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한편, 건국기념일 연회를 여유롭게 즐기던 참석자들이 하나둘씩 감상평을 늘어놓고 있었다.
그들이 마시고 있는 잔 하나까지도 모두 특별한 것들뿐이었다. 당연하다는 듯 값비싼 장식과 진귀한 음식에 대한 칭찬이 이어지고 있었을 때였다.
왠지 모르게 칭찬과 감탄 속에서 허전함이 느껴진다 싶더라니, 그들의 본심이 나오기 시작했다.
“확실히 작년보다는 덜하네요. 기세가 꺾인 듯한 인상이 들어요.”
“그러게요. 아무래도 황녀 전하가 부재해서 그런 거겠지요. 건국기념일마다 황녀 전하께서 그 능력을 자랑하듯이 화려한 볼거리들을 만들어 냈으니까요.”
“이토록 허전하고 평범한 건국기념일이라니. 힘이 빠지기는 하네요.”
“어쩔 수 없죠.”
에리스텔라의 눈매가 뾰족해졌다. 사람들이 나누는 대화 내용이 귀에 거슬렸다.
감히 제국의 건국기념일 연회를 무시하다니.
‘하아…….’
하지만 그들의 말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니었다.
이 넓은 연회장을 마법으로 채우려면 엄청난 양의 마력이 필요했다. 그걸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는 사람은 황녀 에리스텔라가 유일했다.
그렇기에 더욱 상징성이 컸다.
이번에는 그 대신 화려한 샹들리에와 희귀한 조각상, 장식품 등으로 연회장을 채우기는 했지만, 그걸로는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어쩔 수 없는 비교였다.
‘그래도 못마땅한 건 못마땅한 거지.’
제국의 건국기념일에 모두가 감탄하고 동경하기를 바랐다.
초라해 보이는 것은 원치 않았다.
‘역시 내가 없으면 안 된다니까.’
에리스텔라는 새초롬하게 입을 다물었다.
자신의 빈자리를 느끼는 게 아주 나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이대로 끝낼 수는 없지.’
에리스텔라의 마력은 한계가 없었다. 그녀가 마력을 쓰지 못할 때는 운신하지 못할 정도로 체력이 상했을 때뿐이었다.
그리고 그때를 대비해서 특정 마법들을 넣어 놓은 물건들이 있었다.
‘나 잠깐 어디 좀 다녀올게.’
“뭐 하려고?”
‘그냥. 금방 돌아올 거야.’
에리스텔라가 하인리시온의 어깨 위에서 내려와 조용히 움직였다.
멀리 갈 필요도 없었다.
연회장 근처에 발동 마법이 숨겨져 있으니까.
정원에 있는 분수대 뒤에 있는 작은 화단에 숨겨져 있는 꽃 한 송이.
민들레.
그건 에리스텔라가 마력을 모아 만들어 놓은 것이었다. 자연적인 바람이나 다른 사람의 숨결에는 절대로 흔들리지 않지만, 에리스텔라의 숨결이 닿으면 후-날아간다.
“저기 좀 봐요. 저게 뭐예요?”
한 귀부인의 말이 신호가 되어 모두가 한 곳을 바라봤다.
바람도 없는 연회장에서 꽃들이 마치 명령을 받은 것처럼 살랑살랑 일정하게 흔들리며 장관을 만들어 냈다.
“이번에는 저런 광경을 못 볼 줄 알았는데, 역시 제국은 제국이네요.”
“그러게요. 너무 좋네요.”
귀를 쫑긋한 채로 주변의 대화 내용을 듣던 에리스텔라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원래 모습이었다면 지금 이것보다 훨씬 대단한 걸 보여 줬겠지만. 좀 아쉬워도 이 정도면 뭐…… 괜찮지.’
히죽.
사람들의 감탄 어린 말을 들으면서 에리스텔라는 뿌듯하게 웃었다.
드디어 마음에 들었다.
‘어……? 저건 뭐지?’
만족스러워하던 에리스텔라의 시선이 어딘가로 향했다.
“어? 저기 좀 봐요. 저건 또 뭐죠?”
“어머. 대단하네요. 눈이 멀 거 같아요……!”
다른 사람들 역시 에리스텔라와 같은 곳을 보고 있었다.
마법으로 만들어 낸 밤하늘에 별빛이 모여 어떤 모양을 그리고 있었다.
일정한 간격을 갖춰 마침내 나타난 것은 눈부시게 빛나는 르오니아 제국의 문장이었다.
신비로운 마법이 연회장 내를 압도하고 있었다.
역시나 신음을 흘리듯이 감탄하는 이들이 하나둘씩 나왔다.
“세상에 올해는 별 기대가 없었는데 오히려 그 어느 때보다도 대단한데요…….”
“오늘 이 순간을 절대 잊지 못할 거예요.”
사람들은 아직도 밤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더 그 광경을 눈에 담고 싶어서. 여운을 조금만 더 느끼고 싶어서였다.
‘하지만 저건 내가 한 게 아니야.’
저 정도로 광활한 범위를 아우르는 마법은 지금의 에리스텔라로서는 무리였다. 방대한 마력은 물론이고 세심한 조절 능력이 필요했다.
황녀 에리스텔라에게는 간단한 일이지만, 그녀는 지금 여우였다.
게다가 에리스텔라가 마법을 발동시키자마자 나타난 걸 보면 그전에 마법을 걸어둔 것 같았다.
‘그걸 전부 할 수 있는 사람은 여기서 한 명뿐이잖아.’
에리스텔라의 고개가 빠르게 돌아갔다.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에리스텔라를 제외하면 남은 사람은.
‘하인리시온.’
그가 유일하니까.
