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화 (8/23)

_00008 

같이 가자던 영국을 너는 혼자서 가버렸다. 

배신자, 반태성. 

돌아오면 실컷 괴롭혀줄테다. 

라며 벼르고있던 나는, 오히려 크게 한방 먹고 말았다. 

제발 오지 말았으면 바랐던 개학날은 결국 오고야 말았고 

너는 멤버들과 함께 의류광고 지면촬영을 위해서 영국으로 떠나버렸다. 

나도 따라가겠다고 생떼를 썼지만, 

슬프게도 난 이미, 그게 안된다는걸 알고있는 나이였다. 

겨우 3박 4일 여행이였지만 

(너는 여행도 아니고, 일이라고 강조했지만) 

왠지 내키지가 않았다. 

예감이 안 좋았다고나 할까. 

막 떠오르던 신인여배우와 함께 촬영한다는게 마음에 걸렸던건 아니였다. 

난 네가 여자에 전혀 관심이 없다고 생각했었으니까. 

내가 그렇게 생각하도록 네가 행동해왔으니까. 

돌아오던 날, 너는 내 선물을 잔뜩 가지고 집으로 왔다. 

옷이며 신발, 가방, 학용품이 쇼핑백으로 몇 개나 됐다. 

엄마는 너에게 이런거 자꾸 사주면 안된다고 잔소리를 했지만 

너는 이것저것 내게 입혀보고 신겨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다정하게 미소짓는 얼굴앞에서, 

나를 떨어뜨려놓고 3박 4일 동안 사라졌던건 

또 금방 용서해주기로하는 나였다. 

아파트로 돌아가려고 일어서는 너의 목을 끌어안고 

내가 먼저 입을 맞춰 주었다. 

네가 깜짝 놀란 표정으로 빤히 쳐다보는 바람에, 좀 창피해진 나는 

그만 빨리 가라면서 현관으로 너를 밀어냈다. 

보고싶었다는 말 대신이라는걸, 너는 알았을까. 

몰라도 상관없다. 

아니, 몰랐어야 한다. 

그 다음주 내내 모든 방송국의 연예뉴스 프로그램에서 

화보 촬영을 하는동안 그 신인 여배우와 다정해 보이는 너의 모습에 

나는 이를 갈아야 했으니까. 

어깨에 팔을 두르고, 마주 보면서 웃고 

머리카락을 만지고, 서로 뺨을 맞대었다. 

뭘까. 

속에서부터 확확 열이 끼쳤다. 

그런 기분은 처음이였다. 

버티고 선 땅이 와르륵 무너져내리는 아찔함. 

울었다. 

방문을 꾹 걸어잠그고 침대위에 엎드려서 엉엉 울었다. 

그외에 어떻게하면 좋을지 알지 못했다. 

미워. 

이번엔 진짜 미워. 

가수 한다고 했을때보다, 미국으로 가버렸을때보다, 6개월만에 나타났을때보다. 

그걸 다 합친 것보다. 

전화가 왔지만 받지 않았다. 

왜 화가 났느냐고 물으면, 뭐라고 대답해야할지 몰랐다. 

더이상 어린애가 아닌것이 원망스러웠다. 

이제 죽어도, 네가 다른 여자와 다정한것이 화가 난다는 말은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 말은 내가 너에게 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런걸 알아버린 내가 미웠다. 

그래도, 싫은걸 어떡해. 미운걸 어떡해. 

눈웃음을 웃으면서, 네앞에서 내숭떨던 그 여배우보다 

마주 웃어주는 네가 더 미웠다. 

네가 그럴수는 없었다. 

남자든 여자든, 내게 이름을 물어보는 것도 싫어하던 네가 

아무한테나 덥석덥석 손잡히고 안기면 안되는거라고 정색을 하던 네가. 

네가 어떻게. 

밥도 먹지 않았고, 전화도 받지 않았다. 

엄마아빠와 너의 부모님, 담임선생님까지 비상이 걸려버렸다. 

결국, 네가 집으로 찾아왔지만 나는 할 말이 없었다. 

"란우야, 형이야. 태성이형이야. 

문 좀 열어봐, 응?" 

목소리를 들으니 눈물이 났다. 

실컷 때려주고나서, 잘못했다고 말하는 네 품에 안겨 마음껏 어리광부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내가 커버렸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처럼, 네가 다른 여자와 다정한게 싫다고 말할 수 없어졌기 때문에. 

