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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의 여우 황녀님 (83)화 (83/123)
  • 83.

    “이대로라면 수습은 무난히 되겠네.”

    “각 가문의 반응을 확인하고 있는데 별 탈은 없을 듯합니다. 그리고 이건 폐하가 따로 보낸 서신입니다.”

    로웬이 잘 포장된 봉투를 내밀며 말했다.

    “폐하께서 따로 보내신 것 같습니다.”

    또 무슨 일이 생긴 건가. 긴장하며 서신을 펼쳐 보는데.

    “…….”

    대체 이게 무슨 내용이야.

    하인리시온의 얼굴이 복잡 미묘해졌다. 그의 미간이 점점 좁아지다 못해 구겨지려고 할 때였다.

    ‘뭐야. 무슨 내용인데 그래?’

    궁금증을 참지 못한 에리스텔라는 하인리시온의 양팔 사이로 쏙 들어가 종이에 적힌 내용을 확인했다.

    ‘…….’

    에리스텔라마저도 눈을 깜박이며 미묘한 반응을 보였다.

    “전하. 혹시 안 좋은 상황이라도 벌어진 겁니까?”

    아직 서신의 내용을 알지 못하는 로웬은 하인리시온의 심각한 얼굴을 보고 걱정스레 물었다.

    하지만 하인리시온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할 수 없었다.

    종이를 잡고 있는 손에 힘이 점점 더 들어갔다.

    그렇게 종이가 완전히 구겨지기 직전.

    여우가 갑자기 몸을 종이 위로 던졌다!

    ‘종이 찢지 마!’

    에리스텔라가 필사적으로 종이를 보호했다.

    하인리시는 조금 신경질적으로 로웬을 내보낸 뒤 에리스텔라에게 말했다.

    “비켜. 설마 이런 걸 보냈을 리가 없어. 숨겨 놓은 메시지가 있는지 확인해 봐야겠어.”

    하인리시온이 심각하게 말했다.

    ‘절대로 구기거나 찢지는 마.’

    에리스텔라가 눈빛으로 경고했다.

    ‘이거 나한테 온 거잖아. 나는 이런 거 처음이란 말이야.’

    진지한 에리스텔라의 얼굴을 본 하인리시온의 눈썹이 살짝 일그러졌지만, 곧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황제가 보낸 서신에는 공적인 내용이 담겨 있었다.

    문제는 그 내용이 핑계처럼 짧게 끝나고 나머지는 다른 내용으로 가득 차 있다는 점이었다.

    그 안에는 에리스텔라의 이름이 직접적으로 언급되지는 않았다.

    혹시라도 다른 사람의 손에 들어가거나 하는 불상사를 대비한 것이다.

    하지만 앞으로 봐도 거꾸로 돌려 봐도 이건 동생이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해하는 주책맞은 오빠의 편지였다.

    편지를 차지한 에리스텔라는 보물처럼 챙겨서는 몇 번이나 보고 또 보기를 반복했다.

    ‘뭘 이런 편지까지 써서 보내는 거야. 헤헤헤.’

    입꼬리는 씰룩씰룩. 꼬리는 흔들흔들.

    히히히힝-하는 괴상한 울음소리까지. 들뜨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듯했다.

    ‘황제한테 이런 면이 있었나.’

    생각보다 좀…… 주책이다.

    뭐 그래도 어릴 적 황제는 동생을 무척이나 예뻐하고 아꼈었다. 그건 하인리시온도 지켜봤으니 잘 알고 있었다.

    그동안 하지 못했던 것들을 이렇게라도 표현하는 거겠지.

    에리스텔라의 신난 모습을 보니 나쁘지 않다… 라고 생각한 건 하인리시온의 대단한 착각이었다.

    ‘이거 접어 줘!’

    에리스텔라가 앞발을 꼬물대며 접어 달라 조르기에 적당한 크기로 접어 준 게 잘못이었다.

    그대로 서신을 물고 자리를 옮긴 에리스텔라는 방에서 한참 동안 서신을 봤다.

    게다가 하인리시온을 향해 눈동자를 이상하게 굴리는 게 마치 그에게 자랑이라도 하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헤헤. 이것 좀 볼래? 오빠가 나한테…….’

    그것만큼은 제발 사양이었다.

    ‘시온? 왜 자꾸 시선을 피해? 잠깐 나 좀 봐 봐. 그리고 이 서신도…….’

    하인리시온은 에리스텔라의 부담스러운 시선을 피하느라 곤욕이었다.

    여전히 애타게 바라보는 에리스텔라를 무시한 채 하인리시온은 펜을 잡았다.

    일단은 황제에게 형식적인 답변이라도 보내야 했다.

    딱히 쓸 말은 없지만…….

    간단하게 몇 줄로 끝났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에리스텔라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나도 오빠한테 뭔가 보내고 싶은데.’

    필체를 남기는 건 조심스럽다. 하지만 아무것도 보내지 않는 건 섭섭할 것 같고.

    한눈에 내가 보냈다고 알 수 있는 게 뭐가…….

    그때였다. 에리스텔라의 눈이 반짝거리며 빛났다. 아주 좋은 방법이 떠올랐다.

    서신을 반으로 접으려는 하인리시온의 팔 사이로 에리스텔라가 끼어들었다.

    그러고는 꼼꼼하게 인주를 바른 발바닥을 높게 들었다.

    목표 지점은 하인리시온이 방금 써 내려간 글자의 마침표.

    그 위에 발바닥을 쿵-찍어 눌렀다.

    “너……!”

