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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의 여우 황녀님 (9)화 (9/123)
  • 09.

    “저를 좋아하는 게 거슬리십니까. 그래도 너무 뭐라 하지 마세요. 동물은 좋은 사람을 알아본다지 않습니까.”

    자신을 시기한다고 황당한 착각에 빠진 패트릭이 잘난 체를 하며 너스레를 떨었지만 하인리시온의 귀에는 제대로 들어오지도 않았다.

    ‘무슨 생각으로 거기서 그러고 있는 거야?’

    그저 에리스텔라의 행동을 황당하게 바라보며 눈빛으로 묻는데,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패트릭의 품 안에서 놀았다.

    에리스텔라를 바라보던 하인리시온에게서 사나운 기세가 흘러나올 때였다. 당장이라도 일어나 에리스텔라를 끌어낼 듯싶은 순간, 그의 눈매가 갑자기 가느스름해졌다.

    ‘너……?’

    가만 보니, 여우가 패트릭에게 마냥 친한 척 구는 게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장난을 치는 척 뭔가를 그의 몸에 묻히는 것 같았다.

    그 모습을 예의주시하며 지켜보는데 순간 에리스텔라와 눈이 마주쳤다.

    ‘나 한번 믿어 봐.’

    꼭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하긴 다른 건 몰라도 상대의 허점을 찌르고 골탕을 먹이는 건 천부적이니까.

    일단은 좀 두고 볼까 생각할 때였다.

    ‘얌전히 구경하고 있으라고. 이게 다 너한테도 좋은 일이니까. 히히.’

    여우는 장난을 치는 척하면서 폴짝 뛰어 패트릭의 목 뒤에 뭔가를 은밀하게 붙였다.

    여우를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우월감에 취해 기뻐하고 있는 패트릭을 상대하는 건 생각보다 쉬웠다.

    ‘아무 짓도 안 하면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야. 물론 하지 말아야 할 짓을 하면…… 즉각적으로 반응이 일어나겠지만.’

    하지만 분명 돌아가고 나면 패트릭은 레이튼에게 화풀이를 하겠지.

    더 기다릴 것도 없이 그 순간 마법은 효력을 나타낼 것이다.

    그 정도면 충분하다. 아무리 하벨링 후작가가 기사 가문이기에 마법에 관해서는 잘 모른다고는 하지만, 명백한 증거를 눈앞에 두고 못 알아볼 정도는 아니니까.

    현재 하벨링 후작가의 실질적인 결정권자는 노마님으로 통하는 소피아 하벨링이었다.

    그녀는 꼬장꼬장하고 애정 표현에도 인색해 유일한 손자인 레이튼에게도 대단한 관심은 없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래서 패트릭이 더 제멋대로 구는 것이기도 했다.

    ‘그래도 레이튼을 괴롭혔다는 걸 알게 되면 가만있을 사람은 아니야.’

    소피아 하벨링은 분명 크게 분노할 것이다.

    여우는 한참을 패트릭에게 안겨 이리저리 움직이며 놀더니 갑자기 팩하고 돌아섰다.

    “갑자기 어디 가?”

    패트릭이 불렀지만, 볼일을 끝낸 에리스텔라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그대로 하인리시온의 품에 쏙 들어갔다.

    “제멋대로 굴기는! 여우가 아직 버릇이 들지 않은 모양입니다.”

    패트릭은 마치 여우에게 농락이라도 당한 것 같아 참지 못하고 불쾌함을 드러냈지만, 에리스텔라는 오히려 코웃음을 쳤다.

    ‘흥!’

    물어뜯어 버리고 싶은 걸 애써 참았더니, 이빨이 근질근질했다. 그녀가 앙증맞은 송곳니를 갈 때였다.

    손가락 하나가 쑥 들어왔다.

    “입 벌려.”

    일단은 하인리시온에게 맞춰 줘야 하는 상황이기에 얌전히 입을 벌렸다.

    그러자 입안에 쏘옥 뭔가가 들어왔다.

    아사삭.

    바삭한 쿠키였다. 이걸로 대신 씹으라는 건가.

    그럼 사양하지 않고.

    에리스텔라가 열심히 와그작와그작 쿠키를 열심히 씹었다.

    “흘리지 말고.”

    하인리시온이 여우의 주둥이에 묻은 부스러기들을 털어 내며 피식 입꼬리를 올렸다.

    물론, 그녀의 입에 재차 쿠키를 넣어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하! 저희는 이만 가 보도록 하죠. 레이튼 일어나거라!”

    하인리시온과 여우의 태평한 모습에 부들부들 떨던 패트릭이 불쾌함을 드러내며 벌떡 일어났다.

    결국, 문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다. 하지만 하인리시온은 일단 에리스텔라의 꿍꿍이를 믿어 보기로 했다.

    “그러겠습니까. 조심히 가세요.”

    하인리시온이 미련 없이 인사하자 패트릭의 얼굴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패트릭은 이대로 갈 수는 없어 마지막으로 레이튼을 인질로 삼아 경고를 날렸다.

    “부디 더 이상 대공 전하께서 월권을 행사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다음에 한 번 더 이런 일이 생길 경우에는 제가 찾아가는 곳이 대공저가 아니라 황궁이 될 겁니다.”

    “…….”

    하인리시온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자신이 하인리시온을 몰아세웠다는 방증이었다. 우월감을 느낀 패트릭이 기세등등하게 돌아섰다.

    그리고는 휙 하니 나가 버렸다.

