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 ─L. (55/101)

22 ─L.

그만 둬, 가지 마!

메사라가 천천히 일어섰다. 그리고는 몸을 돌려 방을 나갔다. 문이 닫혔다.

나는 멍하니 있었다.

그럴 리 없잖아. 메사라가 데이탄즈일 리 없잖아.

눈물로 뺨이 젖어들었다.

‘진심으로 사과합니다. 사랑합니다.’

그것은 자작나무가 듣고 싶어 했던 말이었다.

어째서.

내가 왜 당신에게 그런 말을 들어야 하는 거지.

나에게 사랑한다고 말해 준 사람인데. 아무도 노크하지 않은 문을 처음으로 두들겨 준 사람인데. 나를 원한다고 간절하게 몸짓하며 다정히 끌어안아 준 사람인데. 내게 활력과 웃음과 그리움을 깨닫게 해 준 사람인데. 그 어느 누구도 베풀지 않은 것을 최초로 선사해 준 사람인데.

자작나무가 들어야 할 말을 왜 내가 들어야 하는 거지.

데이탄즈가 해야 할 말을 왜 당신이 하는 거지.

그럴 리 없잖아. 다시 돌아와 줘. 내가 잘못했어.

당신을 사랑해.

나는 자작나무가 아니야. 나는 레이 아리사야.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당신이야.

‘그러나 이 말만은 꼭 하고 싶습니다. 사랑합니다. 당신은 제게 처음입니다. 이런 감정은 처음입니다…….’

데이탄즈가 자작나무숲에서 한 말과 한 치도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이 말만은 꼭 하고 싶어. 사랑해. 당신은 내게 처음이야. 이런 감정은 처음이야…….

순서까지 똑같았다.

그럴 리 없잖아.

나는 바닥으로 주저앉았다. 내면의 무엇인가가 갈가리 찢어졌다. 그럴 리 없잖아. 그럴 리 없어. 그건 그냥 내 대리만족이 낳은 꿈이었단 말이야.

돌아와 줘.

내게 한 번의 기회를 줘.

입을 박차고 울음이 터졌다.

다음날 나는 가이거에서 풀려났다. 단정한 음성이 내게 집으로 돌아가도 좋다고 말했다. 그러고는 쇼핑백을 건네주었다. 스네이크가 준 것이니 무조건 받으라고 했다. 쇼핑백에는 옷과 보석들이 들어 있었다.

순간 아연실색했다. 보석들 중 목걸이가 눈에 띄었다. 기억이 사라졌던 일주일 뒤, 눈을 떴을 때 내 목에 걸려 있던 그 목걸이였다. 내가 그동안 메사라와 함께 있었단 말인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하나만은 분명했다. 이별이었다.

봄이었다. 메사라가 준 옷을 걸치고 거리로 나갔다. 발꿈치까지 닿는 머리카락 때문에 시선이 쏟아졌다. 여전히 타인의 눈길이 두려웠지만, 그럼에도 계속 길을 걸었다.

머리가 텅 비어 있었다. 깜깜하고 길디긴 터널을 달리다가 막 빛이 쏟아지는 밖으로 나온 느낌이었다. 아직은 눈이 부셔서 앞이 분간되지 않는 듯했다.

빛…….

내 상상과 한참 동떨어진 감각이었다. 빛이라면 따스하고 부드러운 느낌이어야 할 텐데 나를 둘러싼 한기는 변함이 없었다.

강가를 느릿느릿 걸으며 생각에 잠겼다.

어린 시절 부모에게 버림받아 동양계 주술사에게 길러졌다. 길러준 은인의 뜻을 저버리고 추악한 음모의 길로 접어들었다. 덧없는 환영에 사로잡혀 방향 잃은 분노를 엉뚱한 곳으로 퍼부었다. 더러운 삶이었다.

메사라가 정말로 데이탄즈일까.

간혹 상상했다. 자작나무가 레이 아리사로 태어났으니 데이탄즈도 같은 시공에서 부활하지 않았을까, 하고.

그러나 왜 하필 메사라지.

어째서 내게 다시없는 행복을 베풀었던 그 사람일 수 있단 말인가.

회색 눈동자가 되살아났다. 주검의 눈빛이었다. 꿈에서 보았던 데이탄즈처럼, 살아 있는 시체였다. 그리고는 서서히 몸을 일으켜 내게 등을 보였다. 걸어 나갔다. 문이 닫혔다.

그리고 나는 홀로 남았다. 메사라를 만나기 전, 그때 그 시간으로 되돌아갔다. 고독과 침묵만이 떠도는 공간으로.

자작나무가 머물렀던 탑처럼, 차디찬 냉기만 서려 있는 그곳으로.

