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M─
“할 이야기가 있는데 오늘밤 시간이 돼?”
“안 됩니다. 약속 있습니다.”
구레나룻이 또 치근덕거렸다. 나는 칼같이 거절했다.
이놈을 볼수록 분통이 터졌다. 릴리즈에게 달려가 우리 이야기를 꼬불친 일만 되살리면 피가 끓었다. 하는 일 없이 본부를 들락날락하는 것도 꼴사나웠다. 거기에 며칠 전부터는 틈만 나면 내 업무실로 들어와 지린내를 퐁퐁 풍겼다. 돌아 버릴 지경이었다.
이놈을 언제, 어떻게 손봐 주면 좋을까…….
나는 의자에 등을 기대고 앉아 채찍을 까딱까딱 놀렸다. 이런 내 모습이 구레나룻을 외려 자극한 모양이었다. 얼굴이 뻘게지면서 몸을 배배 꼬았다. 목도하고 있노라니 절로 오마이갓이었다.
구레나룻이 헛기침했다.
“어, 어쨌든 중요한 이야기야. 아무래도 자네와 내가 긴히 대화를 나눠야 할 듯해서 말일세. 보안 문제도 있고.”
네가 감히 보안을 운운할 자격이 된단 말이냐?
나는 한껏 코웃음 쳤다.
“보안이라면 이 업무실이 최곱니다. 도청장치도 없고 보는 눈도 없습니다. 여기서 하시지요.”
“흠, 그럼 어쩔 수 없군. 사실은 말일세. 얼마 전 그리폰 사에서 내게 부탁한 것이 있다네. 자네가 모를까 봐 설명하자면, 그리폰 사는…….”
“국내 원전 건설업체죠. 그런데요?”
내 차가운 말투에 구레나룻이 움찔했다. 나는 채찍을 까딱까딱 놀리며 놈의 면상을 노려보았다.
“예전의 술집 파티 때와 마찬가지로 아리사 님께서 직접 울프삭 경에게 전하면 그만 아닙니까? 저희 업무는 원자력 발전소 건설업이 아닙니다만. 멍청한 평민이 고도의 기술력이 필요한 사업에 무슨 관여를 하겠습니까.”
일부러 빈정거렸다. 실은 다 알고 있었다. 정부가 발주하는 카타콤 원자력 발전소 공사를 따내고자 숱한 로비스트들이 정부 관료들에게 접촉하는 중이었다. 그중 가장 집중적인 표적 대상이 울프삭 경과 마넨이었다.
2년 전부터 울프삭 경의 업무실을 자유자재로 들락거리는 이는 극소수에 불과했고 나는 그중 한 명에 속했다. 따라서 뒷공작을 꾸미려는 똥파리들은 일찌감치 나를 찾아와 손바닥을 싹싹 비벼 대거나 쿠키 상자를 떠안기고는 했다. 인즉 로비스트들은 이미 한참 전에 나를 찾아온 터였다. 독일과 프랑스, 한국, 일본 등지의 해외 건설업체들을 비롯해 그리폰 사를 포함한 국내업체까지 모두, 진즉 내 앞에서 지문이 사라질 만치 손바닥을 싹싹 비비고 돌아갔다.
검토한 바 그리폰 사는 불량업체로 드러났다. 그래서 후보 업체에서 제쳐 두었는데, 그새 그리폰 사가 구레나룻을 찾아간 것이다. 우리 정보에는 작자가 벌써 ‘쿠키’를 얻어먹은 것으로 나와 있었다. 건방진 자식. 벌써 뇌물 맛이나 보다니 대단한 싹이었다.
나는 차갑게 웃었다. 일단 구레나룻이 어찌 나올지 지켜보기로 했다.
“자네가 저번 일에 유감이 많은 줄은 알았네만 과거지사 아닌가. 술집 수행은 스타소프의 고집이었어. 나는 반대했다구. 십상시 이야기는 지금 깨끗이 사과하지. 내 만용이었네.”
발등에 불이 떨어지자 비로소 구레나룻이 사과했다. 쿠키 맛이 제법 달콤했나 보았다.
“자네도 그리폰 사를 알고 있다니 바로 본론을 꺼내겠네. 발전소 입찰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재포니카께서 그리폰 사를 적극 밀어 주시면 어떨까 해서 말이야. 기왕이면 국내업체에 발주하는 편이 국가경제에 득이 되지 않겠는가.”
