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 .M─ (83/101)

3 .M─

오전 내내 기분이 야릇했다. 오늘 아침에 레이와 주고받은 대화 때문이었다. 레이는 몸 이상을 알면서도 나를 용서하고 받아들인 것이다. 추호도 짐작하지 못한 일이었다. 행복하고 마음이 놓이는 와중에도 울적했다.

빌어먹을. 그런 이유로 채식을 고집했다니.

“본부장님. 이만 나가 봐야 할 것 같은데.”

밖에서 레오파드가 노크하며 말했다. 나는 빌어먹을 가면을 쓰고 벌떡 일어섰다. 오후에 파티 스케줄이 있었다. 조만간 있을 재포니카 선출식을 앞두고 술이나 한잔하자며 칼이 알토넨을 부른 것이다. 일단 파티는 수락했다.

“본부장님, 방금 들어온 소식이야. 미남 영감께서 코 수술을 완전히 망쳤대나 봐. 울며불며 성형외과를 엎어 놓았대.”

쿠퍼헤드가 사거리에서 좌회전을 하며 말했다. 레오파드가 푸핫, 웃었다.

“뭐냐, 그럼. 퇴원이 더 늦춰진다는 거야.”

“그렇지. 칼도 안됐어. 오죽 초조하면 또 우리에게 윙크질이겠어. 하기야 요즘엔 왕도 이리나를 멀리하것다, 푸셔 영감님의 현재 최대 관심사는 코 수술이것다. 이중고에 칼의 허리가 휘겠지.”

쿠퍼헤드가 낄낄거렸다. 나도 픽픽 웃으며 펀치 잔을 천천히 흔들었다.

칼이 오늘 파티에 알토넨을 초대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이쯤 되자 놈의 전생 고백을 진지하게 믿고 싶어졌다. 잇속에 따라서 이리 붙고 저리 붙고, 하는 짓거리가 확실히 장사꾼이었다. 장담컨대 샤일록의 후예였다.

“참, 스네이크. 오후에 독일에서 연락이 왔는데.”

쿠퍼헤드가 말했다. 귀가 번쩍 뜨였다. 나는 “음. 뭐냐.” 하며 펀치를 마셨다.

“칼의 대학친구가 말했다는데, 꽤 옛날에 칼이 이웃집 부인에게 일방적으로 얻어맞은 적이 있대나 봐. 그로부터 며칠 뒤 칼이 이사를 갔다고 하더라고.”

“흐음.”

“소문에는 칼이 그 부인의 남편하고 동성애를 했다는데, 일단은 대원들이 사실 확인 중이래. 부인도 그 일이 있은 직후 이사를 갔다고 했거든. 확인할 때까지 얼마 안 걸릴 테니까 조금만 기다리라고 하더군.”

“그래.”

내 시큰둥한 반응에 쿠퍼헤드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아무래도 좀 약하지?”

“그렇지.”

나는 담배를 한 개비 뽑아 물었다. 변태들이 대거 포진한 귀족사회에서 ‘유부남과의 동성애’는 박스 기사감도 되지 못했다. 그 정도야 일반인도 흔히 저지르는 실수 아닌가.

내가 갈구하는 작품 모티브는 그따위 시시한 것이 아니었다. 격투기 선수 출신 남자 정부를 서너 명 거느린다든가, 면상에 반드시 오줌 세례를 받아야만 좆이 선다든가, 여자 속옷을 입은 채로 피스트 퍽을 당하며 기쁨의 눈물을 흘리는 취향이 있다든가, 정도는 되어야 이쪽도 연출할 의욕이 솟았다.

“아무튼 그 남편하고 칼이 어떻게 재미를 봤는지 샅샅이 알아내라고는 해 놨어. 혹시 섹스 동영상 있으면 꼭 입수하라고도 말했고.”

쿠퍼헤드의 말에 레오파드가 “비디오라. 기대되는걸, 흐흐흐.” 하며 음흉하게 웃었다. 나는 레오파드의 뒤통수를 탁 때린 다음 빌어먹을 가면을 썼다. 바르디 공작가의 성이 저만치서 형체를 드러내고 있었다.

