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 .M─ (85/101)

5 .M─

알토넨의 집무실로 들어서다가 멈칫했다. 염병할 칼이 소파에 앉아 있었다.

“웬일이십니까.”

“하하핫. 웬일은요. 알토넨을 보러 잠깐 들렀습니다. 알토넨은 화장실에 간다고 잠깐 자리를 비웠어요. 그런데 마침 본부장님이 들어오다니…… 하핫, 이거 반가운데요. 오늘따라 본부장님의 존재감이 대단해 보입니다.”

예의상 던진 질문 한마디에 돌아오는 대답 한번 더럽게도 길었다. 나는 채찍을 든 손에서 힘을 빼려 노력했다. 칼이 눈짓으로 건너편을 가리켰다.

“본부장님도 앉지요.”

“됐습니다. 용무가 없으면 경께서는 나가 주셨으면 합니다만.”

“이거 섭섭한데요. 이리 노골적으로 냉대하시니 할 말이 없습니다. 그나저나 전에 보낸 선물은 마음에 드셨습니까? 부친께서 매우 아끼시던 그림이라 본부장님 반응이 궁금했거든요.”

알토넨이 똥을 싸고 있는 모양이었다. 변비가 분명했다.

“네. 선물 감사했습니다.”

“그렇습니까. 기쁘군요.”

칼이 만족스럽게 웃으며 느긋이 의자에 등을 기댔다. 오늘따라 작자의 차림새가 좆같이 느끼했다. 단추를 서너 개 푼 하늘하늘한 청동색 셔츠 사이로 팽팽한 흉근을 노출시키고, 엉덩이에 착 감기는 회색 실크바지를 입고 있었다.

반반하고 몸매가 자그마한 놈이면 모를까, 이두박근 삼두박근 우람한 새끼가 저따위로 처 입고 앉아 있는 꼴을 보자니 눈이 썩었다. 거기에다가 더덕더덕 떡칠해 넘긴 갈색머리에서 애교 머리카락이 한 올 쭈우욱 삐져나와 이마에 드리웠다. 향수 냄새까지 진동했다. 부디 알토넨이 최대한 빨리 똥을 싸서 나를 구출해 주길 바랄 뿐이었다.

칼이 나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예전부터 느꼈지만요. 그 가면과 제복코트, 정말 매력적입니다. 울프삭 경께서 직접 주문제작 하신 작품이라면서요? 카리스마가 굉장합니다.”

변태인가. 어떻게 이 빌어먹을 가면과 염병할 제복코트에 매력을 느낄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침묵했다. 칼이 “흐흥.” 하고 묘한 비음을 흘렸다.

“본부장님께서 침묵만 지키시니 민망하네요. 그림에 대한 감상이라도 좀 듣고 싶은데요.”

나는 휴대전화 메시지로 레오파드에게 얼른 화장실로 뛰어가 알토넨을 관장시키라고 명령내릴까 진지하게 고민했다.

“흐응…….”

칼이 또 콧소리를 킁킁거리며 다리를 꼬았다. 소파 언저리에 고개를 기대며 게슴츠레 뜬 눈으로 이쪽을 응시했다. 소름 끼칠 만큼 느끼했다. 하는 짓거리가 완전히 게이 바에서 탑을 꼬시려고 암내를 퐁퐁 풍겨대는 바텀이었다.

…….

저놈, 설마.

“으흥.”

재차 칼이 콧구멍으로 비음을 내뿜으며 다리를 꼬았다. 그러면서 이쪽을 나른히 응시했다. 의심에 못이 따악따악 박히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폭소가 아래에서 치고 올라왔다. 미칠 것 같았다. 웃겨서 돌아버리기 직전이었다. 하하하? 저 잘난 귀족나리께서 이 웬 짓이신가.

《속, 구레나룻》이로구나.

나는 싸늘하게 웃었다. 염병할 새끼였다. 작자도 딴에는 우리가 열나게 비수를 갈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 깐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꼴에 몸을 팔려고 작정하다니, 하수 중의 하수였다. 경솔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만약 내가 스트레이트였다면 하늘을 찌를 망신살을 어찌 감당하려고 저런단 말인가.

