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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의 여우 황녀님 (44)화 (44/123)
  • 44.

    ‘이거 어쩌면…….’

    하인리시온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아무래도 실마리를 찾은 것 같다.

    하인리시온의 손가락이 빠르게 움직였다.

    혹시라도 놓치는 부분이 있을까 한 글자 한 글자 확인하면서.

    다 읽고 나니 알겠다. 이건 아버지가 남긴 유품이었다.

    하인리시온의 시선이 아직 펼쳐져 있는 책으로 향했다. 그 안에 유독 시선이 가는 몇 줄.

    ‘방법이 있겠는데.’

    에리스텔라가 원래 모습으로 돌아갈 방법. 그 단서가 이 안에 있었다.

    비록 불안전하기는 하지만.

    ***

    하인리시온은 그대로 집무실로 돌아왔다.

    머뭇거릴 틈이 없었다. 한시라도 빨리 여러 가지 가능성을 계산해 봐야 했다.

    집무실을 벌컥 열자마자 그는 그대로 책상에 앉았다. 주변에 누가 있는지도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하인리시온은 정신없이 계산에 몰두했다.

    ‘뭘 저렇게 집중해서 계산하는 거지?’

    의심스럽기는 하지만 에리스텔라는 일단 얌전히 그 모습을 지켜보기로 했다.

    약간의 시간이 흐른 후 뒤늦게 에리스텔라의 존재를 눈치챈 하인리시온이 입을 열려고 할 때였다.

    쿵쿵쿵-!

    저택 밖에서 느껴지는 강렬한 인기척에 하인리시온과 에리스텔라의 고개가 동시에 돌아갔다.

    이 정도의 울림이라면…….

    ‘무슨 일이 벌어졌나 본데.’

    역시나 이어지는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울리고, 문이 벌컥 열리며 로웬이 들어왔다.

    “큰일 났습니다!”

    역시나.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져 버렸다.

    “흑마법사들이 움직였습니다! 프루투 지역에 차출되었던 기사단을 기습적으로 공격해 왔습니다.”

    결국, 일이 터져 버렸다.

    제국은 충격에 휩싸였다. 한 번 세상 밖으로 튀어나온 흑마법이라는 단어가 불러일으킨 효과였다.

    “현재 상태는?”

    “한 명이 죽고 세 명이 중태입니다. 의사와 마법사들이 총동원해서 치료하고 있습니다.”

    “회복 가능성은?”

    “장담할 수 없다고 합니다.”

    하인리시온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로웬은 최대한 조심스레 대답하고 있었지만, 사실상 중태에 빠진 이들이 회복할 가능성이 적다는 뜻이었다.

    “규모가 어느 정도였던 거지?”

    “그게…… 다들 중태라서 제대로 된 상황을 확인하지 못하고 있지만, 공격한 흑마법사는 한 명이었다는 것 같습니다.”

    “……!”

    한 명이 네 사람을 그렇게 만들었다는 건가.

    에리스텔라의 얼굴이 한층 더 어두워졌다. 이전에 알던 것보다 흑마법사들은 더 강해진 것 같았다.

    ‘설마 그사이에도 힘을 계속 키우고 있었던 건가. 이렇게 빠른 속도로?’

    그래도 이건 예상보다도 너무 빨랐다.

    “게다가 하필 사건이 벌어진 장소가…… 프루투입니다.”

    “…….”

    그곳은 황녀 에리스텔라가 사라졌던 곳이었다. 당연히 단순한 우연일 리 없었다. 단순한 기습이 아닌 분명한 목적과 의도를 가진 채 계산하에 움직이고 있다는 뜻이었다.

    “이건 선전포고입니다.”

    “명백하네.”

    보란 듯이 사건을 저질렀다.

    더는 숨길 수 없으니 이제부터는 공격적으로 나서겠다는 신호였다.

    이건 고작 시작에 불과하다. 앞으로는 이보다 더한 일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제국은 그들의 도발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대책을 마련해야 했다.

    “황궁이나 마법사협회 반응은?”

    “정보를 최대한 끌어모으고는 있지만, 생각보다 속수무책으로 당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전하께 논의해야 하니 지금 당장 회의에 참석해 달라는 요청을 해 왔습니다.”

    역시나 예상대로였다.

    “가야겠지.”

    그곳에서 어떤 말이 나오든 제국 차원에서 대응해야 하는 일이니 직접 가서 확인해 볼 필요가 있었다.

    하인리시온이 황궁으로 향하려고 할 때였다.

    지금까지 조용히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를 듣고 있던 에리스텔라가 하인리시온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하인리시온이 돌아보자 에리스텔라는 기다렸다는 듯이 의견을 피력했다.

    ‘그 안에도 흑마법에 연루된 자가 있을 거야.’

    에리스텔라는 확신하고 있었다. 마법사 회의 구성단 안에 관련자가 있을 거라고.

    ‘조심해야 돼.’

    “알았어.”

    에리스텔라의 걱정을 눈치챈 하인리시온이 여우의 머리를 한 번 꾹 누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걱정하지 말고 기다리고 있으라는 인사였다.

    ***

    제국을 수호하는 마법사들이 모였다. 서로 당혹스러운 낯을 숨기지 못한 채로 각자의 말을 쏟아 내고 있었다.

    “흑마법에 관한 자료가 너무 부족합니다.”

    “백여 년 전에 연구가 끊긴 이후로 그대로니까요.”