방문을 두드리는 너의 애타는 목소리는 내 마음을 찢어놓았다. 

함께 있어도 쓸쓸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버리고 

네 목소리가 위로가 되지 않을수도 있다는 것까지 알아버렸다. 

너에게 묻고 싶었다. 

내가 왜 이러는 거냐고. 

그런데 정말 겁이 났던건, 왠지 물어보면 안될 것 같은 느낌. 

너와 나 사이에 숨기는게 있는건 싫었다. 

보여주는게 다가 아닌건 싫었다. 

어른이 되어가는게 이렇게 복잡한 기분속에서 비밀만 커져가는 거라면, 

필요없다고까지 생각했다. 

난 어차피 네옆에만 있으면 되니까. 

아무 근심없이 네옆에서 행복할 수 있다면, 차라리 어른이 되지 못해도 좋다고. 

네가 다른 여자에게 웃어주고 머리 좀 만져준 것 가지고, 인생 최대의 위기를 느끼는 꼴이라니. 

"란우야, 제발 문 좀 열어봐, 응? 

형이랑 얼굴보고 얘기하자. 란우야." 

이틀동안 아무것도 먹지않았다. 

가끔씩 너를 겁주려고 일부러 벌였던 단식투쟁과는 달랐다. 

완전식욕상실. 

먹고싶지 않았다. 

너는? 

난 겨우 열두살인데도, 너한테 하지 말아야 할것들을 알아버렸는데 

그럼 너는? 

너도 이런걸 아는거야? 

아니면 너한테는 내가, 정말로 그냥 아가라서 이런거 모르는거야? 

아니야. 싫어했잖아. 

나한테 다른 사람 손이 닿는거 너 분명히 싫어했잖아. 

다른 사람이 내 머리카락 만지는 것도 싫어했잖아. 

그런데 왜 너는 나처럼 어려워하지 않는거야? 

너는 왜 나처럼 힘들지 않은거야? 

"란우가 형 보고싶지 않아 하는거 같으니까, 오늘은 그만 갈게. 

다른건 다 모르겠는데, 제발 밥은 먹어. 

란우 안먹는동안 형도 안 먹을거니까. 

형 간다." 

이번에는 엉엉 소리도 내지 못하고, 베개에 얼굴을 묻은채 눈물을 쏟아냈다. 

가지마. 가지마. 

마음속으로 몇 번이나 외쳤다. 

가지마, 반태성. 

왜 너는 아니고 나만 이렇게 힘든건지, 그거라도 말을 해줘. 

내가 안먹으면 너도 안먹겠다는 협박에 

다음날 아침, 엄마가 만들어준 죽을 몇 술 뜨고 집을 나섰다. 

비가 오고 있었다. 

학교까지 바래다 주겠다는 엄마를 억지로 떼어놓고 우산을 펼쳐들었다. 

몇일 동안 방치해둔 핸드폰은 쏟아지는 너의 문자메시지와 부재중통화에 전원이 나가버렸다. 

무용지물이 되어버린 핸드폰을 주머니에 쑤셔넣고 빗길을 걷기 시작했다. 

가을비는 제법 쌀쌀했다. 

그 길 말고 다른 지름길로 갔어야 했다. 

한눈팔지 말고 앞만 보고 갔어야 했다. 

버스정류장 가판대는, 정말이지, 함부로 쳐다보는게 아니다. 

「데이비드 반태성, 신인 연진아와 열애」 

하늘이 무너져 내리고 있어 

그리고 자꾸 깊은 곳으로 떨어져 

_서태지와 아이들, 필승 

학교에는 가지 않기로 했다. 

갈까말까, 고민도 하지 않았다. 

갈 필요가 없을것 같았다. 

가면 안될것 같았다. 

사실은.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 전날처럼 눈물이 나는것도 아니였다. 

넋이 나간 사람처럼 가만히 서서 그 열다섯 글자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건 그대로, 열다섯 발의 총알이였다. 

신문1면마다 죄다 그 기사였다. 

선글라스를 쓴 너의 옆모습과 그 여배우의 활짝 웃는 얼굴이 

'열애'라는 노랗고 커다란 글씨 양쪽으로 인쇄되어 있었다. 

그 어느때보다 네가 멀게 느껴졌다. 

내가 아는 네가 아니였다. 

그냥, 연예인 반태성이였다. 

나란히 실린 너의 얼굴과 연진아라는 여자의 얼굴. 