    아델라시아 대공가의 인장이 찍힐 자리를 당당하게 차지한 여우의 발바닥 인장을 보면서 하인리시온은 기가 찼다.

    하지만 에리스텔라는 아랑곳하지 않고 만족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러면 단번에 알아보겠지.’

    결국, 아델라시아 대공가의 인장은 여우의 발바닥 인장에 밀려 그 옆자리에 찍힌 채로 황궁으로 보내졌다.

    그리고 원래부터 그럴 작정이었는지 아니면 에리스텔라의 반응에 화답이라도 하기 위한 것인지 황제의 편지 습격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며칠에 한 번씩 황제는 꾸준하게 서신을 핑계로 동생에게 전하는 편지를 보내왔다.

    그때마다 에리스텔라는 꼬리를 흔들며 달려와서 편지를 감상했다.

    넌덜머리가 났다. 설마 황제는 원래 이런 사람이었던 건가.

    불안감이 엄습해 왔다.

    하인리시온의 눈에 남매의 징검다리가 되어 버린 자신의 미래가 보였다.

    ***

    하인리시온은 서류를 보다가도 집중이 안 되는 듯 고개를 들어 한곳을 쳐다보았다.

    그곳에는 아네사를 비롯한 고용인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여우가 있었다.

    지치지도 않는지 연신 꼬리를 살랑거리던 여우가, 부담스러울 정도로 껴안는 고용인들의 손길에 콧등을 찡그렸다. 그러다 결국 이빨을 드러내는 순간.

    ‘가서 말려야겠네.’

    누구 하나 물리는 사람이 나오기 전에 하인리시온이 나서려 할 때였다.

    ‘……?’

    당장이라도 이빨을 세우며 콱 물어 버릴 것 같던 여우가 어느새 얌전해져 있었다.

    귀찮고 짜증이 난 게 분명한데도 성격에 안 맞게 꾹 참는 기이한 행동을 하고 있었다.

    ‘저기서 뭐 하는 거지?’

    하인리시온은 조금 더 지켜보다가 고용인들 사이에서 여우를 쏙 들어 올렸다.

    아네사와 고용인들은 아쉬워하며 탄식을 흘렸지만 상대가 하인리시온이다 보니 더는 붙잡지 못했다.

    하인리시온이 한 팔로 여우를 안은 채 손을 뻗었다.

    “그새 털이 엉켰는데?”

    엉킨 털이 마치 나무 덩굴처럼 손가락을 붙잡을 정도였다.

    ‘아, 아파!’

    왜 이 지경이 될 때까지 가만히 있었던 거야?

    하인리시온은 영문을 알 수 없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오일을 꺼냈다.

    그리고 능숙하게 엉킨 털을 부드럽게 마사지하듯이 풀어 나가면서 생각에 잠겼다.

    지금뿐만 아니라 요 근래 여우의 행동이 수상했다.

    너무 조용하고 잠잠해서 오히려 존재감이 더욱 커졌다. 소소한 사고도 안 치고.

    무슨 꿍꿍이가 있는 건가.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그의 눈에서만큼은 음흉한 속셈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또 무슨 대형 사고를 치려고 그래?”

    이럴 때는 보통 더 큰 사고를 치기 전이니까. 하인리시온이 합리적인 의심을 담아 물었다.

    [내가 대체 뭘 했다고?]

    “정말 아무것도 안 했어? 그런데 왜 이상한 행동을 하는 건데?”

    하인리시온이 솔직하게 말하라며 에리스텔라를 채근했다.

    […….]

    왜 자꾸 그런 걸 물어보는 거야.

    대답하고 싶지 않은 질문을 피해 에리스텔라가 스윽 고개를 돌리며 도망쳤다.

    ***

    자정이 지날 때까지도 하인리시온의 의심은 끝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에리스텔라의 이상한 행동이 계속되고 있으니 어쩔 수가 없었다.

    하인리시온은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온 에리스텔라를 이리저리 샅샅이 살펴보며 고민에 잠겼다.

    “정말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거야?”

    “아니라니까. 관심 좀 꺼.”

    에리스텔라가 살짝 신경질을 내려다가 꾹 참으며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시온. 나는 평소와 다를 게 전혀 없고, 아무런 문제도 없어. 나는 정말 괜찮아.”

    에리스텔라는 차분하게 가라앉은 안정적인 목소리로 하인리시온을 설득했다.

    다만, 문제는 그 모습이 하인리시온의 걱정을 증폭시켰다는 점이었다.

    “아니면 혹시…… 후유증 같은 게 남은 거야? 어디 상태가 이상하거나 머리가 좀 이상해졌다거나 그래?”

    순식간에 심각해진 하인리시온이 에리스텔라의 상태를 더 꼼꼼히 살피며 물었다.

    “어……?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갑자기 왜 그런 생각으로 튀는 거야?

    에리스텔라가 절대 아니라고 강하게 부정했지만 하인리시온에게는 조금도 전달되지 않았다.

    게다가 혼자서 이미 확신했는지 그에게선 물러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걸 어떡하지?

    “너는 특수한 상황이다 보니 흑마법이 풀리고 나서도 부작용이나 이상 증상이 나타날 수 있어. 조심해야 해.”

    하인리시온은 납득할 만한 다른 이유가 있지 않은 이상 자신의 예상을 거두지 않을 듯싶었다.

    미치겠네 진짜.

    결국, 에리스텔라가 얼굴을 잔뜩 구긴 채 어쩔 수 없이 외쳤다.

    “아냐. 그런 거!”

    “……?”

    “에이씨…….”

    에리스텔라가 신경질을 내다가 갑자기 망했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앞으로는 진짜 착해져 보려고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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