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그건 좀 구미가 당기지 않는가.
‘신성 기사’란 벨리그레엄의 힘이자 근간이었다. 인간을 넘어선 초월자. 15세를 기점으로 신의 축복을 발현하고 이능을 자유자재로 쓰는 이들.
당연하게도 신성 기사는 신성인의 피를 이어 태어났다.
어미가 신성인일 경우 그 자식은 단 한 명만이 태어나는데, 성별에 관계없이 강력한 축복을 소유했다.
일찍이 돌아가셨으나 라히크의 모후 역시 신성인이었다.
그러나 신성인의 가치가 비단 그 포궁에만 있지는 않았다.
신성인이란 신성 기사들의 생존을 위해 필수 불가결한 존재.
신성인과 짝을 맺지 못하면 신성 기사들은 축복받은 힘을 쓸수록 광기에 물든다. 그러다가 신성인이 광기를 다스려 주면 빠르게 안정을 찾았다.
‘어쨌거나 결론은 하나. 레그리아와 서둘러 짝을 맺어야 한다.’
‘짝’은 신성 기사에게 몹시 특별한 존재였다.
짝의 곁에 있거나 작은 스킨십을 하는 것만으로도 신성 기사는 환희에 떨어대었고 거기에서 더 나아가 몸을 섞으면 그 열락은 감히 무엇에도 비견할 바가 되지 못한다 하였다.
짝이 죽으라 하면 죽고, 살라고 하면 살아간다.
누군가 그러한 명을 내리는 게 거추장스러우니 할 수만 있다면 떼어 내버리고 싶으나 불가능했다.
심장을 떼어도 펄떡이며 맥동할 수 있는 포유류가 있던가. 의지로 되는 일이 아니었다.
신성인에게 이끌리는 것은 신성 기사의 숙명과도 같은 것.
그리하여 신성인에게 끝내 지배당하며 그 나약함을 숭배하여 무릎 꿇게 되는 것 또한 필연이다.
라히크는 제 짝이 될 신성인이 없어 미쳐가는 신성 기사들을 보고 자랐다.
마음에 둔 신성인이 짝이 되기를 거부하여 폭주하는 자도 보았으며 신성인이 죽자 끝내 함께 파멸의 길로 나아가는 것을 한심히 지켜보았다.
그것은 그의 아버지라 불리는 자였다.
그랬기에 라히크는 과오를 반복할 생각이 없었다.
‘철저하게 길들일 것이다.’
금색 눈동자가 번득였다.
레그리아 없이 살 수는 없고, 그렇다 하여 레그리아가 제 머리 꼭대기 위에 올라앉는 것을 봐 줄 의향 또한 없으니.
신성인을 소환하는 공식적인 의식은 각 대에 딱 한 번뿐. 일곱 명의 통로인 중 선택받은 단 하나.
황태자비가 될 자격이 있는 건 레그리아뿐이었다.
700년 전부터 그렇게 정해져 내려온 전통이다.
신성인이 통로인의 몸에 깃든 후, 최소한 7일간 이 땅의 물과 음식을 먹인다.
그동안은 결코 거울을 보여 주지 않는다. 얼굴을 비출 수 있는 유리나 도자기류도 모두 금지였다.
바뀐 육신을 보고 난동을 피우면 안 되니.
거룩의 샘 의식이란 그렇게 애지중지한 신성인의 영혼이 육신에 완전히 안착하는 마지막 과정이었다.
거기까지 끝내면 신성인은 신성 기사의 폭주를 미리 알고 다스릴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된다.
‘지금도 이리 목이 타는데.’
갈증이 인다. 목울대가 크게 출렁였다.
그녀가 소환되어 온 첫날, 라히크는 알았다. 그 한 번의 입맞춤만으로도 사납게 가시 돋쳐 있던 기운이 안정화되었음을.
입술을 부딪치고 있으나 그건 마치 영혼의 교접처럼 느껴졌다.
지식, 교양, 앎. 그 모든 이지적인 것이 일시에 증발하고 남은 것은 낱낱이 까발려진 몸뚱이뿐인 듯한 착각이 든다.
잇새로 새어 나는 낮은 울음에 제 암컷이 주춤거리며 물러섰다. 그 미약한 거부조차 들불 같은 분노를 일으켜 하마터면 머리채를 휘어잡아 당길 뻔하였다.
허나 역설적이게도 그럴 수가 없었던 것 또한 그 거부 때문이다. 찰나 간에 느껴진 그녀의 두려움.
그게 라히크를 멈추게 했다.
황태자로서 긴 세월 받아 왔던 교육. 그리고 부친이 늘 읊조리던 이야기 또한 한몫을 하였고.
“어르고 달래야 한다. 짐은 그러지 못하였다. 그래서 네 모후와 사이가 완전히 틀어진 것이다.”
“예, 폐하.”
“아리툼과의 전쟁이 코앞이다. 너는 반드시 전쟁이 일어나기 전, 짝을 얻어야 한다. 축복의 만개는 짝의 힘으로 이뤄지는 것이니.”
그는 철저하게 연기해야만 한다. 이기를 누르고 이타성을 흉내 내어야 하며 그악스러운 성품을 감추고 그녀의 울타리가 되어 주어야 했다.
그를 떠나면 곧 죽기라도 할 것처럼 종속시키는 게 우선. 제아무리 날개를 꺾고 발목을 부러트린들 제 의지로 머무르는 것보다 더한 족쇄는 없으니.