알토넨을 호위해 회장으로 들어섰다. 화려한 샹들리에가 내부를 환히 밝혔다. 재포니카 선출회를 축하하는 파티답게 대개의 객들이 무신귀족들이었다.

“어서 오시게, 친구! 오랜만이네! 하하핫!”

칼이 시가 연기를 퐁퐁 뿜으며 이쪽으로 다가왔다. 알토넨이 “그래. 그간 격조했지.” 하며 칼과 악수를 나누었다. 칼이 시가를 빨며 눈을 가늘게 떴다.

뭘 봐, 이 자식아.

나는 코웃음 쳤다. 알토넨과 칼이 담소를 나누며 회장을 거닐었다. 며칠 전만 해도 서로 질세라 똥오줌을 끼얹던 작자들이 지금은 대단히 화기애애했다. 이 바닥에서는 신물 나게 구경할 수 있는 꼴이었다.

이리나가 저쪽에 서 있었다. 여기를 보더니 알토넨에게 눈초리를 세우며 고개를 홱 돌렸다. 나는 혀를 찼다.

이 바닥이 다 그런 법이지…….

왕의 정부나 되는 노른자위를 차지해 놓고 설마 그 정도 시련(?)을 예상 못했단 말인가. 알토넨도 재포니카 대리를 시작한 뒤부터 별별 스캔들에 시달렸다. 기침만 한 번 해도 ‘재포니카 대리, 에이즈?!’하는 얼토당토않은 기사가 떴다.

권력의 노른자위에 다가갈수록 지불해야 할 대가도 비례하는 법이다. 그걸 모르고 있었다면 지금부터라도 깨우치는 편이 좋았다. 오래 살고 싶다면 더더욱.

칼이 연신 수다를 떨며 회장을 죽 돌았다. 내 지시대로 알토넨은 칼이 본론을 꺼내기만을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참, 해리. 아버지가 아끼는 그림이 있거든. 구경하지 않겠어? 아무에게나 보여 주는 그림도 아닐뿐더러 대중에게 오랫동안 공개되지 않은 명화야. 그러니까 그림에 관심이 없어도 수락하는 편이 좋을걸. 흔치 않은 기회니까. 하하핫.”

드디어 칼이 본색을 드러냈다. 알토넨이 “좋지.” 하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윽고 칼과 알토넨이 회장을 나섰다. 길고 긴 복도를 걸어간 끝에 칼이 어느 은밀하고 으슥한 문을 열었다.

“어떤가. 실물로는 처음 보지?”

“오필리아 아닌가.”

알토넨이 감탄사를 터뜨렸다. 그림은 독대를 위한 핑계려니, 했는데 그림이 있긴 했다. 뒤엉킨 버드나무 가지가 불길한 그림자를 드리운 잿빛 시냇물 위로, 한 처녀가 옷자락을 드리운 채 떠 있었다.

오필리아……. 덴마크 왕자 때문에 미쳐 죽은 처녀. 시선의 방향은 모호하고, 입술은 살짝 열려 있었다. 노래를 부르고 있는 걸까. 어둡게 물이 밴 치맛자락 옆으로 색색빛깔 꽃들이 떠다니고 있었다.

아름답지만 썩 마음에 들지 않는 그림이었다. 화폭에 멎은 저 순간의 오필리아는 단지 처연한 물의 요정으로만 보이지만, 잿빛 시냇물은 곧 그녀의 옷자락을 단단히 움켜쥐어, 묘혈보다도 깊고 파멸적인 죽음으로 끌어들일 것이다. 조용하지만 비정하게.

“존 에버릿 밀레의 「오필리아」야. 19세기에 꽃말이 유행해서, 화가가 오필리아의 옆에 흩어진 저 꽃들 하나하나에 의미를 넣었다고 하더군. 양귀비는 죽음, 오랑캐꽃은 헛된 사랑. 그리고 저 제비꽃 목걸이는 사랑하는 이에 대한 절개와 젊은 사람의 죽음을 상징한다지.”

“호오. 그런 의미가 있었군.”

칼의 말에 알토넨이 연신 감탄했다.