등을 돌리지 말라며 고함치던 사람이 내게서 등을 돌렸다.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라고 한 사람이 내게서 눈길을 거두었다.

내가 사랑했던 활기와 생동감이 모조리 부서져 저 멀리로 사라졌다.

이럴 순 없어.

푸른 강물에 누군가가 비쳤다. 금발을 나부끼며 죽은 눈동자를 한 어떤 사람이었다. 나였다.

헌책방과 집만 오가는 생활이 다시 시작되었다. 이런 지루한 반복이 레이 아리사의 천성인 듯했다. 자작나무 이전의 내 생은 두더지였을지도 모르겠다.

가이거는 나를 여전히 감시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몰랐는데 지금은 명확히 깨닫고 있었다. 네 명의 사복대원이 집과 헌책방 근처를 잠복근무하는 중이었다. 메사라는 일에서는 철두철미했다. 사적인 감정과 별개로 내가 회복되자마자 지하 고문소로 끌고 가서 취조한 사람이었다. 스네이크의 본분을 결코 망각하지 않는 그가 내 감시를 소홀히 할 리는 없었다.

며칠 전에는 큰마음 먹고 머리카락을 잘랐다. 더 내버려두었다가는 머리카락이 아니라 빗자루가 될 판이었다. 그래보았자 종아리에 닿는 길이에서 잘랐지만, 나로서는 큰 용기를 낸 행동이었다.

한 달 내내 골몰했다. 메사라와 데이탄즈의 상관관계에 대해서였다. 내가 그를 데이탄즈로 단정한 이유는 잠꼬대 때문이었다. 메사라에게 털어놓았던 정령 이야기에서 ‘찰나라도 좋으니 한 번만…… Whitebirch.’라는 문구는 없었다. 나는 꿈에서 본 이야기를 변형해서 메사라에게 했고, 당시 그는 뚱한 반응을 보였다.

정말일까. 정말로, 메사라가 데이탄즈일까.

그럴지도 몰랐다. 레이 아리사의 어떤 부분은 자작나무와 별개지만 어떤 부분은 자작나무와 동일했다. 메사라의 어떤 부분은 데이탄즈와 판이했지만 어떤 부분은 데이탄즈와 똑같았다. 메사라가 지닌 짓궂음과 재치는 그만의 것이었지만 잔인함과 영리함은 데이탄즈를 방불케 했다.

그렇다면 지나치게 잔혹했다. 내가 사랑하는 이가 내가 증오하는 사람이었다니. 자작나무는 아직도 나를 얽어매고 있었다. 환각과 고통을 거두는 동시에 레이 아리사로서의 행복까지 앗아가 버렸다.

아니라고 믿고 싶었다. 아니라고 해도, 나는 이미 그를 내쳐 버렸다. 생생히 빛나던 눈동자를 주검처럼 어둡게 만들었다. 그의 온몸에서 넘치던 활기를 죽여 버렸다. 만약 메사라가 데이탄즈가 아니라면, 나는 그와 나 자신에게 씻을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른 셈이었다.

자작나무…….

너는 나를 끝까지 골탕 먹이는구나.

시간은 계속 흘러갔다. 자작나무가 사라진 것을 제외하면, 레이 아리사의 일상은 예전과 비슷했다. 봄에도 겨울옷을 입고 돌아다녔다. 그러지 않으면 안심이 되지 않았다. 사람의 눈길을 두려워하는 습관도 변함없었다.

달라진 점이라고 해 봐야 마넨 경과 더는 전화통화를 하지 않는다는 것, 문신귀족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헌책방을 이따금 얼씬거린다는 정도였다. 저들이 여기를 어슬렁거리는 이유야 가이거가 나를 감시하는 것을 눈치 챘기 때문이겠지만, 구체적인 이유는 알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대개는 감시대원들이 알아서 처리하는 것 같았다.

의원선출 대회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42번가도 대회 열기로 들끓고 있었다. 어제는 먼발치에서 메사라를 보았다. 42번가로 온 알토넨을 수행하고 있었다. 변함없는 모습이었다. 채찍을 들고 미동 없이 서 있었다.

그 모습에 예전의 한때가 기억났다. 차디찬 칼바람 속에서 나는 붉은 꽃을 허공으로 던졌다. 강제로 동원된 군중들이 소리를 지르며 박수를 쳤었다. 그때와 다른 점이라면, 지금은 군중들이 자발적으로 뛰쳐나와 환호한다는 것이랄까. 요즘 알토넨과 무신귀족들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신문이며 방송매체를 보노라면 기분이 묘했다. 알토넨의 뒤에서 교묘히 모사를 획책하는 메사라가 슬쩍슬쩍 엿보였다. 알토넨은 메사라의 꼭두각시일 것이다. 몇 달 만에 바깥세상은 놀라우리만치 달라져 있었다.

