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일주일간의 방학이 끝난 얌은 다시 뉴-카파로 돌아갔다. 아직 소녀라고 할 만한 나이인 얌은 은준과 밤을 함께 보내고, 또 누구도 함께하지 않은 그들 셋 만의 혼인식을 치르고 나자 이따금씩 은준 앞에서 보였던 말괄량이 같은 모습 대신 언니인 야를 따라 다소곳한 모습을 보여주려 노력했지만, 몸이 근질근질해하하는 것을 은준도 알 정도였다.
옥수수 농장은 그가 손을 쓰지 않아도 문제없이 돌아갔고, 리카온인 카용과도 점차 길들이고 길들여지는 관계에 익숙해가고 있었다.
벤시몽에 커다란 옥수수창고가 들어선 것을 제외하면 평소와 다름 없는 벤시몽이었지만, 최근 은준은 결단을 내렸고 낯선 인물들이 벤시몽을 찾아왔다.
'스타글로벌'이라는 영문이 적힌 옷을 입은 한 명의 사내는 픽업트럭을 타고 나타났는데, 그가 도착하자 은준은 버선발로 뛰어나가 그를 맞이했다.
"어서오세요!"
"안녕하세요. 이쪽인가요?"
검정 선글라스를 낀 백인 남성은 저택을 가리켰고, 은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저택 안으로 안내했다.
실내에 들어온 그는 모자와 선글라스를 벗으며 자신을 소개했다.
"전 길번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김은준입니다."
은준은 인사를 하는 동안에도 손가락을 꼼지락대며 흥분한 기색을 멈추지 않았고, 그 모습을 본 길번은 고개를 끄덕이며 야에게 받은 시원한 물을 단숨에 마시고 잔을 내려놓으며 가져온 가방과 박스를 들었다.
"일단 시작을 하겠습니다. 어디에 설치를 하실건가요?"
"따라오세요. 2층입니다."
은준의 안내를 받은 길번은 은준의 방에 들어가 가져온 박스를 뜯고는 그 안에서 팩시밀리와 비슷하게 생긴 회색빛 기계를 꺼내들었다. 그리곤 그것을 가지고 설치를 하고 은준의 컴퓨터와 연결을 하며 이것저것 작동을 해보고는 이상 없음을 확인하곤 다시 벤시몽을 떠났다.
그가 떠나는 것을 배웅한 은준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와 소리질렀다.
"아싸, 인터넷!"
그가 구입한 물건은 인마샛(INMASAT)이란 장비로 본래 해상이나 오지에서 통신과 인터넷을 가능하게 해주는 물건이다.
은준은 농기계를 인터넷으로 알아보거나 하면서 휴대전화와 연결해서 인터넷을 사용하는 것이 무척이나 속도가 느리고, 터무니없는 요금이 나온다는 사실에 벤시몽에 인터넷을 연결할 방법을 다방면으로 찾아나섰다.
아프리카인 리소테라 하더라도 시내인 뉴-카파만 가면 PC카페가 있을 정도로 인터넷이 들어와있긴 하지만, 그 속도와 인프라는 한국에 비할바가 아니었다. 속도는 느리고 요금은 비싸며 용량제한까지 있었다.
거기에 시내도 아닌 차로 네다섯 시간이 걸리는 벤시몽이니 인터넷을 연결하려면 그 공사 비용은 신청자인 은준이 부담해야 한다는 대답에 되돌아 나온 그가 검색끝에 알아낸 것이 바로 이 인마샛이라는 위성통신장비였다.
해상이나 오지에서 통신이 가능하게 위성과 직접 연결하여 통신을 주고받는 이 장비는 기기값만 400US달러가 넘는 물건이었지만, 그래도 뉴-카파로부터 벤시몽까지 유선랜을 까는 것에 비하면 새발의 피에 불과한 가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년 가까이 인터넷의 불모지에 갇혀있었던 은준으로서는 돈이 없는 것도 아니었으니 투자에 망설이지를 않았고 결국 벤시몽에서 자유롭게 인터넷을 쓰기에 성공하게 되었다.
"보스?"
지난 1년간 못다한 인터넷을 몰아서 하겠다는 기세로 인터넷 삼매경에 빠져있는 은준을 찾아온 것은 퉁야였다.
온라인 게임을 해도 렉이 있을지 없을지, 기대반 걱정반으로 온라인 게임 설치를 기다리고 있던 은준은 퉁야의 부름에 자리를 옮겼다.
평소 낮 시간엔 농장을 돌보거나 저택 주변을 돌아보는 등의 일로 바쁜 퉁야가 은준을 찾아오는 일은 일과 관련된 것들이었지만, 그럴땐 지금처럼 조심스럽게 은준을 찾지 않았다. 그 사실을 모를리 없는 은준이었기 때문에 무언가 중요한 이야기를 할 것이란 생각에 자리를 옮겼던 것이다.
'뭐지? 설마 그만둔다는 이야기는 아니겠지?'
그동안 퉁야화 함께하면서 불편한 일이 없다고는 못하겠지만, 적어도 그가 맡은 일에 관한 문제로 문제가 생겼던 일은 없었다. 공기가 없어져봐야 중요한줄 안다고 하지만, 꼭 그렇지 않아도 퉁야가 없으면 당장 그가 하던 일을 자신이 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있는 은준으로서는 퉁야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걱정이 됐다.
"보스..."
"왜요. 무슨 걱정이라도 있어요? 어려운 일이 있으면 말해봐요."
