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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의 여우 황녀님 (33)화 (33/123)
  • 33.

    ***

    해가 서쪽에서 떴나.

    언제나처럼 하인리시온의 약을 챙겨 연무장으로 향했던 노집사가 그대로 돌아왔다.

    그리고 집무실에 있는 로웬에게 물었다.

    “전하께서는 어디 계시지. 연무장에 안 계시던데 집무실에도 안 계시는군.”

    “저도 오늘은 아직 뵙지 못했습니다.”

    “아직도?”

    “네.”

    “이상하군.”

    노집사의 고개가 살짝 기울어졌다.

    그의 주인인 하인리시온은 거의 잠을 자지 못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대공저에서 가장 먼저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 역시 하인리시온이었다.

    그런 그가 아직도 침실에서 나오지 못하다니.

    혹시 쓰러지신 건 아니겠지!

    노집사의 불안이 섬광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의 가는 다리가 날아갈 듯한 기세로 움직였다.

    하지만 문 앞에 멈춰선 노집사는 언제 당황했냐는 듯 오랜 경력의 연륜이 묻어난 모습으로 순식간에 차분한 모습으로 호흡을 가다듬었다.

    “전하. 계십니까.”

    똑똑.

    노크하며 여느 때와 같은 목소리로 안의 상황을 살폈다. 하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노집사의 다음 말이 빠르게 튀어나왔다.

    “대공 전하. 잠시 들어가겠습니다.”

    기척이 거의 느껴지지 않을 만큼 조심스러운 발걸음이지만, 노집사는 빠르게 침대 앞까지 다가갔다.

    반쯤 가려진 휘장 사이로 하인리시온의 모습이 보였다.

    아무래도 그의 우려대로 쓰러진 게 맞는 것 같았다. 노집사가 황급히 휘장을 걷어 하인리시온의 상태를 살폈을 때였다.

    “…….”

    노집사가 두 눈을 느릿하게 끔벅였다.

    지금 내가 뭘 보고 있는 거지……?

    하인리시온은 침대에 있었다. 하지만 노집사의 걱정과는 달리 그는 단순하게 잠들어 있었다.

    게다가 여우가 하인리시온의 얼굴을 감싸듯이 포개진 모습으로.

    그중에서도 특히, 여우의 뒷발이 하인리시온의 입술 위에 올라가 있었다.

    하인리시온은 분명 불편할 텐데도 전혀 느끼지 못하는 듯 편한 얼굴이었다. 최근 들어 작은 인기척에도 예민하게 깨던 그로서는 굉장히 낯선 모습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노집사는 눈앞의 모습이 어쩐지 눈에 익다는 기분이 들었다.

    ‘아주 오래전에 이런 모습을 본 적 있는 것 같은데.’

    생각이 났다. 노집사의 눈가에 즐거운 주름이 잡히며 만면에 흐뭇한 미소가 걸렸다.

    ‘대공 전하께서 아직 소공자이실 때 황녀 전하와 낮잠을 주무시던 모습과 닮았구나.’

    아직도 선명하게 떠오르는 그날과 두 사람…… 한 사람과 여우 한 마리가 곤히 잠든 모습이 겹쳐졌다.

    15년 전, 어린 황녀 에리스텔라가 대공저에 방문한 날이었다. 황녀와 소공자의 시중을 들던 고용인이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는 달려왔었다.

    “황녀 전하와 소공자께서 또 사라지셨습니다!”

    “또?”

    “네. 또요! 여기는 황궁이 아니라 대공저인데요!”

    “그런 걸 따지다니 네가 아직 두 분을 모시는 데 익숙해지지 않았나 보구나.”

    “네……?”

    “그래. 이번에는 어디 가셨으려나.”

    자주 일어나는 일이라 노집사는 크게 놀라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느긋하게 굴 수도 없는 일이지만.

    만에 하나의 경우라도 두 사람에게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기에 노집사와 고용인들, 그리고 황녀를 모시고 온 황궁 기사들은 에리스텔라와 하인리시온을 찾아 대공저 전체를 샅샅이 뒤지고 다녔다.

