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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의 여우 황녀님 (47)화 (47/123)
  • 47.

    “지금 황녀궁 수색을 담당했던 황궁 기사단이 호출한 쪽은 마법사들입니다.”

    “그럼 흑마법과 관련된 증거는 안 나온 건가?”

    “지금으로써는 마법사들의 증거품들 문제가 커서 그쪽과 관련된 말은 안 나오고 있습니다.”

    누군가는 긴장하고 누군가는 기대하던 결과였다.

    하지만 뚜껑을 열어 그 내용을 확인했을 때는… 희비가 교차했다.

    로웬의 보고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웨슬러 백작이 아직 연수생이던 시절에 쳤던 사고가 기록되어 있는 영상.”

    로웬이 질린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브룩스 백작이 불륜 현장을 들켰을 때의 상황을 기록한 음성.”

    “그게 전부 뭐지?”

    “황녀궁에서 나온 다른 마법사들의 비리와 각종 범죄에 관한 증거들입니다.”

    “…….”

    순간 하인리시온은 물론이고 샬롯까지 질려 버렸다. 다만, 에리스텔라와 소니아만이 태연했다.

    “그래서 진상 조사를 하느라 시간이 좀 더 걸렸다고 합니다. 이 또한, 그냥 넘어갈 수는 없어서 한동안 소환 조사 때문에 정신이 없을 듯해 보였습니다.”

    로웬의 보고를 들은 하인리시온의 시선이 저절로 옆으로 돌아갔다. 앞발로 입가를 가린 채 키득거리고 있는 여우 에리스텔라를 향해.

    “모두 이번에 황녀궁 수색을 강하게 주장하던 마법사들입니다.”

    이게 전부 우연일 리는 없잖아?

    마법사들의 흑역사.

    그들의 치부. 그리고 그걸 증명하는 증거들까지.

    거기에 있을 줄은 생각도 하지 못한 것들이 터져 나왔다.

    ***

    황궁 기사단에게서 연락을 받고 달려온 마법사들의 얼굴이 질려 있었다.

    손은 파들파들 떨리고 동공은 정처 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거기서 나와야 하는 건 이런 게 아니라!”

    “그, 그건……!”

    마법사들은 하나같이 꽁지 빠지게 도망치느라 정신없었다.

    그러다 보니 황녀궁을 수색했던 첫 번째 목적은 완전히 잊혀져 버렸다.

    수많은 가십들이 새롭게 탄생했고, 모두가 그 화제를 꺼내 올리며 떠들기 바빴다.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마법사들은 뜻밖에 자신들의 치부가 드러나자 사색이 되었다.

    오히려 황녀궁의 수색을 흐지부지 덮어야 하는 신세가 되어 버렸다.

    “그걸 계속 가지고 있었다니. 황녀가 이렇게까지 치졸할 줄은……!”

    “그런 게 있을 줄 알았으면 절대 수색하지 않았을 겁니다. 내 얼굴에 내가 침을 뱉은 꼴이 되었어요.”

    “마치 황녀가 바로 옆에 있는 거 같은 끔찍한 기분이네요.”

    그들은 황녀 에리스텔라에게 최소 한 번씩은 당해 본 적 있는 이들이었다.

    “잠깐만! 그, 그건…… 안 나온 건가?”

    그들이라고 아무 준비도 없이 황녀궁 수색을 밀어붙인 건 아니었다.

    나름대로 믿는 구석을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걱정 없이 결과가 나오기만을 기다렸던 것이다.

    “거기에 아무것도 없었나?”

    황녀궁에 흑마법과 결탁했다는 증거를 만들어 은밀하게 숨겨 놓았다.

    적어도 그거라도 있으면 상황을 어떻게든 수습할 수…….

    마법사가 마지막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확인했다.

    “분명 있었죠. 마법사분들의 물건들이 말입니다.”

    “…….”

    어째서. 왜. 그게 어디 간 거지…….

    “어째 황녀의 마수에 걸려들기라도 한 것 같습니다. 어떻게 여기에 없는데도 이토록 존재감이 강한지. 지긋지긋하군요.”

    “당장 황녀가 나타나기라도 할 거 같아요. 으으으…….”

    마법사들에게는 희망은 없었다. 오로지 차마 얼굴을 들 수 없는 낯부끄러움만이 남아 있을 뿐.

    ***

    마법사들이 그토록 간절하게 찾는 증거물은 안타깝게도 황녀궁이 아닌 에리스텔라에게 있었다.

    “제가 생각보다 황궁에 인맥이 단단해서요.”

    소니아가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마법사들이 은밀하게 황녀궁에 넣어 놓은 물건을 중간에서 가로챈 사람은 소니아였다.

    황궁에는 소니아에게 도움을 받은 이들이 여럿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 물건을 빼 오는 건 별로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그리고 마법사들의 과거 행적이 담긴 물건들을 쉽게 찾을 수 있도록 옮겨 놨어요.”

    그 말에 샬롯이 시원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묵은 체증이 쑥 내려가는 거 같았다.

    반면에 하인리시온은 황당함 반 놀라움 반이었다. 그리고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근데 대체 그런 것들을 왜 가지고 있었던 거야?”

    [……이런 날이 올 줄 알고?]

    에리스텔라의 태연한 대답에 하인리시온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절대로 그런 치밀한 이유가 아니었을 거라는 강한 확신이 들었다.

    [자초지종이 뭐가 중요해. 결국, 이렇게 유용하게 써먹었다는 게 핵심이지.]

    에리스텔라의 어깨가 봉긋 올라갔다.

    사실 이유는 단순했다.

