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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 시즌에 열릴 콘서트 준비때문에
너는 11월부터 거의 모든 방송을 중단했다.
무대장치부터 조명과 연출까지 남에게 완전히 맡겨놓을 수 있는 성격이 못되서
일일이 다 참견하느라 몸이 열개라도 모자를 판이였다.
정말이지, 스스로를 힘들게 하다못해 주변 사람들까지 괴롭히는 타입이였다.
"란우야아-, 란우야아-, 아아, 형아 너무 힘들어 죽을거 같다."
열두살 짜리에게 아무리 징징대봐야, 그럴듯한 조언같은건 나오지 않는다.
그때의 내가 알고있던건 그저 막연히
네가 혼자서 모든 짐을 다 떠맡으려고 한다는 것 뿐이였다.
재능이 많은 것도 어찌보면 피곤한 일이다.
"쉬어가면서 해."
전화기 건너 목소리는 정말로 지쳐보였다.
음악을 사랑하는 것과는 별개로, 너는 일을 즐기면서 할 수 있는 성격이 아니였다.
너에게 일은 일일 뿐.
머릿속의 구상과 현실이 일치되지 못하면 견딜 수 없는 것이다.
병이다.
"란우가 형아 응원오면 힘날거 같은데."
"......"
책상앞에 앉아서 전화를 받고있던 나는, 아무 대답없이
노트에 연필로 지그재그의 무의미한 선을 그려댔다.
보고싶었다.
열흘째 만나지 못했다.
그 열흘 사이 부쩍 추워진 날씨에, 엄마는 벌써 더플코트를 입히고 목도리를 둘러서 학교에 보내고 있었다.
지난번에 네가 영국에 가서 사온 것들이였다.
입은거 보여주면, 네가 좋아할텐데.
매년, 계절이 바뀔때마다 새옷을 입은 내 모습을 정성스레 사진기에 담아주던 너였으니까.
"왜 대답이 없어?
내일 토요일인데, 형아 보러 안와줄거야?"
내 대답같은거 미리 다 알고있으면서, 모든 결정권을 내게 넘긴다는듯이 조르는 말투가 미웠다.
차라리, 차 보낼테니까 와. 라고 박력있게 밀어붙여주면 내가 더 편했을텐데.
갈거야, 가고싶어, 보고싶어. 라는 말을 하는게 나에게는 어려웠다.
"학교앞으로 매니저형 보낼게. 알았지?
점심 같이 먹자. 형아 연습하는 것도 구경하고, 응?
다른 형들이 다 란우 보고싶대."
바보처럼 대답도 하지 못하고 노트에 구멍이 나도록 연필만 그어대고있는 나.
"그래도 란우 제일 보고싶은건 태성이 형이야. 알지?
아아, 진짜 보고싶다."
십이년을 들어온 목소리가 어째서 갑자기 멋있게 들리는건가.
만나면 자석처럼 찰싹 달라붙어서 떨어지지 않으면서,
어째서 이토록 수줍고 창피한건가.
나란 애도 모를 놈이다.
"란우야, 형 얘기 듣고있는거야?
왜 이렇게 말이 없어?"
"듣고있어-"
만나면, 아무렇게나 어리광 부리고 고집을 피워서 너를 곤란하게 하는 주제에
고작 열흘 못봤다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내숭이나 떨고있는 모습이,
진짜 봐주기 힘들었다.
"하아-"
네 깊은 한숨의 입김이 내 볼에 닿는 듯 했다.
얼굴을 만지고 싶었다.
그럼, 내 손을 잡으면서 웃어줄텐데.
"전화기뽀뽀말고, 이제 진짜 뽀뽀 받고 싶다.
에너지가 다 떨어졌어. 빨리 만나서 충전해줘-"
역시나, 빠지지않는 뽀뽀타령.
"오늘은 형아가 해줄게, 전화뽀뽀."
"돼, 됐어."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오늘은 자기가 해주겠다고 나서는 바람에 난 당황했다.
"싫어. 할거야."
전화기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줄 알았다.
어찌나 열정적으로 입술을 부벼댔는지, 그 요란한 소리에 얼굴이 다 붉어졌다.
쪽. 쪽. 쪽...
"그, 그만해, 이제!"
누가 말리지 않으면, 밤새도록 그러고있을 기세였다.
"하아-"
그때쯤 너는 한숨이 늘었다.
"내일 꼭 형아보러 와야돼.
이런 플라스틱 장난감 말고 진짜 우리 란우 이쁜 볼따구에다 뽀뽀하게."
