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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M─ (54/101)

21 .M─

머리가 아팠다. 뒤통수가 깨질 것 같았다. 잠깐 뭐가 뭔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악몽을 꾼 듯했다. 기억은 나지 않지만, 꿈이라서 정말이지 다행이라고 안도할 정도면 무시무시한 악몽이 분명했다. 나는 가까스로 눈을 떴다.

“제기랄.”

뭐야, 여기는.

눈을 깜박거렸다. 침침한 천장 아래에 누워 있었다. 순간 전신에 오한이 스며들었다. 비로소 어젯밤에 저지른 일이 뇌리를 스쳤다. 둔기가 뒤통수를 때리는 듯했다.

내가…… 무슨 짓을…….

토요일 오전에 일을 마치고 오후부터 업무실에 틀어박혀 술을 마셨다. 나는 술에 매우 강했다. 이제껏 취해 본 역사가 없었다. 그런데 어제는 오후 한 시부터 새벽 두 시까지 보드카를 쉬지 않고 퍼마셨다. 제아무리 나라도 취하지 않을 재간이 없었다. 그러다가 훌쩍 일어나서 지하 고문소로 내려갔다. 그렇게 과음해 놓고도 전혀 비틀거리지 않았다.

그리고…….

마른침을 삼켰다. 눈동자만 굴려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내게 끌어 안겨 가슴팍에 머리를 기댄 아마빛 머리카락이 보였다.

머리가 하얗게 비었다. 레이는 아직 거동이 불편했다. 그런 그를 안고서 별별 짓을 저지른 것이다. 성질 못 누르고 날뛰었다. 온갖 폭언까지 퍼부었다. 최악이었다. 무릎 꿇고 싹싹 빌어도 모자랄 판에 되레 불구덩이로 뛰어들었다.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레이가 물끄러미 이쪽을 쳐다보았다. 푸르고 텅 빈 눈동자였다. 분노도, 실망도,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정지해 있었다. 그때처럼, “머리를 식히는 게 좋겠군요, 메사라.” 할 때와 흡사했다. 똑같았다.

“……조금 있으면 식사가 와요.”

레이가 말했다. 내 낯으로 피가 몰렸다. 급히 옷을 입고 빌어먹을 가면을 썼다. 레이도 느릿느릿 옷을 입었다. 직후 밖에서 기척이 났다.

고문관이 식사를 들고 오다가 움찔했다. 그러나 눈치 빠르게 식사만 놓고 얼른 나갔다. 아침 일곱 시에 금발미인과 본부장이 나란히 있는 꼴에 어떤 추측을 할지는 불 보듯 뻔했다. 좆같았다.

레이를 부축해서 의자에 앉히는 내내 머릿속이 엉망진창으로 뒤엉켰다. 콘돔도 안 쓰고 미친 듯이 그의 안에다가 사정했다. 섹스가 아니라 횡포였다. 무표정한 레이에게서 생각을 읽어내기란 불가능했다. 화났을까. 당연히 그럴 것이다.

레이는 포크로 음식을 헤집기만 할 뿐이었다. 나는 그의 앞에서 가면을 벗고 한참 시간을 흘려보냈다. 가슴이 이루 말할 수 없이 갑갑했다. 스멀스멀한 기운이 전신으로 퍼져 나갔다. 뜨겁기도 하고 차갑기도 한 감각이었다. 그와 함께 나눈 추억이 눈앞을 스쳤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이었다. 지금 우리는 이렇게 되어 버렸다.

그리고 나는 그의 앞에서 가면을 벗었다. 하나는 분명했다.

다시 시작하고 싶었다.

“……미안합니다.”

힘겹게 입을 열었다. 레이는 포크만 움직였다.

“예. 저는 이런 사람입니다.”

다시 한번 말했다.

레이는 어떤 반응도 하지 않았다. 이제는 포크까지 멈추고 있었다.