사랑하는 이에 대한 절개와 젊은 사람의 죽음이라……. 꽃말이 19세기에야 유행해서 망정이었다. 안 그랬으면 눈의 여왕 팬들이 비올라(Viola제비꽃) 성당 명칭으로도 온갖 억지를 부렸을 터였다.

불현듯 의문이 들었다. 어째서 제비꽃일까. 성당에는 보통 성인의 이름을 붙이던데.

“자, 그럼 이야기를 시작할까요?”

칼이 불쑥 말했다. 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흐흠…….

드디어 시작인가.

우선은 알토넨에게 맡겼다. 우리가 일절 반응하지 않자 알토넨이 눈치 빠르게 입을 열었다.

“이야기라니, 무슨 이야기?”

“자자, 일단 앉아서 이야기하자고. 거기 부장님들도 좀 앉지요? 아, 이것도 업무 원칙에 위배되려나?”

칼이 소파에 앉으며 손을 까딱거렸다. 하여간에 좆같은 새끼였다. 손 빌리러 우리를 부른 주제에 더럽게 목이 뻣뻣했다. 일순간 저놈의 모가지를 확 비틀어 버릴까 하는 충동이 들끓었다.

어차피 이곳은 밀실이었다. 칼은 혈혈단신이며 목격자라고는 알토넨과 동료들뿐이었다. 진지하게 갈등하는 찰나, 알토넨이 “무슨 소린지 모르겠군.” 하며 의자에 앉았다. 덕분에 칼의 목숨이 구제받았다. 운 한번 더럽게 좋은 새끼였다.

칼이 미소를 지었다.

“정말 몰라서 묻는가? 허수아비는 치우고 하데스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 뜻이지.”

“뭣…….”

알토넨의 눈빛이 모욕감으로 확 가라앉았다. 나는 조금 전 품었던 충동을 바로 행동으로 옮겨 버릴까 재차 고려했다. 그러나 이내 소리 없이 웃었다. 칼의 심산이 훤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놈의 목적은 다름 아닌 야합이었다.

그간 많이도 초조하셨나 보군…….

작자가 뭐라 나불거릴지 느긋이 지켜보기로 했다. 가이거 같은 악질 사채업자에게 얼마나 만족스럽게 대가를 제시할지 한번 들어 보는 편도 나쁘지는 않았다. 이쪽이 조급해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딴에는 과감하게 한 수 두었는데 묵직한 침묵만 돌아오자 칼도 오금이 저린 눈치였다. 시가를 뻑뻑 빨아대며 안절부절못했다. 저런 꼴만 봐도 역시 그릇이 작았다. 후하게 쳐서 구레나룻보다 두세 수 위라고, 나는 점수를 매겼다.

“이거 재미있군. 내가 가이거의 손바닥에서 노는 허수아비라고 충고하려 여기까지 불렀나? 실망이야. 이 나를 한갓 보좌관들에게 좌지우지 당하는 멍청이로 판단했다니 말이지. 너도 이리나 일로 똑똑히 알았을 텐데. 이 바닥에서는 조금만 비상해도 온갖 협잡과 소문이 따라붙는다는 사실 말이야.”

역시 쓸 만한 허수아비였다. 알토넨이 이리나를 들먹이자 칼의 면상이 단박에 굳었다. 알토넨이 느긋이 담배를 뽑아 물었다.

“그래도 네 입으로 소문을 전해 들으니 나름대론 새롭군. 뭐, 그런 소문이 돈다는 것 자체가 내 리더십에 문제가 있다는 반증이겠지. 그리고? 다른 할 말은 없나?”

연극이면 뭐 어떠냐. 적당히 까불고 그만 본심 털어놓아라. 알토넨이 에둘러서 운을 떼자, 칼이 흠흠, 하고 헛기침했다. 놈의 관자놀이를 타고 흐르는 땀이 제법 볼만했다.

“뭐……, 하고 싶은 말이야 별거 있겠어? 내가 로터스 측에 붙었다고 오해하지 말아 달라, 이거지. 내가 오바스카 양과 약혼하면서 자네에게 이상한 오해를 산 모양인데, 이번 기회에 꼭 풀고 싶어. 난 여전히 네 친구이자 지지자야.”