아니면, 스트레이트에게도 자신의 매력이 통하리라고 자신했나. 이 자식이 나를 얼마나 우습게 보면 저러나 싶었다. 기껏 실크바지 한 장으로 내 깐깐한 좆을 세우려 시도하다니, 실로 치욕적이었다. 1분이 지나도 알토넨이 돌아오지 않으면 레오파드를 화장실로 급파시키리라 결심했다.

“어, 스네이크. 언제 왔는가.”

알토넨이 들어왔다. 15초만 늦었으면 레오파드의 갈고닦은 관장솜씨를 체험했을 텐데 오늘 구사일생으로 똥구멍을 보전했다. 칼이 실망을 감추지 않으며 “여.” 하고 손을 흔들었다.

“업무를 봐야 합니다만. 바르디 경께서는 이만 나가 주시지요.”

내가 말했다. 칼이 일어서더니 내 옆을 지나치며 눈웃음쳤다.

“아쉽군요. 꼭 그림 감상을 듣고 싶었는데. 다음 기회에 길게 이야기 나누지요. 시간 나면 연락 주십시오.”

그러고는 코를 고문하는 향수 냄새를 남기고 사라졌다. 작자가 나가자마자 나는 채찍으로 바닥을 후려갈겼다. 알토넨을 벗겨놓고 나우트 채찍을 실컷 휘둘렀다. 촛불 샹들리에의 양초까지 뽑아 알토넨을 혼쭐냈다. 간만에 형식을 제대로 갖춘 정통 SM플레이였다.

알토넨의 목구멍이 카우보이에게 추격당하는 버펄로처럼 크르렁크르렁 끓었다. 오전에 칼과 전화통화하다가 무심코 오늘 스케줄을 말했다고 실토했다. 이쪽과 만나기로 한 시간에 딱 맞춰 칼이 집무실을 방문할 줄은 몰랐다고 했다.

“내가 봐도 칼의 옷차림이 하도 요사스러워서 의아하긴 했어. 약혼녀가 있는 녀석이 설마…… 하면서 고개를 갸웃거렸지. 한데 칼이 수고한다며 직접 꿀차를 타 주는 거야. 그걸 마시고 1분 뒤에 설사가 들끓더라고. 그래서 급히 화장실에 갔는데…… 다음부터는 조심하겠네. 앞으론 절대 칼을 집무실에 들이지 않을 테니, 제발 촛농을 그만 떨어뜨리게!”

하고, 울부짖었다. 때 아닌 코미디 한판이었다. 좆같았다.

“설사약! 실크바지!”

쿠퍼헤드와 레오파드가 배꼽을 잡았다. 노기를 가라앉히지 못하는 내 앞에서 웃어 대며 껌벅 죽었다. 책상을 쳐대고 데굴데굴 굴렀다.

“흐흐흐, 우리 본부장님, 인기가 너무 폭발적이잖아. 전에 털북숭이도 본부장님에게 침을 질질 흘려대더니 이번에는 포스트 외척 씨라. 눈 딱 감고 한번 박아 주지 그랬어. 털은 없잖아, 그래도.”

레오파드가 딱 자기 같은 소리를 했다. 쿠퍼헤드가 눈시울을 훔치며 말했다.

“이야, 그래도 칼이 자신의 매력에 자신감이 대단한가 봐. 그 몇 분 사이에 저 눈 높은 우리 본부장님을 사랑의 포로로 사로잡으려고 마음먹었다니 말이야.”

“눈만 높겠어, 좆은 또 얼마나 까다로운데. 흐흐흐.”

녀석들의 해고를 진지하게 고려할 찰나였다. 휴대전화가 진동했다. 짜증을 억누르고 “음. 뭐냐.” 하며 통화버튼을 눌렀다.

―포우 메사라 씨 되십니까.

나이 지긋한 음성이 말했다. 내 휴대전화 번호는 극소수만 알았다. 그중에서도 내 실명을 언급하며 전화를 걸어오는 이는 레이뿐이었다. 대번에 흥분이 가라앉았다.