내 짐작이 맞는다면 이 모든 변화의 주역은 메사라였다. 마넨 경은 메사라의 손에 살해되었을 가능성이 컸다. 울프삭의 횡액도 사고가 아니라고 확신했다. 그런 황당한 대사건이 동시다발로 터질 리 만무했다. 정말이지 대담한 수법이었다. 저런 모습에도 데이탄즈가 겹쳐 속이 쓰렸다.

이럴 순 없어.

어째서 당신이 그 개자식일 수 있느냐구.

내가 이렇게까지 메사라를 사랑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감성적인 자작나무와 달리, 나는 감정을 미친 듯이 쏟아내는 편이 아니었다. 덤덤히 무심하게 메사라를 떠올리며 가끔씩 우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러나 아니었다. 나는 메사라를 적당히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표현하기는 힘들지만 아주 많이, 깊이 사랑하고 있었다. 메사라가 내게 준 보석과 옷을 볼 때마다 기분이 묘했다. 저런 것도 자작나무가 받았어야 할 선물이었다.

메사라는 내 궁상을 질색한 듯했지만, 나는 가난이 한심한 적은 있어도 부끄러운 적은 없었다. 내가 원한 것은 옷과 보석이 아니었다. 메사라였다.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이었다.

메사라가 주검으로 변했을 때 내 안의 무엇인가가 부서짐을 느꼈다. 남김없이 갈가리 찢어졌다. 그것은 내 영혼이었던 것 같았다. 나도 그와 함께 그때 죽어 버린 것이다.

가이거에서 풀려난 지 석 달째였다. 고등어를 사서 집으로 돌아갔다.

고등어.

씁쓰레한 추억이 되살아났다. 어느 초저녁, 나는 굶주림을 이기지 못해 밖으로 뛰쳐나갔다. 거기서 메사라와 부딪쳤다. 처음에는 상대방의 얼굴이 막연하게 낯익다고만 생각했다. 나는 그때 왜 그를 집으로 끌어들였을까. ‘고등어 좋아해요?’라니.

제정신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섹스를 하면 혹시나, 하는 기대 탓이 컸던 것 같았다. 어쩌면 쓰러진 나를 다급히 안아들던 그의 행동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당시 내게 그는 변태적인 행위에 몰두하는 난폭한 자에 불과했다. 그날도 어김없이 메사라는 끝까지 욕구를 채웠다. 그래 놓고는 내게 약을 먹여 주고 한참을 지켜보다가 떠났다. 아픈 와중에도 이상한 사람이네, 하고 나는 생각했다. 간간이 눈을 뜰 때마다 그는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지금 돌이키면 그런 것도 메사라다운 짓이었다.

황혼이 피어올랐다. 눈만 내린다면, 메사라만 있다면, 그날과 똑같았다.

그러나 그날은 다시 돌아올 수 없다. 언어와 시간이란 흘려보낸 뒤에는 기억으로만 남을 뿐이다. 한번 쏟으면 영원히 주워 담을 수 없다.

메사라와 헤어진 뒤 석 달간 수없는 충동을 느꼈다. 스노우 화이트로 달려가면 메사라를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그때마다 그는 데이탄즈야, 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데이탄즈가 맞는 것 같았다. 아니기를 간절히 바라며 석 달간 집요하게 관찰했다. 지금은 확신에 쐐기를 박았다.

요즘 알토넨은 왕을 비롯하여 무신귀족들을 쥐락펴락하는 실세로 자리 잡았다. 기간을 감안하면 대단한 성장세였다. 알토넨은 평민대표 오르키스, 폰타네 의원과 적극적으로 손을 잡았다. 또한 스캔들을 터뜨려 유력 문신귀족 세 명을 몰락시켰다. 그들의 막대한 재산을 족족 사회로 환원하여 민심까지 손아귀에 움켜쥐었다. 지금은 울프삭 경의 대리에 불과하지만, 향후 가장 젊은 나이로 재포니카에 오르리라 예상하는 이들이 많았다.

그 과정들을 훑고 있노라니 기분이 묘했다. 명분과 실리와 민심을 동시에 움켜쥐는 치밀한 수법에서 자작나무 사건이 떠오르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었다. 가슴 한구석에 못이 박히는 것 같았다.

어째서…….

나는 다시 의문을 떠올렸다. 어째서, 왜 하필이면 메사라지. 어째서 데이탄즈가 메사라일 수 있지.

그리고 그는 왜 이 생에서 나와 사랑에 빠졌지. 하필이면 왜 레이 아리사를, 자작나무의 환생체를 사랑했지.