“그렇게 말하니 놀랍군.”

“믿어 줘. 누누이 말했지만 나는 로터스 푸셔와 붙어먹을 의향이 전혀 없어. 현 로터스 푸셔는 내가 몸을 의탁하기엔 썩 만족스럽지 않은 그릇이거든.”

“하지만 너는 태생이 문신귀족이잖아. 그런데도 로터스에 편입하긴 싫다? 왜? 따로 세력을 만들고 싶어서 그래?”

대화가 본판에 진입했다.

“글쎄. 내가 따로 세력을 만든다면 네가 가만히 있을까? 태생 이야기 잘 꺼냈어. 문신 쪽은 서열이 엄격해서 젊은 녀석들이 조금만 날갯짓하면 눈총을 받기 일쑤거든. 그러나 무신은 실력 우선주의라서 서열은 썩 중요하지 않지. 나도 어느 쪽이 더 장래성이 있는지는 잘 안단 말이야.”

“호오. 장래성이라?”

“지겹지 않나? 몇 백 년이나 이어온 문신과 무신의 대립이? 우리가 손을 잡아서 편한 세상을 만들어 보지 않겠어? 말이 났으니 하는 소린데, 나는 내 여동생이 무신세력이 세울 왕비에 맞서 온갖 고초를 당할 상상만 하면 두렵거든. 아내가 있는 남자를 사랑하는 여자의 고충이 얼마나 심한지 너는 모를 거야.”

“왕과 정리하면 끝이잖아. 이리나라면 얼마든지 좋은 남자와 결혼할 수 있어.”

“너와 내가 손을 잡는다면 이리나가 왕과 정리할 필요도 없지. 나도 여동생이 떳떳이 사랑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 그래서 나도 큰마음 먹고 제의하는 거야. 어떤가. 우린 아직 젊어.”

알토넨의 얼굴색이 변했다. 나도 혀를 내둘렀다. 이리나를 왕에게서 떼어놓으라는 권유를 저런 식으로 받아치다니.

알토넨이 눈초리를 세웠다.

“난 위험한 카드에는 승부수를 걸지 않아.”

“하하핫, 당연히 그렇겠지. 그래서 내가 이걸 준비했네.”

칼이 품에서 작은 케이스를 꺼내 열었다. 한 장의 시디가 들어 있었다.

“이걸 보고 결정해 줘. 자, 그럼 시간을 오래 끌었으니 이만 나가지.”

칼이 벌떡 일어섰다. 알토넨이 탐탁잖은 표정으로 케이스를 받았다. 문을 나서는 순간, 둘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금 담소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들을 뒤따라가며 생각을 정리했다. 칼의 말뜻은 뻔했다. 여동생을 왕비로 올려 달라. 푸셔를 쫓아낸 다음, 너는 재포니카에, 나는 로터스에 오르는 거다. 나란히 정승자리 갈라 먹고 우리 함께 잘해 보자.

실로 웃기는 놈이었다. 이런 욕심꾸러기는 처음 봤네 싶었다. 결론은 둘 중 하나였다. 칼이 천하의 승부사거나, 아니면 천하의 멍청이거나.

당연히 후자지.

거기에 조금도 고민 않고 천만 탈란텐을 걸 수 있었다. 놈이 지금껏 몇 번이나 철새 짓을 했던가. 칼은 앞으로도 얼마든지 우리를 배신할 수 있었다. 배신은 권력의 수성을 좀먹는 일급 악덕이라고 했다.

무엇보다도 칼은 큰 착각을 하고 있었다. 왕의 정부는 왕의 총애가 식으면 끝이었다. 우리로서는 무신세력에서 왕비를 추대하는 일이 제일 수지맞는 장사였다. 일단 시디에 뭐가 들어 있는지 보기로 했다.

파티가 끝나자마자 본부로 돌아가 부장 회의를 열었다. 시디부터 플레이했다. 러닝타임 15분의 동영상이었다. 칼이 오바스카 양과 함께 등장했다. 겁에 질린 오바스카 양의 손을 꼭 잡고, 칼이 재포니카 계열과 손잡고 싶다고 길게 나불거렸다. 충성서약에 가까운 내용이었다.