“제가 당신의 가슴에 총을 쏘았고, 당신의 상관을 두들겨 팼습니다.”

괴롭게 말했다. 여전히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예. 제가 스네이크입니다.”

비로소 레이가 포크를 내려놓고 입을 열었다.

“그 문제로 제가 그쪽을 탓할 수야 없지요. 저도 그쪽을 노렸으니까요.”

푸른 눈동자가 나를 응시했다. 기묘한 시선이었다. 희귀한 외계생명체를 보듯 했다.

긴 시간 나를 바라보던 레이가 불쑥 말했다.

“어제요…… 무슨 꿈 꿨어요?”

“예?”

엉뚱한 질문에 나는 어리둥절해졌다.

“기억이 안 나는데요.”

“정말요?”

“예.”

레이가 픽 웃었다. 그답지 않게 비틀린 미소였다.

“하긴, 그럴 리 없지.”

어투도 이상야릇했다.

나는 침묵했다.

침착해라, 포우.

지금이 일생일대 제일 중요한 순간이야.

나는 입술을 달싹거렸다. 거의 쉰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사랑합니다.”

레이의 눈동자가 또다시 정지했다. 나는 그의 저런 눈빛이 싫었다. 그 다음에 올 잔인한 말이 두려웠다.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예.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것 압니다. 말도 안 된다는 것도 잘 압니다. 저는 엄청난 짓을 당신에게 저질렀으니까요.”

분노와 좌절감이 뼛속까지 후벼 팠다.

레이는 눈을 내리깔고 옷자락만 만지작거렸다.

“그러나 이 말만은 꼭 하고 싶습니다. 사랑합니다. 당신은 제게 처음입니다. 이런 감정은 처음입니다.”

옷자락을 만지작거리던 손이 우뚝 정지했다. 이내 바르르 경련했다. 격렬한 손짓이었다.

레이가 고개를 확 쳐들었다. 나는 무의식중에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 눈초리였다. 병상에서 나를 노려보던, 원한이 가득 들어찬 눈빛이었다.

“그럴 리 없어! 장난치지 마!”

“장난이라뇨?”

나는 곧바로 대답했다. 레이의 격렬한 반응에 전신이 타올랐다.

장난이라니.

“어째서 장난으로 치부하는 겁니까. 제가 왜 당신에게 그런 장난을 치겠습니까.”

레이가 미동 없이 나를 쳐다보았다.

“제가 당신에게 장난을 쳐서 얻을 게 뭐가 있겠습니까. 진심입니다. 그리고 당신도 전에 제게 말하지 않았습니까.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예. 그랬지요.”

“……지금도 그 마음이 변하지 않았다면.”

“그래서요? 다시 시작하자구요?”

레이가 웃었다. 눈빛을 일렁거리며, 입 꼬리만 올린 기괴한 표정이었다. 분노와 불신과 경멸이 가득했다. 그리고 저 모든 것이 나를 향하고 있었다.

처음이었다. 그에게서 저런 모습을 발견하리라고는 조금도 상상하지 못했다.

나는 가만히 있었다. 절벽 끝머리에서 간신히 버티는 느낌이었다. 형용하기 힘든 감정이 온몸을 파고들었다. 내 앞으로 다시금 막막하고 차가운 어둠이 펼쳐지고 있었다. 분침 소리만 존재하는 메마른 시간이 깔리고 있었다.

냉정을 찾으려 애썼다. 피가 나올 만치 주먹을 움켜쥐었다.

“제멋대로군요. 과거는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똑똑히 알 텐데요.”

레이가 다시 한번 미소를 지었다. 찰나 나를 향해 시선을 꽂았다.

“말 한 마디로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으리라는 착각을 하고 있었다면, 지금 당장 집어치우라구!”

레이가 전신을 경련하며 주먹을 움켜쥐고서 고래고래 소리쳤다.

내 몸속 어딘가에서 파동이 일었다.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갔다.