이 질문을 떠올릴 때, 언제부터인가 눈앞으로 스쳐지나가는 광경이 있었다. 자작나무 초상화 앞에서 주검 같은 얼굴로 술을 퍼마시던 데이탄즈의 모습이었다.

설마 놈은 정말로 자작나무를 사랑했단 말인가. 다시 태어나서라도 자작나무와 또 사랑하고 싶었던 것인가.

아니야! 그럴 리 없어!

나는 곰곰이 되짚어 보았다. 메사라를 처음 만난 순간부터 헤어진 때까지.

우리는 함께 손을 잡고 깜깜한 터널을 질주했던 것 같았다. 그럼에도 그 사실을 추호도 눈치 채지 못했다. 아무것도 모른 채 감정에 휩싸여 내달렸다. 흡사 보이지 않는 손에 떠밀린 듯이.

그럼, 그 종착역의 이름은 무엇일까.

복수?

이별?

별안간 찢어지는 경적 소리가 터졌다. 나는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어느덧 횡단보도 가운데에 서 있었다. 빨간 불인데도 멍하니 걸어간 모양이었다.

경적을 울린 차가 멈춰선 채 있었다. 차창에 검은 코팅이 되어 있어 안은 들여다보이지 않았다. 나는 꾸벅 고개를 숙인 후 허겁지겁 횡단보도를 뛰어갔다.

길을 걸으며 허공을 쳐다보았다. 어슴푸레한 어둠이 깔리고 있었다. 웃겼다. 경적을 울린 차에 메사라가 겹쳐 버렸다. 자동차뿐인가. 문 밖에서 삐걱거리는 판자 소리에도 흠칫거리곤 한다. 이 막막한 시간이 언제까지 지속될지 두려웠다.

겨울 초입이었다. 며칠 전부터 눈이 소복소복 떨어져 내렸다.

헌책방 카운터 앞에 앉아 책을 읽다가 무심코 유리문으로 시선을 던졌다. 길디긴 금발을 늘어뜨린 어느 사람이 보였다. 그의 뒤로 거리가 황폐하게 펼쳐져 있었다. 어둠이 내려앉은 거리에서 행인 두서넛이 띄엄띄엄 걸어갔다. 멀거니 바깥을 응시하다가 다시 책으로 눈길을 옮겼다.

언제였더라…….

작년 이맘때였던 것 같았다. 집을 뛰쳐나가 스노우 화이트로 향했던 때가. 침침한 계단을 내려가서 종업원의 안내를 받아 아무 자리에 앉았다. 칵테일글라스에 건너편의 두 사내가 비쳤다. 그들이 비딱한 자세로 뚱하게 나를 노려보았다. 한 사람은 금발에 회색 눈동자, 다른 한 사람은 은발에 회색 눈동자였다. 둘 모두 목까지 잠근 검은 코트 차림이었다.

비슷한 분위기네, 하고 생각하며 나는 칵테일글라스만 응시했다. 그러다가…….

나는 고개를 들었다. 문 밖에서 인기척을 느꼈다. 어딘지 찌르르한 감각이 온몸을 덮쳤다. 책을 확 덮어 버리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아무것도 없었다.

저만치에서 자동차 불빛이 줄을 그으며 사라졌다.

폭설이 쏟아졌다. 발목까지 푹푹 잠기는 눈길을 걷다가 결국 넘어졌다.

“아…….”

나는 어딘지 지친 기분으로 하늘을 응시했다. 눈의 여왕이 춤추고 있었다.

눈의 여왕…….

매서운 바람에 후드가 확 젖혀졌다. 머리카락이 눈에 섞여 펄럭펄럭 나부꼈다. 지나가던 아이가 흠칫 놀라며 쳐다보았다. 나는 황급히 일어나 눈을 털며 다시 걸어갔다. 헌책방 문을 열다가 왼편 길목으로 눈길을 주었다. 그쪽으로 조금만 걸어가면 스노우 화이트였다.

지겹다…….

“어으, 끔찍해. 끔찍해. 눈의 여왕.”

행인이 투덜거리며 길가에 껌을 뱉었다. 나는 다시금 허공을 쳐다보았다. 새삼스레 이상한 기분이 몰려들었다. 자작나무는 나에게만 속해진 존재인데 사람들은 애꿎은 하늘에 신경질을 내고 있었다. 헌책방 문을 열려다가 관둬 버리고 길을 천천히 걸어갔다.

메사라와 헤어진 지 일곱 달이 지났다. 겨울도 두 달째로 접어들고 있었다. 우리는 제자리로 돌아갔다. 메사라는 열심히 살고 있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즐기며 성공가도를 달렸다. 나도 예전과 다름없이 살고 있었다. 헌책방과 집을 오가며 일상을 흘려보냈다. 그와 나는 제자리로 귀환했다.

제자리로.

