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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가의 여우 황녀님 (8)화 (8/123)
  • 08.

    ***

    혼자가 된 에리스텔라는 뭔가를 찾아서 복도를 열심히 달렸다.

    하인리시온에게 정체를 들켰다. 앞으로 이 저택에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게 되었다.

    그러니 혼자가 된 지금 최대한 얻을 수 있는 정보를 얻어 내야 했다. 하지만 그녀가 지금 알고 싶은 정보는 흑마법에 관한 것이 아니었다.

    ‘고작 몇 시간 안에 알아낼 수 있었으면 고민할 필요도 없지.’

    그건 불가능했다. 여우는 현실적으로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을 정확히 알았다.

    그러니 지금 여우에게 필요한 정보는 하인리시온과 협상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그에게 자신이 여우의 모습으로 같이 있을 때, 가치가 있다는 것을 보여 줘야 한다.

    ‘그러니 지금 하인리시온에게 필요한 게 뭐가 있는지를 알아내야 해.’

    쉬지 않고 달리던 에리스텔라의 시야에 옹기종기 모여서 심각한 얼굴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수습 보좌관들이 보였다.

    그중에서 에리스텔라가 노리는 건 처음부터 자신에게 호감을 보이던 아네사였다. 일부러 그녀 쪽으로 가까이 다가가자 역시나 아네사가 에리스텔라를 품에 안았다.

    폴짝. 폭. 여우는 별다른 노력 없이 고용인들이 나누는 대화 내용을 들을 수 있었다.

    “대공 전하께서 왜 참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저는 볼 때마다 불쾌하더라고요.”

    “황녀 전하께서 하신 일까지 대공 전하께 책임을 요구하다니요.”

    눈을 반쯤 감은 채 듣고 있던 에리스텔라의 눈이 번쩍 뜨였다. 응? 이게 무슨 소리야?

    ‘내가 한 짓이라니?’

    하지만 오래 생각하지 않아 고용인들이 말한 상황을 이해했다.

    아하. 무슨 말인지 알겠다. 분명 예전에 에리스텔라는 패트릭 하벨링과 레이튼 공자를 만난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때…….

    ‘내가 없다고 이런 식으로 약을 치네?’

    에리스텔라의 눈빛이 서늘해졌다.

    “황녀 전하께서는 어째서 이유도 없이 사람 다리를 부러트린 건지.”

    고용인의 원망스러운 한탄에 에리스텔라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에리스텔라가 패트릭 하벨링의 다리를 부러트린 건 맞았다.

    ‘하지만 그럴 만했어.’

    시간을 되돌려 그때로 간다고 해도 에리스텔라는 패트릭의 다리를 부러트렸을 것이다.

    아니다. 안 그랬을 수도 있겠다.

    겨우 다리 하나만으로 끝내는 게 아니라 반년은 꼼짝도 못 하게 여기저기 아주 예쁘게 손봐 줬을지도 모르겠다.

    반년 전, 에리스텔라는 레이튼 하벨링의 마력을 확인해 달라는 요청을 받아 만났었다. 그 자리에는 그의 후견인인 패트릭 하벨링도 함께였다.

    대마법사인 에리스텔라는 아이의 불안정한 감정 탓에 흔들리는 마력을 알아보았고, 그 원인이 패트릭이라는 사실을 알아챘다.

    후견인인 패트릭이 레이튼을 학대하고 있었다. 그 사실을 눈치챈 에리스텔라는 그에게 경고를 남겼었다.

    ‘그게 다리였지.’

    바로 프루투 영지로 갔어야 했기에 그녀가 돌아올 때까지 좀 누워서 아무 짓도 하지 말라는 의미였다.

    일을 해결하고 돌아오면 바로 레이튼의 문제를 처리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내가 돌아오지를 못했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대처하느라 그만 잊고 말았다.

    게다가 에리스텔라가 실종되자 오히려 기세등등해서 휘젓고 다니고 있었던 것이다. 얌전히 반성하고 있어도 용서해 주지 않을 텐데, 더욱 날뛰는구나.