“누구십니까.”

―레이 아리사 씨의 동거인 맞지요?

그제야 올즈 경사가 떠올랐다. 나는 담배를 한 개비 꺼내며 “계속 말해 보십시오.” 하고 대답했다. 상대방이 나직한 웃음을 흘렸다.

―계속 말하라니 화법이 특이하시네요. 아, 저는 스티그 리 씨의 변호사인 벨마 버커트입니다. 갑자기 이런 전화를 드려서 죄송합니다. 메사라 씨의 전화번호는 레이 아리사 씨가 다니는 병원 담당의를 통해 알았습니다.

나는 담배에 불을 붙이다가 멈칫했다. 섬뜩한 가능성이 뇌리를 스쳤다. 설마, 내 정체를 알아챈 정적들에게 레이가 납치당하기라도……?

“스티그 리 씨는 또 누굽니까? 그리고 무슨 권리로 남의 전화번호를 알아냈습니까! 용건이 뭡니까!”

언성이 격하게 올라갔다. 레오파드와 쿠퍼헤드가 웃음을 뚝 멈췄다. 상대방이 잠깐 침묵하더니 “죄송합니다.” 했다.

다음 순간 나는 멍해지고 말았다.

―다름이 아니라 제 고객이신 스티그 리 씨께서, 레이 아리사 씨가 옛날에 실종된 아들 같다며 친자 확인을 하고 싶다고 하셨거든요.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리 씨께서 오늘 메사라 씨와 만나고 싶다고 하던데요. 시간이 되시는지요.

함정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어서, 장소와 시간을 내가 원하는 대로 정해 달라고 요구했다. 병원으로 연락해 레이의 거취도 파악했다. 멀쩡하게 그림 그리면서 잘 있었다.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레오파드에게 내가 돌아올 때까지 레이와 어딘가에 가 달라고 부탁했다. 레오파드는 군말 없이 바람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 염병이었다.

사회안전 네트워크에서 스티그 리의 신상명세를 파악했다. 깨끗했다. 꽤 알려진 문필가이자 의과대학 교수였다. 사과는 사과나무에서 나는 법이다. 레이가 지금 책을 쓰고, 의학지식에도 밝은 사실을 잘 아는 나로서는 소름만 돋을 뿐이었다.

작자의 주장대로 옛날에 실종된 막내아들이 있었다. 실종 시기는 21년 전이었다. 이 또한 일곱 살에 버림당했다고 털어놓은 레이의 말과 일치했다.

담배를 깊이 빨았다. 일단 리의 집으로 대원들을 급파시켰다. 조금만 꼼수를 부리면 즉각 가족을 납치해 버릴 작정이었다. 방심은 금물이었다. 그러나 내 직감은 리가 레이의 부친이라는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함정치고는 수법이 허술한 탓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정황이 꽤 들어맞았다.

레이를 어찌 찾아냈는가가 가장 큰 의문이었는데, 신상명세를 파악하는 동안 깨끗이 해소되었다. 리의 마누라가 자선만찬에서 레이에게 행패를 부린 그 뚱보 할망구였던 것이다. 뚱보 할망구는 가이거에서 석방되자마자 레이의 병원을 파악했을 터였다. 그러고는 남편에게…… 하며, 나는 마우스 포인터로 리의 사진을 드래그 했다.

그 영감탱이였다. 나와 레이가 눈밭에서 놀고 있을 때 음흉하게 쳐다보던 바로 그 작자였다. 그때 작자가 뭐라고 했던가.

―그쪽이 내 아내의 젊은 모습과 무척 흡사해서 말이오. 내 아내도 금발이거든요. 겨우살이 열매처럼 빛나는 황금색이었다오.

나는 마우스 포인터를 이동하여 실종자 표시가 되어 있는 막내아들 이름을 드래그 했다. 겨우살이Loranthus.