그 자리에서 나는 한 가지 생각에만 몰두했다. 메사라와 내가 왜 같은 시공에서 태어나 이런 인연을 맺었는지.

레이 아리사는 줄곧 복수의 길을 질주했다. 마넨 경의 전속 주술사로서 애꿎은 무신귀족들에게 엿을 먹이며 해묵은 원한을 풀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사랑에 사로잡혀 열병처럼 빠져들었다. 그 사랑이 기실 진정한 복수가 되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하고.

일곱 달이 지난 지금도 생생히 기억했다. 내게 사랑을 거절당한 순간 메사라의 눈동자에서 생기가 사라졌다. 주검의 눈빛이었다. 스물일곱 살에야 내게 느닷없이 마술처럼 찾아든 사랑은 한순간에 복수의 칼날로 돌변해, 그를 무참히 살해해 버렸다.

내 사랑의 진짜 이름은 혹시 복수였을까. 하지만 내 마음속으로 사랑을 불어넣은 사람은 메사라 아닌가.

메사라는 내게 첫인상이 나빴다. 그가 집요하게 내 집을 찾아오고, 아픈 나를 입원시키는 등 지속적으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면, 아마도 나는 그를 사랑하지 못했을 것이다. 레이 아리사의 사랑은 전적으로 포우 메사라의 사랑이 이끌어낸 결과물이었다. 이건 어딘가 섬뜩했다.

만약, 메사라가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면…….

그는 내게 잠깐 스친 하룻밤 상대로 곧 잊혔을 것이다. 내 사랑이 그를 무참히 살해하는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메사라는 왜 나를 사랑했을까. 가난뱅이에 궁상맞고, 아무하고나 하룻밤을 보낸 레이 아리사를.

생각 않으려 노력해도 소용이 없었다. 자르고 잘라도 제 길이를 회복하는 머리카락처럼, 연신 솟아났다. 그가 내게 건넨 몸짓과 언어를 되살렸다. 옷과 보석들을 떠올렸다. 그건 누구에게 건넨 것이었을까. 자작나무에게 품은 죄책감의 발로였을까. 그는 자작나무에게 속죄하고자 여기에 태어난 것일까. 그래서 내게 자작나무가 원한 말을 해 주고 선물도 안겼을까. 메사라가 사랑한 사람은 레이가 아니라, 자작나무였을까.

그만둬!

나는 자작나무가 아냐!

그의 영혼이 내 안에 있는 자작나무만을 원했다면…….

한 가지는 확실했다. 나는 자작나무와 별개였다. 영혼을 공유하되 인격은 달랐다. 발을 붙이고 있는 시간도 달랐다. 공간도 달랐다. 육체도 달랐다. 성별도 달랐다. 이름도 달랐다. 그리고 자작나무는 사라졌다. 레이 아리사는 자작나무를 극복했고,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런데도 나는…….

불현듯 모퉁이에서 누군가와 부딪쳐서 넘어져 버렸다.

“죄송합니다.”

나는 급히 일어섰다. 행인이 말을 하려다가 관두는 기색이었다. 그가 기묘한 눈초리로 나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변태인가, 싶어서 기분이 나빠지려다가 문득 낯익은 인상을 받았다. 뚜렷한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처음 보는 얼굴임은 분명했다. 장신의 체격이 메사라를 연상케 해서 그런가.

“죄송합니다.”

다시 한번 꾸벅 인사하며 행인을 지나쳤다. 그가 “아닙니다.” 했다. 나는 몇 걸음 가다가 멈춰 섰다. 기억났다. ‘단정한 음성’이었다.

고개를 돌렸을 때 그는 이미 흔적을 감추고 있었다. 목소리처럼 지적이고 깨끗하게 생긴 남자였다. 어쩌면 메사라도 근처에 있을지 몰랐다.

근처에 있을지도 모른다.

여기에 있을지도 모른다.

하늘을 재차 올려다보았다. 오늘따라 기분이 이상했다. 뭔가 북받쳐 오듯 가슴이 갑갑했다. 왜일까. 작년 이맘때 메사라와의 관계가 급진전되어서일까.

그동안 많은 일이 있었다. 흡사 롤러코스터를 탄 양 감정의 곡선이 요동쳤고 개인사도 파란을 겪었다. 그리고 나는 지금 혼자였다.

과연 혼자일까.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멀찍이 떨어진 도로에서 서너 대의 자동차가 달려가고 있었다.

고개를 돌리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입술을 깨물며 계속, 계속 걸어갔다. 끝없이 눈이 떨어졌다. 희디흰 눈보라가 안개처럼 하늘을 뒤덮었다.

