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8화 (58/134)
  • 58화

    * * *

    잔뜩 꼬여 버린 관계는 풀어내도 다시 꼬일 따름이다. 가장 좋은 건 단칼에 잘라 버리는 것. 더는 괴롭지 않기 위해 그보다 더 편하고 쉬운 방법이 없지.

    ‘그리고 그게 될 것 같았으면 세상엔 문제라는 게 일어나지 않을 테고.’

    피폐해진 심신 탓에 악몽만 잔뜩 꾸긴 했어도 자고 일어나니 어제보다는 좀 나았다.

    매트리스가 딱딱해서 불편했는데도 잘 잔 걸 보면 피곤하기는 정말 피곤했던 모양이다. 라히크가 나간 것조차 몰랐으니.

    레그리아는 조용히 들어와 그림자처럼 식사를 놓고 사라지는 시녀들의 뒷모습을 보며 손목을 문질렀다.

    지금 제 꼴은 엉망이란 말로도 모자랐다.

    머리칼은 이리저리 뻗쳐 있지를 않나, 목부터 발끝까지 깨물리지 않은 곳이 없었다.

    싫다고 때려도 라히크는 멈추지 않았다. 상처에 손을 넣어 후비라는 소리나 하며 더더욱 달려들었지.

    ‘그 덕에 확실히… 어제의 충격적인 장면이 많이 잊히기는 했어.’

    라히크는 그녀가 평온을 지킬 수 없게 만든다. 그래서 싫었고, 그래서 미웠다.

    그와 몇 마디를 나누다 보면 어느샌가 차분하던 자신은 사라지고 어린애 같은 모습만 남는 것 같아서.

    ‘아, 목이 까끌거려.’

    허벅지 안쪽도 쓸려서 따갑기 그지없다.

    끝까지 하면 안 된다고 으름장을 놓고 약속도 받았지만 그게 그를 얕본 것일 줄이야.

    솔직히 레그리아는 ‘끝까지’ 가지 않고도 할 수 있는 일이 그렇게 많은 줄 꿈에도 몰랐다. 그런, 그런 변태적인 짓거리를 사람들이 하고 산다니.

    레그리아라고 끊임없이 불러오던 나지막한 목소리. 그녀의 허벅지 사이에 끼우고 빠르게 비벼대던…….

    “……그만.”

    목덜미까지 붉어진 레그리아는 일부러 입을 열어 말을 뱉어냈다. 그러지 않고서는 계속해서 이 연기 같은 기억이 머릿속을 차지하고 앉아 사라지지 않을 것 같아서.

    지금은 이런 것보다는 다른 것에 더 집중해야 한다.

    어젯밤의 일은 충격을 완화시키기 위해 라히크를 잠깐 이용한 것뿐이니까.

    ‘나는 내가 왔던 곳으로 돌아가야 해.’

    어차피 동생까지 이곳에 온 이상, 여기는 낙원이 아니었다.

    돌아가자.

    소환하는 방법이 있다면 역으로 돌려보내는 방법 또한 있을 테지.

    레그리아는 그렇게 생각하며 억지로 수프를 떠 입에 넣었다. 전혀 배가 고프지 않았지만, 빵을 찢어 버터까지 발라 야무지게 집어넣으니… 곧장 속이 안 좋아졌다.

    “욱.”

    토할 것 같아.

    식탁보를 거머쥔 채로 잠시간 가늘게 떨던 그녀는 호흡을 내뱉으며 다시 고개를 들었다.

    흐트러진 머리칼 사이로 연녹색 눈동자가 형형하게 빛난다. 여전히 생생하게 살아 있는 눈이었다.

    먹기 싫어도 야채와 고기류를 좀 더 집어 들고 배 속에 영양분을 넣는다. 배를 곯는 시간이 길어지면 몸에서 점점 힘이 빠져나가고 가장 중요한 순간에 결국 움직일 수 없게 될 테니까.

