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0화 (40/134)
  • 40화

    “아, 그 지젤인가 하는 영애 말입니까?”

    “그 안에 깃든 신성인. 그자가 레그리아의 동생이라더군.”

    “헉, 그렇습니까?”

    본래 라히크가 공작을 방문한 건 이번 파티 때 있었던 일에 대해 추궁하기 위함이었다.

    헌데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일을 알게 되었다.

    공작의 기색을 살피니 이미 알고 있던 사항은 아니고 그 분홍 머리 계집이 하필 그가 도착한 시점에 밝힌 모양인데.

    그리하여 상황이 꽤 공교롭게 변했다.

    미리 알았더라면 공작은 그 사실을 끝까지 숨기고 있다 결정적인 순간에 던졌을 것이다.

    아니면 어떻게 이용을 했던지.

    하지만 그가 미리 알게 됨으로 인해 그럴 수는 없게 되었다.

    “오늘부터 신황청 주변에 경비를 두 배로 늘린다. 팔라디누스에 긴급 명령서를 내려 신성 기사를 숲에 배치해 두라고 해.”

    “알겠습니다.”

    조슈아의 눈빛이 심각해졌다.

    그럴 수밖에 없다.

    자매 신성인은 굉장히 희귀했다. 아예 사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의 결말이 문제다.

    대부분 비극으로 끝나거나 세기의 스캔들을 만들어낸다는 것.

    “파쥬 현상이 생기면 큰일입니다. 절대 서로 만나지 못하게 해야겠군요.”

    “쯧.”

    파쥬 현상이란 신성계에서 서로 자매 사이였던 이들이 각기 다른 몸에 강림하였을 때, 어떤 연유로 인해 서로의 몸이 바뀌게 되는 것을 이른다.

    워낙 사례가 적어 연구 결과도 없었고 당시에 빙의한 몸이 바뀌었던 이들도 어째서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 알지 못했다.

    한마디로 골치가 아프다는 것이다.

    “372년. 아그네스 린우드와 발칸도르 워릭. 그리고 수잔나 윈컴 사이에서 벌어진 파쥬 스캔들. 그게 생각납니다.”

    “그래.”

    아그네스 린우드와 수잔나 윈컴은 각기 신성인이었다. 신성계 내에서는 아그네스 쪽이 언니, 수잔나가 동생 쪽이었다고 한다.

    그 둘이 서로를 자각하게 된 건 파쥬로 인해서 벌어진 일 때문이다.

    “아그네스 린우드는 발칸도르와 결혼하는 걸 끔찍하게 싫어하고 있었는데, 파티에서 수잔나와 만난 뒤 파쥬 현상이 벌어졌습니다.”

    그리고 수잔나는 ‘아그네스’인 척. 아그네스는 ‘수잔나’인 척하고 지냈다.

    그렇게 아그네스는 자신이 견디기 힘들어했던 남자에게서 손쉽게 도망을 친 것이다.

    더 우스운 점은 발칸도르는 그 사실을 결혼하고 3년이 지나 아이까지 가진 뒤에서야 알아차렸다는 거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다시 몸이 바뀌어 제 육신으로 돌아오게 된 아그네스가 실성해 버리는 바람에 모든 전말이 밝혀졌다.

    미쳐서는 끊임없이 ‘다시 수잔나가 되고 싶다’고 중얼거렸던 것이다.

    “하지만… 그 이후로 아그네스 린우드와 수잔나 윈컴 사이에서 파쥬 현상이 다시 일어난 적은 없습니다. 아마 딱 한 번 정도 일어날 수 있고, 어느 정도 시일에 제한이 있는 건 아닐까. 그런 의견이 대세적이었지요.”

    쿠르릉.

    대지마저 뒤흔들 기세로 하늘이 울려댄다. 심각한 이야기를 하기에 딱인 날씨다.

    라히크는 다시 주름이 지기 시작하는 미간을 문지르며 눈을 꾹 눌러 감았다.

    그는 변수를 싫어했다.

    이와 같이 명확한 기준이 없어 통제가 불가능한 변수는 극도로 혐오하는 수준이다.

    모든 것이 그의 손아귀 안에서 제대로 굴러가고 있었건만.

