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화 (5/134)
  • 5화

    [듣고 있다.]

    라히크는 건성으로 대답하며 스스로를 달랬다.

    그가 허락하지 않으면 이곳에서 나갈 수 없고, 그가 가르치지 않으면 누구도 이곳의 언어와 문자를 알려 주지 않을 것이다. 오롯이 제 손아귀 안에서만 길러지는 생물의 연약함이 이토록 만족감을 줄 줄이야.

    그는 확실히 발정했다. 중심을 팽팽하게 만드는 그것이 하체를 묵직하게 만들어 기꺼운 괴로움을 선사했다.

    [기다려라.]

    마치 자신에게 내뱉는 듯한 말을 마치며 라히크는 레그리아의 불그스름한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고작 그 정도에 불과한 접촉이나 성마르게 일어나던 기운이 안정을 찾고 가라앉는 게 느껴진다.

    신황청에서 1,000일간 온 힘을 다해 기도를 통해 소환 의식을 치른 결과물. 세상의 모든 살아 있는 것이 이 발톱 숨긴 발치에서 고개를 조아리겠지.

    ‘그리고 나를 완벽하게 만들 것이다.’

    첫날의 입맞춤을 상기하던 라히크는 만족스레 입매를 뒤틀었다.

    그녀의 값어치는 벌써부터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다.

    앞으로 얼마나 더 높아질지 가늠조차 안 될 정도로.

    그녀는, 오직 그만을 위해 준비된 존재였다.

    * * *

    화려함이 지나쳐 불협화음을 이루는 응접실이었다.

    금빛이 고스란히 드러나 번쩍거리는 탁상시계라거나 300년 된 떡갈나무를 기어코 베어 만든 테이블 따위가 조화롭지 못하게 제 잘남을 드러내며 번쩍거리기만 한다.

    눈에 닿는 것이라면 벽면을 장식한 짐승의 머리장식 하나까지 모조리 새것. 오랜 세월 대를 물려 사용해 온 기품이 없이 그저 천박하게 비싸기만 한 것들.

    어차피 이 공간의 주인 역시 물건들과 그리 다르지 않으니 어찌 생각하면 어울리는 것일지도 모르지.

    고귀함이란 날 때부터 지니는 것인지라 모두가 부러워하며 얻고자 한다. 허나 그러지 못하니 이따위 사치품을 두르며 제 값어치가 높아진 체라도 해 보고 싶은 것일 테다.

    라히크는 그런 생각을 하며 제 앞의 거구를 훑어 내렸다.

    투실투실하여 세 겹으로 접히는 턱살에 두툼하게 튀어나와 늘어진 배까지.

    역겹지 않은 부분이 없었다.

    “레그리아 님은 저희가 잘 모시겠습니다. 황궁에 가시기에 모자람 없는 자태를 갖추게 되실 겁니다. 사실 벌써부터도 기품이 있으시지 않습니까!”

    대주교는 두 손을 맞잡으며 어울리지도 않는 아양을 떨었다.

    입바른 말로 점철된 아부가 퍽 우스웠으나 라히크는 지금만큼은 기껍게 들어주었다.

    신성인을 부르는 소환 기도를 올린 날로부터 시일이 꽤 흘렀다. 실패하면 네 무능으로 보고 목을 잘라 벽장식으로 걸겠다는 협박에서 살아남게 되었으니 제법 기쁘기도 하겠지.

    라히크는 피식 웃으며 대주교의 말에 대꾸를 해주었다.

    “그래. 바로 ‘그’ 로에르멜의 장녀지. 참으로, 기품 넘치는 과거를 가진.”

    “아하하, 그, 그래도 이제 속에 깃든 것은 다른 분이시니까요.”

    어떻게 들어도 비꼬는 게 분명한 어조에 대주교가 손수건을 꺼내 이마를 훔쳤다. 하긴, 로에르멜가(家)가 선택되는 바람에 대주교 역시 기겁을 했으리라.

