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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의 여우 황녀님 (20)화 (20/123)
  • 20.

    ‘알고 있는 것과 직접 확인하는 건 좀…… 아니, 많이 다르네.’

    생각보다 타격이 컸다.

    여우의 귀가 뒤로 처지고 꼬리가 아래로 내려갔다.

    앞발을 뻗어 머리에 장식한 티파니 브로치를 벗기려고 하는데 뭉툭한 발 때문에 잘 안 되었다.

    오늘 괜히 왔나.

    그때, 하인리시온이 다가왔다.

    “왜 이렇게 의기소침해졌어?”

    하인리시온이 여우의 등을 쿡 찌르며 말했다.

    그가 물었지만, 에리스텔라는 지금 하고 싶은 말이 없었다. 지금만큼은 하인리시온을 별로 알은척하고 싶지 않았다.

    이미 망가진 모습을 수없이 보여 준 상태이지만 지금은 너무 초라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에리스텔라는 여전히 고개를 바닥으로 숙인 채 가만히 있으니 하인리시온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녀가 침묵해도 하인리시온은 에리스텔라가 왜 침울해졌는지 알고 있었다.

    이럴까 봐 데려오고 싶지 않았던 거니까.

    “그전이라고 너에게 호의적이었던 적 없잖아.”

    하인리시온은 그래서 일부러 무심하게 에리스텔라를 자극하는 말을 했다.

    역시나 고개를 돌릴 생각도 하지 않던 에리스텔라가 고개를 휙 돌려 하인리시온을 노려봤다.

    ‘나도 알아. 굳이 그런 말로 사람 마음을 후벼 파야겠어?’

    에리스텔라가 하는 말이 하인리시온의 귀에 쏙쏙 박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하인리시온은 오히려 웃음이 살짝 나왔다.

    “뭘 그렇게 신경 써.”

    하인리시온이 툭 내뱉었다.

    그럴수록 에리스텔라의 성난 눈썹이 급격하게 치켜 올라갔다.

    “어차피 원래 모습으로 돌아오기만 하면 다 상관없어지는데. 그때가 되면 제국에서 그 누가 널 상대할 수 있겠어.”

    황녀 에리스텔라의 당당하던 모습이 너무 오래전 일 같았다. 그때의 자신이 너무 보고 싶었다.

    “솔직히 나도 너한테는 상대가 안 돼.”

    ‘……그걸 위로라고 해?’

    에리스텔라의 불만 어린 목소리와는 달리 축 처져 있던 여우의 귀가 바짝 올라가 있었다.

    “사람들 생각 따위 상관없을 만큼 대단한 존재잖아. 아냐?”

    ‘맞지.’

    너무나 당연하지. 에리스텔라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고개를 끄덕였다.

    “잘나고 재수 없는 에리스텔라. 그게 너니까 다른 것들은 무시해.”

    하인리시온은 할 말을 다 했다는 듯 좀 전부터 손에 쥐고 있던 물 잔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거나 마셔.”

    ‘뭐야.’

    그래도 가져온 정성을 봐서 이거는 먹어준다.

    에리스텔라는 잠시 망설이다가 물을 할짝 마셨다.

    ‘어라……? 이 맛은…….’

    에리스텔라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다시 물을 할짝 마셨다.

    찹찹.

    분명했다. 물로 위장하고 있는 투명한 액체는…….

    ‘술이네?’

    에리스텔라는 매우 적극적으로 물 잔에 달려들었다.

    그러고는 하인리시온이 있는 방향을 힐긋 바라봤다.

    ‘위로를 이런 식으로 하다니.’

    뭐. 아주 나쁘지는 않네.

    하인리시온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에리스텔라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어느새 물 잔의 바닥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하얀 여우의 털이 붉게 물든 것 같은 건 기분 탓일 거다.

    ***

    어느 순간부터 연회장 내에 여우가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 연회장 밖으로 나온 에리스텔라는 연회장과 황궁을 잇는 복도에 있었다.

    붉은 카펫 위를 걷고 있는 여우의 뒷모습이 위태로워 보였다.

    휘청거리는 모습에서 어쩐지 술기운이 느껴졌다.

    ‘취하긴 누가 취해. 하나도 안 취했어.’

    에리스텔라는 자신이 똑바로 걷는다고 생각하면서 복도를 걷고 있었다.

    히히힣. 통제 불가능한 웃음소리만으로도 취한 게 한눈에 보였지만 말이다.

    에리스텔라가 향하는 곳은 황녀궁이었다.

    황녀궁은 지금 어떤 모습일까. 내가 있었던 흔적이 남아 있을까.

    아니면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을까.

    ‘여기도 마찬가지구나.’

    황녀궁엔 아무도 없었다.

    이곳에서 일하던 수많은 시녀와 시종들도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남아 있는 것은 황녀궁을 채워놓은 물건들이었다.

    ‘그나마 다행이지. 물건들이라도 그대로 있어서.’

    함부로 건드리기 어려웠을 것이다. 대마법사인 황녀 에리스텔라의 물건들이 전부 평범할 리 없으니까.

    ‘꼭 필요한 것만 챙겨서 나가자.’

    에리스텔라가 황녀궁에서 그녀의 물건을 가지고 나가려고 할 때였다.

    문밖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서둘러 몸을 숨겼다. 이 시간에 이곳에 다가온다는 건 아무래도 수상했다.

    그냥 지나가는 건가.

    아니면 설마 들어오려는 건 아니겠지.

    에리스텔라가 신경을 곤두세운 채 예의주시하고 있는데, 문이 열렸다.

    너 누구냐.