결국 나는 그저, 네 뽀뽀밝힘증의 희생양이였던 것인가.
기어코 노트에 구멍이 나고 말았다.
"잘자, 란우야.
내일 만나."
"안녕-"
내일 만나자는 말을 마법처럼 걸어주면, 나는 두 뺨을 분홍빛으로 물들이고는
달디단 꿈을 꾸면서 포근히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태양이 떠오를때까지 너는 잠들지 못하고
연습실 마루바닥에 굵은 땀을 흘리는 것을 까맣게 모르는채로.
확실히 너는, 나를 지켜준건지도 모른다.
카멜색 더플코트에 주황색과 빨간색이 섞인 방울달린 털모자를 쓰고
두툼한 하늘색 목도리에 흰 벙어리장갑.
아이보리 터틀넥 스웨터에 브라운 코듀로이 팬츠.
나이키 키즈의 핫핑크 코르테즈와 파란색 배낭.
머리부터 발끝까지, 심지어 속옷과 내의까지도 '반태성표'로 완전무장.
네가 내 물건 사는걸 워낙 좋아해서
우리 엄마는 따로 내 생필품을 살 필요가 없을 정도였다.
아무리 말려도 소용없었다.
어릴때는 그저 건강하게 아무거나 편한대로 입고 뒹굴면 그만이라는
우리 엄마의 교육철학에도 너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돈 벌어서 다 나한테 쓰는지도 몰랐다.
내 방에 있는 작은 옷장 하나에는 옷이 다 안들어가서
엄마아빠의 드레스룸에도 내 옷이 산더미였으니까.
엄마는 저렇게 갖고싶은거 다 갖고, 부족한거 모르고 자라면
버릇이 없어져서 안된다고 걱정이였지만
너는, 우리 란우는 안그럴거에요, 라며 웃어버리곤 했다.
그때는 너무 어릴때라서 옷같은건 아무래도 좋았고
아침마다 엄마가 입혀주는대로 입을 뿐이였지만,
내 주변 아이들은 그런 나를 어지간히 부러워했던 것 같다.
"이야- 란우, 너무 귀엽다!
반태성 오늘 또 반은 죽어 나가겠는대!"
매니저형은 나를 보자마자 귀엽다며 양볼을 쭈욱 늘려놓았다.
안그래도 추위에 얼어붙은 볼이 얼얼해져 왔다.
장갑을 끼고 코트주머니에 찔러넣은 손을 빼지도 않은채로 인상을 썼다.
"아아! 태성이형한테 이를거에요!"
내 몸에 다른 사람이 손대는걸 질색하는 너였다.
매니저형은 얼른 내 뺨을 놓아주면서 어색하게 웃었다.
차에 올라타자마자, 너는 어떻게 알았는지 귀신같이 전화를 해서는 출발했냐고 물었다.
겨우 열흘을 못봐도 이렇게 두근대고 보고싶은데
다시 또 찾아올 잠적기를 어떻게 보내나 하는 생각에 미리부터 두려워졌다.
첫번째는 뭘 몰랐으니 얼떨결에 속아 넘겼다고해도,
이제 그 공포가 어떤건지 알아버린 나는 생각만으로도 침울해졌다.
자신없었다.
내 안에서 너는 더 견고해졌는데, 그 부드러운 다정함없이 내가 어떻게 살 수 있을까.
목도리안으로 고개를 파묻어버렸다.
"란우야! 란우 아니야? 꺄아-"
연습실앞에 진을 치고있던 너의 팬들중에 몇몇이 나를 알아보고 몰려들었다.
나는, 네가 하는것처럼 고개를 푹 떨구고 매니저형 뒤로 바짝 붙어서 움직였다.
내가 연예인도 아닌데 뭐하는건지.
너때문에 별걸 다해봤다.
지하로 연결되는 심심하고 볼품없는 가파른 회색계단을 내려갔다.
점점 음악소리가 가까워져오고, 거기에 맞춰서 내 가슴도 더 크게 쿵쾅거렸다.
란우야! 하고 달려들줄 알았는데
그냥 나를 보고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는 가까이 걸어와서 말없이 꼭 안아주었다.
"아, 땀냄새나지?"
얼른 나를 떨어뜨리고는 미안한 표정을 짓는다.
나는 가로로 고개를 힘차게 저었다.
그런거 상관없어.
"이야- 우리 란우, 역시 너무 잘 어울린다."
너는 한발자국 뒤로 물러나더니, 품평회라도 하듯이 나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다른 형들도 우르르 몰려와 인사랍시고 한마디씩 건넸다.
"진짜, 잘 어울리네!
