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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의 여우 황녀님 (32)화 (32/123)
  • 32.

    흑마법의 영향인지 몸이 에리스텔라의 마력을 거부했다.

    그렇다면 자연에서 나는 마력석은?

    어떻게든 확인해야 했다. 근데 문제가…….

    ‘너무 비싸.’

    치명적인 장애물이었다. 지금의 에리스텔라의 처지에서는 하인리시온에게 마력석을 사 달라고 부탁할 수밖에 없었다.

    ‘갚는 것도 없이 빚만 늘어나네.’

    이걸 어떻게 부탁할까. 에리스텔라의 머릿속이 바쁘게 돌아갈 때였다.

    고개를 돌리다 보니 창문 너머로 반달이 눈에 들어왔다.

    ‘벌써 밤이네. 곧 하인리시온이…….’

    어? 오긴 오는 건가?

    에리스텔라의 움직임이 느릿해졌다.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놓쳤다는 걸 깨달았다.

    하인리시온과 오래된 갈등을 풀자마자 쓰러지는 바람에 그 이후에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누지 못했다.

    눈을 떴을 때, 하인리시온의 침실이었기에 계속 있지만…….

    ‘나 오늘 여기서 자도 되겠지?’

    하인리시온도 오겠지? 설마 안 오는 건 아니겠지.

    눈동자를 데구루루 구르고 있으니, 침실 문이 열렸다.

    ‘왔구나!’

    벌떡 일어나 확인해 보니 하인리시온이 문을 열고 들어오고 있었다.

    에리스텔라는 자각하지 못했지만 여우의 꼬리가 신나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것도 매우 빠른 속도로.

    ***

    에리스텔라는 꿈을 꿨다.

    퐁퐁. 솜사탕 구름 위에서 열심히 뛰어놀고 있는데 갑자기 푹—

    한쪽 다리가 아래로 쏙 들어간다.

    어라?

    어, 어어어???

    당황하는 사이에 솜사탕 구름이 여기저기서 폭폭-녹아서 사라지고 있었다.

    안 돼애-!

    어떻게든 솜사탕 구름을 지키려고 발을 크게 벌려서 붙잡아 보지만 더 빠르게 녹아내려 갈 뿐이었다.

    번쩍. 눈이 떠졌다.

    에리스텔라는 가장 먼저 바닥을 확인했다. 혹시 침대 아래에서 떨어져 딱딱한 바닥에 누워 있는 게 아닌가 하고.

    하지만 그녀는 처음 잘 때 그대로 폭신한 침대 위에 있었다.

    ‘악몽이었어…….’

    덕분에 에리스텔라의 잠자리는 무척이나 사나웠다.

    첫날부터 달콤한 꿀잠을 선사했던 침대에서 다시 지내게 되었는데, 처음으로 잠을 제대로 못 잤다.

    아침이 되었을 때, 그녀의 눈이 퀭했다. 그리고 침대에 하인리시온이 없었다.

    ***

    역시나 집무실에 와 보니 하인리시온은 새벽부터 계속 그 자리에 있었다는 듯이 서류를 보고 있었다.

    여우를 보고 가장 먼저 반응한 건 아네사였다.

    “여우님! 오늘도 좋은 아침…… 어? 오늘 여우님의 털이 좀 푸석푸석해 보여요. 눈 밑도 검은 것같고.”

    에리스텔라의 고개가 푹 쳐졌다.

    ‘이게 다 잠을 제대로 못 자서 그래.’

    역시 사람은 잠을 잘 자야 하는 건데. 그건 여우도 다르지 않았어.

    한 번 잠을 설치고 나니 다시 잠드는 게 힘들었다. 결국, 밤새 몇 번이나 깨기를 반복하면서 하인리시온의 불면증이 얼마나 심각한지 더욱 알 것 같았다.

    잠을 못 자니 성격이 까칠하지.

    에리스텔라는 황녀일 때부터 항상 중요하게 생각하는 점이 있었다.