에리스텔라가 돌아봤을 때는 이미 하인리시온의 시선도 그녀를 향해 있었다.
처음부터 밤하늘에는 시선 한 번 안 주고 에리스텔라만 보고 있었던 것 같았다.
‘네가 한 거지?’
“…….”
‘왜……?’
에리스텔라가 묻고 있는 게 뭔지 알면서도 하인리시온은 그저 묵묵히 바라보기만 했다.
“…….”
그 순간 에리스텔라는 이상한 기분에 휩싸였다.
지금 자신이 여우가 아니라 황녀의 모습인 것 같은 기분.
지난 몇 년 동안 그와 이렇게 나란히 마주 본 적 없었다. 서로를 보는 것 같아도 언제나 시선이 어긋나 있었다.
그리고 여우가 된 후에는 그와 몇 번이나 서로를 바라보고는 했는데.
하인리시온의 눈빛이 여우를 바라보던 것과는 달랐다.
결국, 먼저 시선을 피한 건 에리스텔라였다.
‘지금 이게 중요한 게 아니지.’
도망치는 게 아니라 해야 할 일이 많아서 어쩔 수 없이 돌아선 것처럼.
에리스텔라는 열심히 달렸다.
오늘 최대한 많은 것들을 해야 했다.
에리스텔라는 머릿속에서 아른거리는 하인리시온을 떨쳐내고 다음 일에 집중했다.
에리스텔라는 연회 참석자들의 면면을 살폈다.
오늘 아주르디 백작 부부는 생각보다 눈에 띄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계획만큼 건질만 한 게 없었다.
‘내가 예민했던 걸까.’
오늘 당장 수상한 점을 발견할 수 있을 거라 기대한 건 아니었지만 조금 더 여유를 가져야 할 듯싶었다.
에리스텔라가 시선을 돌려 다른 곳을 바라봤다.
사실 그녀는 약간의 기대를 품고 있었다.
혹시 자신을 도와줄 사람이 있지 않을까 싶어서.
이곳에는 황녀 에리스텔라와 연관된 사람들이 많이 있으니까.
그중에는 그녀의 시녀들도 있었다. 대부분 고위 귀족들의 자녀들로 구성된 황녀 에리스텔라의 시녀들은 여러모로 이해관계가 얽혀 있으니 한 명쯤은 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작은 기대가 무너지는 데에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에리스텔라는 자신의 시녀였던 레이디들이 어떻게 지내는지는 한눈에 알 수 있었다. 그들은 매우 잘 지내고 있었다.
그중 사교계의 중심에서 한껏 주목을 받고 있는 레이디는 에리스텔라도 아는 얼굴이었다.
에리스텔라의 시녀였던 라테른 후작가의 그레타 영애였다.
과거에는 명문 중의 명문인 가문이었던 라테른 후작가는 최근 몇 십 년 사이에 가문이 점차 기울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레타 라테른은 언제나 자신이 돋보이기를 바랐다. 에리스텔라의 시녀로 자원한 것 역시 그 때문이었다.
황녀의 시녀로서 사교계에서 우월한 지위를 누리게 되었지만, 에리스텔라의 그늘 아래 있는 건 여전했다.
“이번에 라테른 후작가에서 서부 개발을 성공했다면서요? 저희 부군께서 무척 궁금해하시더라고요.”
“사실 저도 서부 개발에 흥미가 있어요. 아버지께서 후작님과 함께 다 같이 식사를 하고 싶다고 하시더라고요. 부탁 좀 드릴게요.”
“걱정 말아요. 제가 잘 말씀드려 볼게요.”
그레타 영애의 말에 주변에 있는 이들이 서둘러 그녀의 호감을 얻기 위해 한 마디씩 보탰다.
지금은 누가 뭐라 해도 그레타 영애가 모두의 중심에서 가장 빛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드디어 원하는 바를 이뤘구나 싶었다.
웃음이 나왔다.
확실히 이곳에서 에리스텔라 황녀의 흔적은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 사실을 깨닫고 나니 처음에는 신경 쓰지 않았던 변화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황제의 바로 아래. 그곳에는 언제나 황녀 에리스텔라의 자리가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그곳에 의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연회 때마다 에리스텔라가 신경 써서 장식하던 꽃도 없었다.
‘그래도 꽃 정도는 원래대로 해 주지.’
별것도 아닌 일 때문에 눈물이 찔끔 나올 것 같았다.
물론, 에리스텔라는 자신이 세상의 중심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누구도 황녀를 기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렇게 깨닫게 될 줄은 몰랐다.
황녀 에리스텔라는 완전히 죽은 사람으로 인식되었다.
에리스텔라가 실종되었던 6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그녀의 빈자리는 완벽하게 다른 것들로 채워지고 메꿔져 있었다.
마치 황녀가 없어지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
허탈함을 드러내고 싶지 않아서 애써 표정을 갈무리하지만, 아래턱에 힘이 들어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괜찮은 척하지만 사실 괜찮지 않았다.
정확히는 괜찮지 못했다.
이미 알고 있었다. 모두가 나를 싫어한다는 것을. 그러니 자신이 사라져도 그리워해 주는 사람은 없을 거라는 사실쯤은.
하지만 이 정도였구나.
내가 사라지자마자 내 모든 흔적을 짓밟고 더럽히고 뭉개버리고 싶을 정도로.
‘근데 지금 왜 이렇게 심장이 따끔거리는 것 같지.’
이상하다. 지금까지 한 번도 이런 적 없었는데.
한동안 아델라시아 대공가에서 여러 사람들의 애정을 받으며 지내서 그런가.
맷집이 이렇게 빨리 약해지는 거였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