어느덧 드라실 강이 가까이서 드러났다. 광야처럼 기나긴 강가에 말라붙은 고목 한 그루만 쓸쓸하게 서 있었다. 바람이 우수수 흩어졌다.

적막한 강가를 느릿느릿 노닐었다. 강변을 에워싼 한기가 죽음처럼 고요했다. 움직이는 것은 실팍한 얼음장 아래에서 검게 굽이치는 물결뿐이었다. 몽유병 환자처럼 몽롱한 움직임이었다.

며칠 뒤 두껍게 얼어붙어 버리면, 저 물결도 자취를 감추겠지. 그러나 얼음장 아래로도 물결은 계속 흐르겠지…….

바람에 이리저리 흩날리는 잡초가 흐느끼는 소리를 냈다. 먹빛 얼음장에 누군가가 희미하게 떠다녔다. 옷만 다를 뿐, 일곱 달 전과 똑같았다. 긴 금발을 바람에 나부끼며, 죽어 버린 시선을 한 어떤 사람이 서 있었다. 수장된 시체 같았다. 나는 미동 없이 그 사람을 내려다보았다. 별안간 저 모습에 왜 그때의 기억이 겹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날도 지금과 비슷해서였을까.

끊임없이 눈이 떨어지던 겨울날이었다. 17년 전 어느 날, 취적절차를 밟기 위해 법원에 들렀다. 당시 나는 레이라는 이름만 있을 뿐, 성은 없었다. 나를 상담한 호적 관장자는 취적절차를 밟으려면 성을 기재해야 한다고 말했다.

「뭐, 원하는 성이 없니?」

「별로…… 아무거나 생각나는 대로 적어 줘요.」

「어머, 얘 좀 봐.」

여자가 양미간을 찡그리며 생각에 잠겼다.

「그럼 아리사는 어떨까. 내가 어렸을 때 기억나는 모국의 풍경이라고는 도시 한복판에서 도도하게 흐르던 큰 강밖에 없거든. 그 강 이름이 원래는 아리수였대. 나는 세상의 도시를 흐르는 모든 강 중에서 아리수처럼 큰 강은 없으리라고 생각한단다.」

「크기라면 바다가 제일 아닌가요.」

「바다도 강을 타고 흐르면 만날 수 있잖아. 어쨌든 아리수를 변형해서 아리사라고 하자. 어감상 아리수는 성보다는 이름에 가까우니까, 아리사가 나을 거야.」

집으로 돌아오며 나는 고소를 지었다. 묘한 성이네, 하며 계속 웃었다. 일본계인 마라타는 영혼이라는 의미를 담아 내게 레이라는 이름을 붙여 준 터였다. 그 이름에 붙은 성이 강이라니 어딘가 묘했다. 영혼과 강이라. 영혼은 강을 타고 흘러 바다를 만난다는 뜻인가.

그때도 이랬다. 이 길을 따라 걸으며 강을 쳐다보았다. 숨 막히게 몰아치는 눈꽃에 휩싸여서.

레이 아리사. 영혼과 강.

마라타는 내 속에 간직된 격렬한 복수심을 항상 걱정했다. 전속계약을 맺지 말라고 유언을 남긴 이유도 그 때문일 것이다. 내가 전속계약 상대자로 마넨 경을 선택하리라 짐작했던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숨을 내뱉기 직전 마라타는 말했다.

「강해져라. 네 이름처럼, 흐르는 강물처럼 살아라. 그래야 너는 행복해질 수 있어.」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다시 떴다. 쓰디쓴 감각이 온몸으로 몰려왔다. 비로소 마라타의 유언에 서린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흐르는 강물처럼…….

알고 있었다. 실은 똑똑히 알고 있었다. 메사라와 나는, 우리는, 제자리로 돌아가지 않았다.

메사라는 여전히 내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서지 못한 채 멀찍이서 나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나는 그의 숨결을, 향기를 생생히 느꼈다. 언제부터인가 길을 걸어갈 때 간혹 눈에 띄던 자동차, 헌책방 주변에서 가끔 발견한 검은 그림자에서.

그리고 나 역시, 그에게 다가서지 못하고 멀찍이서 그리워하고만 있었다. 내 진심을 필사적으로 외면하고 억누르고 있었다. 강물을 따라 나아가려는 거룻배를 억지로 붙들어 매듯이.

가이거 본부에서 풀려나서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내가 제일 먼저 한 일은 루드 씨에게서 메사라의 휴대전화 번호를 다시 알아낸 것이었다. 그러고도 자작나무에게 얽매여 지금껏 용기를 내지 못했다.

