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5화 (75/134)
  • 75화

    “여기에 셀린이란 아이가 있는 것으로 안다. 데려와라.”

    신황청 내부는 오늘 어수선할 수밖에는 없었다.

    황태자가 끌고 온 기사의 숫자는 약 천 명이 넘는다.

    이들을 먹고 마시고 잠들게 하려면 신황청의 모든 견습 사제들이 힘겹게 움직여야만 했다.

    부제마저 잡무에서 벗어날 수 없는 날이다 보니 사제들은 귀찮은 일을 떠안게 될까 싶어 방에 처박혀 나오지 않는다.

    전체적으로 내부 경계가 약화되는 날.

    그렇다고 우트가르드 전역에 병력이 깔린 오늘, 신황청 자체를 지키는 병사들이 열심히 번을 서는 것도 아니었다.

    설마 무슨 일이 일어날까.

    자신들보다 까마득하게 강한 자들이 워낙 우글거리는 날이다 보니 마음이 해이해지는 게 크게 잘못된 것도 아니었다.

    특히 디트리히의 입장에서는.

    “셀린! 얘, 누가 너 찾는다!”

    “누, 누가?”

    “한쪽 눈에 안대를 한 기사님이던데?”

    “아, 안대?”

    “응. 당장 나오래. 엄청 급한 일이라고.”

    오늘은 셀린과 에오스 역시 어쩔 수 없이 청소에 동원되었다.

    레그리아를 직접적으로 모시는 입장이다 보니 힘든 빨래 같은 걸 맡은 건 아니지만, 꼼꼼하게 창틀의 먼지를 닦아내는 정도는 도와야 했다.

    ‘어떡하지. 에오스 님한테 여쭤봐야 하나.’

    에오스는 서쪽 건물을, 셀린은 동쪽 건물을 맡아 멀리 떨어져 있는 상태다. 에오스 님이 계신 곳까지 뛰어갔다가 나가면 늦을 것 같은데.

    고민하던 셀린은 일단 걸레를 앞치마 주머니에 넣었다.

    아침에 레그리아 님이 하신 말씀이 떠올라 괜히 기분이 찜찜하던 차다. 아니겠지만 설마 만에 하나라도 레그리아 님께 무슨 일이 생긴 거라면…….

    “누, 누구세요?”

    주춤거리며 건물 밖으로 나간 셀린은 주변을 휘휘 둘러보았다. 하지만 불렀다던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결국 셀린은 종종걸음으로 좀 더 나아갈 수밖엔 없었다.

    “네가 셀린인가?”

    그때, 건물 옆쪽. 그림자로 살짝 가려진 곳에서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으앗! 네, 네! 마, 맞는데요….”

    검은 머리칼을 지닌 수려한 외양의 사내였다.

    한쪽 눈에 안대를 차고 있는 기사님은 셀린이 보기엔 너무나 멋져서 더 말을 잇기도 힘들 지경이었다.

    저런 분이 왜 굳이 저를 콕 집어서 부른 걸까.

    궁금해하고 있는데, 기사님이 갑자기 가발을 벗었다. 새카만 머리가 사라지자 그 안에 숨겨져 있던 건 비전하와 닮은 붉은 빛깔이었다.

    “누님께서 큰 위험에 처하셨다. 피를 너무 많이 흘리셔서 당장 네 도움이 필요해.”

    “네에에?!”

    “내 이름은 디트리히 로에르멜. 비전하는 내 누님이다. 지금 당장 안내할 테니 따라와라. 촌각을 다투는 상황이다.”

    이게 무슨 소리지?

    눈앞이 핑글핑글 돌아간다.

    셀린은 잘 이해가 되지 않아서 이 상황을 하나씩 쪼개어 다시 생각해 보았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비전하께서 다치셨다고!’

    어떡하면 좋아!

    울적해 보이시던데 설마 큰일이 생긴 건 아니겠지. 아니어야 하는데.

    울상이 된 셀린은 발을 동동 구르며 뒤를 흘긋 돌아보았다.

    역시, 에오스 님께 말씀드릴 걸 그랬다. 그녀보다 훨씬 도움이 될 텐데.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허락 없이 신황청 부지를 나가도 되는 건가?

    물론 비전하께서는 우트가르드 바깥이 아니라 숲에 계시겠지만…….

    “꼭 구하러 와야 해. 알았지?”

    하지만 머뭇거리던 그 순간, 셀린은 이상할 정도로 간곡하던 목소리를 떠올렸다.

    그렇게 잘 말씀하시지 않는 분인데 ‘꼭’이라고 하셨어.

    그건 유능한 에오스 님이 아니라 쓸모없는 제게 해 주신 말씀이었다.

    “가, 갈게요!”

    결국 셀린은 앞치마에 더러워진 손을 닦으며 결의에 찬 대답을 내놓았다.

    “당장 갈게요!”

    죽지 마세요, 비전하…!

    셀린은 디트리히라는 기사님의 뒤를 따라붙었다. 혹시라도 맹수를 만날까 봐 두렵지만, 그보다는 비전하께서 큰일을 당하시는 게 더 두려우니까.

    “어…?”

    그런데 몇 걸음이나 걸었을까.

    신황청 건물이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쯤, 셀린은 제 뒤통수를 내리치는 손길에 눈을 크게 떴다.

    “우선 하나는 해결됐군.”

    삽시간에 기절한 셀린을 들쳐 멘 디트리히가 어두운 숲속을 바라보며 눈가를 좁혔다.

    오늘 그가 맡은 역할은 한 가지.

