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지젤이 빠드득 이를 갈았다.
아주 어린 시절, 언니의 연주를 처음 들었던 바로 그 순간부터 지젤은 깨달았다.
아, 언니가 살아 있는 한 내가 빛을 볼 일은 없겠구나. 긴 평생을 언니의 그림자에 가려진 채로 괴로워하며 살아야겠구나.
그리고 자존심 강한 지젤은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다행스럽게도 엄마는 늙어서 노망이 난 탓인지 뭔지는 몰라도 언니의 연주에 애초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제대로 살폈더라면 진짜 천재는 자신이 아니라 언니였음을 알아보았을 텐데.
그냥 피아노에 국한된 천재가 아니라 하나의 시대를 이끌어 갈 수 있는, 앞으로 100년 뒤. 200년 뒤에도 이름이 남을 세기의 천재.
그게 바로 언니였다.
그리고 지젤은 그런 언니를 망가트렸다.
조금씩, 아주 조금씩. 교묘한 방식으로 눈치채지 못하게.
고립시키고 자존감을 낮추고 잘못된 방식을 주입시키면서.
그렇게 그녀는 제 발아래에 밟혀 꿈틀거리는 언니를 보며 안도를 느껴 왔다.
‘이렇게 두면 내가 들였던 그 수많은 노력이 다 무산될지도 몰라.’
거대한 공포가 목을 졸라 왔다.
지젤은 목숨을 잃는 것보다 그게 더 두려웠다.
아주 어린 그 시절부터 가져왔던 두려움이 현실이 되는 게, 자신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게 되고 언니가 훨씬 높이 날아올라 버리는 게.
그게 너무나 두렵다.
그랬기에 그녀는 곧바로 언니를 탓하기 시작했다.
‘날 아는 체도 해주지 않고 정말 너무해. 언니도 내 연주를 듣고 나인 것을 알아봤을 거면서.’
황태자비인 언니가 그녀를 챙겨 주었더라면 그 많은 관심을 나누어 받았을 것 아닌가.
욕심도 많지.
입을 꾹 다문 체 머릿속을 이리저리 굴리는 동안 공작은 앞에 그녀가 없다는 듯 한가로이 서류를 읽어 내렸다.
한쪽으로 늘어트린 붉은 머리칼. 깊고 어두운 검은 눈동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그 깊이를 가늠할 수가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속이 빤해서 몇 마디 말로 쉽게 쥐고 흔들 수 있었지만 이 사람은 아니었다.
‘불편해.’
빈틈 하나, 약점 한 군데 없는 사람이라 보기만 해도 숨이 턱 막힌다. 찔러서 들어갈 곳 따윈 조금도 없다.
제 효용 가치를 설명하고 설득하지 않으면 어느 날 쓸모 있겠다 싶을 때까지 어디도 나가지 못하게 한 채 구석에 처박아 둘 심산인 게 분명했다.
‘그렇겐 안 돼. 그렇게는…….’
하도 입술의 껍질을 뜯었더니 피 맛이 배어난다.
레그리아 로에르멜이란 여자가 자신이 입게 된 이 몸의 언니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신성인으로서 자신의 언니였기도 하다는 사실은 커다란 패였다.
나중에 언젠가 이 패가 더 귀해질 때쯤에 뒤집으려 했는데 이러다간 완전히 끈이 떨어져 낭패를 볼 것만 같았다.
“…할 말이 있어요.”
“하려무나. 할 말이 있으니 거기 계속 버티고 서 있었던 걸 테지.”
“레그리아 언니요, 제 언니예요.”
“그러니?”
“아니, 제대로 들어줘요. 신성인으로서 제 언니라고요! 자매가 같이 벨리그레엄에 온 거예요!”
와락 내지른 말에 무심히 움직이던 깃펜이 멈칫했다.
그걸 본 지젤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갔다.
“언니는 저한테 꼼짝도 못해요. 뭐든 다 들어줄걸요?”
“신성계에서 가족이었던 자가 함께 강림한 사례가 있긴 하지.”
“그렇죠?”
“하지만 네 말에 증거가 없잖니.”
말문이 막힌다. 신분증 같은 게 있지도 않은데 증거를 내놓으라고 하니까.
그렇지만 여기서 물러서면 죽도 밥도 안 된다는 걸 알기에 지젤은 끝까지 우겼다.
“연주를 들어서 아는 거예요! 언니도 저를 알아본 게 틀림없어요. 가서 추궁할게요. 언니가 참석할 파티에 보내 줘요!”
계산은 끝났다.
언니 쪽이 더 권력이 있다면 로에르멜 공작 따위는 버리고 언니에게 엉겨 붙으면 된다. 만나 봤는데 별것 없다면 공작 영애로 살아가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어느 경우든 간에 파티에 나가야 한다.
그래서 여러 사람을 만나고 조력자도 구하고, 자신을 물심양면으로 도와줄 애인도 만들어야 했다.
“어딜 보내 달라고?”
그때였다.
지젤이 다시 한번 입을 벌리는데 등 뒤에서 문이 스르르 열리더니 아주 심술궂은 음성이 들려왔다.
공작은 이미 누군가 듣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는 듯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나눌 이야기가 꽤 있을 것 같군. 공작.”
“황궁으로 저를 부르셨으면 되었을 텐데요. 이리 연통도 없이 직접 오셨습니까.”
“다 늙어 자리를 보전하는 황제에게도 귀라는 것이 있다.”
인정하기엔 자존심이 상하지만 보는 순간 빨려들 것처럼 잘생긴 남자였다.