우산을 두드리는 가을비 소리는 후두둑 후두둑. 

그리고 어느 순간 심장에서부터 펌프질해 올려진 눈물이 왈칵왈칵.

내가 너보다 아홉살 어린 것보다 더 화가 나는건 

어지러웠다. 

아침으로 먹은 잣죽이 구역질이 났다. 

반태성, 반태성, 반태성 

가을비가 축축하게 고인 보도블럭위에 나는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반태성, 내가 너보다 아홉살 어린 것보다 더 화가 나는건 

내가 여자가 아닌 남자라는 거야. 

난, 겨우 열두살이였다. 

눈을 뜬 곳은 정신없이 소란스러운 병원 응급실 한켠이였다. 

흰 커튼을 뒤에 두고 서있는 얼굴들이 하나씩 눈에 들어왔다. 

내 발치에서부터, 너의 어머니, 아빠, 엄마, 그리고 내 손을 잡고있는 너. 

"란우야!" 

반태성 너, 웃긴다. 

왜 니가, 우리 엄마아빠보다 더 난리야. 

그리고 너, 이런데 있으면 안되는 사람이잖아. 

이래도 돼, 너? 

"란우야, 란우야, 괜찮아?" 

반태성 나, 다 알아. 

넌, 그 여자한테는 절대로 이렇게 안해줄거야. 

네가 그렇게 심각한 표정으로 걱정하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는거, 나 알아. 

스포츠 신문 1면에 나는 기사들이 다 진실은 아니라는 것도, 나 알아. 

그런데도 나는, 너한테 완전히 길들여져버린 나는 

아주 작은 것도 뺏기기가 싫어. 

거짓말로라도 그런 얘기 싫어. 

너는 내껀데, 너는 나만 필요한데 

사람들이 그걸 몰라줘서 싫은걸 어떡해. 

그래서 내가, 하지 말라고 했잖아. 

너 정말, 나 이렇게까지 힘들게하면서 그거 꼭 해야돼? 

화가 나도, 슬퍼도, 땅밑이 꺼지는 것 같아도, 그게 너때문이라고 해도 

결국 또 내가 찾을 수 있는 곳은 너뿐인데 

네가 그러면 안되잖아. 

어린이는 나라의 보배잖아. 

열두살이면 나 아직 어린이맞잖아. 

거기다가 넌 아직도 나 여섯살 취급하잖아. 

그러니까 이러면 안돼. 

날 이 세상에서 제일 불행한 열두살로 만들거야? 

이런 기분, 이름이 뭐든지 아직은 나 잘 몰라. 

막연히 두려운 생각이 들뿐이야. 

막연히 슬퍼질 뿐이야. 

반태성, 네가 나 지켜주면 안돼? 

"란우야, 형이 잘못했어. 형이 너무너무 잘못했어." 

눈치빠른 너는, 내가 주먹으로 두들겨패지 않았어도 

스스로 용서를 빌어왔다.

내가 뭣때문에 밥을 안먹고, 전화를 안받았는지도 모르면서 

너는 잘못했다고 했다. 

나는 너때문이라는 말조차도 한적 없는데, 너는 네가 잘못한걸 어떻게 알았을까. 

너는, 링게르바늘이 꽂혀있는 내 손을 조심스럽게 감싸쥐고 눈물을 보였다. 

두번째였다. 너의 눈물은. 

처음으로 1위 트로피를 탔을때도, 지난 연말시상식에서 신인으로는 이례적으로 대상을 탔을때도. 

펑펑 우는 다른 형들의 어깨를 다독이면서 끝까지 울지 않던 너였다. 

너는 눈물조차 내앞에서만이였다. 

"형이, 형이 진짜 미안해, 란우야." 

내 손등에 너의 입술이 닿았다. 

그 사이로 너의 따뜻한 눈물이 스며들었다. 

그 순간이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두려운 모든 것들은, 어린이라는 탈속에 감추고 묻어버리면 그만이였다. 

너의 곁을 떠날 용기같은건 애초에 없었으니까. 

이제까지 괜찮았으니까 앞으로도 별탈없을거라 믿어버린 나는 

실제로도 정말 어린이였다. 

난 겨우, 열두살이였으니까. 

_20060218_김다윗 

잘못 알고 있느니,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고 싶다. 

환상에 갇히느니, 무지를 택하겠다. 

그런데, 어디까지? 

너에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