“요컨대, 저더러 울프삭 경과 그리폰 사의 만남을 주선해 달라는 뜻입니까.”
“바로 그걸세.”
“아리사 님께서 직접 하십시오. 아까 말했다시피 이 건은 하찮은 평민이 나설 문제가 아니라고 봅니다만.”
“자네를 배려해서 하는 부탁일세. 그때 술집에서 재포니카께 자네가 혼나지 않았는가. 이번에 그리폰 사와 만남을 주선하면 재포니카께서 자네에게 노여움을 풀지 않겠나.”
놀고 있었다. 구레나룻의 속내가 훤히 보였다. 벌써 뚜쟁이 노릇이나 하며 설치다가는 울프삭 경의 미움을 살까 봐 나를 중간에 내세울 속셈이었다.
“흐흠.”
나는 손가락으로 탁자를 탁, 탁, 쳤다.
구레나룻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얼른 대답하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역시 스타소프의 내장을 내 손으로 직접 뽑아 줬어야 했다. 그랬더라면 저놈이 지금 저따위로 시건방을 떨지는 못했을 것이다.
어쨌든 나는 이 건에 대해서 구레나룻과는 생각이 달랐다. 그러나 내 속내를 작자에게 덥석 드러낼 필요는 없었다.
“알겠습니다. 며칠 시간이 걸릴 겁니다. 제가 답변을 드릴 때까지 그리폰 사는 기다리라고 전해 주십시오.”
“그래 주겠는가?”
구레나룻이 뛸 듯이 기뻐했다.
“예. 이만 가 보시지요. 저는 할 일이 많습니다.”
나는 속으로 코웃음 치며 손을 저었다. 구레나룻이 아쉬운 표정으로 계속 이쪽을 쳐다보았다. 까딱하다간 저 두툼한 주둥이에서 아앙, 소리가 터질 낌새였다.
순간 뒤통수에서 뭔가가 확 치솟았다. 채찍으로 책상을 내리쳤다. 짜악, 하고 유연한 소리가 터졌다.
구레나룻이 당장 오줌을 지릴 듯이 말했다.
“뭐, 뭔가?”
“별것 아닙니다. 빌어먹을 파리가 설치는군요.”
나는 이를 갈며 내뱉었다. 구레나룻이 허둥지둥 업무실을 빠져나갔다.
문을 잠그고 담배를 한 대 피운 후, 쿠퍼헤드를 호출했다. 퇴근까지 두 시간이 남았다. 비디오 자료를 보며 마넨 연구를 함께해 볼 참이었다.
“……모르겠는데. 뭐 특별한 행동이 보여야 말이지.”
쿠퍼헤드가 스카치를 들이켜며 툴툴거렸다. 나도 이제는 지겹기 짝이 없었다. 화면에서 마넨이 한 시간 넘게 술을 마시는 중이었다. 징그러웠다. 연대별로 비디오를 서른여섯 개 훑었는데 예외 없이 저런 패턴이었다. 연회장에 들어온다. 술을 들이켠다. 담소를 나눈다. 사람들과 인사한다. 연회장을 총총히 빠져나간다. 그게 전부였다. 특이한 행동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화면에서 마넨이 사람들과 악수를 나누고 있었다. 슬슬 연회장을 떠나려는 참인 듯했다. 나는 담배를 뽑아 물며 의자에 몸을 푹 파묻었다. 쿠퍼헤드가 연거푸 하품해 대며 중얼거렸다.
“본부장님. 궁금한 게 있는데 말이야. 마넨 같은 놈에게도 성적흥분이 당기냐?”
“미친 소리.”
“하긴, 팔십 넘은 할망구에게 물건이 서냐는 질문과 똑같네. 그럼 하나만 더.”
“뭔데.”
“부장들에게는 안 꼴려? 우리도 남자잖아.”
“원한다면 세워 주지.”
“관둬. 흐아아암…….”
저런 잡소리나 해 대는 꼴을 보니 진짜 지루한 모양이었다. 쿠퍼헤드가 눈곱을 떼며 허리를 꼬았다.
나는 시계를 흘끗 쳐다보았다. 6시 45분이었다. 50분까지만 보고 일어서기로 했다.
뭘까. 직감은 외치고 있었다. 저 비디오에서 단서를 건질 수 있으리라고. 마넨의 파티 놀음과 령 사이에 어떤 관련이 있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그렇지 않다면야 즐겁지도 않은 파티를 저토록 열심히 들락날락할 이유가 없었다.
파티라…….