저 남자가 황태자라는 소리를 처음 들었을 때, 정말 그렇게 생겼다고 고개를 끄덕였더랬지. 저런 사람이 황자가 아니면 누가 황자일까 싶어서.
동시에 지젤은 분했다.
언니 같은 멍청이가 아니라 그녀가 황태자비가 돼야 했는데!
똑같이 로에르멜이란 가문에 빙의했는데 어째서 언니는 황태자비고 그녀는 아닌지 알 수가 없었다.
언니가 갖는 건 그녀도 다 가져야 마땅한데.
언니가 할 수 있는 건 그녀도 다 해야 마땅했다.
세상이 원래 그렇게 되어 있으니까.
“황태자 전하! 파티 이후 잘 지내셨는지요?”
그래서였다. 지젤이 너무도 당당하게 황태자에게 인사를 건넬 수 있었던 건.
고집스럽고 미련한 언니는 늘 뚱한 표정을 하고 있지 않나. 그런 어두운 성격보다 밝고 귀여운 자신이 옆에 서는 게 훨씬 더 어울리는 그림이 될 거란 확신도 있었다.
“기억하시지요? 저는 지젤이라고…… 꺄악! 이게 무슨 짓이에요!”
헌데 이상한 일이다.
황태자는 못 들을 리 없는데도 대답조차 하지 않았고 지젤은 아차 하는 순간 웬 기사들에게 붙들려 문밖으로 끌려 나가 내동댕이쳐졌다.
“공작. 자식에게 예의라는 걸 가르치는 게 좋겠군.”
엉덩방아를 찧은 지젤을 흘긋 스쳐본 라히크가 쯧 하고 혀를 차며 공작을 향했다.
“대신 사죄드리겠습니다.”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선 공작이 고개를 살짝 숙여 보였다. 그리고는 둘 중 그 누구도 지젤에게 관심을 주지 않았다.
쾅.
눈앞에서 문이 닫혔다.
완벽한 단절.
태어나 이런 대우를 단 한 번도 받아 본 적 없던 지젤은 황망하여 헛웃음만을 흘렸다. 그러다 잠시 뒤, 그녀는 미친 것처럼 소리를 지르며 문을 쾅쾅쾅 두드려댔다.
“열어! 이거 열라고!!! 아아아악!!!”
극도의 흥분상태로 접어든 그녀를 말릴 수 있는 건 아무도 없다.
제 머리를 쥐어뜯으며 아아아아 소리를 내질렀으나 문 앞을 지키고 선 황궁 기사들은 눈썹을 찡그릴 뿐, 달래 주지도 일으켜 세워 주지도 않았다.
‘언니한텐. 언니한텐 안 그랬잖아.’
그 파티 날을 지젤은 처음부터 끝까지 기억한다.
저 금발의 미남자는 언니를 볼 때마다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까지 달콤하거나 사랑에 빠진 눈빛은 아니었지만, 충분히 친절했고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나한텐 왜 이렇게 대하지?’
모르겠다. 이해가 되지 않아 머릿속이 뜨거웠다.
바스락.
그때, 뒤에 나타난 어떤 인물이 그녀의 겨드랑이 아래에 손을 넣어 불쑥 일으켜 세웠다.
힘없이 딸려 올라간 지젤은 그게 누구인지 알아보고 반색했다. 디트리히잖아!
“디티! 있잖아, 엄마가…!”
“조용히 하십시오. 각하의 집무실 앞입니다.”
“…뭐?”
“또한, 호칭을 조심하십시오. 당신은 공작님이라 칭하셔야 합니다.”
“왜…?”
멍하니 반문하자 디트리히가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대꾸했다.
“당신은 진짜 지젤도 아니지 않습니까.”
주제를 알라.
예의를 갖춘 말이었으나 그래서 더 아팠다.
“흐, 흐아아앙!”
눈물이 방울방울 솟아난다. 지젤은 선 채로 끊임없이 울어 젖혔다. 온 얼굴이 눈물로 뒤덮일 만큼 계속해서.
‘이건 다 언니 때문이야.’
용서 못 해.
어떻게든 찾아가서 따질 것이다. 그리고 모든 걸 다 원래대로 돌려놓으라고 할 테야.
‘날 두고 언니 혼자만 행복해질 수 있을 것 같아?’
녹색 눈동자에 고집이 단단히 서린다.
긴 세월 동안 이어져 온 증오의 또 다른 이름은, 집착이었다.
* * *
로에르멜 공작가의 수도 저택에서 평범한 마차 한 대가 빠르게 빠져나왔다.
아무런 장식도, 가문의 문양도 달려 있지 않은 마차는 길거리에 흔히 다니는 삯마차와 외관이 똑같았다.
그러나 그 내부만큼은 전혀 다르다.
최고급 악어가죽을 카펫처럼 깔아둔 바닥이며 순록 가죽을 무두질하여 만든 깔개를 덮은 소파. 짙붉은 벨벳 천으로 만든 천장엔 기이한 돌이 박혀 스스로 빛을 내고 있었다.
이처럼 호화로운 마차의 주인은 단연 황태자다.
라히크는 미간을 구긴 채로 관자놀이를 짚고 생각에 잠겨 있었다.
“뭐가 잘 안 풀리셨습니까?”
그런 라히크의 맞은편에 앉아 빠른 속도로 서류를 정리하고 있는 이는 조슈아다. 라히크가 가장 신뢰하는 측근 보좌관이었다.
“안 풀렸느냐라…….”
“낯빛이 몹시 안 좋으십니다만.”
조슈아의 말에 라히크는 인상을 풀고는 무표정으로 돌아갔다.
“공작이 레그리아의 동생을 데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