    귀찮아서. 그래서 까먹어서. 그냥 거기에 방치 중이었을 뿐이었다.

    그러다 때마침 이번에 그 기억이 떠올랐던 거였다.

    [내가 죽었으니 자신들의 비밀도 영원히 묻힐 거라고 자신하지 말았어야지.]

    그래서 일부러 황녀궁을 수색하도록 내버려 두라고 했다.

    비록 내가 지금 당장 눈앞에 나타나지 못하더라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건 아니라는 걸 알려 주기 위해서.

    덤으로 황녀가 남긴 흔적을 그림자처럼 여기면서 두려워하라는 에리스텔라의 경고였다.

    “이번엔 이렇게 해결한다 쳐도 이게 끝이 아닐 거라는 건 알고 있지?”

    [역시 그렇겠지.]

    “이번 황녀궁 수색의 목적은 그저 증거를 조작하기 위해서만은 아닐 거야.”

    [원하는 게 있다는 건가.]

    흑마법사들이 황녀궁에서 뭔가를 찾고 있다.

    “그게 뭔지 짐작 가는 거 없어?”

    [전혀. 모르겠어.]

    에리스텔라는 황녀궁의 주인이었다. 하지만 흑마법사들이 탐낼 만한 물건으로 예상가는 게 도통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분명히 뭔가가 있었다.

    지난번 아주르디 백작 부부 때도 그렇고 이번에도 그렇고.

    그런 사건들이 반복되다 보니 확신이 생겼다.

    황녀궁에 그들에게 필요한 무언가가 있다.

    근데 그게 대체 뭐지?

    ***

    황녀궁 수색에 대한 허가를 한 건 결국 황제였다. 당연히 그에 따른 결과 역시 보고받았다.

    “황녀궁에서 그런 게 나와 시끄러웠다고.”

    “예. 지금 그 사건으로 발칵 뒤집혔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어떻게 하기는. 이제 와 처벌하기에는 오래된 일이니 그냥 두거라. 사람들 입방아야 알아서들 하겠지.”

    “예. 그리하겠습니다.”

    황제가 오른손으로 이마를 매만지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나저나 그동안 황녀가 뭘 하고 다녔던 걸까.”

    생각에 잠겨 있던 황제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그리곤 얼굴이 잔뜩 구겨지더니 이내 그는 머리를 잡고 괴로워했다.

    지독한 두통에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쓸데없는 짓이었겠지.

    황제는 그렇게 황녀의 행적에 대한 생각을 지워 버렸다.

    ***

    하지만 상황은 엉뚱한 데서 튀었다. 누군가 물고 온 한 가지 소식으로 대전은 발칵 뒤집혔다.

    “황녀 전하를 목격했다는 이야기를 하는 자가 나타났습니다.”

    프루투 영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목격자가 나타났다.

    “만약 정말로 어딘가 살아 계시다면 흑마법과 결탁했기 때문에 나타나지 않는 것 아니겠습니까.”

    “폐하. 사안이 심각합니다. 결코 가벼이 넘기셔서는 안 됩니다.”

    “황녀가 실종되었다고 한 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밝혀내야 합니다. 황녀 전하의 결백을 믿는다면 더더욱 필요한 일입니다.”

    청산유수.

    마치 말을 맞춰 놓은 것처럼 마법사들은 차례대로 말을 이어 나가며 황제를 압박해 나갔다.

    “황녀가 제국에 미치는 상징성 때문이라도 그냥 넘어가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그날, 흑마법과 결탁하지 않았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조사가 필요합니다.”

    마법사들은 계속해서 황제를 흔들었다. 그의 마음속에 합당한 명분을 만들어 주면서 황녀에 대한 불신이 싹트도록.

    내내 이마를 감싸고 있던 황제가 미간을 좁히며 입을 열었다.

    “조사하도록 해.”

    그저 귀찮고 짜증이 난다는 듯. 황제의 명이 떨어졌다.

    그것은 곧 황제가 황녀의 행적을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을 은연중에 뜻하기도 하는 셈이었다.

    ***

    하필, 하인리시온이 참석하지 않은 회의에서 결정된 일이었다.

    뒤늦게 상황을 접한 하인리시온은 기가 찬 헛웃음을 내는 수밖에 없었다.

    “황녀가 죽었다는 사실을 증명하거나, 아님…….”

    황녀가 실종되던 날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증명해서 흑마법과 결탁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밝히는 수밖에 없다는 건가.

    분명 두 가지 선택지가 있는 것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실상은 하나뿐이었다.

    에리스텔라 황녀는 죽지 않고 살아 있으니까.

    그녀의 죽음을 증명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자연스레 그 상황에 대해 에리스텔라도 알게 되었다.

    여러 정치적인 이해가 얽혀 있을 것이다.

    그중에는 황녀의 권위를 깎아내리는 쪽이 황제의 위상을 높이는데 더 효과적이라는 판단 역시 있을 것이다.

    어차피 황제와 에리스텔라의 관계가 안 좋아진 지는 오래되었으니까.

    하지만 지금까지 어떤 상황이 펼쳐져도 조금도 타격받지 않고 태평하던 에리스텔라의 반응이 이상했다.

    아닌 척하지만 축 처진 게 눈에 보였다.

    다른 사람도 아닌 그녀에게 현 황제는 가족이자 오라버니였다. 다른 사람들이 의심하는 것과는 완전히 달랐다.

    그녀에게는 여전히 단 하나 남은 가족이었으니까.

    그녀가 유일하게 신경 쓰는 존재였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하인리시온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더는 피할 수만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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