어찌나 낯간지러운지 타고난 철면피인 포우 메사라마저 일생 최초로 부끄러움을 느껴 버렸다. 부장들도 겸연쩍은 기색으로 턱만 뻑뻑 긁었다. 저거 혹시 푸셔와 짜고 치는 연극 아냐, 하고 진지하게 의심할 찰나, 휴대전화가 울렸다. 직속부하였다.

―지금 공중파 뉴스채널을 열어 보십시오.

공중파 뉴스채널을 켰다. 긴급회견이 속보로 나왔다. 칼이 잘생긴 얼굴에 한줄기 눈물을 흘리며 성명서를 낭독하고 있었다. 이리나가 왕의 아이를 임신했으며, 왕실은 고루한 전통을 꺾고 이 가엾은 여인에게 떳떳한 권리를 달라는 것이 회견의 요지였다.

그날 밤 왕은 내일부터 왕실 주재파티를 재개하라고 왕실 시종장에게 명령했다. 왕실 시종장 왈, 왕의 주둥이가 귀에 걸렸더라고 했다. 좆같았다.

다음날 조간에 푸셔의 중태가 톱뉴스로 실렸다. 푸셔가 전신마비를 일으킨 것이다. 성형수술을 위해 전신을 마취하던 중 일어난 사고라고 했다. 우연한 사고로 치부하기에는 타이밍이 공교로웠다. 그러나 우리가 포섭한 간호사는 의료사고일 뿐이라고 잘라 말했다.

―로터스께서 어찌나 조심성이 많으신지, 물 한 모금조차 부인과 딸이 공수해 온 것 외에는 입도 대지 않더군요. 누군가가 독을 쓸 여지는 전혀 없었습니다.

그날 저녁 왕실주재 파티에 참석했다. 한량클럽과 푸셔 파의 온갖 인사들, 별별 문신귀족들이 칼에게 벌떼처럼 몰려들어 손바닥을 불나게 비벼대는 꼴을 목도했다. 구석에서 쓸쓸히 술잔을 기울이는 문신귀족들은 푸셔파의 몇몇 골수분자와 중견 소장파뿐이었다.

열화와 같은 아부에도 아랑곳 않고 칼은 알토넨 옆에 달라붙어 부지런히 잡담을 나누었다. 이튿날 출근한 내게 커다란 선물상자가 도착했다. 오필리아였다.

토요일 오후였다. 칼이 뇌물이랍시고 떠안긴 자살한 여편네 그림을 차 트렁크에 넣고서 정신병원으로 향했다. 길이 염병으로 막혔다. 겨울장마가 끝나 버려 눈까지 팡팡 떨어졌다.

가는 길목에 신문을 사서 훑어보았다. 지하철 개관식에서 알토넨과 칼이 손뼉을 치는 사진이 1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어김없이 흉물스런 괴물가면들이 그들 뒤에 주르르 늘어선 채로.

기분이 찌그러진 거지깡통 같았다. 나는 담배를 한 개비 피워 물고 기사를 죽 읽어 보았다. 어느 새끼가 썼는지 마무리 문장이 진정 좆같았다.

《사이좋은 두 거물을 축복하듯, 오늘도 가이거 부장들은 묵묵히 호위에 충실한 모습을 보였다…….》

망할 놈의 푸셔. 하필이면 이런 시기에 성형수술 하다가 전신마비에나 걸리고, 빌어먹을. 왕국 역사상 최악의 로터스로 길이 남을 머저리 같으니.

푸셔만 마구잡이로 욕했다. 요사이 정계 최고의 화제는 문신과 무신의 야합이었다. 푸셔의 공백을 틈타 정쟁판에서 급부상한 칼이 가이거와 손잡으리라는 것이 세간의 지배적인 관측이었다.

그 탓에 하루에도 몇 번씩 이쪽에 전화질을 해 오던 폰타네 의원의 연락이 뚝 끊겼다. 얼마 전에는 어처구니없는 정보도 들어왔다. 폰타네 의원이 신문쟁이 후배들을 불러 모아 스네이크와 가이거를 단단히 손보라고 했다는 것이다. 염병이었다.