지금까지 지켜본바, 레그리아를 길들이는 건 크게 어렵지 않은 일이 되리라 자신했다.
“전하. 실례인 것은 아오나, 마지막으로 이것만 여쭙겠습니다. 저, 지하에 던져 두신 그 야만인 놈 말인데…….”
황성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붙잡는 목소리가 달갑지 않아 눈을 가늘게 뜨자 대주교가 움찔하며 빠르게 말을 이었다.
“곡기를 입에 전혀 대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주, 죽으면 어찌할지…….”
“야만족은 명이 길지. 벽을 기는 벌레를 씹어 먹어서라도 끈질기게 살아남을 놈이니 신경 쓸 것 없다. 그것을 걱정할 시간이 있으면 의식이나 더 신경 쓰는 게 좋을 텐데.”
“아, 알겠습니다! 알고말고요. 그럼요.”
그 대화를 끝으로 라히크는 신황청을 떠났다.
그에게는 집짐승을 기르는 것 외에도 해야 할 일이 많이 있었다.
‘우선 기다림부터 가르쳐 볼까.’
그를 잘 기다려내면 그땐 상을 주어야겠지.
희귀한 붉은 다이아몬드와 백금으로 이뤄진 팔찌를 양쪽 팔목에 끼우고 같은 것을 목에도 채우면 볼만하지 않겠나.
‘유쾌하구나.’
말에 오른 그의 입매에 미소 비슷한 것이 떠올랐다가 사그라들었다.
한 사람의 인생을 정교하게 통제하는 수고를 들이는 것은 기대보다 더 즐거운 일이었다.
* * *
대제국 벨리그레엄은 유일신을 믿는 신정일치 체제의 나라다. 신을 가장 가까이서 섬기는 것이 교황이었으며 교황은 곧 황제다.
그러나 황제 노릇을 하며 제국에 깔려 있는 신전을 모두 관리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기에 수도 근처의 신성지.
첫 번째 신성인이 나타난 것으로 알려진 우트가르드에 신황청이 설립되었다.
신황청은 늘 고요해야 하는 것이 규칙이었으므로 평시에 떠드는 이들은 없었으나 잠자리에서까지 그러하지는 않았다.
셀린은 저를 부러워하는 견습 신관들 앞에서 우쭐대며 말을 이어 나갔다.
“누, 눈빛이 얼마나 부드러우신지 몰라. 어떤 신성인은 야, 야만족처럼 마구 날뛰기도 한다던데 그분은 전혀 달랐어. 혀, 현숙함이 배여 있는 눈빛이셨다고!”
“와, 로에르멜 가문은 좋겠네. 쓸모없는 딸을 바쳤더니 덜컥 그런 분이 강림하시고 말이야.”
“맞아. 아, 그분의 팔을 주물러 드렸거든? 그, 그러니까 눈으로 고맙다고 하셨어! 어쩌면 나를 수발 사제로 써 주실지도 모, 몰라.”
“얘는. 네가 사제가 되려면 한참 남았잖니!”
견습 신관용 기숙사에 깔깔거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러다가 기숙사를 감독하는 사제님께 들키면 혼이 나겠지만 그래도 어쩔 수가 없다. 이들은 아직 열다섯에서 열여덟 사이의 소녀들이었던 탓이다.
바람에 나뭇잎이 날아가는 것만 봐도 우스워서 까르르거릴 나이이니 하나가 웃음보가 터져 다 함께 웃는 걸 어찌할까.
청내에서는 감히 웃지 못하니 이들은 여기에서라도 자유를 만끽하는 중이었다.
“황태자비가 되실 거라니. 부럽기는 해.”
잠시 뒤, 제일 먼저 웃음을 멈춘 소녀가 입술을 뾰족하게 내밀었다. 웃겨서 웃기는 하였지만 사실은 샘이 난다.
그토록 멋진 황태자 전하의 짝이 하필이면 그 ‘미친개’가 될 줄은 몰랐던 탓이다.
그보다 나은 몸이 여섯 개나 더 있었는데 어째서 하필이면 ‘그 몸’일까.
“로에르멜의 독초가 꽃이 됐네.”
“그러게. 우리는 여기서 평생 고생해야 간신히 사제까지 올라갈까, 말까인데. 신성인들은 강림하자마자 성자, 성녀와 같은 위치잖아. 부럽기는 해.”
여기저기서 진심이 툭툭 떨어져 내린다.
그때였다.
“나는 이해가 안 가. 우리가 왜 신성인이랍시고 시중을 들러 가야 하는데?”
그렇게 입을 연 것은 금세 사제가 되리라 촉망받고 있는 아니타였다.
그 한 마디에 셀린이 애써 만들어뒀던 호의적인 분위기가 썰물처럼 사라진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견습 신관이란 신황청 내에서 가장 아랫급이다. 힘겹고 궂은일을 다 하면서 어떻게든 부제 단계를 넘어 정식 사제가 되기를 원하는 이들.
그런데 신성인들은 그러한 신황청의 계급도를 건너뛰고 곧바로 사제보다 윗급이 되어 버린다.
부럽지 않다면 거짓이었다.
“그 여자, 기껏 준비한 음식을 거의 먹지도 않았어. 그런데도 주방에서는 매일 모든 음식에 그 귀한 모르말라 가루를 뿌려댄다고.”
모르말라란 신황청을 중심으로 넓게 퍼져 있는 ‘신성의 숲’에서만 자라는 특별한 약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