손을 깍지 끼며 의자에 등을 기대려는 찰나 휴대전화가 진동했다. 레오파드였다. 레이와 함께 병원 근처 수목원에서 꿀맛 나게 놀고 있는 중이라고 전해 왔다. 그새 내 이름을 주워듣고서는 포우, 포우, 포오오오오우 해대는 것이 엿 같았다.

“이참에 네 이름이나 들어 보지.”

―나? 일렉스 스파르테. 그럼 되도록 천천히 와. 흐흐흐.

일렉스라. 호랑가시나무Ilex cornuta Lindle에서 따온 이름인가. 삼정승마저 로터스(연꽃Lotus)니, 재포니카(동백나무Japonica)니, 오르키스(난초Orchis)니 부를 만큼 수목을 숭앙하는 왕국 풍조상 이상한 이름은 아니었다. 그래도 저 대단한 근육질 녀석의 이름이 하필 크리스마스트리에나 쓰이는 호랑가시나무라니, 실소가 나왔다. 겨우살이와도 조화가 절묘한 이름이었다.

어쨌거나 이 건을 계기로 부장들의 신상명세 보안에 더욱 철저를 기해야 할 필요성을 절감했다. 담배를 두 대 더 피운 다음 코트를 걸쳤다. 약속장소에는 쿠퍼헤드가 동행하기로 했다. 어쨌든 피할 수 없는 만남이었다. 시체들이 썩어 가는 산기슭에 레이를 내팽개친 그 애비의 낯짝, 기왕에 실컷 노려봐 주기로 했다.

약속장소로 들어가자 지정한 자리에서 리가 일어섰다. 먼저 도착한 쿠퍼헤드는 다른 자리에 앉아서 이쪽을 감시하는 중이었다.

리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앉으십시오.” 하고는 자리에 앉았다. 리가 당황한 표정으로 의자에 엉덩이를 주춤주춤 붙였다.

나는 의자 팔걸이를 톡톡 쳤다. 레이와 리 사이에 몇 가지 궁금한 사항이 있었다.

“반갑습니다. 저는 스티그 리라고 합니다. 병원에 연락해 본 바로는 그쪽이 아리사 씨의 보호자로 기재되어 있어서 이렇게 연락드렸습니다.”

“보호자 아닙니다. 아직까지는 팍스에 신고도 하지 않은 단순 동거인입니다.”

“아, 네. 그럼 신고는 언제…….”

“우리 사생활과 오늘 용건은 상관없을 텐데요. 본론으로 들어가죠. 리 씨의 실종된 아들이 제 동거인 같다며, 친자확인을 원한다고 들었습니다만.”

“……네. 그렇습니다.”

“그런데 제 동거인에게 직접 말하지 않고 저를 통해 의견을 전하는 이유가 뭡니까. 고아 출신인 제 동거인에게 아버지의 갑작스런 등장은 퍽 감동적인 일이라고 판단됩니다만?”

단도직입하는 내 질문에 리의 안색이 하얗게 떴다. 나는 싸늘하게 웃었다. 실종 좋아하네. 진정 실수로 아이를 잃어버렸다면 벌써 레이에게 달려들어 얼씨구나 내 아들 울부짖고도 남지 않았겠나.

리가 시선을 불안하게 옮기며 커피 잔을 들었다. 나는 주먹에서 힘을 빼며 말을 이었다.

“죄송합니다만 리 씨는 제 동거인의 부친이 아닌 것 같습니다.”

“네? 어,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는 겁니까.”

리가 커피 잔을 급히 내려놓았다. 나는 팔걸이에 느긋이 팔을 걸치고는 뜸을 들였다. 궁금한 거나 알아보고 얼른 끝내기로 생각을 정했다. 담배를 한 개비 뽑아 불을 붙이며 말했다.

“하하하. 뭐, 다른 까닭이 있겠습니까. 일단 얼굴부터가 닮지 않았고…… 흐흠. 그리고 리 씨께서 실종 운운 하셨는데, 동거인이 제게 털어놓기론 자신은 부모에게 버림당했다고 했거든요. 버림당한 까닭이야 뭐, 한겨울에 어린아이를 시체가 썩어 가는 산기슭에 유기할 정도면 대충 알 만하죠.”