그가 나를 거부했다.

온몸으로 거절했다.

밀어냈다.

꺼지라고 명령했다.

분명하게 의사를 밝혔다.

나는 마른 입술을 깨물었다. 진정해라, 포우.

“예. 다시는 돌이킬 수 없지요. 그렇습니다. 저는 당신에게 총을 쏘았고, 당신의 상관을 함정에 몰아넣었으니까요.”

한 가지는 분명했다.

나는 레이의 어둠이 되기는 싫었다.

내 앞에 펼쳐진 어둠은 내가 버티기만 하면 끝이지만, 내가 그의 어둠이 되는 짓은 하지 말아야 했다. 나는 레이에게 드리운 병색이 싫었고 가난이 싫었고 어둠이 싫었다. 거기에 나까지 암흑으로 화해 그를 드리우지는 말아야 했다.

나는 레이에게 잔인한 짓을 이미 넘치게 저질렀다. 그리고 레이는 내게 꺼지라고 단호하게 명령했다. 그렇다면 물러서야 했다. 그에게서 뒷걸음쳐야 했다. 그것이 레이가 나에게 원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이것으로 끝인가.

진정 끝이란 말인가.

지금 이 순간이 마지막이란 말인가.

가슴이 먹먹했다.

괜찮았다. 나는 나서야 할 때와 물러서야 할 때를 잘 아는 것이 장점이었다.

“그런 주제에 제가 당신의 감정까지 원한 것은 과욕이었습니다. 너무 이기적이었군요. 미안합니다. 제 생각만 했습니다. 다시는 괴롭히지 않겠습니다.”

레이가 나를 거부한다면, 나는 그를 놓아주어야 했다.

상관없었다. 이대로도 충분했다. 지나칠 만큼 넘쳐흘렀다. 레이를 만나 다시는 잊을 수 없는 사랑의 시간을 보냈다. 죽을 때까지 망각하지 못할 것이다. 그와 함께 길을 걷고 눈썰매를 타고 여행을 했다. 춤을 추었다. 키스를 했다. 사랑합니다, 라고 말했다. 저도요, 라는 대답도 들었다.

레이의 심장이 멎은 순간,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을 깨달았다. 오로지 하나만을 갈망했다. 그가 죽는 것이 싫었다. 그가 살아 주기만을 바랐다.

그리고 레이는 살았다. 지금 살아서 생생히 숨 쉬고 있었다. 뜨겁게 맥박 치는 몸으로, 금발을 늘어뜨린 채, 푸른 눈으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포우 메사라는 레이 아리사를 위해 무엇인가를 해 주려고 노력했다. 속죄하려 몸부림쳤다. 차디찬 갈라테이아에 생기를 부여하려 애썼다. 그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것만으로도 나는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남자였다.

“당신의 감정은 조금도 배려하지 않았군요. 미안합니다.”

나는 그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진심으로 사과합니다.”

그렇게 말하며 그의 손에 입을 맞추었다.

“사랑합니다.”

신은 내게 어떤 사람을 내동댕이쳤다. 겁 많고 우울하고 힘없는 사람이지만 그는 내게 사랑이라는 춤을 선사했다. 화려하고 뜨거운 춤이었다. 그리고 그는 이제 내게서 떠나려 날갯짓했다. 내게는 앞으로 죽을 때까지 그를 회고할 길디긴 시간만이 남아 있었다. 아무래도 좋았다. 29년 인생에서 조금도 느끼지 못한 감정이 봇물같이 터졌다. 뜨거운 한낮의 소나기처럼 그것은 나를 미친 듯이 적셨다. 급기야 나는 익사체가 되었다. 물풀같이 축축한 아마빛 머리카락에 휩싸여 사랑이라는 이름의 바닷물로 침수했다. 헤어나지 못할 것이다.

나는 이미 죽었으니까.

레이 아리사에게 살해당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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