정보를 뒤져본 결과, 마넨이 파티광으로 탈바꿈한 시기가 십 년 전이었다. 그리고 42번가 출입이 딱 끊긴 시기도 십 년 전이었다. 우연일 리 없었다.
주술사들이 언급한 령의 후계자를 떠올렸다. 어쩌면 십 년 전에 령이 세대교체를 했을 가능성이 있었다. 나는 담뱃재를 털며 다음 비디오를 플레이했다.
건국기념 파티가 나왔다. 마넨이 지인들과 와인을 마시며 담소를 나누었다. 울프삭 경의 소태 씹은 면상도 보였다. 빌어먹을 가면을 쓰고 제복코트를 걸친 우리까지 화면에 잡혔다. 볼 때마다 느끼지만 끔찍한 꼬락서니였다.
울프삭 경과 마넨이 형식적인 악수를 나누었다. 울프삭 경이 불쾌한 심사를 감추지 않으며 연회장을 떠나 버렸다. 뒤이어 마넨이 연회장을 돌기 시작했다. 한 사람도 빼놓지 않고 차례대로 악수를 나누며 간간이 말도 건넸다.
저놈의 악수, 참 부지런히도 한다…… 나는 나직이 투덜대며 담뱃재를 털었다. 이제 마넨은 낯선 하급귀족과 악수를 나누고 있었다. 흡사 악수에 걸신이라도 들린 인간 같았다.
어느새 담배가 필터까지 닳았다. 담배를 비벼 끈 후 새로 한 개비를 뽑았다. 비디오 화면에서 마넨은 여전히 악수에 열중하고 있었다. 심지어는 시종과도 악수를 나누며 어깨를 두들겼다. 이쯤 되자 같은 필름을 재탕하는 착각에 사로잡힐 지경이었다.
쿠퍼헤드가 “본부장니임…….” 하고 보채며 다리를 달달 떨었다. 나도 신물이 났다. 5분이라도 더 보다간 미쳐 버릴지도 몰랐다. 저 수준이면 아예 악수가 취미인 양반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혹시 손바닥 비비는 데서 오르가즘을 느끼는 변태 아닐까. 심지어 나한테까지 악수를 하자고 졸라 댄 양반 아닌가.
…….
일순 멈칫했다. 전신에 전류가 감돈 듯 찌르르 했다. 화살이 뒤통수를 꿰뚫은 기분이었다.
쿠퍼헤드가 재떨이를 이쪽으로 밀며 졸린 어투로 말했다.
“본부장님. 제발 나가지 않을래? 이제 퇴근 시간이야.”
“악수야.”
“엉?”
“악수라구.”
나는 급히 담배를 비벼 끄고 다시 한 개비를 뽑아 물었다. 라이터를 켜는 손이 덜덜 떨렸다. 불을 붙인 후 스카치로 목을 축였다. 속이 타는 것 같았다. 악수다. 악수였다. 이제껏 훑은 비디오에서 마넨이 악수를 빼놓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간간이 술은 마시지 않아도, 파티 내내 침묵을 지킬 때는 있어도 악수만은 빼놓지 않았다.
007을 뇌리에 되살렸다. 마넨은 정보를 탐색하고자 파티에 참석한 007이었다. 거기에 촬영장비나 도청장치 따위는 필요하지 않았다. 악수 하나면 충분했던 것이다.
비디오 화면에서 마넨은 지금도 집요하게 악수를 나누고 있었다. 문신귀족, 무신귀족 가리지 않고 손바닥을 비볐다.
마넨이 처음으로 내게 악수를 요구한 때를 떠올렸다. 이쪽을 탐색하듯 훑어보던 그 눈초리. 딱 카운트다운 들어갔던 그 시기에 마넨은 기묘한 시선을 던지며 내게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두 번째, 이탈리아 식당에서도 마넨은 이쪽에게 악수를 요구했다.
두 번이나 거듭된 악수 요구에 나는 왜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당연했다. 악수는 그만큼 일상적인 행위였다. 식사 때 포크와 나이프가 반드시 필요하듯, 악수도 떼놓으려야 떼놓을 수 없는 생활의 일부였다.
카운트다운 시기에 마넨이 드러냈던 행보는 어떠했던가. 갑작스레 회계사들을 불러내 저녁식사를 했고, 방송노조협회결성 25주년 기념파티에 참석했다. 비로소 의문이 해소되었다. 바로 악수를 하기 위해서였다. 이 얼마나 기발한 수법이란 말인가. 내가 온갖 비용과 시간, 인력을 들여 정보를 수집하는 동안 마넨은 간단히 연회장을 한 바퀴 돌기만 함으로써 모든 탐색을 끝마쳤던 것이다.
