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아프리카로 향하는 비행기는 중간 기항지를 거쳐 약 16시간의 비행을 할 예정이었다. 벌써 세 번째인 은준은 꼬박 하루 가까이 걸리는 비행 시간을 어떻게 보낼지 생각했다.
‘영화? 볼만한게 있을까? 흔히 영화나 드라마에 보면 주인공 옆자리엔 젊고 섹시한 아가씨가 타던데, 이 외국인 아저씨는 정장을 입은걸 보면 일 관련해서 가는걸까? 불편하겠군. 고생좀 하겠어. 음... 그냥 잠이나 잘까?’
하지만 전날 푹 자고 나온 그로서는 생각처럼 잠을 자며 시간을 보내는 것도 쉽지만은 않았다. 오히려 조용한 가운데 이따금 지나다니는 스튜어디스들의 모습을 힐끔힐끔 쳐다보며 정신만 또렷해졌다.
“손님, 혹시 불편한 부분이 있으십니까?”
“아뇨. 괜찮습니다.”
그런데 스튜어디스도 은준의 시선을 느꼈는지 다가와 묻는다. 갑작스런 물음에 오히려 잠시 당혹스러웠지만, 이내 추스르고는 살며시 미소 지으며 사양했다. 그러자 다시 몸을 돌려 통로를 따라 지나가는 스튜어디스의 모습에 은준은 자신의 대응이 마음에 들었는지 은근히 뿌듯해하며 좌석 깊숙이 몸을 파묻었다.
조용한 가운데 그의 의식은 천천히 자신의 세계로 빠져들어갔다.
‘이 돈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것이 그의 머리를 채우고 있는 의문이었다. 아니, 의문이라기 보다는 하나의 화두에 가까웠다. 그는 이 하릴 없이 지나가는 비행 시간 동안 이 문제에 대해 다시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 볼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먹고, 돈도 써본 사람이 쓴다던데. 내가 어디 이렇게 큰 돈을 써봤어야지.’
은준의 초등학교 시절 용돈은 일주일에 500원, 중학교를 거쳐 고등학교에 들어가서도 그가 받은 용돈은 한 달에 만 원이 전부였다.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되는 돈이지. 만 원이면 치킨도 못 사먹겠네.’
하지만 당시의 그는 그것이 당연한 것으로 알았기 때문에 사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학교 앞 슈퍼에서 파는 문어발 하나에 그렇게 좋아했고, 하교길에 사먹는 얼린 쿨피스만한 군것질 거리가 없었다.
‘요즘 애들은 하교길에 친구들하고 패스트푸드점에도 가고 전에 보니까 교복입고 스파게티 먹으로 온 애들도 있던데, 나같았으면 어림없는 소리지.’
어쨌든 그렇게 어린 시절을 보냈던 은준은 커서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직장에 다닌 시간 보다 취업준비생으로 보낸 시간이 더 많았던 그는 부모님께 부담이 되고 싶지 않아 어튼 돈은 거의 쓰지 않았다. 그의 월급은 절반 이상이 통장으로 들어갔고, 교통비와 식비 외로 들어가는 비용은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야박했다. 그것이 큰 돈을 모으자는 의도에서 그런 것이 아니라, 일종의 습관이었을 뿐이다.
그래도 그 덕분이라고 해야 할지 그는 박봉에도 불구하고 아프리카로 떠나기 전 2천만원 정도의 돈을 모을 수 있었던 것이다.
‘여자들이 10년 일해서 결혼할때쯤 5천만원 모으면 많이 모은 것이라고 한다던데, 나는 그대로 갔으면 10년 후엔 1억은 모았겠지?’
하지만 이런 생각이 무슨 소용일까. 그는 이미 이 일년 동안에 500년 동안 벌 돈을 벌은 뒤였다.
그건 어쨌든, 다시 본래 이야기로 돌아가서 아무튼 은준은 아주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형성된 생활 습관이 돈을 쓰는데 익숙하지 않다라는 것이었다. 실제로 그가 벤시몽에서 번 돈으로 한 일이라고는 옥수수 창고가 필요했기에 창고를 지었고, 전기가 부족해 풍력발전기를 하나 설치했고. 또 사람을 쓰는데 쓴 돈이 대부분이었고, 자신에게 쓴 돈은 식대와 그나마 취미라고 해줘야 할 듯한 밀크티와 침대 하나를 산 것이 전부였다.
돈이 있어도 어디에, 어떻게 써야할지 모른다. 그것이 은준 스스로도 인정한 자신의 문제점이었다.