    “일단 그 지젤이란 영애를 비전하의 근처에 붙지 못하게 하는 게 최우선이지 싶습니다. 레스노 후작 부인에게 일러 사교계를 통제하도록 명하시는 게 어떠십니까?”

    “……그게 낫겠지. 따로 자리를 만들어라.”

    “알겠습니다. 닷새 후, 오후 4시경에 휴식 시간이 있으십니다. 이 시간에 레스노 후작 부인을 궁으로 부르겠습니다.”

    조슈아의 말에 라히크는 고개를 까딱였다.

    일주일에 단 한 번 있는 쉬는 시간이 없어졌으나 아쉽거나 하진 않았다.

    지금 당장은 이 문제를 통제할 방도를 찾아내야 했으니.

    가을 숲의 레스노 후작 부인은 현재 사교계 내에서 윗사람에 속하는 이 중 하나였으며 황태자파에 속하는 귀부인 전체를 이끄는 철의 여인이었다.

    그이가 사교계 내에서 조직적으로 움직이며 지젤 로에르멜을 멀리하고 레그리아를 보호한다면 연회가 열리는 긴 시간 내내 둘은 한마디도 나누지 않을 수 있다.

    황태자비로서 연회에 나가는 걸 금지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렇다고 로에르멜 공작가의 영애를 파티에 초대하지 않는 것 또한 말도 되지 않는다.

    주에 평균 15개의 크고 작은 티파티와 연회가 열리는데 그때마다 그가 일일이 따라다니며 경비견처럼 챙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얼마 전, 레스노 후작 부인이 경매에서 낙찰 실패한 목걸이가 있습니다. 해당 목걸이와 세트인 팔찌까지 구입하여 선물하시면 대가는 충분히 될 것입니다.”

    “그러도록.”

    조슈아는 유능하다.

    어떤 인물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어디까지 해주어야 하는지를 모두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니 라히크가 신뢰하며 가까이 곁에 두는 것이다.

    이런 돌발 사태를 제대로 대처할 수 있는 자여야만 차후 궁내부 장관이 되지 않겠는가.

    라히크는 창을 가리고 있는 두꺼운 커튼을 젖혀 끝끝내 빗방울을 흩뿌리고 있는 밖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복잡하던 머릿속이 어느 정도 정리가 된다.

    그런 그를 향해 조슈아가 아주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런데 전하.”

    할 말이 있는 듯한 부름에 라히크는 바깥에서 눈길을 돌려 조슈아를 응시했다. 머뭇거리던 조슈아는 안경을 추켜올리며 말을 이었다.

    “어쩌면 잘된 걸지도 모릅니다. 적절히 통제만 한다면… 저희에게는 두 번째 패가 있는 겁니다.”

    “그 생각을 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헌데 어째서 불쾌해 보이시는지요.”

    불쾌하다라.

    나는 지금 기분이 좋지 못한가?

    조슈아의 물음에 라히크는 멈칫했다.

    듣고 보니 의아한 일이다.

    레그리아는 양순하지 못하다. 부나 권력을 탐하지도 않고 보석 같은 걸 좋아하는 듯 보이지도 않았다.

    어여쁘게 꾸미고 시중받는 일은 더더욱 귀찮아하는 것 같았고 파티에 참석하기 싫다는 티는 또 어찌나 내는지.

    귀엽거나 착 감겨 오는 맛도 없고 사랑스럽게 아양을 떨지도 않는다.

    가장 심한 부분은 황태자비라는 지고한 자리에 대해 아무런 감흥도 없어 보인다는 점이었다.

    그 말은 즉, 결국 그와 맺어진다는 사실 자체에 대해 아무런 감정이 없다는 뜻과 같으니까.

    ‘헌데 어째서.’

    그녀를 대체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대체품이 생겼다는 말이 이토록 좆같은지.

    아직 정복하지 못한 산꼭대기에 깃발을 내리꽂기도 전에 저기 좀 더 고지가 낮은 산이 있으니 거기에 가도 될 거란 말을 들은 것처럼 자존심이 상했다.