문신과 무신의 화해? 정국 안정? 놀고 있네. 나는 비웃음을 흘렸다.

19세기부터 지금껏 할퀴고 싸웠다. 그 오랜 대립이 고작 악당 사디스트와 3류 피아니스트에 의해 막을 내린다? 터무니없었다. 나와 동료들은 옛날에 마음을 굳혔다. 칼에게 남은 미래는 비명횡사 아니면 개망신 둘 중 하나뿐이었다. ‘순리를 거스른 사랑’의 실마리를 얻지 못하면 오래 안 끌고 암살해 버릴 작정이었다. 칼의 몰락은 초를 다투고 있었다.

실컷 나대 보라지…….

나는 코웃음 치며 신문을 구겨 차창 밖으로 던져 버렸다. 어쨌거나 오늘은 주말. 일은 깨끗이 잊고 레이와 즐겁게 보내기로 했다. 교통지옥과 한 시간에 걸친 고투 끝에 병원에 도착했다. 이번 주부터 치료 프로그램에 토끼사육이며 식물재배가 포함되는 바람에, 레이는 병원 온실에서 시간의 대부분을 보내기 일쑤였다.

온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하얀 눈꽃이 쉼 없이 덮이는 유리지붕 아래, 넓게 펼쳐진 화사한 꽃밭이 한 폭의 그림이었다. 사육장에서 치료사 루이즈와 함께 토끼에게 먹이를 주는 레이가 보였다. 멀리서도 흰 얼굴이 눈에 확 들어왔다.

잠깐 멈춰 서서 레이를 감상했다. 훌륭했다. 자연스럽게 넘겨 보석 핀으로 고정된 아마빛 머리카락, 클래식한 롱코트, 둥근 술이 늘어진 손뜨개 목도리와 장갑까지, 코디네이션이 아주 조화로웠다. 센스의 황제 포우 메사라의 솜씨다웠다. 물론 저 옷과 소품도 전적으로 옷걸이가 받쳐준 덕에 빛을 발하는 거지만.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나저나 희한하네.

의사와 면담하면서 나는 레이의 또 다른 ‘은밀한 비밀’을 알게 되었다. 놀랍게도 레이는 자신의 용모에 극도의 열등감을 품고 있었다.

―열등감을 넘어서서 거의 망상증에 가까운 수준이더군요. 자신이 괴물에 가깝게 못생긴 사람이 아닐까 끊임없이 의심했답니다. 그래서 사람의 시선을 극도로 기피하고, 봄에도 겨울옷을 입고 다녔다더군요.

의사의 설명을 듣는 순간 내가 얼마나 황당했는지 몰랐다. 레이 같은 미인이 외모에 불만을 품고 있다? 자기 얼굴이 괴물에 가깝게 못생겼다고 생각한다?

이유는 둘 중 하나였다. 레이의 시력에 문제가 있든가. 아니면 레이에게 양심이 없든가. 내 생각에는 후자였다.

백치 같긴 하지만 충분히 아름다운 외모 아닌가. 티 하나 없는 크림색 피부와 눈부신 금발, 단아한 이목구비까지, 전형적인 라파엘로풍의 미인이었다. 침울한 표정만 빼면 어디 하나 흠잡을 데 없었다. 저런 얼굴을 매일 거울로 볼 사람이 자신을 못생겼다고 생각하는 것은 솔직히 양심 없는 거였다.

…….

갑자기 손끝으로 찬 기운이 몰려왔다. 레이가 털어놓았던 말이 귓전을 스쳤다.

「거울이 없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 거예요. 나는 거울 보는 것을 좋아했는데 지금은 거울이 없어서 다행이라고.」

설마…….

점차 실마리가 잡혔다. 그건 정말이지 상상도 하기 싫은 끔찍한 가능성이었다. 혹, 레이가 거울 속에서 마주치는 자신의 얼굴이 고문으로 끔찍하게 망가져 버린 눈의 여왕이라면……?