    내가 그때 분명 경고했는데,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다 이거지.

    ‘꼼짝 말고 기다려라.’

    에리스텔라가 눈을 빛내며 짧은 다리로 열심히 달리기 시작했다. 저택의 고용인들은 여우가 복도를 뛰어다니는 것을 보면서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덕분에 에리스텔라는 누구의 방해도 없이 목표한 곳까지 갈 수 있었다.

    폴짝. 폴짝.

    그녀가 향한 곳은 지금은 쓰고 있지 않은 방이었다.

    ‘여기 어디 있을 텐데.’

    이곳은 아델라시아 대공가에서 에리스텔라가 가장 잘 아는 공간이었다.

    ‘어릴 때 응용 마법을 배우러 대공가에 올 때마다 하인리시온이랑 함께 쓰던 연구실이었지.’

    수업을 받을 때 외에는 이곳에 와서 새로운 마법 아이템을 만드는 연구를 하고는 했었다.

    엉뚱하고 괴랄한 것들이 대부분인 데다가 실제로 사용하기에는 위험하다고 금지당한 아이템들도 있었다.

    ‘그때 처분하라고 한 걸 몰래 숨겨 놨었지.’

    에리스텔라는 그곳에서 지금 이 상황에 딱 알맞은 물건 하나를 열심히 찾았다.

    ***

    패트릭과 레이튼을 만나고 있는 하인리시온은 내색은 하지 않지만 곤란한 상황이었다.

    하인리시온의 이복형은 마법사로서의 재능이 별로 없었다.

    실생활에서 약간의 도움이 되는 정도의 마법 외에는 불가능했기에, 그의 자식부터는 마력이 완전히 사라질 거라고 예상했었다.

    하지만 의외로 그의 아들에게 눈에 띄는 마법적 능력이 나타났다.

    마법사는 곧 국력이었다. 당연하게도 그중에 싹이 보이는 아이들은 특별한 관리를 받았다.

    문제라면 하벨링 후작가는 지금까지 마법사가 단 한 번도 나온 적 없는 정통적인 기사 가문이라는 것. 심지어 부모마저도 세상을 떠나 없다는 점이었다.

    일반적으로 이복형제와는 남보다 못한 관계인 경우가 많은 귀족 중에서 하인리시온은 이복형제와도 사이가 좋은 편이었다.

    그렇기에 하인리시온은 조카인 레이튼을 보호해 주고 싶었다.

    다만, 그의 조카는 엄연히 하벨링 후작가의 사람으로 미래에는 가주가 될 예정이었다.

    그를 위해 도움이 되어 주려고 할 때마다, 레이튼의 후견인인 패트릭이 격렬하게 거부했다.

    “하벨링 후작이 될 몸입니다. 하벨링가에서 키우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아무리 혈연관계라 해도 아델라시아가에서 자꾸만 간섭하시는 것은 차후, 레이튼이 작위를 이었을 때 대공가의 영향 하에 두려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하인리시온이 조금만 나서려고 하면 이런 논리를 펼쳐 왔다.

    이런 오해가 자칫 커지게 될 경우에는, 하인리시온만이 아니라 레이튼에게도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었다. 그가 나중에 가주가 되어 뭔가를 하려고 할 때마다 아델라시아 대공가가 언급되며 의심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패트릭이 감히 하인리시온에게 무례해도 그는 일단 상황을 지켜보았다.

    “그래도 다시 생각해 보는 건 어떤가. 마법은 갖고 싶다고 가질 수 있는 재능이 아니니. 일단 아카데미에 보내 체계적으로 배우면 하벨링 후작가에도 힘이 될 텐데.”

    레이튼은 마법에 재능을 보였다. 그렇다면 적어도 마법 아카데미로 보내야 했다. 그게 후작가에 있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하지만 패트릭은 조금도 물러나지 않았다.