    셀린이라는 말을 더듬는 견습 신관을 신황청에서 빼돌릴 것.

    맹수에게 물려 죽은 것처럼 흔적을 꾸며 놓기 위해 돼지 피도 따로 가져왔다.

    ‘형님이 걱정될 뿐.’

    셀린을 데리고 마차를 숨겨둔 곳으로 향한 디트리히는 작달막한 여자의 위로 값비싼 모피 코트를 덮어 신관 옷을 감추었다.

    그런 다음 주머니에서 값비싼 사파이어 목걸이를 꺼내 셀린의 목에 채웠다.

    마치 셀린이 그의 정부인 것처럼.

    손가락에 반지도 일곱 개 정도 끼워놓으니 견습 신관인지, 정부인지 얼핏 구분이 가지 않기는 하였다.

    기절하여 고개를 숙이고 있으니 더욱더.

    ‘부디 이 모든 희생에 가치가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형님.’

    여물을 잘 먹여둔 말이 힘차게 내달린다.

    신성 기사들이 진을 치고 있다고는 하지만 빠져나갈 길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애초에 표드르가 신성 기사들을 관리, 감독하는 것도 이유였지만 그보다는 요 몇 달간 디트리히의 행보도 한몫했다.

    봄부터 그는 ‘정부를 두는 것에 푹 빠진 로에르멜의 아들’이란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 왔다.

    사람이 갑자기 변하는 일이야 왕왕 있는 것이므로 처음엔 놀라워하거나 질색하던 동료 기사들도 이제는 어느 정도 그러려니 하고 있었다.

    신황청이 궁금하다고 떼를 쓴 귀여운 정부를 몰래 데려왔다가 다시 나가는 것도 있을 법한 일이지.

    레그리아는 그의 누님인 비트리체도 아닌데 탈출시키기 위해 이토록 노력하는 건… 오직 표드르 때문이었다.

    이 일에라도 매달리지 않으면 표드르가 지금 당장이라도 어느 폭포에 뛰어들어 자진할 것만 같아서. 그렇게 위태로워서.

    누님도 잃었는데 친형처럼 생각한 사람까지 허무하게 잃을 수는 없어서… 그래서였다.

    서둘러 떠나는 디트리히의 뒤로 긴 그림자가 늘어졌다.

    오후 3시 경이었다.

    * * *

    셀린이 디트리히와 함께 우트가르드를 빠져나가고 있던 시점.

    표드르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자신이 나서야 할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포로를 잡았습니다. 두 번째입니다.”

    “처형하라.”

    “예.”

    거대한 검을 바닥에 꽂아 넣은 채 표드르는 흔들림 없이 서서 신성 기사들을 관리했다.

    오늘 그가 맡은 임무는 우트가르드 경계를 지키는 것.

    초원인은 그 누구도 빠져나가지 못한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것이 황명이므로.

    그러니 표드르는 초원인 포로를 처형하는 것에 있어 큰 감정을 소모하지 않는 편이었다.

    기사는 명령을 따라야 한다. 기사는 주군을 거역해서는 안 된다. 기사는…….

    ‘약자를 지켜야 한다.’

    비릿한 피 내음이 후각을 자극한다.

    그는 서서히, 그 누구도 모르게 몸속의 기혈을 스스로 망가트리기 시작했다.

    신성 기사쯤 되면 제 육체 하나만큼은 누구보다도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말이, 스스로 마귀가 될 수도 있다는 거라는 건 누구도 모를 테지.

    오늘 비트리체를 탈출시키기 위해 필요한 제물은 단 하나. 그 자신이다. 이것 외에는 괴물 같은 황태자의 시선을 끌고 막아설 길이 존재하지 않았다.

    ‘어떻게 이 숲을 빠져나간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그의 몫을 하면 된다.

    비트리체는 늘 영리하고 똑똑하며 언제나 그를 놀라게 하는 면이 있었으니.

    일부러 신성 기사들의 능력치를 계산하여 절묘하게 배치해 포위망이 약한 곳을 만들어 두기는 했다. 한 네 군데쯤.

    강자들을 한 곳에 몰고, 비교적 약한 이들을 묶어 다른 쪽으로 배치해 두었으니 어떻게 잘하면 빠져나갈 수 있을지도.

    ‘비트리체라고, 부르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이제는 그 화려하던 꾸밈새가 수수하게 바뀌었고, 언제나 여유롭고 장난기 넘치던 모습이 차분하고 고요하게 변하였음을 아는데도.

    레그리아의 안에 비트리체가 없다는 걸 모르지 않는데.

    그래도 이 멍청한 미련을 끊을 수 없는 건 은혜를 갚지 못하고 보냈다는 부채감 때문이리라. 한마디 상의도 없이 사라져 죽은 탓에 그녀가 떠났음을 믿을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겠지.

    표드르는 마음에 구멍이 뚫린 듯한 기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연회에서 레그리아를 마주칠 때마다 가슴이 울렁거리고 목덜미가 뜨끈해지는 것도 이유 중 하나다.

    그는 비트리체와 결혼을 할 몸이었다. 레그리아에게 이런 반응을 보여선 안 되는 것인데.

    어째서 지금도 당장 그녀를 끌어안고 이 마음을 속삭이고 그 몸에 새겨 넣고 싶은 건지.

    오후 4시경.

    노을이 지기까지 약 2시간 전.

    표드르는 폐인이 되는 것마저 각오하며 이 모든 번뇌에서 벗어나기를 기도했다.

    차라리 마귀가 되리라.

    맨정신으로 이 모든 걸 견디기에는 너무 괴로웠으므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