    잘 먹는 것.

    그리고 잘 자는 것.

    마지막으로 잘 노는 것.

    이 세 가지는 기본이자 필수라고 여기며 언제나 충실하게 지켜 오고 있었다.

    그런데 그중에서 잘 자지를 못하다니.

    대단히 큰일이었다.

    안 되겠다. 내가 괴로워서 안 되겠어!

    ‘그래도 신세 지고 있으니까. 잠은 잘 자도록 도와줘야겠지.’

    에리스텔라에게 원래 돌아가는 것 외에 또 다른 목표가 생겼다,

    ‘뭐, 그 김에 마력석을 부탁할 수 있으면 좋고.’

    그거 때문은 절대 아니고! 그냥 겸사겸사 그렇다는 거지.

    ***

    에리스텔라가 하인리시온의 곁에서 지켜본 결과, 그의 생활 습관에도 큰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특히 그중에서도 가장 나쁜 게 바로 저거였다.

    에리스텔라는 하인리시온이 커피를 마시려고 할 때마다 앞발로 쳐 툭 쓰러트렸다.

    커피는 잠에 나빠!

    “갑자기 왜 이래?”

    ‘마시지 마.’

    “다시 한 잔.”

    하지만 다시 준비한 커피를 한 모금 마시기도 전에 에리스텔라는 짤막한 다리를 용맹하게도 휘둘러 커피잔을 넘어트렸다.

    “혹시 커피에 뭐가 들기라도 했나.”

    “그럴 리가 있습니까. 제가 먹어서 증명할 수 있습니다.”

    “그럼 먹어 봐.”

    “전하……!”

    “당장.”

    “제가 먹습니다. 이까짓 거 커피가 뭐라고! 단지 전하께서는 맛이라고는 신경도 안 쓰고 굉장히 쓰고 진한 커피만 마셔서 다른 사람이 먹으면 아주 괴롭다는 것밖에요!”

    로웬이 억울하고 서운하다는 티를 팍팍 내며 커피를 쭉 들이켰다.

    ‘아…… 하인리시온 커피 타입이 그렇게 최악이었어?’

    커피를 한 번에 쭉 들이킨 로웬의 눈가에 눈물이 글썽이는 것을 본 에리스텔라가 안타깝게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그러는 동안 하인리시온이 지켜보는 쪽은 로웬이 아니라 에리스텔라였다.

    뭔가 이유가 있는 거 같은데.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멀쩡하네.”

    하인리시온이 옆에 있는 다른 커피잔에 손을 가져갔을 때였다.

    방금까지는 얌전히 있던 여우가 또다시 발을 날려 커피 잔을 쓰러트렸다.

    “나만 못 마시게 하나 본데.”

    ‘그래. 너 마시지 마!’

    에리스텔라가 눈을 부리부리하게 뜬 채로 외쳤다.

    “왜 그러는 거지?”

    “그러게요. 여우님이 왜 이러는 거죠?”

    하인리시온과 로웬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나란히 갸우뚱 기울어졌다.

    ‘커피는 잠에 나빠.’

    에리스텔라의 미간이 좁아졌다. 잠은 자지도 못하면서 하루에 커피를 대체 몇 잔을 마시는지 모르겠다.

    “마침 잘됐습니다. 안 그래도 전하께서는 커피를 좀 줄이시는 게 좋습니다. 가뜩이나 잠을 못 주무시는데 커피까지 마시는 건 좋지 않으니까요.”

    ‘그래. 바로 그 말이야!’

    로웬이 마침 잘 됐다는 듯이 조언을 가장한 잔소리를 했다.

    “안 마신다고 해서 자는 것도 아닌데.”

    ‘정말 말 안 듣네.’

    에리스텔라가 못마땅한 시선으로 노려봤다. 고집이 아주 쇠심줄이야.

    그때였다.

    “지난번에는 쓰러지기도 하지 않았습니까.”

    “내가 언제.”

    에리스텔라의 눈이 번쩍 뜨였다.

