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은준은 외출을 했다.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약족장소로 향하며 눈에 보이는 가까운 카페에 들어가 커피를 주문했다. 커피를 즐기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약속시간까지 기다리며 심심한 입을 달래기 위함이었다.
"아메리카노 톨 사이즈에 샷 추가요."
"아메리카노 톨 사이즈에 샷 추가해서, 5300원 입니다."
커피 한잔이라고 보기엔 결코 싸지 않은 가격이다. 이미 상단의 메뉴판에 적힌 가격을 보고 정한 메뉴지만, 막상 결재를 하려니 아깝지 않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잠시후 전동벨이 반짝이며 진동이 오자 카운터로 다가가 아메리카노를 테이크아웃해 카페 밖으로 나왔다. 오늘 은준이 만나려는 친구는 남자, 둘 다 카페에서 남자를 만나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커피를 들고 밖으로 나온 은준은 천천히 약속장소를 향해 걸으며 주변을 구경했다. 다른 사람들에겐 평범하고 일상적인 장소지만, 오랜만에 한국에 돌아온 은준에겐 익숙하면서도 조금은 낯설었다.
그는 백화점 앞의 사거리에 있는 벤치에 앉아 횡단보도를 오가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겨우 5분 만에 지난 2년여간 아프리카에 살며 본 사람들보다 더 많은 사람을 볼 수 있었다.
꼬리를 무는 자동차는 끝도 없다. 평일 대낮임에도 불구하고 자동차는 도로를 가득 메우고, 길거리엔 바삐 걸음을 옮기는 사람들고 가득찼다.
그들은 하나같이 무엇인가 바쁜듯 움직였고, 손엔 하나씩 핸드폰을 들고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수십, 수백명의 사람들의 떠들어대는 소리, 도로를 가득 채운 무거운 엔진음과 경적소리 그리고 매캐한 매연.
은준의 미간에 내 천 자가 심어졌다.
시끄러워 귀가 아프다. 사람 구경이 하고 싶어서 약속시간보다 일찍 나왔건만, 강제로 귀에 쑤셔넣는듯한 소음은 머리를 지끈거리게 했다.
벤시몽에서 즐기던 바람소리, 옥수수 잎파리 스치는 사각사각하는 소리. 밤이면 야를 연주하는 음악소리를 들으며 목가적인 나날에 익숙해진 은준에게 도시는 폭력이고 횡포였다.
"...괜히 일찍 나왔나?"
시간을 보니 아직도 한 시간은 더 있어야 약속 시간이었다. 스스로 자처한 일이었지만, 앞으로 한 시간을 더 이렇게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 끔찍했다. 그렇다고 어디 카페에 들어가 있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앞서 카페에 들어가 커피를 주문하고 기다리는 동안, 카페 안에서도 밖에 못지 않을 만큼 수다떠는 소리가 굉장했었다.
어쩔 수 없이 빨대를 입에 물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흐리멍텅한 하늘이 보인다. 파란 하늘도 아니고 구름이 낀 것도 아니다. 그냥 물감에 색이 잘못 섞여 색칠한 듯한 답답한 하늘이다.
"이것도 저것도 다, 마음에 안드는것 투성이네."
은준은 혀를 차며 궁시렁거렸다.
그나마 그의 앞을 스쳐 지나가는, 그중에서도 예쁜 여자들을 쳐다보며 시간을 죽쳤다. 은준은 그나마 볼건 그거밖에 없다고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개중엔 손을 잘못 댄 듯한 얼굴을 한 여자도 있었지만, 그럴땐 얼른 고개를 돌렸다. 가공할 안구 공격이다.
안보는듯 슬쩍슬쩍 짧은 치마밑 쭉 뻗은 다리를 힐끔거리고 있자니 마음이 싱숭생숭 하다. 과연 마음만 그런 것일까? 은준은 아랫도리서 느껴지는 감각에 신음을 삼켰다.
"끙..."
이틀을 떨어져있었을 뿐인데, 매일매일 하던 습관이 되어서 그런지 아래로는 근질거리는 감각이, 위로는 심장 박동이 빨라진다.
"에효, 죽겠구만."
은준은 혈기를 가라앉히려 일부러 눈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검은 양복을 입은 남자가 가방을 들고 어디론가 향한다. 그 모습이 어딘지 모르게 후줄근해 보인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니다. 길가에 멈춰서 핸드폰으로 누군가와 큰 목소리로 통화하는 사람, 넥타이를 조금 풀은 사람, 커피를 마시며 횡단보도 앞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양복맨 일행. 한결같이 모두가 바쁘다.
은준은 오직 자신만이 바쁘지 않은 것처럼 느껴졌다.
"나도 어딘가에 취직했으면 지금쯤 저러고 있을 테지. 저 사람들은 한달에 얼마나 받을까?"
문득 떠오른 궁금증에 은준은 고민을 해봤다. 대졸 신입사원이 중소기업에 들어갈 경우 약 2,300만원을 받는다고 한다. 한달에 200만원이 안되는 금액에 세금을 떼면 그보다 훨씬 줄어든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만 있을까? 인터넷엔 한달에 100만원도 못 받는다는 사람들이 수두룩 하다. 평균이 2,300만 이면 그보다 더 받는 사람도 있겠지만, 어쨌든 100만원으로 한 달을 살아야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은준은 눈 앞이 깜깜해졌다. 이제 와서 월급쟁이 생활을 하라면 절대 못할 것 같았다. 이미 그는 꿀 맛을 봤다.
개인 사업을 하던 사람이 사업이 망하면 빚을 내서라도 사업을 하려 한다고 한다. 남의 일 해주면서 월급 받는 생활을 못한다는 이야기다. 은준도 백수였던 예전에는 그런 사람을 보면 '배가 불렀지. 쯧쯧.' 하고 혀를 찼지만, 지금은 이해가 갔다. 굶어 죽을 것 같으면 하기야 하겠지만, 정말 최후의 방법일 뿐이다.
