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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의 여우 황녀님 (94)화 (94/123)
  • 94.

    ‘어쩌다 내가 침대 밑에 숨는 신세가 되어 버렸을까.’

    그때 에리스텔라를 돌아보던 하인리시온은 반사적으로 푸훗 웃었다. 그 웃음에 에리스텔라의 미간이 좁혀졌다.

    “뭐야. 왜 웃는 건데?”

    에리스텔라가 사납게 추궁하며 걸음을 옮겼을 때였다.

    옆에 있던 거울 속에 그녀의 모습이 비쳤다. 머리는 엉망에 드레스도 주름이 우습게 잡혀 있었다.

    에리스텔라가 자신의 몰골을 확인하고는 서둘러 정돈을 하려 했다. 그런데 에리스텔라의 손길이 닿을수록 어째 몰골이 점점 더 엉망이 되어가고 있었다.

    “왜 자꾸 머리가 엉키는 거야.”

    에리스텔라가 신경질적으로 투덜거리면서도 얼굴이 점점 더 빨개질 때였다.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하인리시온이 에리스텔라의 머리를 차분하게 다듬어 주었다.

    “황녀께서는 아직도 서투르십니까.”

    하인리시온이 자연스럽게 구겨진 드레스 주름도 정돈해 주면서 에리스텔라를 놀렸다.

    어릴 적부터 시중을 받다 보니 그녀는 의외로 기본적인 생활 능력이 부족했다.

    사실 그것도 여우가 되고 나서야 깨달은 일이지, 황녀 에리스텔라로 지낼 때는 자각조차 하지 못했다.

    “소니아한테 해 달라고 하면 돼.”

    에리스텔라가 드레스를 슬쩍 빼내며 말했다.

    “내가 아무도 들어오지 말라고 했는데 어떻게 소니아를 불러.”

    그건 또 그렇네.

    빠르게 납득한 에리스텔라는 하는 수 없이 하인리시온의 손길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에리스텔라가 다시 여우로 돌아가기까지는 지난번보다 더 많은 시간이 걸렸다.

    무려 점심쯤이 다 되어가서야 여우가 되었으니까.

    ***

    그 후에도 에리스텔라가 여우로 돌아가는 시간이 불규칙적으로 바뀌었다.

    그녀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이 확실했다.

    “왜 이런 변화가 생겼는지 규칙을 찾지 못하면 더는 숨기기 어려운 상황이 생길 거야.”

    그게 문제였다.

    단순히 에리스텔라와 하인리시온이 긴장하고 조심해야 하는 거라면 어떻게든 해 보겠지만,

    이런 식으로 시간이 들쑥날쑥하다 보면 두 사람이 아무리 조심해도 다른 사람의 시선을 피할 수 없는 상황에 맞닥뜨리게 될 것이다.

    기분 탓인지 원래 모습과 여우로 변하는 시간이 제멋대로일 때마다 컨디션도 나빠지는 것 같았다.

    “어떻게든 패턴을 찾아야지.”

    하지만 필요한 걸 알면서도 척척 해낼 수 없는 일도 존재했다.

    우선, 소니아에게도 상황을 설명한 뒤에 함께 고민해 봤지만 답을 찾을 수 없었다.

    대체 왜 자꾸 변화하는 시간이 바뀌는 건지 도무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에리스텔라와 하인리시온은 매일 새로운 가능성에 대해 논의했지만 별로 소득은 없었다.

    “내일 디아클렌 자작이 방문할 거야.”

    “내일?”

    “지난번 연회에서 사업 논의를 하고 싶다더니 다시 서신을 통해 요청하길래 내일 보자고 했어. 나도 좀 신경 쓰이는 게 있고.”

    하인리시온이 신경 쓰인다는 건 지난번 황궁 연회에서 에리스텔라가 디아클렌 자작에게 보인 반응이었다.

    에리스텔라의 얼굴에 불편함이 떠올랐다.

    “디아클렌 자작이랑 뭐가 있는 거야? 그때 분위기가 이상하던데.”

    “아직 확실하지는 않은데 좀 찝찝해 내가 전에 만난 적 있는 사람 중 하나인 것 같아서.”

    에리스텔라가 디아클렌 자작과 에밋이라는 소년 그리고 흑마법사 데클렌이 겹쳐 보였던 것을 설명했다.

    아직 디아클렌 자작에 대한 정보가 정리되지 않아 설명하는 그녀 역시 혼란스러웠지만, 하인리시온은 바로 알아들었다.

    “에밋이라는 소년에 대해 알아보라고 할게. 그래야 디아클렌 자작과 공통점이 있는지 확인할 수 있으니까.”

    하인리시온은 곧바로 방법을 찾았다.

    “그리고 내일 자작을 만나는 곳에 동석하는 게 불편하면 나서지 않아도 돼.”

    “그건 생각해 볼게.”

    디아클렌 자작을 만나 봐야 그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으니 마냥 피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자꾸만 그녀를 알아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껄끄러운 나머지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할 때였다.

    생각에 잠겨 있던 에리스텔라가 갑자기 양팔을 감싸며 몸을 파르르 떨었다.

    ‘으으으. 왜 갑자기 소름이 돋지?’

    이상하게 디아클렌 자작을 떠올리면 괜히 으슬으슬한 기분이 드는 것 같았다. 덩달아 재채기까지 나왔다. 에, 엣취!

    “왜 그래?”

    갑작스러운 재채기에 하인리시온이 에리스텔라에게 괜찮냐는 듯 물었다.

    “아냐. 그냥 기분 나쁜 생각을 해서 그래.”