    “마법은 아델라시아가의 재능입니다. 지금껏 하벨링가를 수호해 온 것은 검이었습니다. 하벨링 가문 방식대로 잘할 테니, 더 이상의 월권은 멈춰 주셨으면 합니다.”

    패트릭의 관심사는 오로지 하벨링가의 위신뿐이었다. 레이튼의 재능이나 그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레이튼은…….”

    기사가 될 수 없는 몸이었다.

    레이튼은 마법에 재능을 가진 대신 타고나기를 몸이 약했다. 이복형을 떠올린다면 기사가 되는 것은 무리였다.

    그런데 후견인인 패트릭 하벨링의 강요로 기사 훈련을 받는 레이튼의 몸이 점점 더 안 좋아져 가는 것이 눈에 보였다.

    이대로 더는 지켜볼 수 없어 하인리시온이 레이튼을 마법 아카데미로 보내는 것이 어떻겠냐고 설득하려니, 이토록 격렬하게 항의해 오고 있었다.

    애초에 협의할 생각도 없어 보이니, 하인리시온이 선택할 방법은 두 가지밖에 없었다.

    하벨링 가의 의견을 존중해 물러나거나. 아니면 힘으로 레이튼을 데려와 독단적으로 마법 아카데미로 보내거나.

    로웬은 절대 안 된다며 그를 말리고 있었지만 하인리시온의 마음은 후자로 기울어져 있었다.

    “패트릭 경. 정말 생각을 돌릴 의사가 없는 건가.”

    “생각을 바꿔야 할 사람은 제가 아니라 대공 전하십니다.”

    “곤란하군.”

    하인리시온이 마지막으로 확인을 하려고 할 때였다.

    고용인이 차를 가져오느라 잠시 열어 놓은 문틈 사이로 작은 동물의 모습이 보였다.

    “저건 뭡니까? 웬 여우가…….”

    “……?”

    먼저 여우의 존재를 발견한 건 패트릭이었다.

    갑자기 나온 여우라는 말에 하인리시온의 고개 역시 돌아갔다.

    그곳에는 정말로 순진무구한 얼굴을 한 여우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가증스럽게도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면서.

    하인리시온이 무슨 꿍꿍이냐는 얼굴로 에리스텔라를 바라봤지만.

    ‘지금 내 목표는 네가 아니라 저쪽이거든.’

    에리스텔라는 의기양양하게 하인리시온을 한 번 쳐다보고는 갑자기 방향을 틀어 패트릭을 향해 폴짝 뛰었다.

    “?!”

    하인리시온은 여우가 저토록 수상한 미소를 지을 수 있구나 싶었다.

    너무나 예상 밖의 행동이라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한편, 에리스텔라는 계획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르오니아 제국의 사람들은 대부분이 동물을 사랑하는 사회적 풍토가 있었다. 그래서 동물이 이유 없이 따르지 않는 사람은 인격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편견이 있었다.

    패트릭은 유난히 동물들이 안 따랐다. 그게 이전부터 묘하게 콤플렉스였다.

    그러니 여우가 갑자기 폴짝 뛰어올라 친한 척 굴어도 그는 싫어하기는커녕 즐거워할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것만으로도 그는 사교계에서 평판을 개선할 수 있으니까.

    그래서 에리스텔라는 대범하게 패트릭의 품에 안겨 친근한 척 행동했다.

    “하하. 여우가 저를 무척이나 좋아하네요.”

    패트릭은 대공가의 여우가 주인이 아닌 자신을 따른다는 것을 과시하고자 했다.

    그러면서 여우를 쓰다듬는 손길은 매우 거칠고 불친절해서 에리스텔라는 당장이라도 뿌리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왜 동물들이 피하는지 알겠네.’

    에리스텔라는 패트릭을 힐긋 날카롭게 노려보았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온순한 표정으로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뭐 하는 짓이지.”

    그 모습을 본 하인리시온은 참지 못하고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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