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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의 여우 황녀님 (46)화 (46/123)
  • 46.

    ***

    ‘괜히 생각했어.’

    에리스텔라가 재수 없는 기운이 붙을까 봐 고개는 물론이고 온몸을 탈탈 털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문이 부서질 듯한 기세로 열렸다.

    소문을 접하자마자 샬롯이 무서운 기세로 들이닥친 것이었다. 그녀는 냅다 에리스텔라를 향해 바짝 다가오더니 심각하게 입을 열었다.

    “내가 무슨 개소리를 듣고 여기까지 왔는지 알지?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

    “샬롯 님……. 조금 진정을 하시는 게…….”

    “소니아. 너는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

    “아뇨. 저도…….”

    소니아가 고개를 내젓자 샬롯의 얼굴이 다시 에리스텔라에게로 돌아갔다.

    “그런데도 이대로 있을 거야?”

    샬롯의 날카로운 질문이 에리스텔라를 향했다.

    “내 사촌은 마법이 없다고 어디서 당하고 다니는 사람은 아니었는데. 내가 잘못 알고 있었던 건가?”

    [그럴 리가.]

    물론, 에리스텔라 역시 호락호락 당해 줄 생각 따위 없었다.

    그녀는 샬롯의 말을 단호하게 부정했다.

    착각이더라도 그런 오해는 사절이었다.

    그때 로웬이 하인리시온을 부르며 다급하게 문을 두드렸다.

    “전하. 급한 일입니다.”

    “들어와.”

    방으로 들어오는 로웬의 얼굴이 잔뜩 구겨져 있었다.

    “황녀궁 앞에서 마법사들이 모여 수색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황녀궁 문이 열릴 기세입니다.”

    “벌써?”

    “예. 아무래도 기습으로 밀어붙이려나 봅니다.”

    제대로 대처하기도 전에 명백한 물증을 확보하겠다는 뜻이었다.

    “황궁으로 가지.”

    하인리시온이 곧바로 움직이려고 할 때였다.

    에리스텔라가 하인리시온을 붙잡았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해 하인리시온은 로웬을 먼저 내보냈고, 그가 나자가자마자 에리스텔라가 재빨리 말했다.

    [황녀궁을 수색하도록 찬성해. 마음껏 헤집어서 원하는 걸 찾으라고 해.]

    하인리시온의 한쪽 눈썹이 치켜올라갔다.

    [걱정 마. 그게 오히려 그놈들의 발목을 잡을 테니까.]

    흐음. 이렇게 나온다면 죽은 황녀의 그림자를 보여 줘야겠네.

    에리스텔라의 얼굴에 비릿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놈들 나한테 헛짓거리를 하다가 들킨 것들이 많지.

    내가 없으니 그대로 묻힐 거라고 생각하나 본데. 어림없지.

    차라리 잘됐다.

    ***

    결국, 황녀궁은 철저하게 수색당했다. 단, 마법사들이 아닌 황궁 기사단에 의해서.

    마법사들을 비롯한 대부분의 귀족들은 황궁 홀에 모여 있었다.

    마법사들은 기세등등했다.

    그들은 지금 당장이라도 대단한 게 나올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곤 분위기를 완전히 굳히기 위해 보란 듯이 목소리를 높였다.

    “이렇게까지 말이 나오는데 황녀를 비호하는 이가 하나도 나타나지 않는 것 보십시오.”

    황녀의 평판을 가리키며 비웃었다.

    이미 죽은 사람을 위해 이 자리에서 나설 사람이 있을 리 없었다.

    하인리시온은 에리스텔라가 나서지 말라고 협박에 가까운 당부를 했기에 그들이 멋대로 지껄이는 걸 참고 있었다.

    그때였다.

    목소리를 높이는 마법사 무리와 웅성거리는 군중들. 그 안에서 유일하게 침묵을 유지하던 이가 그들의 확신에 균열을 일으켰다.

    “그럼 내가 나서지.”

    군중 속에서 유유히 걸어 나오는 발걸음.

    느릿하지만 주위를 압도하는 힘이 있었다.

    희끗희끗한 머리카락. 살짝 굽은 등. 한 발 내디딜 때마다 바닥을 지탱해 주는 지팡이.

    그럼에도 흐트러지지 않은 걸음걸이로 모두의 앞에 나선 사람.

    하벨링 후작가의 노마님이자 여전한 권위를 지닌 소피아 하벨링이었다.

    “비록 다른 길을 걷고는 있지만 마법과 검. 모두 제국을 위한 길이니 한마디 거들지 않을 수가 없네요.”

    담담하지만 회장 안에 있는 모두를 압도하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는 마법에 대해 잘 몰라요.”

    의외의 인물이 에리스텔라의 편을 들며 나섰다.

    “하지만 지금까지 황녀가 제국을 수호했다는 건 알죠.”

    하벨링 후작가는 제국의 검을 상징하는 가문이기에 그 반대인 마법과는 담을 쌓아 놓고 한평생을 살았다.

    그렇기에 그녀가 지금 나선 것은 무척이나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러니 보증이 필요하다면 내가 나서지요.”

    심지어 이 상황에서 보란 듯이 황녀를 비호하고 나서는 모습은 충격적이기까지 했다.

    “어째서 소피아 마님께서 나서시는 겁니까? 이번 일은 다른 것도 아니고 흑마법과 연루된 사건입니다.”

    “왜요. 나로는 부족한가요?”