    에리스텔라는 대수롭지 않게 말하고 넘겼다.

    역시 디아클렌 자작을 떠올리면 꼭 찝찝한 기분이 드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

    에리스텔라는 잠결에 자꾸만 이불을 찾아 당겼다. 몸이 저절로 말렸다.

    으슬으슬 추운데 땀이 나고 몸이 평소와는 다르게 무거운 느낌이 들어 왜 이러나 싶었다.

    에엣취!

    그러다 자신의 재채기에 깜짝 놀라며 깨고 나서야 몸 상태가 좀 이상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라. 감기라도 걸렸나.

    몸이 붕 뜬 것 같으면서 바위에 눌린 것처럼 무거웠다.

    에리스텔라가 무거운 눈꺼풀을 힘겹게 뜨는데 언제부터인지 하인리시온이 심각한 얼굴로 그녀를 빤히 지켜보고 있었다.

    ‘나 아픈 거 맞구나.’

    이상하게도 하인리시온은 화가 난 것 같았다. 그 얼굴을 보니 실감이 났다.

    동시에 에리스텔라는 이런 상황이 낯설었다.

    아주 어렸을 때 이후로 에리스텔라는 잔병치레조차도 한 적 없었다. 지나치게 건강해서 꾀병조차 부릴 수 없었다.

    그래서 사람이 아프면 어떤 상태가 되는지 기억이 흐릿했다.

    정말이지 여우가 되고 나서 별걸 다 경험해 보는구나. 그런 생각이 들어 바람 빠진 웃음이 흘러나올 때였다.

    하인리시온의 미간이 신경질적으로 좁아졌다.

    “웃음이 나와?”

    비아냥거리는 투였지만, 그의 목소리에는 걱정이 잔뜩 묻어났다.

    에리스텔라는 새벽부터 열이 들끓었다. 그 모습을 보고 놀랐던 마음이 아직도 진정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정작 당사자가 고열 때문에 호흡도 가쁜 주제에 태평한 모습을 하고 있으니 기가 찰 지경이었다.

    누구는 밤을 꼴딱 새웠는데.

    하지만 그런 원망도 잠시였다.

    에리스텔라의 열이 다시 오르자 하인리시온은 얼른 젖은 타월로 그녀의 얼굴을 닦아 주었다.

    그렇게 밤새 에리스텔라를 돌본 것이다.

    에리스텔라는 새삼 그의 걱정을 깨달았다. 그걸 깨달으니 하인리시온의 잔소리가 엄마의 잔소리와 겹쳐서 들리는 것 같았다.

    사실 에리스텔라가 정말 태평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머리가 멍했다.

    이러다 까무룩 정신을 잃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일단 약부터 좀 드세요.”

    소니아가 방금 가져온 약을 조심스럽게 내밀었다.

    “몸은 좀 어때? 아직 의사는 못 불렀어. 혹시 상태가 안 좋은 거 같으면 어떻게든 불러올게.”

    “괜찮아. 굳이 그럴 필요까지는 없어. 약 먹고 좀 쉬면 괜찮아질 거야. 어릴 때부터 회복력은 남달랐거든.”

    의사를 부르지 못한 이유는 충분히 짐작이 됐다. 게다가 몸살감기 때문에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었다.

    에리스텔라가 씩 웃어 보였다. 하지만 아픈 얼굴로 웃어 봤자 더 안쓰러울 뿐이었다.

    “별로 아파 본 적 없잖아. 건강할 때면 모를까 아픈데 강한 척하지 마.”

    하인리시온이 에리스텔라를 나무라듯이 잔소리했다.

    “의사를 부르려고 했는데 일이 좀 있었어요. 전하께서 깨어나시기 전에 계속…….”

    “?”

    소니아가 조심스럽게 살피며 설명해 주려고 하는데, 그전에 에리스텔라에게서 어떤 신호도 없이 갑작스러운 변화가 일어났다.

    어느새 그녀는 순식간에 여우로 변했다.

    “또 변했네요.”

    또… 라니?

    에리스텔라가 혼란스러워하며 두 사람을 바라봤다.

    하지만 문제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여우에서 다시 에리스텔라의 모습으로 변한 것이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밤새 계속 이랬어. 그래서 다른 사람을 부를 수가 없어.”

    밤사이에 갑자기 여우가 됐다가 또다시 에리스텔라가 되는 예측불허의 상황이 몇 번이나 벌어졌던 것이다.

    결국 하는 수 없이 하인리시온이 가지고 있던 비상용 처방전을 찾아 소니아에게 따로 준비하게 만들었다.

    “이러다 누가 보기라도 하면 큰일이니까.”

    “정말이네. 전혀 통제가 안 돼. 이런 적 없었는데…….”

    에리스텔라도 직접 봤으니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최근 들어 자꾸만 몸에 변화가 생기자 걱정이 앞섰다.

    에리스텔라가 심란하게 자신의 몸을 보며 생각에 잠길 때였다.

    “아무래도 전하의 몸 상태가 마법에 영향을 주는 것 같아요.”

    소니아의 추측에 에리스텔라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몸이 약해지니 변화가 생기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모든 게 설명되지는 않았다.

    “지난번에는 몸이 약해지거나 하지 않았어.”

    조금 놀라기는 했어도 몸도 마력도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일단 그 문제는 나중에. 지금은 아무 생각 말고 쉬어. 그게 네가 당장 해야 할 일이야.”

    하인리시온이 단호하게 에리스텔라의 생각을 끊어 냈다.

    그 후로도 하인리시온과 소니아는 계속해서 에리스텔라를 보살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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