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9화 (59/134)
  • 59화

    고작 다섯 개의 단어지만 디트리히는 확실하게 알아들었다. 이제 이 몸 안에 비트리체가 없다는 것을.

    그리고 그녀가 신성계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는 것 또한.

    이윽고 표드르 역시 암호 대화에 동참했다.

    ‘짝, 안 된다.’

    짝을 맺으면 안 된다는 뜻이로구나.

    그러면 돌아갈 수 없는 법칙이라도 있나 보지. 레그리아는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이곤 찻잔으로 손을 가져가 일부러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여름, 기회, 돕다. 무엇을.’

    이번에는 진짜로 가슴이 철렁하여 시끄러운 소리를 내고 말았다.

    여름에 기회를 봐서 도와주겠다고 한다. 표드르가.

    그녀가 신성계로 가고 돌아가고 싶어 한다는 것을 명확하게 알아들었을 텐데도 정말 도와주려는 걸까.

    어디까지 믿어도 될까.

    머릿속이 팽팽하게 돌아간다. 이제 그녀는 무엇이든 무턱대고 믿지 않았다.

    “참, 천사를 만나 보고 싶네.”

    레그리아는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으려 안간힘을 쓰며 차분히 입을 열었다.

    “천사를 말입니까?”

    “응. 같은 신성인이잖나.”

    “원하신다면 만나실 수는 있습니다만… 역시 황태자 전하의 윤허가 필요합니다.”

    표드르가 무언가를 써 내려갔다. 음표 하나하나가 오선지를 채울 때마다 레그리아는 아무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신성의 숲. 나가다. 반드시.’

    거기까지 쓴 표드르가 깃펜을 내려놓고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천사가 믿을 만한 자들이긴 하지만 그들이 비전하께 만에 하나 위해를 끼칠 수도 있습니다. 윤허가 떨어지면 제가 동석하겠습니다.”

    “아니, 나는 혼자 만나 보고 싶네. 혼자로도 충분해.”

    표드르는 ‘위험할 테니 같이 신성의 숲을 나가 주겠다’라는 의미다. 하지만 레그리아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 역할은 표드르가 맡을 것이 아니었다.

    저 지하에 갇혀 있는 남자. 지금은 살았을지 죽었을지 모를 제국의 이방인.

    그와 손을 잡고 숲을 빠져나가는 게 훨씬 믿을 수 있었다.

    표드르는 그녀를 배신할 수도 있지만, 초원의 전사는 목숨을 걸고 초원으로 돌아가야 할 테니 신뢰할 수 있다.

    이해관계의 일치만큼이나 안전한 게 또 있을까.

    표드르가 해 주어야 할 건…… 미끼.

    라히크의 시선을 끌어 그녀가 비칸과 빠져나갈 틈을 벌어 주는 역할.

    [미끼. 부탁.]

    그녀가 그려낸 음표의 의미를 보고 표드르는 진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판을 짜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레그리아는 그래도 어떻게든 해 나갔다.

    일부는 이들을 믿는 척하고, 또 일부는 믿지 않으면서.

    [디트리히. 동굴. 이동.]

    마지막 암호는 세 가지 단어로 이뤄져 있었다. 디트리히는 짤막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묵묵히 차를 들었다.

    ‘이걸로 조력을 얻을 수 있게 됐어.’

    레그리아는 양피지를 제 앞에 끌어당겨 놓고 빈 공간 곳곳에 아무 의미 없는 음표를 나열했다. 그러면서 암호를 해독할 규칙이 적혀 있는 부분은 새카만 잉크를 떨어트려 글씨를 덮어 버렸다.

    이러면 이 자리의 셋 외에는 누구도 알아보지 못한다.

    혹 라히크가 이 종이를 의심하여 보더라도 들킬 염려가 없었다.

    곡을 구상하고 있었다고 하면 그만이니까.

    ‘어느 정도 협조를 구해서 다행이야. 물론, 완전히 믿을 수는 없지만.’

    레그리아는 그녀가 신성계로 돌아가겠다고 하면 표드르나 디트리히가 도와줄 거라고 여겼다. 두 사람 다 비트리체를 아주 특별하게 생각한 듯하니 거절하진 않을 거라고 기대했다.

    그녀를 데려나가 또 다른 어딘가에 가두면 가두더라도 라히크 옆에서 황태자비가 되도록 내버려 둘 것 같진 않았다.

    무엇보다 표드르는 비트리체를 사랑하지 않았나.

    아내가 될 사람이었는데 황태자비가 되도록 그냥 두고 보기만 할 성격은 아닌 듯했다.