퉁야가 뜸을 들이자 조금 초초해진 은준이 너그러운 미소를 지어보이며 퉁야를 달랬다.
그 모습에 힘이 났는지 퉁야도 몇 번 입을 벙긋거리다 마침내 마음을 정했는지 정면으로 은준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벤시몽은 좋은 곳입니다. 보스도 좋은 분이시고, 일도 바쁜때를 제외하면 크게 어렵지도 않지요. 게다가 저는 보스의 배려로 편하게 먹고 쉴 수 있으니 지금까지 일해왔던 다른 어느 농장보다 가장 멋진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뭐지? 무슨 소리를 하려고 이렇게 다이아몬드칠을 한담?'
하지만 퉁야의 칭찬을 들은 은준은 더욱 걱정이 됐다. 보통 갑자기 좋은 이야기를 늘어놓을 때에는 뒤에가서 뒤통수를 치는게 일반적이었기 때문이었다. 약주고 병주는 식이다.
"하하하. 무슨... 별 말을요."
"아닙니다. 정말 제 진심입니다. 그런데 제가 요즘..."
정말 하기 어려운 일인지 평소같지 않게 퉁야가 좀처럼 입을 열지 못한다. 그럴수록 은준의 부담감도 커졌다.
"제가 요즘 가족들이 보고싶습니다. 후, 이런 말씀 드리면 안되는데... 지난번에도 휴가도 보내주시고 하셨는데..."
"...혹시 일 하기가 어렵나요?"
"아뇨, 아닙니다. 일은 정말 할 맛이 납니다. 다만 지난번에 집에 다녀올때, 저는 매일같이 좋은 침대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고 있는데, 아내와 아이들은 그렇지 못하는게 마음에 걸려서... 그래서 말입니다."
마침내 퉁야는 마음에 담아둔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제가 가족들을 이곳으로 데려왔으면 합니다. 무, 물론 이곳이란 벤시몽을 말씀드리는게 아니라, 리소테로 데려온다는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적어도 주말만이라도 가까이서 만날 수 있다면 덜 걱정이..."
"그럴게 뭐 있어요. 그러지말고 가족들도 여기로 와서 함께 살죠."
"그래서 잠시 아내와 아이들이 있는곳엘좀 다녀올 수 있... 네?"
"물론 이 저택에서 함께사는건 아니에요. 가까이에 집을 하나 지어줄께요. 어렵게 주말마다 왔다갔다 할 필요 뭐 있나요? 그냥 여기서 같이 살면 되는걸. 하지만 이 집은 제가 퉁야에게 빌려주는걸로 할거에요. 퉁야가 일을 그만두고 벤시몽을 떠날땐 집을 비워주기만 하면 되는거죠."
"네?"
"왜요. 싫어요?"
"네? 아, 아닙니다! 천만에요! 그럴리가요! 보스!"
퉁야는 믿어지지가 않았다. 평소 은준과 가장 가까이에서 부딪기며 그의 성향에 대해 잘 알고있는 그로서는, 그가 자신의 '영역' 안에 자리를 내어줄 것이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저 매주 만나는 야와 얌 자매가 부러워 자신도 가족들을 좀 더 살기 좋은 이곳으로 데려왔으면 하는 바람에 이야기를 꺼냈던 것이었다.
그런데 믿을 수 없게도 보스인 은준이 자신과 가족이 살 집을 이곳 벤시몽에 지어준다는 이야기에 그저 바보처럼 '네? 네?' 하고 반문 하는것 말고는 할 수 있는게 없었다.
그렇지만 은준은 은준 나름대로의 계산이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쉽게, 아니 더욱 전격적인 지원정책을 펼친 것이었다.
'휴, 난 또 그만둔다는줄 알았네. 하지만 확실히 혼자 있는 것보다 가족까지 있으면 엉덩이가 무거워지겠지? 또 안그래도 퉁야가 저택에 있어서 불편한게 한두가지가 아니었는데, 이참에 직원 기숙사처럼 건물 하나를 세워서 거기서 살게 하면 되겠네. 또 혹시 나중에 그만두게 되면 내 집이나 사람만 빠져나가면 되고, 새로 고용한 사람을 거기에 살게하면 되니 나야 손해볼일 없지.'
하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는 또 하나 있었다.
'으흐흐. 그동안 퉁야 눈치 때문에 밤마다 열심히 해도 야가 자꾸 입을 막고 소리를 참아서 뭔가 빠진것 같았는데, 퉁야만 없으면 밤마다 울부짖게 해주고 말겠어! 또 계단에서도, 부엌에서도, 거실에서도... 으흐흐! 아! 얌과 스킨쉽 하는 것도 눈치보지 않아도 되겠구나!'
이런 은준의 속내를 모르는 퉁야는 그저 이 동양에서 온 넉넉한 인심의 보스가 감사할 뿐이었고, 하루라도 빨리 퉁야를 내보낼 생각에 은준은 벤시몽 저택에서 훨씬 떨어진 곳에 새 건물을 짓기 시작했다.
"그래. 이정도 떨어졌으면 한밤중에 소리를 질러도 안들리겠지. 야야, 기다려라!"
은준은 세로 들어서기 시작한 건물을 저택 테라스에서 지켜보며 중얼거렸다.
============================ 작품 후기 ============================
흑흑 소제목을 알아봐주신 분은 에르시리나님 한분밖에 없나요 ㅜㅜ 나름 기발하다고 생각했는데 ㅋㅋ.. 이렇게 불청객을 퇴출시키고 벤시몽 저택에선 밤마다 광란의...(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