    어라. 지금 이게 무슨 소리지.

    무시무시한 기세로 노려보자 하인리시온이 시선을 피했다.

    “지난번에…….”

    “없어. 그런 적.”

    하인리시온이 단호하게 끊어 냈다. 로웬에게 매서운 눈빛으로 여기서 한마디라도 더 하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경고와 함께.

    로웬은 입을 다물었지만 그렇다고 전후 사정을 알아차리지 못할 에리스텔라가 아니었다.

    하루 종일 에리스텔라의 따가운 시선이 따라다녔다.

    하루 업무를 끝내고 가벼운 차림으로 옷을 갈아입은 하인리시온을 보니 이전과 다른 점들이 보였다.

    ‘살이 좀 빠진 것 같기는 하네.’

    그의 몸을 낱낱이 훑는 듯한 시선이 부담스러워진 하인리시온이 침대에 누웠다.

    이제 그만 관심 끄고 자라는 뜻이었는데, 에리스텔라는 하인리시온이 덮고 있는 이불이 신경 쓰였다.

    하인리시온의 이불은 허리 아래로 흘러내려 있었다.

    ‘추워 보이는데.’

    하인리시온은 추위를 많이 탔다. 그런데 이불을 덮다 만 상태로 자다니.

    추우면 알아서 잘 덮겠지.

    에리스텔라가 돌아누웠다. 그런데 자꾸 등 뒤의 존재가 신경 쓰였다.

    ‘끙-’

    고민에 잠겨 있던 에리스텔라가 결단을 내렸다.

    여우가 폴짝 뛰어올라 하인리시온의 목을 온몸으로 돌돌 감았다.

    아무리 가벼워도 여우의 무게가 고스란히 느껴지자 무시할 수가 없었다. 뜬금없는 여우의 행동에 하인리시온이 고개를 살짝 들어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굉장히 이상하다는 듯 한쪽 눈을 살짝 찡그리며 입을 열었다.

    “뭐야. 암살이야?”

    이런 식으로 숨을 못 쉬게 하려는 꿍꿍이인가. 하인리시온이 낮게 중얼거렸다.

    그 순간, 여우의 무자비한 발톱이 하인리시온을 향했다.

    ‘잘 자라고 감싸 주는 거잖아!’

    결국, 하인리시온의 목에는 여우의 이빨 자국이 남고야 말았다. 여우가 씩씩 거친 숨을 내쉬며 외쳤다.

    단지, 하인리시온을 위해 감싸 안는 게 어색하고 부끄러워서 몸을 날렸을 뿐이다.

    에리스텔라는 민망해서 그대로 몸을 휙 돌렸다. 그리고 슬쩍 하인리시온의 목에서 내려와 그의 머리 위로 옮겨 자리를 잡고서 눈을 감았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하인리시온이 피식, 입꼬리를 올렸다.

    “잘 자.”

    하인리시온도 나란히 눈을 감았다.

    얼마 동안 적막이 흘렀을까. 하인리시온의 숨소리가 규칙적으로 흘러나왔다.

    그러고 나서야 에리스텔라의 눈꺼풀이 살포시 떠졌다.

    ‘잠들었나?’

    하인리시온이 자고 있는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으니 예전 생각이 났다.

    ‘예전에는 이렇게 같이 잔 적도 있었는데.’

    잠시 눈을 떼면 천방지축 사고를 치고 다니는 에리스텔라 때문에 하인리시온이 그녀를 졸졸 쫓아다녔다.

    잠시 낮잠을 잘 때도 하인리시온은 마음을 놓을 수 없다며 에리스텔라의 손을 꼭 붙잡고 잤었다.

    하인리시온과 이렇게 있으니 그때가 떠올라 웃음이 나왔다.

    여전히 따뜻하네.

    어느새 에리스텔라와 하인리시온은 함께 잠이 들었다. 아주 깊고도 편한 잠이었다.

    특히, 하인리시온은 밤새 단 한 번도 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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