“…….”

“찢어지게 가난해서 어쩔 수 없이 아이를 버렸다든가, 그런 이유겠지요. 하지만 리 씨는 사회명사 아니던가요? 아! 게다가 면전에서 제 동거인이 그쪽을 알아보지도 못했죠. 자랑이라면 자랑입니다만, 제 애인의 기억력이 무척 비상하거든요. 암만 21년 전에 헤어졌다지만 자기 부모 얼굴을 못 알아볼 리 없죠.”

“기억력이 무척 비상하다라…….”

리가 쓰게 웃었다. 나는 담뱃재를 털다가 멈칫했다.

내 말의 모순을 퍼뜩 깨달았다. 그랬다. 레이는 기억력이 비상했다. 담당의도 혀를 내두른 지능지수의 소유자였다. 하물며 일곱 살이면 웬만한 건 기억할 나이였다.

“이것부터 봐 주십시오.”

리가 앨범을 꺼내 건넸다. 나는 리를 잠깐 노려보다가 앨범을 넘겼다. 작자가 앨범을 꺼낼 때부터 예상했지만 그래도 놀라웠다. 사진에서 어린 레이가 푸른 눈을 멍하니 빛내고 있었다. 치렁치렁한 아마빛 머리카락도 여전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있었다.

나는 레이를 안고 있는 여자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모친인 듯한데, 내가 목도한 그 뚱땡이 프로레슬러와는 판이했다. 리의 외모도 딴판이었다. 지금같이 폭삭 시들어 버린 오이가 아니었다. 어디를 보나 지적인 미남이었다.

나는 리와 사진을 번갈아 보았다. 혹여 레이의 보복을 우려해 부부가 합동으로 성형수술했나, 하는 터무니없는 의혹이 들 정도였다. 사진의 미남이 저 시든 오이와 동일인이 분명하다면, 레이가 부친을 코앞에서 못 알아본 건 당연했다. 누구라도 못 알아볼 터였다.

리가 낯을 일그러뜨리며 말했다.

“의심스럽겠지만, 그 사진의 사람들은 저희 부부가 맞습니다. 아무튼 친자확인 같은 절차는 필요 없겠습니다. 우리 아이가 아니면 절대 알지 못할 사실을 메사라 씨가 언급했으니까요. 네. 맞습니다. 가매장을 앞둔 시체들이 널린 산기슭에 아이를 버렸습니다. 저희 부부가요.”

나는 담배를 비벼 끄고 한 대 더 뽑아 물었다. 귀가 더러워지는 느낌이었다. 그래도 저렇게까지 얼굴 가죽이 찌그러질 정도면 딴에는 21년간 마음고생을 심하게 겪은 듯했다. 조금이나마 기분이 누그러졌다.

“애를 버리고 집으로 향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우리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를 깨달았습니다. 다시 돌아갔는데 그새 아이가 사라졌더군요. 고작 30분 만에요. 수면제를 잔뜩 먹은 애가 제 발로 산을 빠져나갔을 리는 없고…… 산짐승이 물고 갔거니 생각하며 살아왔지요.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러웠습니다.”

나는 담뱃재를 털다가 멈칫했다.

수면제……?

이건 레이에게 듣지 못한 이야기였다. 일순간 뒤통수에서 뭔가가 핑 날아갔다. 당장 리의 목뼈를 꺾어 버리고 싶은 충동을 필사적으로 억누르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자식을 버린 이유가 궁금하군요.”

“……이유라면, 아이가 잘 알고 있을 겁니다. 그 아이는 모든 걸 꿰뚫어 보는 아이였거든요.”

모든 걸 꿰뚫어 본다라.

“아무튼, 제 동거인을 만나고 싶다고 하셨죠? 무엇이든 절차가 있습니다. 제 동거인을 만나기 전에 그쪽이 법적 형사처벌부터 거쳐야 순서 아니겠습니까.”

나는 짐짓 비꼬는 투로 말했다.