자작나무는 사라지지 않았다. 지금도 나를 얽어매면서 자신과 놀자며 끊임없이 손짓하고 있었다. 어떤 때는 누이동생 같은, 대개는 철천지원수 같기만 한 자작나무는 여전히 내 시야를 흐리게 했다. 자기 자신에게 거짓말하라고 속삭이며 나를 가두었다. 변함없이 병마처럼 나를 속박하고 있었다. 예전과 달라진 것은 거울에 비치는 얼굴과 머리카락 색깔뿐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자작나무가 사라졌다며 자신을 속였다. 레이 아리사는 자작나무를 극복했고, 완전히 잊는 일만 남았다고 거짓말을 읊조렸다. 제자리로 돌아갔다고 믿으려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나는 자작나무가 아니라고 언제나 뇌까려 왔다. 나는 너와 다르다고 곱씹었다. 그러면서도 헤어나지를 못했다. 내가 자작나무가 아니라면, 메사라 역시 데이탄즈가 아닌 셈인데도.

나는 자작나무와 영혼만 공유할 뿐이었다. 메사라도 마찬가지였다. 데이탄즈와 메사라는 발을 붙이고 있는 시간이 달랐다. 공간도 달랐다. 육체도 달랐다. 이름도 달랐다. 처음부터 알았으면서도, 지금껏 외면하고 부정했던 사실이었다.

이제는 행복해지고 싶었다. 이제 더는, 춥고 쓸쓸한 방에서 혼자 밤을 지새우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행복해지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처음부터 알고 있었지만, 자작나무에게 미안해서 모른 척했다.

그러나 더는 버틸 수 없었다. 나는 사무치게 외로웠다. 그리고 메사라와 나는, 우리는, 너무도 간절하게 서로를 원하고 있었다.

더는…… 나를, 메사라를 속이고 싶지 않아. 이제 더는.

나는 한 발짝 걸음을 내딛었다. 이제껏 마음속에서조차 하지 못한 말이 있었다. 자작나무에게 미안해서 계속 숨겨 오던 진심이었다.

메사라가 데이탄즈라 해도 나는 그를 미워하지 못해.

메사라를 사랑해.

그리고 종착역의 이름도 알고 있었다. 처음부터 깨달았지만, 나는 그 이름을 애써 모르는 척했다. 억지로 자신을 속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이름은 완성이었다.

우리는 함께 손을 잡고서 복수와 화해의 터널을 질주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터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제 더는 향기만을 풍기고 도주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헛된 과거가 아니라 현재와 미래를 걸어가야 했다. 자작나무를 완전히 잊는 일이 불가능하다는 것도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더는 자작나무를 미워하지 않기로 했다. 따뜻이 그녀를 보듬으며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것이 레이 아리사로서 남은 시간을 채워 나갈 수 있는 방법이었다.

뒷걸음치면 안 돼.

지금부터라도 앞으로 나아가야 해. 묵묵히 흐르는, 끊임없이 표표히 흐르는 강물처럼.

메사라는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사랑합니다, 하고 말했다. 레이 아리사를 사랑합니다, 라고 말했다. 우리의 인연이 전생에서의 악연과 관련 없다고는 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좋았다. 나와 그는 과거가 아니라 지금 여기, 이곳에 있었다.

하늘에서 눈의 여왕이 휘몰아쳤다. 눈썰매를 타기 전까지 나에게 눈은 곧 죽음과 상통했다. 눈이 일으키는 즐거움은 메사라를 통해 처음 깨달았다. 사람들은 앞으로도 하늘에서 떨어지는 눈에 자작나무를 연관시킬 것이다. 그러나 눈은 눈이고 자작나무는 자작나무였다. 그는 포우 메사라이고 나는 레이 아리사였다. 레이 아리사가 사랑하는 사람은 포우 메사라였다.

손아귀에 눈을 움켜쥐고 잠깐 내려다보았다. 그것을 허공으로 세차게 집어던졌다. 쏟아지는 폭설 속으로 그것은 금방 자취를 감췄다.

나는 걸음을 떼어냈다. 숨 막히게 몰아치는 눈발을 헤치며 걷고 또 걸었다. 어느 사이 강변을 벗어났다. 잿빛으로 얼어붙은 길목 끝에 교차로가 있었다. 외롭게 붉은 불빛을 끔벅거리는 신호등 옆에 공중전화 박스가 있었다.

흐르는 강물처럼……. 나는 다짐하듯 혼잣말했다.

신호등 불빛이 바뀌었다. 다시금 자작나무가 먼 곳에서 나를 향해 손짓했다.

그러나 나는 앞으로 걸음을 내딛었다.

공중전화 박스로 들어가 수화기를 들었다. 동전을 넣고 천천히 번호를 눌렀다. 신호가 몇 번 가고 딸깍 소리가 울렸다.

“음. 뭐냐.”

무심한 음성이었다. 나는 잠깐 미동하지 못했다.

그 사람의 목소리다.

