지만 도통 통하지를 않았다.

    얘네들은 속이 콩알만 하다니까. 툭하면 삐지고 풀어주기는 또 어렵고.

    ‘뭐, 이번엔 삐질 만하기는 했지만.’

    그니까 무조건! 최선을 다해! 성심성의껏! 이번에 잘 풀어 줘야 한다.

    에리스텔라가 의지를 불태우면서 입을 열려고 할 때였다.

    “일단 소개를 좀 해 주는 게 어때.”

    하인리시온이 나서서 물었다.

    아직 서로가 누구인지도 모른 채 마주 보고 앉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럼 소개부터 할까?”

    네 사람도 서로 시선을 주고받더니 모르는 사람들 앞에서 흥분했던 게 민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에리스텔라는 먼저 네 사람에게 하인리시온과 소니아 그리고 샬롯을 소개해 주었다.

    “이쪽은 브릭. 덩치도 크고 힘도 세. 근데 또 민첩해. 그리고…….”

    그래서 행동 대장처럼 위험한 일에 가장 앞장서서 나섰다.

    에리스텔라가 브릭을 흘깃 쳐다보고는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잘 삐져.”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는 배포도 크고 속도 넓습니다!”

    브릭이 바로 항변했지만, 내내 에리스텔라에게 서운함을 가장 강하게 토로한 걸 본 이들은 조용히 납득했다.

    “그리고 여기는 제이크. 친화력이 높고 눈치도 좋아서 소문에 특히 빨라.”

    제국 곳곳에서 벌어지는 온갖 소문을 가장 먼저 알아차리고는 했었다.

    “케일리. 이분은 외모와는 달리 나이가 많으니까 함부로 깔보면 안 돼. 그리고 손이 엄청 매우니까 조심하는 게 좋아.”

    주름 하나 없고 소녀 같은 얼굴은 에리스텔라와 비슷한 또래로 보이지만 사실은 그녀의 부모뻘이었다.

    “마지막으로 유진. 볼 때마다 모습이 달라져 있으니까 주의해.”

    필요에 따라서 여자와 남자의 모습으로 위장하고 다니는 게 일상이었다.

    “참고로 남자인지 여자인지는 나도 몰라.”

    지금도 짧은 머리에 하얗고 선이 고운 얼굴 때문에 성별을 확신하기 어려웠다.

    에리스텔라가 네 사람을 쭉 둘러보고는 고마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동안 내가 흑마법을 쫓는 걸 도와준 사람들이야.”

    황궁에 사는 에리스텔라가 제국 곳곳에서 벌어지는 소동을 알고 찾아갈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했다.

    “각자 알게 된 사연은 다 다른데. 나를 도와준 지는 오래됐어.”

    에리스텔라의 소개에 네 사람이 벌떡 일어나 각자의 방식대로 인사했다.

    우렁찬 목소리로 외치기도 하고 갑자기 부끄러운지 말을 버벅이며 인사하기도 했다.

    휴우. 이대로 좀 진정이 되나.

    에리스텔라가 안심하기 무섭게 인사를 끝내자마자 그들의 성토가 이어졌다.

    “이런 줄도 모르고 저희는 전하가 안 계시는데도 맡은 임무를 계속 수행했습니다.”

    “정말?”

    순간 에리스텔라가 눈을 반짝였다. 이건 정말 기대하지 못한 수확인데?

    “어딜 넘보십니까. 저희를 배신한 전하께 드릴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흥. 제대로 토라졌다.

    에헤이. 그러지 말고. 에리스텔라는 능글맞게 그들을 달랬다.

    “정말 안 알려 줄 거야?”

    “네. 돌아가는 대로 자료도 전부 소각해 버릴 겁니다.”

    우와. 얘가 언제 이렇게 협박하는 법을 배웠지?

    에리스텔라가 자리를 비워 두었던 시간이 짧지 않았던 모양이다.

    하긴 나도 이렇게 장난스럽게 넘어갈 생각은 없었어.

    이들은 신분에 상관없이 에리스텔라가 막막할 때부터 많은 도움을 주었던 이들이었다.

    그러니 그들에게 말할 작정이었다.

    “너희들한테 알려 줄 비밀이 있어.”

    에리스텔라가 큰 결심을 한 얼굴로 비장하게 말했다.

    “이번엔 또 무슨 비밀로 저희를 부려 먹으시려고요.”

    “비밀은 됐습니다.”

    이번에야말로 단단하게 마음을 굳히고 온 거라고. 그들이 단호하게 거부했다.

    “정말?”

    나 두 번은 안 물어본다?

    에리스텔라가 한쪽 눈을 찡긋거리며 묻자 절대 흔들리지 않을 것 같은 그들 사이에서 동요가 일어났다.

    “아 그야…… 일단 한번 들어나 볼까요? 정 그러면 못 들은 척 잊어버리면 되니까.”

    어처구니없는 논리였지만, 나머지 세 사람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그렇게 하면 되겠네.”

    그러니 얼른 말해 달라고. 궁금해 미치겠는 여덟 개의 눈동자가 에리스텔라를 향했다.

    “직접 보여 줄게.”

    그리고 순식간에 에리스텔라는 여우로 변했다.

    “이게 무슨……? 무슨 일입니까? 왜 전하가 사라지고?”

    “저희가 잘못했습니다. 그러니 제발 돌아오세요. 이렇게 다시 못 돌아오는 건…….”

    당장 눈물이라도 쏟을 기세라 에리스텔라가 서둘러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지금은 어느 정도 자율성이 생기기는 했지만, 흑마법에 당해서 여우의 몸에 갇혔어. 그래서 그동안 알리지 못했던 거야.”

    바늘 들어갈 곳도 안 보일 정도로 틈이 없는 줄 알았던 그들은 너무도 의외로 단숨에 흐물흐물 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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