    “……저 갈게요. 안녕히 계세요.”

    레이튼이 눈치를 보다가 위축된 모습으로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패트릭을 따라가려고 할 때였다.

    툭툭.

    에리스텔라가 앞발로 레이튼의 다리를 건드렸다.

    ‘꼬맹아. 여기 좀 봐 봐.’

    다리를 건드리는 감각에 레이튼은 걸음을 멈추고 돌아봤다. 하얀 여우가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나?”

    레이튼이 어리둥절해하며 묻자 에리스텔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너. 너 이리 고개 좀 숙여 봐.’

    레이튼은 여우에게 명령을 받는 기묘한 느낌이 들었다.

    눈을 동그랗게 뜬 레이튼은 무릎을 굽혀 그녀와 눈을 맞췄다. 에리스텔라가 앞발을 뻗어 레이튼의 손을 꼭 잡았다. 그리고 눈을 지그시 바라보며 말했다.

    ‘에리스텔라 르노 리오나르프 황녀의 이름을 걸고 약속하지. 나중에 어떤 방식으로든 너의 청을 들어주겠다고.’

    여우의 낮은 울음소리를 알아들을 리 없는 레이튼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고민하는 사이.

    에리스텔라가 재빨리 앞발을 뻗어 레이튼의 신발 뒤에 뭔가를 톡 붙였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입꼬리를 늘렸다.

    어차피 레이튼이 알아듣지 못하는 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건 에리스텔라 스스로에게 하는 약속이나 마찬가지니까.

    비록 사정이 있었을지라도, 지난 반년 동안 아이를 잊고 도와주지 못한 것에 대한 에리스텔라 나름의 사과이자 보상이었다.

    그동안 고생이 많았다고. 앞으로는 분명 좋아질 일만 남아 있을 거라고.

    그 순간 레이튼은 신기한 경험을 했다.

    여우의 금안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그를 둘러싼 모든 문제가 해결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유 없이 안도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저택에 들어선 순간부터 단 한 번도 웃지 않던 레이튼의 눈매가 처음으로 휘어졌다.

    ***

    하벨링 후작가의 사람들이 돌아간 후, 에리스텔라의 눈동자가 도망치듯이 먼 허공을 헤맸다.

    조금 전까지는 분명 쿠키도 챙겨 줬으면서 단둘만 남으니 언제 그랬냐는 듯이 하인리시온이 그녀를 빤히 노려보고 있었다.

    ‘그만 좀 쳐다봐. 이러다 구멍 나겠어.’

    에리스텔라가 요리조리 시선을 피하며 꿍얼거렸다. 아직은 찔리는 게 많아 쫓겨나지 않을 명분이 생길 때까지는 안심할 수 없었다.

    에리스텔라가 잽싸게 도망치려던 순간.

    ‘어……?!’

    곧바로 하인리시온에게 목덜미를 붙잡히고 말았다.

    “어딜 내빼려고.”

    하인리시온의 손에 대롱대롱 매달린 에리스텔라는 발버둥을 쳤지만, 그에게서 벗어날 순 없었다.

    여우의 몸은 왜 이렇게 무력한 거야!

    “아웅우우우-!”

    마음만큼은 늑대 못지않은 여우의 서글픈 울음소리가 마지막 반항처럼 울려 퍼졌다.

    그러자 하인리시온이 한 손으로 에리스텔라의 양 볼을 꾹 누르며 단숨에 제압했다.

    이, 이거 놔.

    “좀 전에 패트릭 하벨링에게 무슨 짓을 한 건지 솔직하게 말하면 기회를 줄게.”

    ‘으으. 알았어……!’

    “아까 보니까 그거 눈에 익던데. 설마 그 방에서 가져온 거야?”

    처음에는 뭔지 알 수 없었지만 계속 지켜보다 보니 얼핏 떠오르는 게 있었다.

    그 물건은 어린 시절 하인리시온도 함께 만든 물건이었다.

    하인리시온의 추궁이 이어지는데 그 순간, 에리스텔라의 눈매가 뾰족했다.

    그러고는 갑자기 네 발을 버둥거리며 하인리시온의 가슴을 퍽퍽 쳤다.

    ‘네가 모르니까 내가 나선 거잖아.’

    에리스텔라가 혼신의 힘을 다해 하인리시온을 팡팡 때리면서 몸짓으로 표현했다.

    “아우우! 우우우우!!!”

    여우의 말을 알아들을 수는 없어도 그 물건의 용도를 알고 있는 하인리시온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설마 패트릭 하벨링이…… 레이튼을…….”

    하인리시온의 눈매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상황을 파악한 하인리시온이 당장이라도 후작가로 들이닥칠 기세로 돌아섰을 때였다.

    ‘잠깐만!’

    이번에는 에리스텔라가 하인리시온의 머리카락을 쭈욱 잡아당기며 붙잡았다.

    ‘참아. 일단은 기다려 봐!’

    하인리시온의 흉흉한 시선이 닿았다.

    ‘너도 아까 다 봤지? 여기랑 여기에 내가 뭘 붙였는지.’

    에리스텔라가 서둘러 앞발을 뻗어 하인리시온의 뒷목과 신발을 툭툭 쳤다.

    ‘어차피 이제 레이튼의 손가락 하나 건드리지 못해.’

    “…….”

    ‘그니까 너는 하벨링 후작가에 서신이나 보내!’

    에리스텔라가 앞발을 뻗어 당장 해야 할 일을 하인리시온의 가슴팍에 써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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