    그렇게 억지로 아침을 먹은 레그리아는 벽면에 붙은 설렁줄을 당겼다.

    “예, 비전하.”

    “편지지와 잉크, 깃펜을 가져오게.”

    “명 받듭니다.”

    라히크는 아침부터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지만 신경 쓸 건 아니다. 오히려 잘됐지.

    시녀가 공손히 가져다준 필기 세트를 확인한 레그리아는 몇 마디를 적당히 휘갈겨 썼다.

    수신인은 표드르 이안 실버레이크와 디트리히 로에르멜.

    둘 중 누가 되었든 상관없다. 지금 황궁에 있는 사람이 그녀를 만나러 와 주기만 하면.

    “이 편지를 라히크에게 즉시 가져가. 어제 일에 대한 충격이 커서 사람을 좀 만나고 싶다고 하게.”

    “알겠습니다. 더 필요하신 사항이 있으십니까?”

    “환복을.”

    “예, 환복을 돕겠습니다.”

    이제 나도 여기 사람이 다 되었구나.

    쓴웃음을 머금으며 레그리아는 지금까지 자신이 얼마나 많이 변했는지를 떠올렸다.

    예전이라면 어깨를 늘어트린 채 고개는 숙였을 것이다. 있는 듯 없는 듯,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는 것처럼.

    그렇게 조용히 있는 게 그녀의 세상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비책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그녀의 그 작은 세상을 지키기 위해선 움직여야 한다.

    치열하게 생각하고 고민하고 수를 둬야만 했다.

    봄이 되면 장미를 심고 여름이 되면 벌레를 잡고, 가을이 되면 마당에 들어온 길고양이에게 밥을 주며 살아가는 삶이 이렇게나 사치스러운 것일 줄이야.

    레그리아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 나타난 화려한 드레스들을 보며 무감히 입꼬리를 올렸다.

    그녀에게 필요한 건 이깟 보석 달린 드레스보다 훨씬 비쌌다. 그러니 더한 값을 치르는 수밖에 없지.

    그리고 오후 세 시.

    아직 태양이 하늘에 걸려 있을 시각.

    표드르와 디트리히가 동시에 그녀를 방문했다.

    * * *

    “찾으셨다 들었습니다.”

    “예비 황태자비 전하를 뵙습니다.”

    접견은 라히크의 침실 옆에 딸린 간이 응접실에서 진행되었다. 애초에 밤늦게 신하를 만날 수 있도록 만들어진 공간인지, 보통의 응접실과 큰 차이 없이 넓다.

    레그리아는 제 앞에서 정중히 고개를 숙여 인사하는 두 남자를 향해 손짓했다.

    “가까이 와서 앉게.”

    이제 그녀는 표드르에게 경어를 쓰지 않는다.

    처음 만났을 적엔 그래야 하는 줄 알았지만, 지금은 아니라는 걸 알기에.

    이 나라에서 황족은 모든 사람의 위에 선다.

    좋든 싫든 그 규칙을 따라야만 했다.

    “몸은… 괜찮으십니까. 호수에 투신하셨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시녀가 차려 주고 나간 찻잔의 김이 식을 때쯤이 되어서야 적막이 깨어졌다. 먼저 입을 연 것은 표드르 쪽이다.

    레그리아는 그의 눈 밑이 움푹 파였음을, 일전에 보았을 때보다 좀 더 말랐음을 알아차렸다.

    보랏빛 두 눈이 우수에 차 있다. 그녀가 자살이라도 하려는 줄 알아서 그런 걸까.

    “투신한 게 아니라 헛디뎌서 빠진 거야. 몸은 괜찮으니 걱정 않아도 돼.”

    “하지만… 하지만 마르셨습니다.”

    누가 누구한테 할 소릴.

    그러나 레그리아는 표드르에게는 날을 세울 수가 없었다.

    이 남자가 주었던 위로가 그녀를 다정해지게 만드니까.