나는 탄성을 내질렀다.
“하.”
내 낌새에 뭔가를 눈치 챈 듯 쿠퍼헤드가 침묵했다. 긴장한 안색으로 이쪽을 뚫어지게 주시하고만 있었다. 나는 스카치를 남김없이 들이켰다. 레이 말이 맞았다. 그가 빗댄 표현이 딱 적중했다. 한 시간을 공부하여 일등을 차지하는 학생과 열 시간을 공부하여 일등을 차지하는 학생이라…….
한기가 온몸을 에워쌌다. 마넨은 내게 두 번이나 악수를 요구했다. 평소에는 우리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던 양반이, 카운트다운 들어가자마자 대뜸 내게 손을 내밀었다. 그때 내가 심술기를 발동하지 않았다면 어찌 되었을까.
드문 감각이 등골을 설핏 스쳤다. 공포였다.
진정하려 애썼다. 마넨의 파티 행보 목적이 악수라는 사실은 알아냈다. 이것으로는 아직 불충분했다. 마넨의 악수가 령에게 어떤 식으로 쓰이는지를 알아내야 할 차례였다.
나는 스카치를 잔에 들이부었다. 여유를 되찾으며 느긋이 스카치를 마셨다. 맛이 일품이었다.
두고 봐, 이 늙은이.
마지막에 웃는 사람은 내가 될 테니까…….
「……우리는 그 능력을 오르키투니카라고 부릅니다.」
「어린아이도 흔히 쓰는 주술 중에 밀랍이나 짚단으로 인형을 만들어 이름을 적어 놓고 저주를 퍼붓는 수법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르키투니카는 그런 의식이 필요 없습니다. 그저 떠올리기만 하면 모든 것이 이뤄지죠.」
「오르키투니카도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눈으로 투시를 한다든가, 사물을 손으로 만져서 기록을 읽어낸다든가…… 하지만 저는 진짜 오르키투니카를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
주술사들의 진술 파일을 반복해서 재생했다. ‘사물을 손으로 만져서 기록을 읽어낸다든가’ 하는 부분에 주목했다.
마넨에게 악수는 아주 중요한 행위였다. 이것을 이른바 의식이라고 가정한다면 어떨까. 그럼, 악수와 령은 어떤 상관관계가 있을까. 몇 가지 가설을 세웠다.
첫째, 마넨이 곧 령 자신이다.
둘째, 령의 주술에서 마넨의 악수가 꼭 필요하다.
첫째와 둘째 모두에서 악수가 공통점으로 도출되었다. 그다음, 악수를 통해 마넨이 얻는 이익을 생각해 보았다. 바로 해답이 나왔다. 정보였다. 카운트다운 시기의 행보만 보아도 확실했다.
사람의 손을 만져서 정보를 읽어내는군.
나는 의자에 몸을 깊숙이 파묻었다. 자명종이 묵직하게 울렸다. 자정이었다. 퇴근하고 돌아오자마자 서재에 처박혀 내리 생각에 몰두한 터였다. 책상에는 메모용지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결론은 명확했다. 령이 마넨 그 자신이든, 혹은 어딘가에 숨어 있는 미지의 인물이든, 뛰어난 술사가 틀림없었다. 그러나 신은 아니었다. 술사들이 말한 ‘눈빛만 봐도 모든 것을 꿰뚫는’ 경지까지는 아니었다.
마넨 숙청에 본격적으로 돌입한 근 1년간, 마넨과 나의 다툼은 백중지세였다. 코트비카의 죽음을 되새겼다. 마넨은 왜 코트비카의 죽음을 막지 못했을까. 답은 간단했다. 마넨이 나와 악수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코트비카 암살 건을 울프삭 경에게 제안한 후, 허락을 받아냈다. 이후 세밀한 작업은 부장들 선에서 이뤄졌다. 그동안 울프삭 경이 한 일이라고는 연회장를 활보하며 백포도주나 기다린 것이 전부였다. 마넨은 그래서 코트비카의 죽음을 막지 못한 것이리라.
나는 눈을 감으며 손을 깍지 꼈다. 절로 웃음이 새어나왔다.
이거 잘하면 손도 안 대고 코를 풀 수 있겠는걸…….