    지긋한 연세에도 조금도 바래지 않은 눈빛.

    젊은 시절부터 제국의 한 축에서 강한 영향력을 과시해 오던 그녀의 힘은 지금도 여전했다.

    게다가 깐깐하기로 정평이 나 있는 그녀가 직접 에리스텔라를 비호하니 누구도 함부로 말을 더 얹지는 못했다.

    “내 보증은 그 정도의 무게도 없는 건가요?”

    그녀는 하벨링 후작가의 상징이었다. 감히 함부로 그녀의 말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적어도 제국을 수호하는 이들에 대한 존중과 대우는 잊지 말아야지요.”

    그녀가 앞에 있는 마법사들을 천천히 훑어보며 의미심장하게 말을 이었다.

    “염치라는 게 있다면 말입니다.”

    노부인의 일갈에 적막이 감돌았다.

    “이미 조사까지 한 마당에 함부로 말할 필요는 없겠지요. 결과가 나오면 그때 확인하면 될 일이니.”

    그리고 마지막으로 쐐기를 박았다.

    더 이상 마법사들은 입을 놀릴 수 없었고, 황녀에 대한 화두는 그대로 끝이었다.

    ***

    하벨링 후작가의 소피아가 복도를 천천히 걸어가고 있을 때였다.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하인리시온을 발견한 그녀의 걸음이 멈췄다.

    “대공 전하. 이리 뵙네요.”

    “노부인께서 나서 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사람이라면 그래야죠.”

    소피아 하벨링은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하지만 에리스텔라를 향한 호감이라든지 믿음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보다는 의무감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왜지? 하인리시온이 의문을 가졌을 때였다.

    “제 손주를 도와준 분이라는 걸 알면서도 모른 척하는 건 인간으로서 도리가 아니니 말예요.”

    “?”

    “레이튼이 얘기하더군요. 황녀궁에 갔을 때 황녀께서 가장 먼저 알아차리고 도와주시려 했었다고요.”

    하인리시온도 미처 거기까지는 알지 못했었다.

    에리스텔라가 어떻게 레이튼의 상황을 그렇게 빨리 알아차렸던 걸까 했는데.

    이미 그때부터였구나. 그럼…… 그때, 에리스텔라가 하벨링 후작 대리를 폭행했던 사건도 같은 이유였던 건가.

    “비록 내가 황녀를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순간 황녀의 얼굴이 떠오른 듯 소피아 하벨링의 얼굴에 언짢음이 떠올랐다가 금세 사라졌다.

    “황녀가 제국에 반하는 일을 하지는 않을 거라는 사실만큼은 안답니다.”

    그때였다.

    그녀의 시선이 하인리시온을 살짝 빗겨나가 그의 어깨 위에 올라와 있는 여우를 향했다.

    눈이 침침한지 인상을 쓰듯이 눈매가 가느스름해졌다.

    “그나저나 이 여우가 레이튼이 얘기하던 바로 그 여우인가 보네요.”

    목을 빼고 여우를 빤히 보던 소피아 하벨링의 미간에 주름이 짙어졌다.

    “어딘지 눈빛이…… 기분 나쁜 게 황녀가 떠오르네요.”

    “…….”

    ‘…….’

    “레이튼이 귀엽다고 그리 얘기해서 궁금했는데, 영…….”

    소피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 지팡이를 짚고 걸음을 옮겼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하인리시온이 가볍게 웃으며 돌아서려고 할 때였다.

    그의 어깨 위에서 무시무시한 기운이 느껴졌다.

    ‘방금 나 별로라고 한 거 맞지?’

    에리스텔라가 충격에 빠진 채 멍하니 중얼거렸다. 이거 위험하다. 하인리시온이 위험을 감지함과 동시에 에리스텔라가 폭발했다.

    캬아아아아!

    ‘내가 어디가 어때서! 지금 나도, 여우도 무시하는 거야?’

    에리스텔라가 포효했다.

    ***

    아델라시아 대공가.

    이른 아침부터 요란하게 들이닥친 샬롯의 방문에 에리스텔라와 소니아는 물론이고 얼떨결에 하인리시온까지 테이블에 빙그르르 둘러앉아 있었다.

    “황궁에 못 가는 게 이렇게 답답한 날이 올 줄이야. 이게 다 너 때문이야. 대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신경 쓰여서 잠도 못 잤잖아.”

    샬롯이 걱정이 잔뜩 담긴 불평불만을 쏟아 내었다.

    “대체 뭘 하길래 조사 결과가 안 나오는 거야?”

    황녀궁 수색 결과가 예정보다 계속 뒤로 미뤄져 나오지 않고 있었다.

    예상 밖의 상황이 벌어졌다는 뜻이었다.

    그때였다. 로웬이 노크와 함께 안으로 들어왔다.

    “황녀궁 조사 결과가 나왔습니다.”

    그토록 기다리던 소식에 그들이 긴장하며 마른침을 삼켰다.

    “황녀궁에서 의심이 가는 물건들이 몇 가지 나왔다고 합니다.”

    “물건이 나오다니?”

    하인리시온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네.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게 황녀 전하의 물건이기는 한데…… 증거가 맞기는 한데…… 흑마법과 관련된 게 아니라 다른 마법사들에 관한 증거랍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그때였다.

    옆에서 키득 웃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고개를 돌리니 절대 웃은 적 없다는 얼굴로 정색하고 있는 여우 한 마리가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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