반태성, 없는 시간 쪼개서 고생한 보람 있겠다."
네가 자꾸만 웃는 바람에 난 겸연쩍어졌다.
목도리안으로 기어들어가는 얼굴을 너의 두 손이 부드럽게 감싸쥐었다.
그리고는 한마디 예고도 없이, 곧장 내 입술에 쪽.
으아아.
늘 하던 뽀뽀이긴 했지만, 그렇게 갑작스러웠던 적은 처음이라
나는 뭐라 투정도 부리지 못하고 사색이 되어 버렸다.
"조금만 늦었으면, 형아 죽을뻔했어."
그리고는 또 웃는다.
그대로 네 품에 매달려, 언제까지고 떨어지지 않았으면 싶었다.
항상 이렇게 나를 원해주기를 마음속으로 얼마나 바랐는지, 너는 모른다.
매일매일 보면, 하루만 못봐도 힘들어지고
자꾸자꾸 잘해주면, 단 한번의 무심함에도 무너지고 마는게 사람.
두 다리가 묶이고 두 눈이 가려진채로 네 품에 안겨있던 나에게
너를 벗어난 세계라는건 위협이였다.
12월 23, 24, 25일. 3일에 걸친 데이비드의 콘서트는
치열한 티켓팅 전쟁속에서 3분만에 전회매진이라는 초유의 기록을 세우면서
화려하게 막을 올렸다.
나는 너에게서 선물받은 빨간 산타옷을 입고
3일 내내 staff pass card를 목에 걸고 대기실과 VIP석 사이를 종횡무진했다.
여태껏 봐왔던 tv방송과는 비교도 되지않게 넓고 화려한 무대위에서
각종 특수효과와 짜임새있는 구성으로 2시간 내내 눈을 뗄 수 없는 즐거움을 주었다.
난 똑같은 공연을 세 번이나 봤지만, 볼때마다 넋을 잃을 정도였다.
너의 끼에 완전히 압도당했다.
카메라를 통해 tv로 보는 이미지도 강렬했지만
그 콘서트야말로 통째로 반태성 그 자체였다.
너의 모든 재능과 노력이 녹아들어간 하나의 거대한 포트폴리오였다.
눈앞에서 숨쉬고 노래하고 움직이는 너는, 감동이였다.
사람들의 무수한 열광속에 우뚝 서있는 너는,
그 열광을 이끌어내는 너는,
그 열광과 맞서있는 너는,
여전히 나의 영웅이였다.
누구도 무너뜨릴 수 없는 피레네의 성처럼.
콘서트가 끝나면, 2집 앨범의 활동은 공식적으로 마무리되었다.
연말시상식에는 모두 불참의사를 표시했다.
거기에 대해서도 시시비비 말들이 많았지만, 언제나 그랬듯
너는 언론과 대중의 입방아에는 관심이 없었다.
적어도, 없어 보였다.
마지막 콘서트가 끝나고나면, 너의 아파트에서 성탄절 파티를 하기로 약속했었다.
드디어 앵콜곡까지 끝이 나고 나는 한달음에 무대뒤로 뛰어 들어갔다.
땀에 흠뻑 젖은채로 의자에 앉아 숨을 고르던 네가 환하게 웃으면서 양팔을 벌렸다.
얼른 달려가 그 품에 뛰어들었다.
정말 말그대로, 뛰어들었다. 풀장에 뛰어들듯이.
"고마워. 기분 최고야."
네가 너무 세게 껴안는 바람에 가슴이 좀 아파왔지만 상관없었다.
귀에 바짝대고 속삭이는 그 목소리에 기분이 날아갈 것 같았다.
네 목에 감은 두 팔에 더욱 힘을 주었다.
절대로 우리, 떨어지지 말자.
스텝들과의 총 뒷풀이 자리에서 간단한 감사의 인사말을 한 후에
너는 모든 비난과 야유를 뒤로 하고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건 꼭 나와의 약속을 위해서만은 아니였다.
그때쯤의 너는 사람들에게서 별나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사생활 관리를 하고있었고
아주 가까운 지인들 외에는 너와 연락이 닿기도 어려울 정도로 고립된 생활을 하고있었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너에 대한 신비감은 더해가고 인기도 나날이 높아져만 갔으니
너로서는 의도대로 일이 진행된 건지도 모르겠다.
그런 어려운거, 난.
너의 아파트는 온통 성탄절 분위기였다.
"우와아아아-!"
신발을 벗는둥 마는둥, 실내화도 신지않고 뛰어들어가는 내 뒷모습을
아마도 넌 흐뭇하게 바라보았을 것이다.
