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
에리스텔라가 씩씩거리면서 하인리시온을 노려보았다.
왜 자꾸 훼방을 놓는 거냐고. 따지는 듯한 시선이었다.
이건 또 무슨 소리지?
하인리시온은 더더욱 이해할 수 없어 복잡한 얼굴을 했다.
갑자기 에리스텔라가 왜 이러는지 알 수 없어 답답했다.
신경질을 내던 에리스텔라가 혼잣말하듯이 힘없이 중얼거렸다.
“나도 이제 사람들한테 미움받고 싶지 않아.”
그게 에리스텔라의 진짜 속마음이었다.
미움받는 게 좋았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며 포기했을 뿐이지.
하지만 그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러니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었다.
“이번에 그런 생각이 들었어. 내가 너무 일찍 포기한 게 아닐까 하고…….”
그래서 지금부터라도 바꿔 보려는 거다.
“내가 노력하면 바꿀 수 있지 않을까?”
그러려면 사람들이 싫어하는 건 하지 말아야 하니까. 저절로 눈치를 보게 되었다.
분명 그녀의 말에는 틀린 게 없었다. 하지만 왜일까. 왜 이토록 짜증이 나는 걸까.
하인리시온의 얼굴이 착잡하게 일그러졌다.
“너는 그냥 너로 있으면 돼.”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걸로 충분해.”
그래. 그게 에리스텔라다.
때로는 제멋대로인 에리스텔라. 그렇기에 에리스텔라인 거다.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는 에리스텔라라니. 상상만 했을 뿐인데 어쩐지 화가 났다.
“하지만 그런 나는 사람들이 싫어하는데?”
“내가 좋아해.”
하인리시온이 숨도 쉬지 않고 단번에 대답했다.
“……어?”
“…….”
말을 뱉은 하인리시온도 갑작스러운 대답을 들은 에리스텔라도 그대로 굳어 버렸다.
두 사람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어어어???
내가 지금 무슨 말을 들은 거지?
내가 방금 무슨 소리를 한 거지?
잠깐. 지금 이게 그러니까. 어어어???
에리스텔라와 하인리시온의 맞닿은 눈이 믿을 수 없을 만큼 커졌다.
“오해하지 마!”
하인리시온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라서 숨이 당장이라도 멎을 듯한 기세로 외쳤다.
“그런 의미가 아니라.”
하인리시온은 말문이 막혔다.
잠시 머뭇거리던 그는 뭐라도 말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머릿속이 정리도 되지 않은 채로 일단 입을 열었다.
“그냥 인간적으로…… 친구로서 호감을 느낀다고 말하는 거야.”
“…….”
“절대 오해하지 마.”
제대로 말한 건가. 아닌데. 더 망한 거 같은데.
역시나 에리스텔라의 반응이 미묘했다.
하인리시온은 자신의 심장이 이렇게까지 세차게 뛸 수 있는지 처음 알았다.
“어, 그럼…….”
에리스텔라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특별한 의미로는 여길 수 없는 건가?”
에리스텔라가 웅얼거리며 고개를 휙 돌렸다.
“……어?”
기습적인 에리스텔라의 한마디에 하인리시온이 입만 뻐끔거렸다.
그저 바람 빠진 것처럼 넋이 나갔다. 이렇게까지 동요하는 스스로의 모습이 낯설고 어색했다.
하인리시온의 눈동자가 방향을 잃고 흔들렸다.
“아니, 그게 아니라…….”
“알았어. 더 이상 이 짓거리는 안 할게. 사실 나도 되게 이상하고 불편하기는 했어.”
에리스텔라가 말을 뚝 자르며 말했다.
어느새 원래대로 돌아온 듯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하인리시온의 마음은 마냥 편하지만은 않았다.
스스로 생각해도 자신의 태도가 애매해서.
그래서 에리스텔라가 오해하고 상처를 입은 것 같아서.
한 마디라도 더했다가는 에리스텔라가 가만두지 않겠다는 얼굴을 하고 있어서 하인리시온은 어떠한 해명도 할 수 없었다.
“너도 오해하지 마. 내가 무슨 기대를 하거나 실망한 건 절대 아니니까.”
에리스텔라가 단칼에 잘라 내며 밀어냈다.
혹시나 네가 나를 좋아한다는 착각 따위 한 적도 없고, 두근거린 적도 없다고.
‘제대로 말하고 있는 거 맞나?’
사실, 하인리시온도 에리스텔라도 서로 지금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는 상태였다.
결국, 두 사람 사이에 정적과 함께 민망함이 흐르는데.
“내가 하려고 한 말은…….”
잔뜩 붉어졌던 얼굴을 겨우 진정시킨 하인리시온은 에리스텔라를 똑바로 바라봤다. 그리고는 나직하면서도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냥 너 자체만으로 충분하다는 거야.”