    ‘이변.’

    누구도 당대에 강림할 신성인이 비트리체 로에르멜을 택할 거라고 생각지 않았다. 천하의 도박사가 와도 이 결과에는 돈을 걸지 않을 테지.

    부정할 수 없는 진실 하나.

    신성인은, 자신과 가장 상성이 비슷한 통로인의 몸에 깃든다.

    “사교계의 미친개, 성격파탄자, 여름 울타리의 독초, 농약을 쳐도 안 죽을 계집.”

    한 마디씩 던질 때마다 대주교가 움찔거렸다.

    “제국 전체의 악몽 같은 여자, 비트리체 로에르멜. 그녀와 닮았다라. 예비 황태자비가.”

    “히익!”

    “그러고 보니 대주교. 레이디 비트리체가 그대의 둔부를 물려고 달려들었다던데. 사실인가?”

    툭, 툭.

    테이블을 성마르게 두드리던 라히크가 무심한 얼굴로 입꼬리를 끌어당겨 올렸다. 그에 대주교는 이제 거의 식은땀에 푹 절어버린 고기 다짐처럼 보일 지경이 되었다.

    “비트리체 로에르멜을 부르는 별명에 대해 조사해오라 시켰더니 나온 게 이 한 장짜리 종이라.”

    굳이 대답을 기대한 것은 아니기에 라히크는 금세 종이로 관심을 돌렸다. 거기에는 비트리체가 통로인으로 관에 눕혀지기 직전까지 저지른 수천 가지 악행이 최대한 압축되어 정리되어 있었다.

    개중 가장 눈길을 끄는 건, 역시 가장 하단에 적힌 세 줄짜리 문장이다.

    - 자신의 남동생인 디트리히 로에르멜의 한쪽 눈을 유리 조각으로 찔러 실명시키다.

    - 사유: 불명.

    - 해당 사건으로 인해 가문 내에서 크게 징계를 받아 ‘통로인’에 자발적으로 지원.

    로에르멜 공작은 이 다음 딸을 다시 돌려받을 생각이었을 터다. 본래 같은 중립파인 세비레이크 가문의 영식과 결혼시키려 했을 테니. 하지만 일이 이렇게 되고 말았지.

    이번 대 황태자비를 배출할 가문이 어디인지는 아직까지 공식적으로 발표하지 않았으나 거룩의 샘 의식 이후에는 귀족원 전체에게 알릴 의무가 있었다.

    아마 나라가 떠들썩해질 테니 볼만한 꼴일 것이다.

    새 황태자비가 악독한 미친개와 같을까 봐 걱정하여 벌벌 떨기 바쁠 테니까.

    ‘미련한 것들. 독초는 잘 쓰면 약초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생각하기 나름이지.

    게다가 대주교의 말처럼 비트리체가 아닌 ‘레그리아’에게는 기묘한 기품이 있었다.

    신성인들은 제 상황을 깨달으면 보통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하염없이 울거나, 화를 내며 날뛰거나. 혹은 현실을 부정하고 눈과 귀를 닫아 버린다. 가장 골치 아픈 건 물론 세 번째 경우였다.

    레그리아처럼 차분하게 상황을 파악하고 회피하지도 도망치지도 않은 채 덤덤히 받아들이는 건 특수한 경우다.

    꼭 체념하는 법을 일찍 배운 것처럼.

    거칠게 반항하는 것을 짓누르는 걸 즐기는 그로서는 맥이 빠지는 일이긴 하였으나 얌전히 구는 것이 나쁘다고 할 수는 없었다.

    국혼이 코앞이다.

    신성계에서 온 그녀에게 축복을 받고 싶어 하는 신민은 발에 챌 만큼 많았고 그렇기에 레그리아는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해져야만 했다.

    주어진 시간은 앞으로 반년.

    그 안에 말조차 할 줄 모르는 짐승의 모습을 벗고 고결한 황태자비로 완성되어야만 한다.

