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 * *
“헉, 헉…!”
“으아악!”
수풀 사이로 처절한 비명이 울린다. 끔찍한 단말마와 피 냄새가 마구 뒤엉켜 늘 고요하던 숲속을 뒤흔들었다.
저런 야만성은 벨리그레엄에 살게 된 뒤로 자주 본 것이라지만 오늘은 유독 날 것 그 자체였다.
거센 말발굽 소리가 절뚝이며 뛰는 포로를 뒤쫓는다. 맹수에게 짓밟혀 어깨를 물어뜯기는 초원인을 향해 벨리그레엄의 기사들은 미친 듯이 포효했다.
“더 뛰어야지! 멍청하게 그걸 잡히냐!”
“그때처럼 해 보라고!”
“너희 때문에 내 조카가 죽었다! 짐승 같은 네 놈들이 감히!!!”
“죽어! 죽어 버려!!!”
악의를 품은 화살이 허공을 긋는다.
말에 탄 채 포로의 다리를 쏘아 맞히는 것엔 광기마저 어려 있었다.
누구도 말릴 수 없고, 누구도 말려서는 안 될 듯한 집단 광기.
라히크와 함께 말을 탄 채 달리며 그 모든 장면들을 지켜본 레그리아는 차마 무어라 할 말을 찾지 못한 상태였다.
새카맣게 탄 증오가 곳곳에 도사린다. 저 깊은 증오와 복수에 감히 누가 말을 얹을까.
검투 시합이라는 허울 좋은 이름을 붙여 놓은 인간 사냥.
역겹다는 생각은 여전했지만… 황실에서 이걸 여는 이유는 알 것 같았다.
전쟁을 치르며 분노가 사무쳤을 기사들에게 원망을 쏟아낼 제물을 주는 것이다.
벨리그레엄과 초원 연합국의 전쟁은 참 오래되었다. 일방적으로 벨리그레엄이 초원인을 학살한 게 아니라는 뜻이다.
양쪽의 무력이 비슷하니 양쪽 모두 피해가 컸겠지.
수뇌부인 황가는 잃은 것 하나 없는데 직접 나서서 싸우는 자들의 마음은 저렇게 우그러졌구나.
그리하여 칼날을 서로에게 돌리고 이를 가는구나.
그럴 시간에 합심하여 황가를 치는 쪽이 더… 희생을 늘리지 않을 길일 텐데.
“라히크. 당신은… 혹시 이런 게 즐거워?”
“여기에서 희열을 느끼느냐는 질문인가?”
“응.”
우트가르드의 숲은 지독하게도 넓었기에 두 시간쯤 지나자 포로도, 맹수도. 구경하던 기사들도 어디론가 뿔뿔이 흩어졌다.
하지만 포로들이 달아날 수 있다거나 도망쳤다는 건 아니었다.
이날을 위해 신성 기사들이 숲 경계에 진을 치고 있다고 했다.
누구라도 튀어나오면 바로 죽이는 게 그들의 임무였다.
그러니 얼마 남지 않은 생존자들은 그저 숲속 어딘가에서 숨죽이고 있는 거겠지.
기사들은 맥주를 들이켜며 한숨 돌릴 테고, 맹수들은 1차 포식을 끝냈기에 만족스레 앞발이라도 핥으며 잠시 쉴 것이다.
2차 포식이 시작될 때까지.
아직 비칸은 풀려나지 않았다.
“글쎄. 생각해 본 적 없다.”
“그렇구나.”
“네 생각에 끔찍하다 싶어도 드러내지 말라. 이는 기사들을 위로하는 자리이니.”
라히크의 대꾸는 담담했다.
흥분하지도 않았고 경멸하지도 않는다. 단지 황태자로서 해야 하는 행사이기에 할 뿐이라는 태도다.
그래서 레그리아는 진심으로 의아했다.
이 남자가 뭔가를 느낄 순 있는 걸까.
어떻게 저렇게도 무서울 만큼 호불호가 없을 수 있는 건지.
거세게 달리던 말이 잠시 걸음을 멈추고 호흡을 골랐다. 말에게 물을 먹일 만한 곳을 찾은 라히크는 훌쩍 내리더니 그녀에겐 주의를 주었다.