리는 고개를 숙인 채 침묵했다.

“대답을 하십시오. 기다리자니 지루하군요.”

나는 리를 노려보며 재촉했다. 그래도 리는 계속 침묵했다.

작자를 긴 시간 쳐다보자니 재차 살의가 치달았다. 열 받아서 돌 것 같았다.

레이는 부모의 거취를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단 한 번도 찾지 않았다. 그 지독한 가난을 겪으면서도 도움을 청하지 않았다.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가.

그건 바로 증오였다. 자신을 버린 부모를 향한 격렬한 증오.

그리고 내 예측이 맞는다면, 레이는 버림당하기 전부터 부모에게 학대당했다. 확실했다. 앨범을 훑어보며 알아차렸다. 젖먹이 때만 제외하면, 함께 웃고 있는 부모형제들에게서 레이는 언제나 따로 떨어져 서 있었다. 거의 모든 사진에서.

“할 말이 없습니까? 형사처벌은 역시 싫은가요? 그럼 저는 이만 가도 되겠지요? 하하하. 찻값은 제가 계산하지요.”

“……이걸 아이에게 전해 주십시오.”

리가 봉투를 내밀었다. 나는 콧잔등을 찌푸리며 봉투를 노려보았다. 할 말이 없냐고 물으니까 대답 대신 돈 봉투를 덜렁 내미신다……?

작자의 짓거리 하나하나가 마음에 안 들고 부아를 돋웠다. 돈 봉투의 의미는 뻔했다. 레이에게 부모랍시고 면상을 들이댈 생각은 없다, 이 뜻이었다. 이 돈으로 우리 이제 쿨하게, 심플하게 끝내자, 굿바이하자, 이런 의미였다.

엿 같았다. 끓어오르는 살기에 머리가 핑핑 돌았다. 레이는 이 순간까지도 부모에게 버림받고 있었다. 내 눈앞에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친 혈육에게 질근질근 짓밟히고 있었다.

“그래도 아이가 잘 자라서 다행입니다. 행복해 보이더군요. 이제는 걱정을 접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돈, 얼마 안 되겠지만 잘 써 주십시오.”

리가 나직하게 말했다. 나는 퍼뜩 정신을 차리며 “네?” 했다.

레이가 잘 자랐다니. 이건 웬 생뚱맞은 소리냐…… 하다가, 곧 깨달았다.

하하하? 이 웬 착각이신가.

자칫하면 폭소를 터뜨릴 뻔했다. 이 의과대학 교수님의 착각에 어처구니없었다. 염병할 착각이었다. 하기야, 정황상 그런 착각에 빠질 만했다.

레이는 모르고 있지만, 내가 그의 치료를 맡긴 병원은 수도에서 제일 비싼 사설 정신병원이었다. 그의 옷이며 보석 핀도 하나같이 최고급품이었다. 그렇게 잘 입고 비싼 병원까지 다니는 광경을 직접 목격했으니 작자 딴에는 착각에 빠질 만도 했다. 레이가 좋은 사람에게 구출돼 잘 자랐으니까 21년이나 부모를 찾지 않았으려니, 단정한 것이다.

나는 웃으면서 담배를 한 개비 뽑아 물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수도에서 으뜸가는 사창가 42번가에서 헐벗고 굶주리며 자란 사람치고는 참 반듯하게 자랐죠. 걱정, 푹 접으셔도 좋습니다.”

“네? 사, 사, 사창가라니요? 지금 무슨 말씀을…….”

리가 눈을 크게 뜨며 말을 더듬거렸다. 나는 리의 면상으로 담배연기를 훅 불었다.

“아, 놀라지 마십시오. 매춘은 안 했으니까. 돈이 없어서 술집에서 잠깐 카운터 일을 본 적은 있었지만요. 뭐, 모르죠. 내게 과거를 숨겼을지도. 하하하. 웬 마귀할멈 같은 여자한테 구출돼서 다락방에 10년이나 갇혀 지냈다고 하더군요. 구타를 당하고 굶기까지 했다고요.”