‘한국에서 뭔가 해보자니 왔다갔다 하는 것도 쉬운일이 아닐테고, 또 나에게야 50억이 큰 돈 같아 보일지 몰라도 사업좀 한다는 부자들에게 50억쯤이야 아무것도 아닐수도 있겠지? 드라마다 영화같은데 보면 괜히 어설프게 사업좀 한다고 시작했다가 조폭 같은 사람들에게 걸려서 인생 종치던데 괜히 그럴 필요가 있을까? 한국 말고 아프리카에서 뭔가 해봐?’
하지만 그런 생각도 잠시, 그는 처음 아프리카에와서 기차에서 목격한 총격전을 떠올리곤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세계 어디를 가도 깡패같은 사람 없는 곳은 없지. 세계 경찰이라고 자처하는 미국엔 그래서 조직이 없나? 리소테 왕국에도 법은 있지만, 사실 법보다는 주먹이 가깝지. 아니, 여기선 법보다 총알이야. 자칫하다간 언제 어디서 알라의 요술봉이나 AK-47 총알이 날아올지도 몰라. 소말리아 해적들을 보라고!’
‘지금은 리소테 정부와 1:1로 거래를 하니 다른 똥파리가 끼어들지 못하고 있는지도 몰라. 내가 모르는 곳에서 벌써 누군가가 나를 주시하고 있을지도 모르지. 그런데 내가 여기서 다른 사업을 시작한다면? 하다못해 한국에서도 포장마차라도 할라치면 보호세다 뭐다 받는 이들이 있다는데, 여기선 포장마차 때려부수는게 아니라 일단 총으로 쏘고 가져갈지도 몰라.’
그렇게 생각하니 은준은 더욱 겁이 났다. 그는 평생 월급을 받으며 일하다 은퇴하리라 생각했었지, 누군가와 싸운다는 것에 익숙치 않았다. 직접적인 싸움이든 암투이든 말이다.
한편으론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스스로가 우습기도 했다.
‘이게 무슨 배부른 소리야? 사업? 사업 좋지. 하지만 뉴스에도 많이 나오잖아? 퇴직금 가지고 사업했다가 노후자금까지 날리는 사람들 이야기. 전문가들의 조언은 항상 섣부른 투자를 지양하라고 했지. 서두르지 말자. 이제 1년 농사 지어보고 벌써 다른데 돌릴 정신이 있어? 아직 개간하지도 못한 땅이 지금의 옥수수 농장보다 3배는 더 커. 그것도 아직 소화시키지 못한 판국에...’
은준은 그렇게 생각하지 머리에 올려놓은 짐 하나가 내려놓아진 것 같이 가벼워졌다.
‘농장을 지금보다 4배로 키우면 수익도 그만큼 늘어나겠지. 50억의 네 배면 얼마야. 연간 200억? 그래. 이것보다 대박인 아이템이 어디있어? 다른데 정신팔지 말자. 내가 가진 것부터 차근차근 소화시켜 나가는거야.’
머리를 복잡하게 했던 문제가 해결되자 잠도 잘 왔다. 워낙 긴 비행이라 중간중간 깨어나기도 했지만, 은준은 어렵지 않게 다시 남아공에 착륙할 수 있었다.
공항에서 내린 은준은 생각지 못한 난처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세관에서 그를 찾은 것이다. 그는 어리둥절 했지만, 다행히 거기에 폭력은 개입하지 않았고, 다만 양 옆에 경찰관이 그를 안내했을 정도였다.
가는 내내 무엇이 문제일까 고민했던 은준은 의외의 문제에 당혹스러워하면서도 얼굴이 빨개질정도로 부끄러워졌다.
공무원은 남자인 그의 캐리어에 가득한 뜯지 않은 스타킹에 은준이 보따리상이 아닌가 하는 의혹을 가졌고, 은준으로서는 차마 사실대로 밤마다 야에게 스타킹을 신키고 그것을 튿어가며 즐길 예정이라 여분의 스타킹을 잔뜩 가져왔다고는 말 하지 못하고, 단지 애인에게 줄 선물이라며 한동안 비행기를 타지 않을 예정이라 미리 준비한 거라고 둘러댈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작은 해프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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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벌써 금요일이네요' 왤케 시간이 빨리가죠? ㄷㄷㄷ
선추코 감사합니다~
댓글중에 추천글 보고 오셨다는 분이 계셔서 검색해보니 몇몇 사이트에 추천글이 올라와있더군요. ㅎㅎ 이 자리를 빌어 감사하다는 말씀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