“내 맹수들은 말은 공격하지 않도록 훈련받았다. 거기서 내리지 마라.”
“…응.”
굳이 그리 말하지 않아도 내릴 생각은 없었다.
말에 타고 있어야 그가, 곧 풀려나 이 숲을 질주할 비칸이 그녀를 쉽게 찾지.
‘지금쯤 디트리히가 제 몫을 다 해 주고 있을까.’
시간은 이미 꽤 흘렀다.
표드르가 라히크의 눈길을 끌어주기로 한 시간은 저 하늘이 노을이 지는 순간. 그리고 비칸이 그녀를 데리고 도망치는 건 그 직후다.
해가 떠 있을 때도 깜깜한 숲이 어둠으로 완전히 물들면 평범한 인간은 물론이고 신성 기사들까지 모두 시야를 잃는다.
오직 모든 동물과 교감할 수 있는 비칸만이 이 숲을 제집처럼 삼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
그때였다.
길게 자란 풀숲이 바스락거리더니 머지않아 거기서 포로가 튀어나왔다.
한 손에는 피에 젖은 검을 질질 끈 채로.
“호오. 꽤 쓸 만하군.”
“너. 악마!”
“내 짐승을 죽이고 살아남았나?”
“악마!!!”
초원인 포로들은 발만 자유로울 뿐, 두 손은 여전히 묶인 채로 숲에 던져졌다. 저항조차도 조롱거리가 될 뿐.
어차피 노을이 질 때쯤이 되면 신성 기사들이 나서서 포로를 찾아내 죽일 것이다. 포로들도 그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벌벌 떨며 숨어 있다가 죽음을 맞이할지, 이를 악물고 버티며 제 눈앞에 보이는 증오스러운 제국민을 하나라도 더 죽일지는 그 자신의 선택이겠지.
“좋군. 포기하지 않는 눈이라.”
“아아아악!!!”
독기만이 남은 포로가 고함을 지르며 라히크에게 달려들었다.
채애앵!
서느런 검날이 서로 비벼지는 소음이 오싹했다. 생과 사. 오직 그것만이 존재하는 단순한 찰나.
레그리아는 라히크의 입가에 맺히는 뒤틀린 미소를 보고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컥……!”
아니나 다를까. 포로가 죽어간다.
두 눈에서 영혼의 빛이 점멸하는 과정만큼은 보고 싶지 않았기에 레그리아는 속으로 천천히 열을 셌다.
열, 아홉, 여덟, 일곱…….
“치워라.”
라히크가 뭔가를 발로 찬다. 그러자 멀지 않은 곳에서 그들을 호위하던 기사들이 나타나 그 ‘뭔가’를 질질 끌고 가는 소리가 이어졌다.
“이제 시간이 됐군. 놈을 풀어라. 독기가 제법 올랐으니 무료하진 않을 터.”
“예, 전하.”
“내 앞으로 몰아오도록.”
라히크의 마지막 명령에 눈을 치뜬 레그리아는 입술을 꾹 깨물어 웃거나 기쁜 기색을 내보이지 않으려 애를 썼다.
잘됐다!
이 계획에서 가장 큰 문제는 비칸이 그녀를 두고 혼자 가 버리는 거였다.
혹은 그녀를 찾지 못하거나.
하지만 라히크 앞에 올 수밖에 없다면 이 계획의 허점이 완벽하게 채워지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
사아아아.
등 뒤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피 냄새를 멀리멀리 밀어냈다. 거기에 섞여 오늘 뿌린 향수의 인조적인 꽃 내음이 함께 퍼져간다.
누군가 죽는 이곳에서 향수를 뿌린 채 드레스를 입고 있다니.
이보다 더 연극 같은 상황도 없을 테지.
“레그리아.”
비칸은 지금 어디쯤 왔을까. 노을은 언제쯤 지지?
높은 나무들 사이에 가려진 태양의 위치를 가늠해보고 있는데 라히크가 돌연 그녀를 불러왔다.
“나는 너를 안을 것이다.”
“……?”
“네가 물은 것에 대한 대답이 되었겠지.”
“무엇에 대한 대답?”