우선 구레나룻을 제외한 모든 부장들에게 마넨과의 사소한 접촉도 일절 금지시켜야 했다. 어차피 우리에게 접근하는 웬만한 움직임은 허용하지 않았던 터였다.
마넨이 내게 악수를 요구하던 그때를 떠올릴수록 피가 끓었다. 건방진 늙은이 같으니. 감히 내 속을 엿보려고 해?
그래도 걸리는 점은 하나 존재했다. 이제껏 추측한 바로는 마넨은 어떤 정보를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악수를 거쳐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론사 계획을 알아냈다. 디데이 일시도 귀신같이 짚어냈다.
요행일까. 아니면 혹시, 미래를 볼 수도 있는 것일까. 그럴지도. 내게 연애 작업이 멋지게 막을 내리리라 예언한 마녀의 예도 있지 않은가.
어쨌든…….
나는 위스키를 잔에 들이부으며 지그시 미소 지었다.
미끼를 던져 봐야지.
철저에 철저를 기할 작정이었다. 내 예감은 악수가 정답이라고 외치고 있었으나 만에 하나는 염두에 두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 번의 시험은 꼭 필요했다.
원자력 발전소 건설업체 지정을 보류하길 잘했다 싶었다. 그 건을 보고서로 접하자마자 건설업체 지정을 보류하기로 결심한 계기는 다소 엉뚱했다. 발전소 건립예정지 지명을 보는 찰나, 찌르르한 느낌이 목덜미를 덮쳤던 것이다. 대어를 낚을 때마다 으레 느끼던 감각이었다. 그날 오전 내내 나는 보고서를 훑어보며 책상을 톡톡 두들겼었다.
‘카타콤Catacombe.’
초기 기독교 시대의 비밀지하묘지 카타콤(Catacomb)과 철자가 유사했다. 그리고 마넨은 독실한 가톨릭으로 명망이 높았다.
음모가 잘 풀릴 때면, 신이 나를 인도하듯 생각지도 않은 데서 아이디어가 쑥쑥 형체를 드러내고는 했다. 예술가들이 영감을 얻네 뭐네 하는 것과도 비슷했다. 얼개가 맞지 않을 것 같은 조각조각들이 퍼즐처럼 들어맞으며 나중에는 커다란 그림으로 완성될 때의 그 기분. 아무도 모를 것이다. 희열과 신기함과 황당함이 섞인 그런 감각이었다.
카타콤이라는 지명이 눈에 들어오는 순간 직감했다. 이것은 신이 내게 던진 영감이었다.
편안한 여유가 전신을 타고 돌았다. 나도 모르게 소리 내어 웃고 있었다. 웃을 수밖에. 이 어찌 즐겁지 않을 수 있을까.
오디오 리모컨으로 스피커 볼륨을 높였다. 부드러운 피아노 선율이 실내를 감쌌다. 의자에 몸을 깊이 파묻었다. 비로소 설핏한 취기를 느꼈다.
담뱃갑에서 담배를 뽑으려다가 주춤거렸다. 스툴에 놓아둔 회색 쇼핑백이 시선에 들어왔다. 레이에게 선물한 옷이 들어 있는 쇼핑백이었다. 버려야지, 버려야지 하면서도 여태껏 버리지 못한 터였다.
나는 담배연기를 깊게 한 모금 빨았다. 대뜸 뇌리를 스치는 생각에 픽픽 웃어 버렸다. 골치 아픈 일이 좀 해결될 듯하니 또 엉뚱한 짓이냐…….
컴퓨터로 사회안전 네트워크에 접속했다. 알고 있다. 가이거 본부장이라는 놈이, 헤어진 옛 사람의 현재 애인이나 추적하는 짓거리에 몰두하는 꼴이 얼마나 웃기는지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나는 본성부터 추악한 인간이었다. 잘나신 양반을 알아내서, 점잖게 불러낸 다음 몇 방 두들겨 놓고 정성껏 좆을 뭉개 줄 작정이었다.
괜찮았다. 죽이지는 않을 작정이었다. 레이에게 그렇게까지 잔인한 짓을 할 의향은 없었다. 그리고 진정한 사랑은 육체관계를 초월하는 법이다. 좆 정도는 뭉개줘도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혹시 아는가. 내 행동이 그들의 거룩한 사랑에 일대 전환점이 될지. 하하하.
레이의 잘나신 양반을 알아내는 일은 식은 죽 먹기였다. 레이의 신상정보에서 휴대전화 번호를 훑어낸 후, 통화기록만 검토하면 끝이었다.