    “혹은 반대로 생각하여 보십시오, 전하. 레그리아 님을 마음에 깊이 두고 계신다면… 잃지 않으실 방법이 될지도 모릅니다.”

    조슈아가 담담하게 한마디를 더 꺼내놓았다.

    성마르게 창틀을 두드리던 라히크는 눈썹을 까딱일 뿐, 더 답을 하지 않았다.

    그는 신성인을 마음에 두지 않을 것이라 맹세했다.

    이건 어쩌면 정신 접촉을 한 것 때문에 드는 일시적인 감정일지도 모른다.

    물론 좋아한다거나 사랑한다는 헛소리가 아니다. 그는 그저 그 고집 센 여자를 옆에 두고 싶은 거였다. 무심한 듯 고고한 표정을 깨부수고 제게 스스로 굴복해 오도록 만들고 싶다.

    그래, 그렇게 흥미로운 여자를 일찍이 잃을 수는 없지.

    하지만 아무리 피임을 한들 언젠가는…….

    “마차가 움직이지 않는군.”

    찰나, 라히크는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고개를 들어 올렸다. 완벽한 문관인 조슈아는 어리둥절한 표정이었으나 라히크는 곧바로 행동을 취했다.

    “컥!”

    쾅!!!

    거대한 압력에 의해 마차의 문이 찌그러지며 바깥으로 튕겨져 나갔다. 그러면서 쥐새끼처럼 다가오던 자의 안면을 후려쳤다.

    마차를 벗어남과 동시에 검을 뽑은 라히크는 다가오는 자가 누구인지 확인하기도 전, 본능에 따라 살초를 날렸다.

    어차피 이런 식으로 방문하는 자들 중 반가운 손님은 없다는 걸 그는 여덟 살 나이부터 알았다.

    “전하! 저는 닥치고 소파 밑에 들어가 있겠습니다! 끝나면 꺼내 주십시오!”

    이미 포위되었나.

    혀를 찬 라히크는 저를 향해 소리치며 재빠르게 몸을 숨기는 조슈아에게 턱을 까딱였다.

    ‘적의 숫자는 여섯.’

    아니, 다섯이다.

    방금 한 놈의 목을 깔끔하게 베어 넘겼으니.

    라히크는 바닥을 구르는 수급을 짓밟으며 사납게 웃었다.

    “야만족 놈들이 여기까지 기어들어 왔구나.”

    “비칸. 어디에.”

    “글쎄. 야만족의 이름을 일일이 기억하진 않아서.”

    라히크의 조소에 그를 둘러싼 초원의 전사들이 분노에 차 위협적으로 발을 굴렀다.

    단신으로 다섯이나 되는 전사를 상대해야 하나 라히크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조차 그는 여유로울 따름이다.

    “와라. 너희의 목을 베어 선물로 돌려보내 줄 테니. 가는 길엔 리본이라도 묶어 주마.”

    “악마!”

    대부분의 초원인들은 벨리그레엄어가 서툴렀다. 끽해봐야 단순한 문장 한두 개나 뱉을 수 있을 뿐.

    그런 그들이 태어나서 가장 먼저 배우는 벨리그레엄어는 이것이다.

    악마.

    라히크는 저를 이르는 그 호칭을 기껍게 받아들였다.

    점차 굵어지는 빗줄기 사이에 비릿한 피 냄새가 번져간다.

    “!”

    냉철하게 검을 휘두르던 라히크가 어깨를 늘어트리며 공격을 허락하고 만 것은 여섯 중 셋을 죽였을 때였다.

    “이런, 이런. 거만하게 굴면 그렇게 되는 거야, 형.”

    찰박거리는 물소리를 일부러 내며 다가오는 인영이 경박스러운 말투로 말을 건넸다. 설렁설렁 흔들고 있는 손가락 사이엔 얇고 가벼운 형태의 단도가 통상 네 자루 끼워져 있으나 지금은 셋뿐이었다.

    “아, 난 신경 쓰지 말고 실컷 공격하세요. 죽이면 더 좋고.”

    어둠을 헤치고 나온 에화가 싱긋 웃었다. 그러더니 라히크의 어깨에 박힌 단도를 가리키며 얄미운 한마디를 더했다.

    “참고로 저거, 내가 던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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