찌릿한 전율이 전신을 한 바퀴 휩쓸었다. 형용할 수 없는 감각이 치달았다. 별안간 땅에서 유령의 손이 확 튀어나와 내 발목을 낚아채는 듯한 느낌이었다.

급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까지 넋을 놓지는 말아야 했다. 레이가 거울에서 보는 얼굴은 어디까지나 환각 증세가 낳은 허상일 뿐이었다. 다음 내원 때 의사에게 레이의 환각 증세를 말해 주고 대처를 논의하기로 했다.

“메사라? 언제 왔어요?”

레이가 손을 흔들었다. 나는 얼른 미소를 지으며 사육장으로 걸어갔다.

“미안합니다. 내가 많이 늦었군요.”

“그러고 보니 늦긴 했네요. 삼월이와 노느라고 시간 가는 줄 몰랐어요.”

“삼월? 하하하, 그게 토끼 이름? 레이가 직접 지어 줬습니까?”

“네. 삼월이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따왔어요. 3월의 토끼.”

“그랬군요. 삼월이도 레이더러 메리 앤이라고 부르면서 장갑과 부채를 찾아오라고 으르렁거리던가요?”

“비슷해요.”

레이가 토끼에게 먹이를 주며 말했다.

“어찌나 사나운지 나를 완전히 하인 취급하거든요. 지금도 봐요, 손만 뻗어도 물어뜯으려 하잖아요. 그래도 귀여워요. 이래서 애완동물을 키우나 봐요.”

“흐흠. 동물은 다들 귀엽지요.”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레이에게 강아지라도 한 마리 사 줄까 싶었다. 왜 진작 이 생각을 못했을까. 레이는 혼자 있는 시간이 많은데.

“두 분,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좋아하나 봐요.”

루이즈가 내게 토끼풀을 건네며 말했다. 나는 토끼에게 토끼풀을 던졌다.

“아무래도 유명한 소설이니까 상식으로 아는 정도지요.”

“유명해서 되레 안 읽는 사람들도 많잖아요. 가령 앨리스의 모델 말이에요. 작가 루이스 캐럴이 귀여워한 어린 소녀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도 흔하더군요.”

“그 이야긴 저도 처음 듣습니다만. 루이스 캐럴이 제 이웃집 노부인 같은 사람인가 보군요. 그 부인도 저를 아이 취급하거든요.”

“어머, 호호호? 루이스 캐럴은 남자예요. 이름 때문에 여자로 착각했군요? 아무튼 캐럴은 앨리스뿐 아니라 여러 소녀들을 귀여워했대요. 소녀들을 위한 장난감과 놀이기구, 심지어 소녀들이 바다에 들어갈 때 옷을 걷어 올릴 수 있도록 옷핀까지 항시 가방 안에 구비하고 다니고, 마술쇼와 티파티도 자주 열었다나요.”

“왠지 수상쩍은데요.”

“호호, 그렇잖아도 수상한 의혹을 받았대요. 월경 전의 어린소녀를 예찬한 빅토리아 시대의 유행을 감안해도 도가 지나쳤다고 하더군요. 이만 나가죠. 저도 퇴근할 시간이네요.”

루이즈가 차트를 챙기며 말했다. 나는 레이와 함께 온실을 나섰다. 레이가 눈이 떨어지는 하늘을 응시했다.

“병원에 올 때만 해도 눈이 안 내렸는데. 간만에 눈을 보니 새롭군요.”

“그렇습니까. 저는 운전할 생각만 하면 지긋지긋한데요.”

“그도 그러네요.”

레이가 하늘로 손을 뻗었다. 고단한 잿빛 하늘 아래 눈송이가 총총히 뒤엉켜 춤추었다. 온실 앞 앙상한 전나무 사이로 줄을 늘어뜨린 낡은 그네가 소멸해 가는 겨울처럼 쓸쓸히 흔들렸다. 시든 꽃처럼 외로운 풍광이었다.

나는 슬그머니 레이를 곁눈질했다. 레이는 눈이 휘날리는 허공을 멀거니 바라보고 있었다.

“눈사람이나 만들까요?”