“음?”
레이의 신상정보에서 휴대전화 목록이 공란이었다. 나는 손가락으로 탁자를 가볍게 두들겼다. 어찌 된 일이지.
답은 하나뿐이었다. 잘나신 양반께서 자신의 명의로 개설한 휴대전화를 레이에게 선물한 것이다. 잔뜩 고무된 기분이 확 구겨져 버렸다. 나는 나직이 투덜거리며 일어섰다. 사람을 사서 레이를 미행시켜 볼까. 잘나신 양반만큼은 기필코 혼쭐내 줄 작정이었다. 그런 다음 기회를 봐서 레이에게 슬쩍 접근하면 될 것 같았다.
지금은 수면을 취해야 할 때였다. 내일부터 할 일이 많았다.
“오늘 시간이 되십니까.”
구레나룻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절대 찾아오지 않던 내가 자신의 업무실로 나선 것만도 놀라울진대 시간이 되느냐고 묻기까지 했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험험. 무슨 일인데 그러는가.”
구레나룻이 넥타이를 느슨히 풀며 헛기침했다.
꼴에 체면을 차리기는…….
나는 속으로 비웃음을 흘렸다. 의자에 앉으며 일부러 작자의 어깨를 슬쩍 훑었다. 구레나룻이 작살 맞은 생선처럼 펄쩍 뛰었다. 작자와 함께 있노라면 내가 대단한 지골로라도 되는 것 같은 착각에 종종 사로잡혔다.
“요즘 제가 아리사 님께 많이 소원했지 싶어서 말입니다. 사실 우리가 평범한 관계는 아니지 않습니까. 어제 아리사 님을 떠나보낸 후 곰곰이 생각했습니다. 마넨 때문에 울프삭 경께서 요즘 심기가 말이 아니신데 제가 사사로운 감정에 연연할 때가 아니라고 판단했습니다. 오늘밤 시간이 된다면 오붓이 이야기나 나눴으면 싶은데요. 전에 우리가 밀회했던 엘리자베트 호텔 로열 스위트룸에서.”
“거기까지 갈 필요도 없이 여기서 잠깐 어떤가.”
곧바로 구레나룻이 속삭였다. 하마터면 나는 작자에게 채찍을 날릴 뻔했다.
이런 제기랄. 그동안 단단히 굶주렸구나, 이 털투성이가.
“저는 일과 사생활을 철저히 구분하는 것이 원칙이라서 말입니다. 그리고 제 섹스 습관이랄까요. 저는 옷을 모조리 벗고 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어떠십니까.”
“그, 그게 말일세.”
구레나룻이 입술을 핥아 대며 안절부절못했다.
“사실은 말이야. 오늘 파티가…… 있어서 말이지.”
“파티?”
“가면무도회지. 릴리즈를 비롯해 친분이 있는 무신가문 자제들이 모여서 벌이는…… 험.”
“아아.”
나는 픽픽 웃었다. 그건가.
‘가면무도회’는 젊고 방종한 귀족자제들의 섹스파티를 가리키는 은어였다. 수도 외곽부에 위치한 타마린 호수에는 귀족들의 별장이 대거 몰려 있었다. 자제들은 돌아가며 별장에서 가면무도회를 열어 문란하게 즐겼다. 가이거는 정보 수집을 위해 ‘촬영팀’을 여러 차례 투입시키고자 시도했으나 이 가면무도회는 잠입이 쉽지 않았다. 시종들도 하나같이 무도회 전날에야 일시로 구하는 통에 지금껏 번번한 건수를 잡지 못한 터였다.
나는 어깨를 으쓱 올렸다.
“어쩔 수 없지요. 푹 즐기고 오십시오. 그럼 내일은 어떻습니까.”
“아니, 잠깐만.”
구레나룻이 생각에 잠겼다.
“이렇게 하는 게 어떨까. 오늘밤 내가 자네들을 특별히 초대하겠네. 릴리즈와 가이거는 친목을 다져야 할 운명 아닌가. 자네만 좋다면 오늘밤은 자네들을 끼워 주겠네.”
“흐흠.”
나는 흥분하지 않으려 애썼다. 구레나룻의 표현 하나하나가 거슬렸다. ‘특별히’ 따위의 단어 선정을 비롯해, 내가 선심을 베풀어 주마 하는 식의 태도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인내심을 발휘해야 할 때였다.