    그리고 두 사람이 발견된 곳은…… 대공저 후원이었다. 깊숙한 곳에 수풀이 우거져 있어 쉽게 찾기 어려운 곳이었다. 게다가 햇빛을 완벽히 차단해 그늘이 지고 시원해서 숨어 있기 딱 좋은 자리였다.

    “허허. 이런 곳은 또 어떻게 찾으셨는지.”

    그 수풀 아래에서 에리스텔라와 하인리시온은 손을 꼬옥 붙잡고 잠들어 있었다.

    그때, 에리스텔라가 뒤척이면서 하인리시온의 몸 위로 다리를 올렸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찾아다니느라 화가 났던 마음이 힘을 잃고 사라졌다.

    “두 분을 깨우지 말고 옆에 테이블과 적당한 간식을 준비하거라. 깨어나시면 바로 드실 수 있도록.”

    그날, 에리스텔라와 하인리시온은 해가 조금씩 기울어지고 있을 때쯤에 일어났다. 일어나자마자 노집사의 예상대로 두 사람의 배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꼬르륵 소리를 내었다.

    ‘별거 아닌 걸로 예전 일을 떠올리는 걸 보니 내게 남은 시간이 많지 않나 보구나.’

    노집사는 하인리시온과 여우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결국엔 조용히 방에서 나왔다.

    오랜만에 깊게 잠든 그의 주인의 모습이 너무나 평온해 보여서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때마침, 방에서 나오자마자 반대편에서 오고 있던 로웬이 보였다.

    “전하께 가던 길입니까.”

    “네. 전하께 보고해야 할 건이 있는데 혹시 침실에 계신 건가 해서요.”

    “급한 건이 아니라면 기다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오랜만에 아주 푹 주무시고 계시거든요.”

    “그게 정말입니까?”

    “제가 방금 보고 오는 길입니다. 오늘 급한 일정이 없으면 오전을 비우면 더 좋을 듯합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나저나 다행이네요.”

    대공가에서 일하는 사람 모두의 큰 걱정이었다.

    하인리시온이 아무리 건강하고 강하다고 하더라도 사람은 잠을 자야 했다. 하지만 그는 잠을 자지 않는 게 아니라 못 자는 것이었다.

    그동안 온갖 처방을 다 해 보았지만, 효과가 없었다.

    잠을 자지 못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몸이 급격하게 망가져 가고 있었다. 하인리시온이 멀쩡한 얼굴로 버티고 있어도 그의 최측근들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얼마 전부터는 수면향까지 쓴 것이었는데, 그것마저도 미미한 효과만 있을 뿐 충분한 수면은 아니었다.

    “혹시 여우님 덕분입니까?”

    노집사와 로웬이 나란히 걸으며 말했다.

    “어찌 아셨습니까.”

    “여우님이 나타나신 후부터 전하께서 밝아지신 것 같아서요. 혹시나 했습니다.”

    “아무래도 여우님이 대공 전하께는 특별한 존재인가 봅니다.”

    “그런 듯합니다. 어쩔 수 없네요. 여우님한테 잘해야겠습니다.”

    로웬이 의지를 불태웠다.

    그동안 그는 하인리시온에게 생채기를 내는 여우를 그리 좋게 보지는 않았었다.

    하지만 그를 푹 자게 만들어 주기만 한다면 여우가 무슨 짓을 해도 웃는 얼굴로 모실 수 있었다.

    “하하. 그럼 저도 여우님께 잘해야겠군요.”

    노집사도 덩달아 웃으며 말했다.

    여우가 대공가에서 아주 특별한 존재가 되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

    하인리시온이 느릿하게 눈을 떴다. 눈을 뜨자마자 하얀 솜뭉치가 시야를 가득 채웠다.

    여우는 몸을 조금씩 뒤척거리고 있었다. 어느새 그의 뺨에 닿아 있는 뒷발에 힘을 주더니 하인리시온의 뺨을 세게 쳤다.