    그녀가 보기엔 표드르도 결코 순한 편은 아니거든.

    ‘패는 얼추 갖춰졌어. 위험하지만 이 방법뿐이야.’

    모든 걸 이용하고 수를 둬서 그림을 그려내야 한다.

    최종적으로는 라히크 옆에서 달아나는 게 아니다.

    정답은 이 세상에서 달아나야 하는 거였다.

    다시 자신이 살던 곳으로.

    혹은 벨리그레엄이 아닌 다른 나라로.

    아주 힘들고 몹시 어렵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야 하는 일이 있는 법이지 않나.

    ‘그럼 다시금 정리를 해보자.’

    제1번, 표드르가 라히크의 시선을 끈다.

    제2번, 그 틈을 타서 그녀는 초원인 전사를 구해내 숲을 빠져나간다.

    제3번, 숲 경계에 디트리히가 기다리고 있다가 그녀를 몰래 빼돌려 준다.

    제4번, 신성인이 자신의 세계로 돌아간 전설이 존재한다는 동굴에 가 본다. 만약 거기에서도 뾰족한 방법이 없다면…… 남장을 한다.

    키가 작은 편도 아니니 남장을 하면 이럭저럭 이목을 속일 수 있을 것도 같은데.

    그리고 살아갈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다.

    남자로 속이면 아리툼 제국도 그녀를 쉽게 발각해내진 못할 테지.

    ‘정치적인 문제 때문에 초원 연합국으로 갈 수는 없고, 그렇다고 왕국들로 가기도 어려워. 거긴 벨리그레엄과 친밀하니 나를 포장해서 다시 라히크에게 돌려보낼 게 분명해.’

    하지만 그녀 외의 그 많은 신성인들이 전부 다 얌전히 여기서 살아가겠노라 했을 리 없다.

    대외적으로 널리 알려지진 않았더라도 반드시 누군가 한 명쯤은 집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제겐 돌아가고픈 집 같은 건 없지만 일단은 그렇게 믿고 자료 조사라도 열심히 해 보는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 전설의 동굴 어쩌고 하는 것이 진실일 때의 이야기지만.

    * * *

    “왜 그러셨습니까?”

    두 마리 말이 전력으로 내달리며 흙덩이를 파헤쳤다. 귀족을 위한 전용 승마로가 아닌 수도 외곽의 숲을 질주한 두 명의 남자는 누구 하나 할 것 없이 눈에 띄었다.

    디트리히의 물음에 간신히 말을 멈춘 표드르는 고삐를 쥔 손에 힘을 꾹 주었다가 이내 풀어냈다.

    “그러지 않으면 무너질 것 같아 보였다.”

    “거짓 희망은 진실의 절망보다 못한 법입니다. 그 희망이 차후 레그리아 님을 더욱 죽일 겁니다.”

    “하지만… 또 뛰어들면. 또다시 내가 지켜 줄 수도, 잡아 줄 수도 없는 곳에서 혼자 투신했다는 소리가 들려오면!”

    표드르는 목소리를 높이는 법이 없는 사내였다.

    그는 항시 고고하고 단정하다는 평을 들었다.

    그러나 비트리체가 한마디 논의도 없이 자진해서 통로인이 된 다음부터 그에게서는 옛날의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망가졌다.

    그 변화는 어려서부터 표드르와 친하게 지냈었던 디트리히이기에 더더욱 확연히 알 수 있었다.

    “한 번 우리 세계에 온 신성인이 다시 돌아간 경우는 한 번도 없습니다. 단 한 번도.”

    “그랬지.”

    “그 동굴의 전설이라는 것도 말 그대로 허황된 이야기인데…… 저는 걱정스럽습니다.”

    느리게 말을 모는 디트리히의 눈동자에 깊은 죄책감이 어렸다.

    그는 제 누님의 몸을 입은 여인에 대해 떠올렸다.

    생생하게 살아 날뛰는 눈빛이 꼭 어릴 적 비트리체 누님과 닮아 있었다. 그래서 누님의 몸에 깃들었나 싶을 정도로.

    처음에 그는 암호로 된 악보를 보았을 때, 그걸 해석해냄과 동시에 그런 기적은 없다고 대답하려 했다.

    저 좋은 머리를 가지고 왜 이상한 생각만 할까. 자꾸 벗어나려 들지 말고 순응하는 쪽이 더 낫다는 건 굳이 계산해 보지 않아도 알 일인데.

    빌어먹을 운명이라는 것은 발버둥 치는 걸 가장 좋아하기에 저항하는 자를 오랫동안 가지고 논다.