“좋습니다. 오늘 저와 동료들이 가면무도회를 방문하겠습니다. 단, 가면과 옷은 그대로입니다. 아시다시피 우리의 업무원칙이니까요. 어떻습니까.”
“좋네. 당장 친구들에게 연락 돌리지.”
구레나룻이 화색이 도는 낯으로 가면무도회 장소를 말해 주었다. 시간은 밤 열한 시. 나는 업무실로 돌아가 부장들에게 메시지를 돌렸다. 레오파드를 위시한 미혼남들로만 골랐다.
괜찮았다. 마넨을 유혹하려면 이 정도 투자는 감수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섹스파티였다. 꿩 먹고 알 먹고였다. 부장들도 기뻐할 것이다.
지프를 타고 별장으로 향했다. 레오파드가 운전대를 잡았다. 차 창문은 밖에서는 들여다볼 수 없게끔 특수 처리가 되어 있었다. 나와 쿠퍼헤드는 가면을 벗어던지고 뒷좌석에서 담배를 피웠다. 오늘 내가 부른 부장들은 레오파드, 쿠퍼헤드, 리져드, 팔콘, 개비얼이었다. 다른 놈들은 유부남이거나 사귀는 여자가 있어서 제외했다.
타마린 호수까지는 얼추 네 시간 거리였다. 나는 레오파드와 쿠퍼헤드에게 마넨에 대한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일단 너희에게만 알려주는 이야기야. 당분간 다른 부장들에게는 함구하도록 해.”
“말해줘도 누가 믿겠어? 마넨이 악수로 정보를 탐색한다?”
쿠퍼헤드가 허허, 웃으며 황당해 했다. 레오파드는 침묵했다. 그는 언론사 비리 계획이 침몰했을 때의 충격을 나와 공유하고 있었다. 반신반의하는 기색이었다.
나는 보드카 잔을 천천히 흔들며 말했다.
“나만 믿고 따라와. 이번 건은 내 가정을 증명하는 중요한 포석이니까.”
“릴리즈에게 꼬리를 흔드는 짓이?”
“물론. 내 가정이 들어맞는다면 손도 안 대고 코를 풀 수 있지.”
내 예상에 이번 건국기념 파티에서 마넨은 악수로써 구레나룻의 비밀(?)을 눈치 챘으리라 보았다. 구레나룻과 나의 은밀한 관계부터, 놈이 구상하는 계획까지 모두 읽어냈을 것이다.
구레나룻은 가이거와 릴리즈를 통합시킬 심산이었다. 그 일환으로 최근 놈은 나와 더욱 가까워지고자 몸이 달아 있었다. 그러나 건국기념 파티 무렵까지 내가 구레나룻에게 보인 반응은 미적지근했다. 현재 마넨은 구레나룻과 내 관계의 차후 향방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을 터였다.
오늘의 가면무도회는 이른바 낚시질이었다. 이 찌를 마넨이 물어도 안 물어도 내가 손해 볼 일은 없었다. 최상의 미끼였다.
나는 지그시 웃었다. 쿠퍼헤드가 눈썹을 흘끗 올렸다. 레오파드는 룸미러에 비치는 이쪽을 한 번 쳐다본 후 입을 꾹 다물었다. 한 시간이 지나자 가까이서 달빛에 잠긴 타마린 호수가 드러났다. 우리는 가면을 쓰고 자세를 바로잡았다. 낚시질 시작이었다.
별장 정문을 통과해 15분을 더 달렸다. 높이 치솟은 전나무 가로수 사이로 웅장한 고택이 보였다. 아리사 가문의 별장으로, 이번은 구레나룻이 주재하는 가면무도회였다. 릴리즈의 새 리더로서 오늘밤 단단히 배포를 과시할 모양이었다.
나는 코웃음을 치며 지프에서 내렸다. 가면과 턱시도 차림의 건장한 사내들이 저택 정문에 서 있었다. 문을 열어 주고 객들을 안내하는 몸짓이 제법 단정했다. 훈련받은 조직폭력배들을 어디서 구해온 듯했다.
촛불 샹들리에가 빛을 발하는 고풍스러운 실내가 펼쳐졌다. 남녀 가리지 않고 귀족자제들이 화려한 옷차림으로 흥청망청하는 중이었다. 시종들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붉은 로브로 감싸고 있었다. 귀족들은 물론이고 시종들까지 가면을 쓰고 있었다. 매춘부들은 첫눈에도 분간이 쉬웠다. 하나같이 똑같은 가면에 몸에 걸친 것이라고는 없다시피 했다. 대마초 연기가 자욱했다. 무표정한 가면을 쓴 남녀들이 저렇게 늘어져 있으니 기괴한 인상을 풍겼다.