    ‘아, 말을 할 줄 모르는 건 아닌가.’

    라히크는 제게 뭔가를 요구하듯 당당한 표정으로 어떤 시늉을 해 대던 그녀를 떠올렸다.

    제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고 여기니 답답해하는 것 같기는 하였으나 마른 팔을 허우적대며 시늉하는 꼴이 귀여워 더더욱 알려 줄 용의가 없었다.

    그는 대제국 벨리그레엄의 황태자로서 반드시 익혀야 하는 3개의 언어에 더하여 신성어 4가지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었다. 그러니 레그리아가 쓰는 말 역시 모조리 알아들었다.

    혼자서 ‘혀 도착증 새끼’라거나 ‘미친놈’이라고 중얼거리는 것도 다 들었다는 의미다.

    욕을 들었는데도 웃음이 나는 걸 보면 미친 것도 맞는 듯하니 딱히 불쾌하지는 않았다.

    레그리아는 요즈음 그의 인생에 있어 가장 흥밋거리이기도 하였으니.

    “그래, 참! 모르말라 가루가 효능이 있던가요?”

    “글쎄.”

    “실험체에게는 먹혔지만 귀하신 분께는 이번에 처음 써보는 것이지 않습니까. 궁금합니다. 앞으로 불시에 강림할 다른 귀족 계급 신성인들에게 일괄적으로 사용해도 될지….”

    어떻게든 다른 화제를 찾겠다는 듯 간절한 눈동자가 안쪽이 탐욕으로 번들거렸다.

    모르말라 가루.

    몇 년 전, 새롭게 진행된 신성인 연구 결과에 따르면 그 가루를 뿌린 음식을 섭취하거나 향을 들이켜게 하면 바뀐 환경에 대한 스트레스를 크게 줄여 주고 육신의 거부 반응을 낮춘다고 했다.

    허나 무엇보다 중요한 건 그런 것들보다도 이쪽 세계 사람들에 대한 경계심을 완화시키는 작용을 하는 것이다.

    그래, 어쩌면 그녀의 말도 안 되는 차분함은 다 모르말라 가루 덕분일 지도 모르지.

    아예 통로인을 눕혀둔 공간 자체를 값비싼 모르말라 향으로 뒤덮어 두었으니 그 효과가 지금 나타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능글맞게 신황청의 수고를 드러내며 보상을 요구하는 건 내키지 않는다.

    그가 입가에 비틀린 미소를 띠운 채 말이 없자 대주교는 손수건을 꺼내 이마의 땀을 닦으며 냉큼 다음 주제로 넘어갔다.

    “그러면 전하께서는… 그, 거룩의 샘 의식 이후에는 거취를 어찌하실 것인지….”

    “글쎄. 어찌할까.”

    “아이고, 여기에 오래 머물러 주시면 영광이옵니다.”

    “입이 찢어지기는 싫은가 보군. 기름칠을 해 댄 수준이 과한 걸 보니.”

    그의 한마디에 대주교의 기름 낀 코가 움찔거렸다. 허나 감히 한마디라도 반항적인 대꾸를 할 수 있을 리 없다. 그럴 만큼 간이 큰 작자였더라면 저 자리에 앉혀 두지도 않았을 테니.

    “신황청은 모든 신성 기사의 머물 곳이기도 합니다. 위대하신 황태자 전하께서는 황궁은 물론이고 이 신황청 역시 쉴 곳임을 잊지 말아 주시옵소서.”

    “거룩의 샘 의식 준비에 만반을 기하기나 하도록.”

    느물거리는 입바른 소리는 철저하게 무시한 라히크는 서늘하게 식어가는 찻잔 따위엔 손조차 대지 않은 채 다른 생각으로 넘어갔다.

    ‘만일 레그리아에게 비트리체와 같은 패기가 있다면, 그녀와의 사이에서 낳은 자식은 대륙을 제패하게 될지도 모른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