    디트리히는 그런 진리를 어려서부터 깨달았다.

    진정 벗어나고자 한다면 차라리 아무것도 해선 안 된다는 것을.

    “비체를 죽게 둘 수는 없어.”

    “…누님은 선택하셨습니다. 이제 그 몸 어디에도 누님은 없어요.”

    “육신은 여전히 비체의 것이니까. 당장 죽지 않고 살아갈 이유를 만들어 줘야만 해.”

    이것 보라. 평소 유순한 성질이라 정도를 벗어나지 않고 항시 옳은 행동만 하던 사람이 미친 소리나 지껄이게 만들지 않은가.

    달아나려 하면 할수록 모두가 달아나지 못하게 만들 터인데.

    운명은 거멓게 죽은 눈을 한 자는 에둘러가고 살아 날뛰는 자에겐 꼭 시련을 내린다. 그 시련을 이겨낼지 어디 한번 보겠다는 듯이.

    그리고 비트리체 누님도 그도 시련을 맞이하지 않는 쪽을 택했다. 그게 합리적이니까.

    “하아. 그러면 일단… 황태자비가 되는 전날로 결행일을 잡고 신성의 숲에서 빠져나올 수 있게 해야겠군요. 하지만 무슨 수로 황태자의 눈을 돌립니까? 그 수많은 기사들은요?”

    “내게 방법이 있다. 너는 마차만 준비하면 돼. 비트리체가 숲에서 빠져나오거든 곧바로 그녀를 태워 루손 지방으로 향해.”

    “모스그라토 대공령으로.”

    “그래.”

    “제정신이십니까? 모스그라토 대공에게 빚을 지워서 어쩌시려고…!”

    자칫하면 중립파의 주축이 모스그라토 대공파로 넘어가야 할지도 모른다. 그게 아니라 하더라도 알려지는 즉시 황제의 진노를 사게 될 거다.

    이건 충동적으로 결정할 게 아니었다. 가문의 존망이 걸려 있을 정도로 정치적으로 굉장히 중요한 사안인데.

    “황제는 균형을 깨트리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중립파가 모스그라토 쪽으로 넘어갔다는 기색을 내보이면 현 신성인 제도에 반대하는 무리들이 대거 일어나 나라가 혼란스러워질 겁니다.”

    “상관없다. 그걸로 그녀가 살고자 하기만 한다면.”

    “…….”

    지금 당신은 비트리체 누님을 보는 걸까, 아니면 레그리아 님을 보는 걸까.

    어둔 빛으로 내려앉은 보랏빛 눈동자 속에 맺힌 상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디트리히는 긴 숨을 내뱉고는 가장 큰 문제를 지적하기로 했다.

    “다 좋습니다. 그런데 그 숲에서 어떻게 빠져나오게 할 겁니까?”

    신성의 숲.

    거대한 나무의 미로나 다름없는 곳이다.

    바깥에서 신황청으로 들어가는 길이 일직선으로 나 있긴 하지만 당연하게도 도망치는 사람이 그 대로를 이용할 일은 없다.

    그러니 숲속을 헤치고 에둘러 나와야 할 텐데 그 넓은 숲의 어디로 나가서 어떻게 만나란 건지.

    게다가 우트가르트는 숲으로 둘러싸인 지형이다. 까딱해서 방향을 잘못 잡기라도 하면 숲속에서 빙글빙글 돌다가 죽기 딱 좋았다.

    “…확신이 있는 눈이었다.”

    “아까 돕겠다고 하니 레그리아 님이 거절한 것 말씀입니까?”

    “그래. 스스로 알아서 나올 수 있다고 하는 걸 보니 믿어도 되겠지. 문제는 그 뒤야.”

    “레그리아 님은 걷지 못한다고 알려져 있…는데.”

    말을 멈춘 그를 향해 표드르가 조용히 웃었다.

    어딘가 슬프고 아련한 미소 속에 담긴 의미가 너무 많아, 디트리히는 멈칫하며 입을 닫았다.

    “비체에 대해서는 내가 가장 잘 알아. 비체와 가장 닮아 그 몸에 깃든 영혼이라면… 그 또한.”

    “…….”

    “믿도록 하자. 우리는 우리가 할 일을 하면 되는 것이니.”

    그렇게 말하는 표드르는 금세라도 바스러질 것처럼 위태해 보여서, 디트리히는 차마 더는 말릴 수가 없었다.

    한평생 피해 온 운명이 그의 소중한 사람들을 덮치려 노도처럼 밀려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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