    지젤이 들러붙지 못하게 해주었던 게 진심을 다해 고마워서, 레그리아는 오랜만에 꾸며내지 않은 미소를 내보였다.

    “괜찮아, 정말로. 오늘 둘을 이렇게 부른 건… 결혼 후에 본격적으로 내정을 돌보게 될 텐데 그 전에 친분을 다져 놓기 위해서야.”

    “그렇군요. 일리가 있는 말씀입니다.”

    응접실 내부. 문가에는 호위 기사들이 서 있다. 황태자의 거치이니만큼 삼엄한 경계가 있어 함부로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레그리아는 일상적인 대화를 이어 나가며 아까 편지를 쓰는 척, 다른 내용을 써 둔 종이를 펼쳐 보였다.

    “신성 기사에 대해서 좀 더 궁금하기도 하고. 라히크는 신성 기사이긴 하지만 황태자의 책무가 우선 되니까. 보통의 신성 기사들은 어떠한지 알고 싶네.”

    “명확히 어떤 것이 궁금하신지 모르겠습니다.”

    “예를 들면… 신성 기사들은 단체로 훈련을 갈 때가 있나?”

    종이의 내용을 읽은 디트리히가 움찔했다. 표드르는 제 뒤쪽을 슬쩍 살피며 종이가 보이지 않도록 디저트 그릇을 당겨 감추었다.

    마치 그 위에 놓인 스콘이 먹고 싶었다는 듯 자연스러운 움직임이라 어색한 티가 나지는 않았다.

    “우선… 기존의 신성 기사들은 얼어붙은 호수의 달 후반부터 성 요하네스의 달까지 극한의 전지훈련을 떠납니다. 꽃잔디의 달이 돌아오면 그 해에 새롭게 신성 기사로 임관을 받는 이들과 수도 내에서 훈련을 하지요.”

    “들은 적이 있는 것 같아. 일주일간 아주 추운 곳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던데.”

    조지 경이 해 줬던 이야기와 일치한다. 그러면 표드르는 곧 이곳을 떠난다는 의미겠지.

    그리고 봄이 되어야 돌아온다. 그게 최소 4월.

    표드르의 도움을 얻으려면 그 이후가 되어야 하는구나.

    “신성 기사는 어떤 기후에서든 싸울 수 있도록 준비되어 있습니다.”

    “많이 힘들지는 않나?”

    “어린 기사들은 이따금 힘겨워하기는 합니다만, 이 힘으로 나라를 지킬 수 있으니 영광이지요.”

    대화는 끊기지 않고 물 흐르듯 부드러이 이어졌다.

    입으로 하는 대화도. 또 깃펜으로 오가는 대화도.

    ‘동…굴. 그리고 전설. 있다.’

    디트리히의 깃펜이 그려내는 움직임을 눈으로 따라가던 레그리아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제 깃펜을 들고 ‘데려가 줘’라는 암호문을 만들어냈다.

    그 다음엔 ‘부탁할게.’

    레그리아가 내놓은 종이.

    거기에 적힌 건 벨리그레엄의 알파벳과 대치시켜놓은 음표들이었다.

    디트리히와 비트리체가 둘만의 언어를 창조한 것에서 영감을 받아 그녀는 그녀만의 비밀 언어를 생각해 냈다.

    낮은음자리표 계명은 모음. 높은음자리표 계명은 자음.

    단, 그라베, 아다지오, 안단테. 모데라토 와 알레그로 따위의 템포 표기를 통해 같은 계자리라도 의미가 바뀐다.

    이걸 만든 건 그녀이니 디트리히가 오선지에 그려내는 단어를 쉽게 알아본다지만, 디트리히는 정말 대단했다.

    암호문의 해설도를 본 지 몇 분 만에 규칙을 외우고 적용하다니.

    레그리아는 자신이 제일 먼저 만들어낸 암호문으로 쓸쓸한 시선을 던졌다.

    [비트리체, 죽다. 몸, 돌아가다, 신성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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