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공가의 여우 황녀님 (93)화 (93/123)
  • 93.

    “브리아나 영애가 청혼서를 보냈을 때 이상하다고 생각했어.”

    “그게 왜? 브리아나 영애는 어릴 때부터 너를 좋아했으니까. 청혼서를 보내는 것도 이상하지 않은데?”

    에리스텔라의 의문에 하인리시온의 눈매가 의미심장하게 가느스름해졌다.

    “걔가 나를 좋아한 건 너 때문이었어.”

    “……그게 왜 나 때문이야?”

    브리아나는 에리스텔라를 질투했다. 그래서 그녀의 옆에 있는 하인리시온에게 눈독을 들인 것이다.

    그러니 에리스텔라가 없는 지금 그에게 청혼을 할 이유가 없었다. 다른 꿍꿍이가 있다면 모를까.

    하인리시온의 의심은 거기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래서 조만간 디아클렌 자작을 초대할 거야.”

    연회장에서 가벼운 인사를 나누는 것 말고 직접 따로 만나서 확실하게 확인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지난번 연회에서 초대해 달라는 요청도 있었으니 핑계도 적절했다.

    “그전에 이번에 있었던 네 변화에 대해서 확인하는 게 먼저지만.”

    지금 당장 가장 중요한 건 이쪽이라고. 하인리시온이 에리스텔라의 몸 상태를 살피며 말했다.

    “앞으로 한동안은 귀찮아도 내 옆에 붙어 있어. 혼자 멋대로 돌아다니지 말고.”

    “…….”

    “알았어?”

    “……응.”

    브리아나가 하인리시온을 좋아한 게 아니었구나.

    십여 년 만에 알게 된 뜻밖의 진실에 놀란 에리스텔라는 멍하니 얌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

    여우로 변하는 시간에 변화가 생겼는지 확인하기 위해 최근 며칠 동안 에리스텔라와 하인리시온은 함께 밤을 지새웠다.

    “이제 곧 아침이야.”

    그리고 해가 뜨는 모습을 보며 에리스텔라가 여우로 변하는지 지켜봤다.

    “오늘도 원래대로 여우로 변하겠지.”

    “글쎄. 지켜봐야지.”

    마치 황궁 연회에서 있었던 일이 신의 농락이라도 되는 것처럼 지난 며칠 동안 에리스텔라는 해가 뜨는 시간에 원래 모습에서 여우로 돌아왔다.

    좀 더 지켜봐야 하나 아니면 그때가 정말 예상치 못한 변수였나. 이쯤 되니 갈피를 잡기가 어려웠다.

    “오늘도 그대로라면 일단은 한 번의 예외라고 생각해도 될 거 같아.”

    황궁 연회에서의 일은 마음에 걸리지만 하인리시온과 에리스텔라는 긴장을 어느 정도 내려놓은 채 아침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거 때문에 요즘 하인리시온이랑 밤새 함께 있네.’

    에리스텔라가 변하는 타이밍을 지켜봐야 한다는 이유로 두 사람은 내내 붙어 있었다.

    나란히 앉아서 대화를 나누기도 하고 간단한 게임을 하기도 하고 답답하면 산책하러 잠시 나갔다 오기도 했다.

    그러면서 시시콜콜한 농담을 하며 장난을 치다가 그동안 한 적 없는 진지한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그리고 오늘은 창가에 앉아 와인을 마시며 창문 너머로 빛나고 있는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쩐지 평화롭다고 느껴지기까지 하는 순간이었지만, 사실 에리스텔라는 살짝 초조한 상태였다. 그녀의 손가락이 꼼질꼼질 바쁘게 움직였다.

    ‘할까 말까.’

    하인리시온에게 물어보고 싶은 게 있었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지금 이야기를 꺼내는 게 딱 좋을 듯해 에리스텔라는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그럼 말이야.”

    최대한 담담하게 말해야 하는데. 이렇게 하면 엄청 궁금한 게 아니라 그냥 한번 물어보는 것처럼 보일까.

    여러 생각이 뒤섞여 살짝 망설여졌지만 이내 그녀는 결심했다는 듯 말을 이었다.

    “처음부터 청혼에는 관심이 없었던 거야?”

    정말 아주 조금도 결혼에 대해서는 고민하지 않은 건지 에리스텔라는 내심 그게 궁금했다.

    하인리시온은 에리스텔라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궁금해?”

    “아니.”

    네 마음을 안다는 듯 훅 들어오는 물음에 그녀는 당황하고 말았다.

    그래서 반사적으로 부정해 버렸다. 대답을 준비하고 있었던 게 대번 티가 날 정도로. 에리스텔라가 망했다는 생각에 아랫입술을 깨물었을 때였다.

    이렇게 된 이상 대답이라도 꼭 들어야겠다.

    비장해진 에리스텔라가 피하지 않고 하인리시온의 눈을 빤히 쳐다보자 그의 눈매가 느릿하게 휘어졌다.

    그리고는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내 약혼자는 살아 있잖아.”

    하인리시온의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것도 에리스텔라를 똑바로 바라보면서.

    “어……?”

    어떤 대답을 듣더라도 마음을 다잡겠다던 에리스텔라의 결심이 빠르게 허물어지고 말았다.

    당황한 에리스텔라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깜박이자 하인리시온이 친절하게 말을 이었다.

    “폐하께서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했지만, 내 약혼자는 그분이 아니잖아.”