    “게다가 그전까지 연구되었던 자료들도 많이 소실되었죠.”

    화재나 관리 소홀 등으로 인해 남아 있는 자료가 별로 없었다.

    게다가 그 자료들이 너무 오래되어서 신뢰성에도 문제가 있었다.

    “당장 문제는 닥쳤는데, 대비할 정보가 없다니요.”

    답답하기만 하고 무엇 하나 해결책이 보이지 않았다. 당연히 상황은 최악이었다.

    “그나마 아델라시아 대공가의 정보가 도움이 될 겁니다.”

    “대공 전하. 이번 일에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

    모두의 시선이 하인리시온을 향했다.

    사실상 처음부터 이 자리는 하인리시온에게 부탁하고 기대기 위한 것에 불과했다는 게 지금 그들의 태도에서 드러났다.

    “제가 협조할 수 있는 건 최대한 해야죠.”

    하인리시온이 당연하다는 듯이 답했다. 그제야 마법사들의 얼굴에 안도가 피어올랐다.

    결국, 하인리시온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거라는 기대였다.

    “그런데 혹시 그 이야기 아십니까. 황녀궁에서 흑마법에 관한 자료들이 나왔다고 하는데, 들으신 거 있습니까?”

    “……?”

    웨슬러 백작이 떠보듯이 말을 꺼내자 하인리시온의 한쪽 눈썹이 치켜올라갔다.

    듣지 못한 일이었다. 문밖에 대기하고 있던 로웬을 슬쩍 쳐다보니 그가 고개를 살짝 숙였다.

    바로 알아보겠다는 뜻이었다.

    로웬이 잠시 회의장을 벗어나는 사이 웨슬러 백작의 말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그러게요. 게다가 이번에 문제가 일어난 장소도 그렇고……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러고 보니 처음부터 이상한 점이 있었습니다.”

    그러자 브룩스 백작이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호응하며 의심에 힘을 더했다.

    “인정하기 싫어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게 황녀 전하의 마력 아닙니까.”

    황녀의 방대한 마력은 감히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절대 진리와도 같았다. 에리스텔라 황녀는 넘볼 수 없기에 감히 열등감조차도 드러낼 수 없는 존재였다.

    “대체 어떤 일이 있었기에 황녀 전하의 신변이 위협받았던 건지 저는 그게 가장 의문입니다.”

    초조한 상황으로 인해 밀려오는 의심 속에서 지금까지 조용히 자리를 지키던 파브리안 남작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누군가에게 당했다는 가정보다는 차라리 자작극이라는 게 현실감이 있죠.”

    “……저도 그 의견에는 동의합니다.”

    에리스텔라의 능력을 그만큼 인정하기에 드는 의혹이었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듣다못한 하인리시온이 입을 열었다.

    “이 자리가 다른 사람을 음해하기 위한 자리였나요.”

    “그건…….”

    “꽤나 한가하신가 봅니다.”

    한가하다 못해 따분할 지경이었다.

    “아니, 우리는 그런 게 아니라……!”

    하인리시온의 일침에 백작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어떻게 해서든 자신들의 결백함을 주장해야 했다.

    그럴수록 더 추해 보인다는 사실은 모른 채로.

    “먼저 대처법을 분석해야 하니 이만 일어나 보겠습니다.”

    더는 이 자리에 머물고 싶지 않았던 하인리시온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일어나 그대로 문을 박차고 나섰다.

    ***

    하인리시온이 황궁에 가 있는 동안.

    에리스텔라는 또 다른 사건에 대해 알게 되었다.

    에리스텔라가 소니아와 샬롯을 번갈아 가며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다 소니아를 향해 물었다.

    [대체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왜 네가 가지고 있어야 할 것들을 전부 빼앗긴 거지?]

    “저한테는 있으나 마나 한 것들이었어요.”

    [그럴 리가. 너에게 힘이 되어 줄 테니까 내가 준 거였어. 너에게 당장 필요한 것들이라서.]

    “…….”

    에리스텔라가 소니아를 만난 이후부터 내내 의문이었던 점이 있었다.

    아직 황녀로서 굳건했을 때, 에리스텔라는 소니아의 공을 치하하며 그녀가 안정적인 지위를 누릴 수 있게끔 지원해 주었다.

    그 안에는 부와 명예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데 지금 소니아에게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리고 그 이유를 드디어 알게 되었다.

    그 모든 것이 그레타 라테른 후작 영애를 필두로 한 이들에게 가 있었다.

    [왜 나한테 말하지 않았어?]

    “…….”

    말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말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던 거다. 자신이 갑자기 실종되고 뒤늦게 나타났을 때는 지금 이 꼴이니까.

    당장 여우가 된 상황도 어쩌지 못하고 있는데 소니아가 자신의 억울한 상황을 호소할 수는 없었을 터였다.

    그래도 내가 너에게 해 준 유일한 건데.

    [소니아. 네 걸 빼앗기지 마. 무슨 일이 있어도 되찾아야지.]

    “지금은 그게 급한 건 아니니 나중에 천천히…….”

    [아니. 나중은 없어.]

    우선순위를 따지며 미루다 보면 끝이 없는 법이었다.

    해결해야 할 문제가 눈앞에 보였을 때.

    그때가 뭔가를 하기에 가장 적절한 시기라는 것을 지금의 에리스텔라는 알았다.

    내가 너한테 제대로 전달하지 못했으니까. 다시 돌려줄게.

    에리스텔라가 소니아에게 약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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