    아주르디 백작이 황녀궁에 잠입했다. 마치 손님처럼 자연스럽게.

    하지만 주인 없이 빈 곳에 들어올 사람은 하나밖에 없었다.

    ‘도둑인 게 당연하잖아.’

    나는 내 방에 온 거니까 사정이 다르지. 에리스텔라는 자신의 방에 들어온 아주르디 백작 부부를 날카로운 시선으로 지켜보았다.

    “어째 스산한 게 께름칙하네요.”

    “어서 챙겨서 나가자고.”

    “그래요.”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며 수상함을 잔뜩 풍기는 아주르디 백작 부부가 뭔가를 찾기 시작했다.

    ‘빈집털이범 같네.’

    침대 밑에서부터 시작해서 벽과 바닥을 조심스럽게 두드리는 모습이 혹시 비밀스러운 공간이 있는지 확인하는 것 같았다.

    ‘내가 은밀하게 숨겨 놓았을 만한 걸 찾는 중인가 본데.’

    에리스텔라는 자신이 황녀이던 시절, 그녀가 물건들을 보관하던 위치들을 하나씩 떠올려 보았다.

    비밀 공간은 몇 군데 있었다.

    ‘하지만 거기엔…….’

    아주르디 백작 부부를 조용히 지켜보는 에리스텔라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대체 뭘 찾는 거지?

    뭐길래 이토록 대범하게 황녀궁에 들어올 생각을 한 건지 궁금한데, 두 사람이 뭔가를 찾으며 대화를 나누는 소리가 들렸다.

    “오늘이 아니면 또 여기까지 들어올 기회를 만들기 어려워. 꼭 찾아가야 해.”

    “그럼요. 분명 여기 어디 있을 거예요.”

    아주르디 백작 부부는 바닥에 엎드리는 것도 마다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물건을 찾아 헤매고 있었다.

    “여기! 빈 공간이 있어요!”

    “안에 물건은? 있어?”

    아주르디 백작이 몸을 날릴 기세로 달려가서 확인했다.

    “잠시만요. 뭔가가 있기는 한데 확인 좀…….”

    열기로 가득하던 두 쌍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차게 식었다.

    두 사람이 잔뜩 기대하며 살폈지만, 빈 공간에 있었던 것은 에리스텔라가 어릴 적 가지고 놀았던 장난감들이었다. 그 안에는 아무런 마력도 들어 있지 않았다.

    허탕이었다.

    “대체 이걸 왜 여기에 보관하는 거야.”

    아주르디 백작 부인이 짜증을 내며 투덜거렸다.

    “일단 다른 곳을 찾아보지. 거기에는 있겠지.”

    “후……. 알겠어요.”

    그 후로, 아주르디 백작 부부는 두 군데의 비밀 공간을 더 찾아냈다.

    하지만 전부 또 허탕이었다. 기대로 들떴다가 실망하기를 여러 번.

    “이미 다 치워 버린 거야 뭐야? 뭐가 이렇게 없어.”

    “안 돼. 무조건 있어야 해요.”

    어느새 아주르디 백작 부부의 얼굴에는 땀이 흐르고 있었다.

    그런데도 포기하지 않고 자신들의 몰골이 어떻게 흐트러지는지 안중에도 없는 채로 집요하게 뭔가를 찾았다.

    그럴수록 에리스텔라의 얼굴이 굳어지면서 눈꼬리가 사납게 올라갔다.

    두 사람이 무엇을 노리는 건지 얼핏 짐작이 갔다.

    도통 찾지 못해 짜증을 내던 아주르디 백작 부인의 떨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이, 이거 같은데요?”

    아주르디 백작 부인이 뭔가를 찾아냈다.

    “확실해? 이번에도 이상한 거…….”

    “아뇨. 그렇지 않아요.”

    “어디 봐.”

    아주르디 백작이 눈에 불을 켜며 달려와 확인했다.

    “어디서 찾았어?”

    “여기 서랍 첫 번째 칸에 있었어요.”

    “…….”

    백작 부인이 가리킨 서랍은 창가 옆에 떡하니 위치하고 있었다.

    “설마 이런 곳에 보관할까 싶기는 했는데, 일단 확인해 보려고 열어 봤더니…….”

    정말로 있었다고.

    아주르디 백작 부인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황녀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아주르디 백작이 황당해하며 중얼거렸다.

    누구든지 가져갈 사람은 가져가라고 보란 듯이 가장 허술한 곳에 가장 중요한 물건이 들어 있었다.

    너무 허술해서 오히려 함정이 아닌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저기 뭐가 있더라?’

    에리스텔라가 사물함을 쳐다보며 기억을 되짚어봤다.

    딱히 기억에 남을 만한 물건을 넣어 둔 거 같지는 않은데.

    “황녀가 머리는 별로라더니. 그 말이 진짠가 보네. 확실해. 이게 맞아.”

    “괜히 어렵게 생각하다가 헛수고할 뻔했어요.”

    “어쨌든 잘됐어. 사람들 눈에 띄기 전에 얼른 돌아가지.”

    아주르디 백작 부부가 물건을 챙기고 돌아섰을 때였다.

    그들의 움직임을 하나도 빠지지 않고 주시하던 에리스텔라는 분명 보았다.

    두 사람이 가지고 가려는 게 무엇인지를.

    얼핏 보면 값비싼 보물들을 잔뜩 갖고 있던 에리스텔라의 물건치고는 평범해 보이는 귀걸이였다.

    하지만 그들의 의도를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에리스텔라의 얼굴이 살얼음처럼 얼어붙었다.

    ‘내 마력을 이용하려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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