리는 말을 잊은 표정이었다.

“저와 처음 만났을 때 레이는 헌책방을 운영하고 있었죠. 그 헌책방도 어느 노파에게서 물려받았다고 들었습니다. 겨울에는 장사가 되질 않아 헌책방도 닫고 인형눈알을 붙여 생계를 유지했죠. 영양실조로 쓰러져서 내가 병원에 입원시킨 적도 있습니다.”

나는 한껏 빈정거리는 조로 덧붙였다.

“주신 돈은 레이 명의의 계좌를 개설해서 넣어 두겠습니다. 그 사람 성격에 돈의 출처를 안다면 받지 않을 게 분명하니까요.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꽁꽁 얼어붙은 리를 두고 나는 벌떡 일어섰다.

잿빛 길목으로 눈의 여왕이 추락했다. 눈송이가 너무도 잔인하게 흩날렸다. 나는 봉투를 갈기갈기 찢어 공중으로 확 뿌려 버렸다.

“아니, 본부장님. 요즘 같은 불경기에.”

뒤따라오던 쿠퍼헤드가 봉투조각을 잡으려 뛰어다니며 생난리를 쳤다. 나는 담배를 한 개비 피워 물었다.

“이거 너무하네. 곱게 반 토막만 낼 것이지 이렇게 갈기갈기 찢다니, 이어붙일 수도 없잖아. 그나저나 어땠어? 계속 령에게 달라붙을 것 같아?”

“알게 뭐냐.”

“이야. 도청하면서 들어보니까 가관이던데. 부모가 일곱 살배기 아들을 상대로 살인미수라…… 그것도 저명인사께서. 멋져, 후후후. 뭐, 덕분에 괜히 경찰이 끼어들 일이 없어져서 이쪽이야 고맙게 되었다만.”

쿠퍼헤드가 낄낄거렸다. 나는 담배연기를 길게 불었다.

쿠퍼헤드의 말이 옳았다. 단언컨대 그들 부부의 행위는 치밀한 살인행위나 다름없었다. 왜 그렇게까지 했을까. 리의 말에 이미 답이 나와 있었다.

‘모든 것을 꿰뚫어 본다’.

나와 부장들은 마넨을 취조하는 과정에서, 령의 주술이 사이코메트리Psychometry와 비슷하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접촉을 통해 정보를 탐지해내는 초능력. 주술사들이 말한 ‘오르키투니카’였다.

어린 시절 레이는 그 능력을 아무것도 모른 채 과시했을 가능성이 컸다. 부모에게는 자식이 아니라 악마로 보였을지도 몰랐다. 그러다가 끝내는…….

눈앞이 확 돌아갈 찰나 휴대전화가 진동했다. 레오파드였다. 퍼뜩 정신을 차리고 “음.” 하자, 레오파드가 말했다.

―레이가 같이 저녁이나 먹자고 하는데. 시간 돼?

목소리가 빌어먹게 몽롱했다. 곧 갈 테니 기다리라고 대답한 다음 통화를 끝냈다. 졸지에 겨우살이와 호랑가시나무와 함께 저녁식사를 하는 셈인가.

나는 담배를 튕겨 날렸다.

신경 끄자.

더 곱씹다간 리를 쫓아가서 백주대로에서 목을 비틀고 혀를 뽑아 살해해 버릴 것이 뻔했다. 숙부나 사촌만 되었으면 벌써 보내 버렸다. 오이와 뚱땡이는 마넨과 마라타를 능가하는 원흉이었다. 레이를 둘러싼 모든 불행의 근본이었다.

그들이 부모 노릇만 해 줬어도 레이가 어둠 속으로 처박히지는 않았다. 주술과 정쟁에 조금도 관련 없이 잘살았을 것이다. 가난도 겪지 않았다. 내게 총도 맞지 않았다. 열이 지글지글 끓어올랐다. 걷잡을 수 없이 들끓었다.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쩔 수 없었다. 지금으로선 부디 예기치 않은 사고로 빌어먹을 부부가 끽 하길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진정 엿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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