진짜 하고 싶은 말은 이거라고. 하인리시온은 차분히 진심을 전했다.
***
에리스텔라는 자꾸만 오르는 열을 식히기 위해 한참을 씻었다.
차가운 물에 몇 번이나 세수를 하고 나서야 겨우 욕실을 나설 수 있었다.
소니아가 에리스텔라의 젖은 머리를 말리고 정리하면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일부러 들으려고 한 건 아니에요.”
“…….”
에리스텔라는 끄응, 앓는 소리가 나올 것 같았다.
사실, 하인리시온과 대화를 나누다 마지막에는 묘한 분위기가 되었다.
애매하게 자리를 일어나려고 할 때, 하필이면 소니아와 마주쳐 버렸다.
게다가 에리스텔라를 찾으러 왔던 소니아가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말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때부터 에리스텔라의 어색함과 민망함은 한층 더해졌었다.
소니아가 그런 에리스텔라의 눈치를 보며 하고 싶었던 말을 꺼냈다.
“저는 응원해요. 앞으로는 전하께서 혼자가 아니었으면 좋겠어요.”
“…….”
“그동안 전하께서 일부러 혼자가 되려는 것 같았거든요. 근데 더는 그러고 싶지 않다는 거니까요.”
에리스텔라가 소니아의 진심을 들으며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사실 에리스텔라가 혼자라고 생각했던 순간에도 그녀의 옆에는 소니아가 있었다는 것을.
그러니까 더더욱 무슨 일이 있어도 마음을 굽히지 않겠다고 다짐할 때였다.
“그런데 말이에요.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있어요.”
소니아가 내내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응?”
소니아가 은근하게 목소리를 낮추며 입을 열었다. 마치 비밀을 속삭이듯이.
“그럼 대공 전하는요?”
“어?”
에리스텔라가 눈을 깜박였다. 갑자기 하인리시온은 왜?
“폐하와도 이제 좋아지셨잖아요. 그래서 이제는 대공 전하와도 달라지시는 건가 싶어서요.”
“……어?”
에리스텔라가 입만 벙긋거렸다.
거기까지는 생각해 보지 않았는데 그게 그렇게 되나……?
“요즘엔 두 분 사이가 좋아 보이기도 해서요.”
소니아가 기대 어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던 에리스텔라는 고개를 돌렸다.
생각해 보면 하인리시온 역시 에리스텔라가 그녀에게 주어진 운명을 받아들이면서 포기한 사람이었다.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면 당연히 하인리시온과의 약혼 관계도 정리하려고 했었는데.
어차피 하인리시온은 나를 안 좋아하니까. 나는 누구에게도 사랑받을 수 없으니까.
그런 하인리시온과 억지로 관계를 이어 나가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그건 에리스텔라가 사랑받을 수 없는 운명을 깨부수기로 결심하기 전의 일이었다.
지금의 나는 어떻게 하고 싶은 거지?
더 이상 아끼는 사람들을 포기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그녀가 아끼는 사람 중에는…….
‘하인리시온도 있지.’
에리스텔라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미뤄 두고 있던 진심을 새삼 깨달았다.
***
희고 복슬복슬한 털로 뒤덮였음에도 여우의 눈 밑이 어째 퀭했다.
전날, 소니아가 한 말 때문에 생각이 많아진 에리스텔라가 밤잠을 설친 결과였다.
게다가 고민은 날이 밝아서도 지속되었다.
하인리시온과의 관계에 대해 한 번 의식을 하게 되니 그를 볼 때마다 신경 쓰였다.
나는 어떻게 하고 싶은 거지? 하인리시온이랑…….
더 이상 자포자기하지 않기로 했다.
그러니그 앞으로는 오빠와 어릴 때처럼 지내고 곁을 지켜 주는 소니아와 샬롯과의 관계에도 최선을 다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하인리시온과의 관계에 대해선 깊이 생각해 보지 않았다.
그저 막연히 지금 이런 관계가 되어서 좋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이대로만 지내면 되지 않을까 하고 받아들였던 모양이다.
‘하지만 이건 여우로 존재할 때까지만 가능한 시한이 정해져 있는 관계니까.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수는 없지.’
그럼 내가 앞으로 지키고 싶은 관계는 어떤 거지.
소니아는 에리스텔라가 당황하자 오히려 더 의아하다는 듯 말했다.
“설마 대공 전하에 관해서는 생각해 보시지 않은 거예요?”
왜 내가 당연히 생각했을 거라고 여기는 거야?
에리스텔라는 이상하게 여겼지만 소니아는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지금까지 전하의 곁에 가장 오래 있는 분이잖아요. 게다가 약혼자이기도 하고요.”
제기랄.
에리스텔라의 얼굴이 서서히 일그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