그녀의 의지와 상관없이 마음대로 범하겠다는 통보가 대체 무엇에 대한 답이란 말인가.
도저히 알 수가 없어 의문 어린 눈으로 응시하자 라히크가 쭉 뻗은 눈썹을 스윽 들어 올렸다.
“너를 사랑하느냐 묻지 않았나.”
“…….”
“내일 이후로는 식 준비를 하여야 하니 매일 올 수는 없다. 그래도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시간을 내지.”
그러니까 지금, 이 개소리가 결론이 된 이유가.
‘내가 사랑하느냐는 질문에 대한 답이라고?’
누군가 뒤통수를 후려친 것처럼 얼얼했다. 피가 거꾸로 솟는 것과 동시에 머리가 조여들 듯 아파 온다.
이게 대체 무슨 소리야.
아니, 그 전에. 어떤 뇌를 가지고 있으면 결론이 저렇게 되는 거지?
‘아. 나는 또 라히크를 얕보았구나.’
라히크의 오만함에 치를 떨면서도 언제나 그 이상이 있을 수 있다는 건 상상하지를 못하였다.
레그리아는 팔뚝에 돋은 소름을 쓸어내리며 대꾸하지 않았다. 기가 막혀서 할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차피 라히크의 저 망상은 이뤄지지 않을 것이기도 하고.
허니 생각하지 말자. 분노하지 말자.
‘디트리히. 디트리히를 생각하면서 진정해.’
라히크는 그녀의 반응이 어떻든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말고삐를 쥐었다. 어디로 가는지는 모르겠지만 저 앞쪽에 비칸과 싸우기 좋은 공터라도 있는 모양이지.
“……가루가 또 …할 수 있게 만든다고 하지 않았소!”
무슨 소리지?
“돈을 얼마를 냈는데! 이건 황가가 ……을 하는 거요!”
둘? 셋인가?
누가 말다툼을 하는 것 같기는 하나 잘 들리지 않는다. 몹시 화가 난 어조라는 것만 확실할 뿐.
분노를 토로하는 목소리들은 그들이 이동하던 길목 어귀. 죽은 덩굴로 가려진 곳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황태자에게 따져야 하오!”
어쩐지 중요한 비밀 대화인 것 같아 청각을 곤두세운 레그리아는 그 순간 들려온 고성에 흠칫했다. 동시에 자연스레 라히크에게 시선을 옮긴 그녀는 한 번 더 움찔하고 말았다.
라히크의 낯은, 지금껏 본 적 없는 사나운 기색이었다.
* * *
한편, 신황청.
“컥!”
“아악!”
발목을 묶은 줄이 끊어지자마자 비칸은 자신을 짐승처럼 다룬 기사들의 명치를 걷어찼다.
콰앙!
걸친 갑옷이 우그러질 정도로 파괴력 높은 공격에 기세등등하던 벨리그레엄의 기사들은 볼썽사납게 주저앉아 침을 흘렸다.
사실 별수 없는 노릇이었다.
비칸은 평범한 초원인 포로와는 격이 다르니까.
내내 웅크리고 있던 거대한 덩치를 펴 온몸으로 햇볕을 받아내는 그는 내로라하는 기사들 사이에서도 머리 하나는 더 컸다.
굵은 팔뚝과 근육의 결이 선명한 복근. 압도적인 키.
반년 가까이 학대를 당한 육체이니 상했어야 옳을 텐데도 그의 움직임엔 군더더기 하나 없었다.
“몰아야 한다!”
“따라붙어!”
“창을 사용해라!!!”
몰이꾼 역할을 맡은 기사들이 말을 달리며 비칸을 향해 창끝을 들이댔다.
선 채로 잠시 볕을 음미하던 비칸의 눈꺼풀이 스르르 들어 올려지고, 청회색 눈동자가 드러났다.
그리고 그 순간.
“!!!”
“어, 어디로 갔지?”
“찾아! 찾으란 말이다!!!”
비칸은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인간의 경지를 넘어선 속도였다.
그리고 비칸과 함께 벨리그레엄의 기사들이 모두 숲으로 향한 뒤.
먼 곳에서 기척을 감추고 있던 디트리히가 텅 빈 뜰에 발을 내디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