레이 아리사가 사랑하는, 포우 메사라의 목소리다.

헤어져 있던 긴 시간 동안 수천 번, 수만 번 귓가에서 울리고 또 울린, 그의 목소리였다. 쥐어짜도 쥐어짜도 산산이 흩어지기만 할 뿐인 달빛 같은 꿈이 아니었다. 고개를 돌리면 연기처럼 가셔 버리는 환각 따위도 아니었다.

현실이었다.

“뭐냐니까.”

언젠가처럼, 설핏 노기를 띤 음성이었다.

“나예요.”

짧은 시간 적막이 흘렀다. 그러나 나는 알았다. 수화기 너머에서 그의 감정이 주체할 수 없이 휘청거리고 있었다. 숨 막힐 것 같은 감각이 내 전신을 치달았다.

“……레이.”

“예.”

나는 말했다. 사랑한다고. 그때의 거절은 본심이 아니었노라고. 미안하다고. 아직도 내게 마음이 있으면 다시 시작하고 싶다고, 떠듬떠듬 고백했다.

“보석도, 옷도, 필요 없어요. 내가 원하는 건 당신뿐입니다. 당신입니다. 포우 메사라입니다. 당신의 마음이 알고 싶습니다.”

그러자 단숨에 대답이 돌아왔다.

제 모든 것은 당신이 가져갔습니다. 짠맛이 나는 눈물도, 단단한 뼈도, 뜨겁게 흐르는 피도, 맥박 치는 심장도, 열기를 띤 피부도, 바람에 흔들리는 머리카락도, 빛나는 눈동자도, 날카로운 이빨도, 언어를 토하는 혓바닥도, 붉은 땅을 딛고 선 두 발도, 손짓과 행동, 체세포 하나하나, 마음 한 조각 한 조각, 그리고 영혼까지 그 모든 것이 당신의 소유입니다.

단호한 음성이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쏟아지는 그 고백은, 거의 울음과도 같았다. 아니, 울음이었다.

“기다려요. 지금 바로 가겠습니다. 거기 어딥니까?”

메사라가 말했다. 나는 장소를 말한 뒤 전화를 끊고 공중전화 박스를 나왔다. 8분에 걸친 통화였다.

단 8분 만에…….

뭔가 기묘한 기분에, 나는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창백한 태양이 잿빛 하늘을 어슴푸레 밝히고 있었다. 우두커니 선 낡은 골목으로 눈이 뚝뚝 떨어졌다. 비명을 지르는 바람이 캄캄한 거리를 휩쓸고 지나가는 늦은 오후였다. 나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걸음을 옮겼다.

단 8분 만에.

다시 한번 멍하게 뇌까렸다.

메사라와 만나기로 한 카페 앞 가로등에 등을 기댔다. 손톱을 세운 눈발이 사납게 몰아쳤다. 쇠창살에 매달린 간판들이 가늘게 몸을 떨었다. 시간이 느릿느릿 흘러갔다. 그래도 현실감이 들지 않았다. 곧 그를 만난다. 포우 메사라를 만난다. 내가 사랑하는 포우 메사라를 만난다.

홀연, 나는 고개를 치켜들었다. 눈꽃이 부딪쳐 허물어지는 도로 끝에서 붉은 빛이 반짝거렸다. 희미했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나는, 알 수 있었다. 미칠 듯이 몰아치는 눈꽃도 잊어버린 채 숨도 쉬지 못하고 불빛을 바라보았다. 불빛이 차츰차츰 커져 갔다.

그 사람이다…….

포우 메사라가, 레이 아리사에게 달려오고 있다.

자동차가 저만치서 멈춰 섰다. 문이 확 열리며 장신의 남자가 밖으로 뛰쳐나왔다. 그가 나를 향해 팔을 활짝 벌렸다. 나는 그에게로 달려갔다. 그가 나를 끌어안았다. 나도 그를 끌어안았다. 삽시간이었다. 단 8초도 안 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그 순간, 긴 시간 내 육신을 잔인하게 짓밟은 분침 소리가 산산이 증발되는 것을 느꼈다. 눈물도 키스도 없었다. 단지 포옹뿐이었다. 끌어안고 끌어 안겨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죽음마저 몰아내 버릴 듯한 억센 얽힘이었다. 파리하게 질린 입술에서 침묵만이 풀려나오는 시간이었다.

한참 뒤에야 나는 그의 등에서 손을 풀었다. 그의 얼굴을 응시했다. 엉망이었다. 술 냄새까지 지독했다. 그러나 망상이나 환각 따위가 아닌, 체온을 띠고 맥박이 생생히 박동치는, 살아 있는 포우 메사라였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그의 차가운 뺨을 만졌다.

“추워요. 다른 곳으로 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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