    하인리시온은 눈앞의 약혼자를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나는 아직 파혼한 적 없거든. 그럴 생각도 없고.”

    너 지금 그거 무슨 의미야?

    하인리시온의 대답은 여러 가지 가능성을 상상하게 만들었다. 에리스텔라의 심장이 쿵쿵 뛰고 기대하는 마음이 생겨날 때였다.

    “다음에 폐하께 그렇게 대답할 거야.”

    숨을 쉬는 것도 잊어버린 채 머릿속에 동동 떠도는 생각에 당황하던 에리스텔라의 눈매가 점점 가늘어졌다.

    하인리시온의 의도를 알 것 같았다.

    ‘하…… 이런 식으로 나를 이용한다는 거지?’

    하인리시온은 아직 결혼에 대한 생각이 없는 거다. 그래서 청혼에 대한 거절에 에리스텔라를 핑계로 대는 것이다.

    그럼 그렇지.

    순간 괜히 설렜…… 아니, 철렁거렸잖아!

    에리스텔라가 씩씩거렸다.

    하지만 에리스텔라는 하인리시온한테 자신을 이용하지 말라며 화를 내지는 않았다.

    이번에 에리스텔라는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하인리시온이 다른 사람과 결혼하는 건 싫다. 이번에 온 청혼을 전부 거절했으면 좋겠다.

    그게 그녀의 솔직한 마음이었다.

    “하지만 나를 가지고 놀지는 마.”

    나는 더 이상 혼자 포기하지 않기로 했으니까.

    이전과는 달라지기로 마음먹기는 했어도 아직은 어색했다.

    이제 내게도 나를 좋아하고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생겼지만 그렇다고 다른 사람들까지 다 그럴까.

    아닐 가능성이 훨씬 더 높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미 한 번 직접 확인한 가능성에 모든 걸 걸기로 결심했다.

    그게 에리스텔라의 선택이었다.

    그러니 지금 당장 안심하고자 괜찮은 척할 수는 없었다.

    “언제든 깰 수 있는 형식적인 관계 때문에 파혼하지 않는 거라면 내가 정확히 할게. 그럴 필요 없어.”

    차라리 하인리시온이 다른 사람을 만나는 모습을 보면서 견디는 게 더 나을 것이다.

    에리스텔라가 힘겹게 결단을 내린 끝에 말했다.

    나는 내가 아끼는 사람들에게 미움받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지만.

    그럼에도 내가 원하는 사람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고 떳떳할 수 있는 선택을 하자고 결심했었다.

    “솔직하게 말할게.”

    여전히 마음을 표현하는 건 어색하고 민망해서 에리스텔라는 자꾸만 아닌 척하고 싶었다.

    하지만 스스로 피하는데 타인에게 자신이 진짜로 듣고 싶은 대답을 들을 수 있을 리 없었다.

    이럴 때 필요한 건 언제나 한 번의 용기와 진심일 테니까.

    “나는 궁금해. 네가 이번 청혼서를 보고 어떤 생각을 했었는지. 혹시…… 다른 사람과의 미래를 생각했는지.”

    그래서 에리스텔라는 솔직히 마음을 털어놓았다.

    그에 따른 부끄러움이나 민망함은 이미 뒷전이었다.

    만약 하인리시온의 반응이 자신의 기대와는 상반되더라도 감당할 수 있었다.

    ……적어도 괜찮은 척은 할 수 있어.

    에리스텔라의 결심이 가볍지 않다는 것을 이해한 하인리시온이 대답을 하려고 할 때였다.

    창가 사이로 햇빛이 들어왔다.

    에리스텔라가 여우로 돌아가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더 이상 조금 전의 화제를 꺼낼 수 없게 되었다.

    에리스텔라가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한 채 혼란스러워하며 중얼거렸다.

    “왜……? 어째서 그대로인 거지?”

    에리스텔라는 여우로 돌아가지 않았다.

    심장이 쿵쿵 불안하게 뛰었다.

    그때였다. 하필 이 타이밍에 문밖에서 노크와 함께 로웬의 목소리가 들렸다.

    “전하. 잠시 들어가겠습니다.”

    “잠깐만.”

    하인리시온이 급하게 말하며 에리스텔라를 바라봤다.

    그리고 에리스텔라가 반사적으로 몸을 숨기고 나서야 하인리시온의 대답이 떨어졌다.

    “들어와.”

    방안은 하인리시온뿐이었다.

    조금도 이상한 점을 눈치채지 못한 로웬은 간단한 보고를 마치고 난 후 일정에 대해 말했다.

    “그리고 오늘 브룩스 백작과 오찬 약속이 있습니다.”

    “그건 오늘 참석하기는 힘들 것 같아. 그리고 오늘 오전 일정은 전부 미루고.”

    일단 에리스텔라의 상태를 지켜봐야 하기에 이 방을 떠날 수가 없었다.

    “갑자기 말입니까? 혹 무슨 일이라도 생기신 겁니까?”

    “생각을 정리할 게 좀 있어서. 혼자 있고 싶어.”

    “알겠습니다. 전하께서 나오실 때까지 기다리겠습니다.”

    로웬이 평소와는 다른 하인리시온의 모습에 의아해하면서도 명을 따랐다. 로웬이 물러나 완전히 방문까지 닫혔을 때였다.

    에리스텔라가 침대 밑에서 스멀스멀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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