나는 레이의 옆구리를 잡아당기며 말했다. 레이와 함께 눈사람을 만들었다. 작은 눈덩이를 살살 굴려 커다랗게 만든 다음, 나뭇가지와 이파리로 눈코입을 붙이고 뿔을 꽂아 주고 팔도 달았다. 우리가 집 앞마당에서 곧잘 하는 놀이였다.

눈사람을 만든 뒤 눈싸움을 하며 장난쳤다. 레이를 업고 신나게 뛰어갔다. 직진, 후진, 좌우회전하며 힘껏 달렸다. 일명, ‘메사라데스 놀이’였다. 운전자 레이는 매우 즐거워했다. 눈발이 거세질 즈음에 레이를 내려놓았다.

“이만 가지요. 곧 있으면 폭설로 변하겠습니다.”

“벌써요?”

레이가 아쉬워하며 한숨 쉬었다. 머리핀에서 살짝 삐져나온 머리카락이 레이의 눈가를 스쳤다. 나는 참지 못하고 레이에게 키스했다. 키스를 하며 레이의 목도리를 풀었다. 코트 깃 속으로 손을 넣어 목덜미를 애무했다. 레이가 내 목에 팔을 휘어 감았다.

하나로 이어진 입속에서 혀가 부드럽게 엉켰다. 타액과 숨, 체온이 길고 짙게 교환되는 순간이었다. 펄펄 날리는 아마빛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훑었다. 입술을 떼어내자 레이는 거의 녹아 버린 표정이었다. 반응해 버린 것이다. 다리까지 풀려 어쩔 줄 몰라 하는 꼴이 재미나기도 하고 즐겁기도 했다.

“하하하. 나머지는 집에 가서 하죠. 여기서 하면 동상 걸려 죽습니다.”

레이의 목도리를 고쳐 매 준 다음 끌어안았다. 레이가 창피한 표정으로 내 가슴팍에 얼굴을 파묻었다. 나는 레이를 꽉 끌어안고 병동으로 느릿느릿 걸어갔다.

실은 아까부터 신경 쓰이던 것이 하나 있었다. 온실을 나설 때부터 눈치 챘다. 웬 영감탱이였다. 병원 본관 출입구 앞에서 계속 이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정확하게는, 레이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눈초리가 아주 엿 같았다. 레이의 옆구리에 빤히 듬직한 임자가 눈 시퍼렇게 뜨고 붙어 있건만, 보통 무례하지 않았다.

변태인가. 정신병원을 들락거리는 변태라면 보통 변태가 아닐 터였다. 출입구로 들어서다가 멈춰 서서 영감을 노려보았다. 꼴에 차림새는 퍽 부티 났다. 공부깨나 한 엘리트 변태의 모범적 샘플로 삼을 만했다.

레이도 뭔가를 느낀 듯, 영감을 흘끗 곁눈질하더니 이내 고개를 돌렸다. 영감이 레이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내 살기 띤 눈초리에도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더는 참을 수 없었다.

“뭘 그렇게 쳐다봅니까, 할아버지. 제 애인에게 관심이라도 있는 겁니까.”

날카롭게 쏘아붙이자 비로소 영감이 이쪽으로 눈길을 옮겼다. 갈색 눈동자가 기묘한 인상을 풍겼다. 작자가 이쪽을 꼭 무슨 개구리 발바닥 관찰하듯 쳐다보았다. 그 눈초리는 흡사 금반지 값을 매기는 구두쇠 전당포 주인 같기도 했다. 이쯤 되자 외려 내가 황당해질 지경이었다.

나는 주먹에서 힘을 빼려 노력했다.

“왜 그렇게 쳐다보느냐고 묻지 않았습니까.”

“……미안합니다.”

잠깐 뒤 영감이 말했다.

“그쪽이 내 아내의 젊은 모습과 무척 흡사해서 말이오. 내 아내도 금발이거든요. 겨우살이 열매처럼 빛나는 황금색이었다오. 지금은 사라졌지만.”

그러고는 고개를 숙이고 자리를 떠났다. 우울한 말투로 보건대 마누라가 옛날에 꼴까닥한 모양이었다. 원무과에 병원비를 지불하면서 영감에 관해 슬쩍 물어보았다. 잘 모르겠다는 대답만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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