    “!”

    반사적으로 얼굴을 뒤로 뺐지만 그래도 뺨이 얼얼했다. 하인리시온은 보지 못했지만, 한쪽 뺨이 살짝 붉어져 있었다.

    ‘설마 일부러 한 거는 아니겠지.’

    실은 여우도 잠에서 깬 거 아닐까. 하인리시온이 의심스럽게 지켜보았지만 아무리 봐도 여우는 쌕쌕거리며 잠에 빠져 있었다.

    ‘하아…… 자면서도 사람을 당황하게 만드네.’

    황당해서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근래는 전혀 예상할 수 없는 상황의 반복이었다. 예전에는 너무 자주 사람을 당혹시켜 피곤하다고 생각했는데… 근 반년간 잊고 있던 감각이었다.

    얼얼한 뺨에 정신이 더욱 개운해졌다.

    그러고 보니 오랜만에 푹 자고 일어나서인지 몸이 한결 가벼운 게 느껴졌다.

    그동안 내내 머리가 지끈거리고 몸이 무거웠다. 반쯤 물에 잠긴 채로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처럼 멍하고 먹먹했다.

    그런데 지금 몸을 일으키지 않아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잠을 자고 있는 내내 여우의 체온이 느껴졌다. 푹신하고 보들보들한 감촉이 몸을 따뜻하게 감싸고 있었다.

    자신의 존재를 확인시켜 주는 그 체온이 무의식 속에서도 안심이 되었다.

    그걸 깨닫고 나니 웃음이 나왔다.

    여우의 모습으로 나타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언제나 예상 밖이기는 했지.’

    그래서 믿을 수 없는 상황 속에서도 금세 적응한 것 같기도 했다.

    게다가 여우의 모습을 하고 있으니…… 에리스텔라는 에리스텔라이지만 이전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마치 어린 시절의 에리스텔라를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때는 하인리시온이 에리스텔라보다 키도 작고 힘도 약해서 매번 휘둘리는 게 일이었는데.

    그러면서도 어린 하인리시온은 굴하지 않고 나중에 자신이 강해져서 에리스텔라도 지켜 주겠다고 약속하고는 했었다.

    “10년이 지나도 내가 너보다 더 강해! 어쩔 수 없지. 불리하다 싶으면 내 뒤로 붙어.”

    물론, 그때마다 에리스텔라는 황당해하며 무시했지만.

    나중에 하인리시온은 놀라운 속도로 강해졌지만, 에리스텔라는 그 모든 걸 초월한 수준이라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었다.

    ‘그러니 내가 한 약속을 지키는 날은 오지 않을 줄 알았는데.’

    어쩌다보니 지금의 에리스텔라, 정확히는 여우를 보호해 주고 있었다.

    하인리시온은 잠든 모습만큼은 천사 같은 여우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이렇게 가만히 보고 있으면 여우의 모습인데도 에리스텔라의 얼굴이 보이는 것 같았다.

    지금은 눈을 감고 있어 보이지 않지만, 여우의 눈동자 역시 고귀한 빛을 띠는 금색이었다.

    사람들은 에리스텔라의 화려한 외모나 기행에 시선을 빼앗겨 오히려 그녀의 눈동자가 어떤 모습을 띠고 있는지 잘 알지 못한다.

    그저 금빛일 뿐이라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아니었다.

    정교하게 세공된 황금 장식처럼 고귀한 빛을 가진 에리스텔라의 눈동자는, 그 누구와도 같지 않았다.

    그 눈을 오래도록 마주하고 있으면 저절로 그녀의 앞에 무릎을 꿇고 싶을 만큼.

    “지금도 괜찮지만.”

    눈을 감고 있어 보이지도 않는 여우의 눈가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낮게 중얼거렸다.

    “역시 금안을 보고 싶어.”

    여우가 아닌 황녀 에리스텔라의 두 눈에 맺힌 아름다운 금빛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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