그래도 일개미처럼 부지런히 움직이는 월급쟁이들을 보고 있으니 은준도 마음 한구석이 무거워졌다.
'난 너무 놀고 먹는거 아닌가? 일은 다른 사람들을 부려서 다 하고, 나는 그 사람들이 한 일의 대가로 내내 놀다가 돈이나 벌고. 이러다가 벌 받는거 아닌가 몰라. 사람이 일을 안하면 망가진다고 하던데, 나도 뭔가 해야 할까? 옥수수 농장 말고 사업을 해봐?'
한편으론 은행에 묵히고 있는 돈이 아깝기도 하다. 누군 돈이 없어서 사업을 못하는데, 은준은 돈이 있지만 아이템이 없다. 그렇다고 아무곳에다 돈을 퍼부을수도 없는 노릇.
'먹는 장사가 남는 장사라던데. 그런데 그것도 아이템이 좋아야지. 먹는 장사라고 다 잘되면 문닫는 집은 뭐람? 하... 내가 뭔가 사업에 대해서 생각을 해봤어야지. 내게 이런 행운이 올지 알았나?'
고민하던 은준의 눈에 건물이 들어왔다. 약국, 식당, 학원, 슈퍼, 등등. 수많은 가게가 들어서있는 상가 건물이었다.
'나도 빌딩이나 하나 사서 임대료나 받아먹을까?'
순간 혹했던 은준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임대료 받아먹는 생활이나, 지금 생활이나 다를게 뭐가 있을까 싶었던 것이다.
끝까지 은준은 뭔가 해보고 싶기는 하지만 뭐가 하고 싶은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생각은 거기서 끝났다.
"이여, 은준!"
오늘 만나기로 했던 준승이란 친구였다.
"준승이, 오랜만이네?"
"그래 야. 정말 오랜만이다. 그런데 왜 그러고있어."
"음, 잠깐 앉았다가자. 너도 앉아."
"뭐야? 너 옷 산다며."
근 2년여만에 만난 사이였지만, 당장 어제도 만났던 사이처럼 대화는 평범했다.
"...잠깐 있어봐."
오늘 둘이 만난 이유는 오랜만에 한국에 돌아와 만나는 것도 있었지만, 겸사겸사 은준의 옷을 사려는 목적도 있었다. 2년만에 돌아온 한국에서 입을 만한 옷은 철 지난 옷들 뿐이었던 것이다.
"왜...?"
자꾸만 기다리라는 은준에 의아해하던 준승은 어쩔 수 없이 옆에 앉았고, 그러자 은준은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귓말을 했다.
"지금 섰어... 애들 치마가 왤케 다 짧냐? 크크"
"뭐?"
은준의 귓속말에 준승도 킥킥거리며 웃는다. 남자들만 아는 피치못할 사정이리라.
"다른 애들이랑은 연락해봤어?"
"어. 근데 뭐 다들 일하느라 바쁘지. 백수는 너밖에 없더라. 지금도 공무원 공부중?"
"어... 그냥 그렇지 뭐. 애들은 나도 잘 못만나. 전부 여기저기 흩어져서 어디서 모이기도 힘들고. 걔 누구는 3교대라 쉬는 날도 애매하다더라."
"그렇군. 넌 어때. 가망이 좀 있어보여?"
"쩝, 모르겠다. 계속 노력은 하는데 지원자가 워낙 많아야지. 나도 집에선 1년만 더, 1년만 더, 그러고 있다. 정말 그만 둬야 할까봐. 근데 또 이제와서 어디 들어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고."
"그렇지... 야, 너 나 따라 아프리카 안갈래? 내가 월급 줄께. 흐흐"
은준은 어깨가 축 처진 친구에게 일부러 가볍게 물었다. 친구가 승락한다면 동업은 안되지만, 월급을 주고 일을 시킬 생각은 있었다. 앞으로 남아있는 땅을 더 개간하게 되면 지금 퉁야나 쉬사네로는 그 땅을 전부 관리하기 어려울 터, 어차피 관리직으로 사람을 더 구해야 할 상황은 오게될 터였다.
"벼룩의 간을 빼먹지! 옥수수 그거 얼마나 된다고 분질러 나눠 먹겠냐?"
"왜? 나름 벌어."
"그래서 얼마나 버는데."
"뭐... 그냥 너 하나 쯤은 고용할 만큼?"
은준은 차마 한 해에 50억을 벌었다고 말 할 수 없어 얼버무렸다. 하지만 친구인 준승은 그것이 버는 돈이 적어 말을 못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됐다 야. 나중에 정 어려우면 그때좀 부탁하마."
그래도 준승은 신경써주는 친구가 고마워 여운만 남겼다. 물론 실제로는 그럴 날은 오지 않을거라 속으로 생각하고 있었지만.
"자, 이제 가자. 옷도 좀 사고 하다가 저녁이나 먹자고. 내가 살께."
"오, 네가 쏘는거냐? 삽겹살 먹으러갈래? 그럼 검색좀 해봐야겠는데? 맛집이 어디에 있으려나..."
백수인 준승은 사양도 안하고 넙죽 받는다. 그게 서로 편하다는걸 알기 때문인 것이다.
하지만 밤이 되어 삼겹살에 소주를 걸치고 돌아오는 은준의 머리에는 다른 생각이 들어있었다.
'아, 소고기 먹다가 삼겹살 먹으려니까 딱딱해서 턱 나가겠네. 소주도 알콜 맛만 나고. 집에 있는 와인 생각난다. 음냐 음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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