거실 한 면 가득한 통유리엔 초록색 잎사귀 장식들이 무성하고
붉은색 꼬마전구 대신, 백열전구 크기의 은은한 오렌지빛 조명들이 온 방안에 가득했다.
갖가지 장식의 커다란 트리 아래에는 선물 상자가 한아름이였다.
난,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크리스마스를 보내는 열두살이였다.
"마음에 들어?"
말이라고?
난 이렇게 신경써준 너에 대한 보답으로 활짝 웃어보이면서 네 품으로 폴짝 뛰어들었다.
더 어렸을때처럼 가볍게 나를 안아올리지는 못했지만,
그때까지도 나는 네 몸무게의 절반밖에는 나가지 않았다.
"저기 있는거, 다 란우 선물이야."
"우와- 정말?"
트리아래에 있는 크고 작은 선물상자들은 얼핏 보아도 스무개는 족히 될 것 같았다.
제일 작은 상자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의기양양하게 너에게 물었다.
"저거, 엠피쓰리지?"
얼마전부터 엄마에게 mp3 player를 사달라고 조르고 있었고
내가 엄마에게 뭘 사달라고 조르는지, 너는 언제나 훤히 알고 있었다.
"어? 어떻게 알았지?"
너는 시치미를 뗐지만, 나는 웃으면서 흘겨보고 말았다.
성탄절을 둘이서 보내기는 처음이였다.
네가 가수가 되기전에는 매년 우리 가족과 너희 가족이 모두 모여서
함께 식사를 하고 케이크를 자르고 선물교환을 하곤 했었다.
그 날밤엔 아마도 네분이서 어딘가 멋진 레스토랑에 가셨을 것이다.
나의 우렁찬 '울면 안돼'가 빠진 성탄절이란, 엄청 썰렁하셨겠지만.
트리앞에 주저앉아서 나는 선물을 풀어보기에 바빴다.
너는 줄곧 내 뒤에 앉아서 내 정수리에 턱을 괴고 있었다.
내가 별로 관심없는 옷과 신발, 가방같은게 또 한더미.
레고블럭과 털이 무지하게 부드러운 테디베어 인형.
그렇게도 갖고 싶었던 mp3!
하지만 이번에는 왠지 씁쓸했다.
지난번에 미국으로 떠나면서 핸드폰을 사줬던 기억이 나버린 것이다.
mp3 player를 손에 쥐고도 처음처럼 별로 신이 나질 않았다.
"란우야."
뒤에 앉아있던 네가 나를 가까이 끌어당겼다.
등뒤에 너의 체온이 따스했다.
얼굴을 볼 수 없는게 차라리 다행인지도 몰랐다.
그때 분명, 엄청 못난이 얼굴이였을테니까.
쫙 깔린 네 목소리가 어쩐지 불안했다.
"형아도 크리스마스 선물 받고싶어."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네가 아직 뭐라고 말하지도 않았는데, 눈물이 먼저 나왔다.
"나, 이거 안가져."
내가 먼저 네 입을 막아버렸다.
mp3를 멀찌감치 밀어놓았다.
그걸 안 받으면, 너를 안보내도 되는거라고.
또 어린애같은 고집을 부리려고 했다.
"란우야.."
"싫어, 싫어어!! 말하지마, 이 바보멍청아!!"
결국 나는 졌다.
먼저 돌아보고 말았다.
눈물이 범벅이 된 얼굴을 내가 자진해서 보여주고 말았다.
너에게 덤벼들어 내 손으로 네 입술을 막아버렸다.
하지만 이미 예감이 왔다.
이제 작년처럼 막무가내로 너를 막아설 수 없는 나임을.
너는 내 손에 입을 맞추고 꼭 잡아주었다.
차라리 잘해주지나 말지, 이 나쁜놈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크리스마스를 보내던 열두살 김란우는
순식간에 한치앞도 보이지않는 어둠속으로 내동댕이쳐졌다.
"란우야, 형이 받고싶은 선물은-"
그냥 너를 꼭 끌어안아 버렸다.
눈을 마주하고 그 말을 들을 자신이 없어.
"란우가 형이랑 같이 미국에 가줬으면 하는거야."
그 말에 기뻐한 나는, 순진했던걸까.
누구도 무너뜨릴 수 없는, 감히 접근조차도 할 수 없는 바다 위, 피레네의 성.
거기에 갇힌 나의 슬픈 영웅.
이름은 라푼젤.
_20060220_김다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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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데까지가보자.
안그럼안놔줄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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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