우리가 회장으로 들어서자 일순 침묵이 감돌았다. 느닷없이 등장한 가이거 부장들을 향해 두려움과 호기심이 반반 섞인 눈초리가 쏟아졌다. 곧이어 웅성거림이 번졌다. 중간에서 어릿광대 가면을 쓴 한 놈이 양팔을 활짝 벌리고 걸어왔다. 첫눈에 구레나룻임을 알아보았다.
어릿광대라……. 구레나룻에게 대단히 어울렸다. 저런 알록달록한 색깔이라니, 노골적인 게이 취향이었다.
“어서 오게! 친구들.”
나는 고개만 까딱거렸다.
“어김없이 채찍을 들고 있군? 이런 자리에서까지?”
“채찍이 아니라면 저를 알아보시지 못했을 텐데요.”
“목소리가 있잖은가.”
벌써 달착지근하게 구는 구레나룻에게 쓴웃음이 나왔다. 그의 인도를 받으며 천천히 연회장을 돌았다.
1층의 반이 드넓은 홀이었다. 아주 높은 천장에서 황금색과 아이보리, 브라운 색깔의 몰딩이 호사스럽게 굽이쳤다. 가구와 커튼, 초상화, 태피스트리, 조각상 등 모든 장식품은 몇 백 년 이상 된 고가의 골동품이었다. 전통 있는 무신귀족의 저택답게 엄격하고 고아한 분위기였다. 그 서늘한 실내에서 사람들은 유령처럼 거닐었다. 군데군데 남녀가 엉겨 붙어 흐드러지게 정사 중이었다.
게이인 나는 별다른 느낌이 없었지만, 부장들은 다른 모양이었다. 어지간해서는 흥분하지 않는 녀석들이 거칠게 숨을 쉬고 있었다. 부장들은 체격이 좋았다. 벌써 귀족 영양들이 끈끈한 눈길을 던지며 유혹하고 있었다.
“즐기기는 즐기되 가면과 옷은 절대 벗지 마. 지퍼만 열고 끝내.”
간단히 주의를 준 다음 레오파드와 함께 연회장을 돌았다. 대마초 향과 우아한 음악이 안개처럼 떠돌았다. 귀족들의 파티라서인지 어떤 면에서는 확실히 독특했다. 음란하게 놀면서도 탄성을 거의 내뱉지 않았다. 정사를 나누는 광경마저 기이하리만치 건조한 인상을 풍겼다. 기분이 절로 몽롱해질 정도였다. 냉정이라면 으뜸가는 나로서는 드문 경험이었다.
구레나룻이 이쪽을 흘끗흘끗 쳐다보았다. 회가 동해서 미치려는 꼬락서니였다. 나는 입 꼬리를 슬며시 올려 웃었다. 작업에 바로 들어갈 생각은 없었다. 좀 더 몸을 달아오르게 할 작정이었다.
나는 느릿느릿 걸으며 말했다.
“릴리즈와의 친목은 이것으로 확실히 보장된 겁니까.”
“물론이지. 우리의 가장 은밀한 모습 아닌가. 그걸 자네들에게 보여 주는 걸세. 자네들과 우리가 손을 잡으면 울프삭 경의 세도 더욱 단단해질 터.”
“다른 릴리즈 멤버들의 의견은?”
“이 초대가 곧 우리의 뜻일세.”
역시 쓸 만한 너구리였다. 이런 면에서는 꽤 말이 통했다. 아랫도리 관리만 잘했다면 점수를 더 높이 매겨 줬을 것이다.
구레나룻이 시종이 건넨 와인을 이쪽으로 내밀며 눈웃음 쳤다.
“자네도 한잔 하지.”
“마음만 받겠습니다. 흠. 그나저나 저도 슬슬 몸을 풀고 싶군요. 어디 은밀한 곳 없습니까. 이미 제 취향은 말씀드렸습니다만.”
“2층으로 올라가지.”
작자가 으슥한 계단으로 나를 이끌었다. 레오파드가 솜씨 좋게 우리 뒤를 미행했다. 달빛이 드리우는 복도를 한참 걸어간 구레나룻이 어느 방문을 열었다.
“눈을 가려 주십시오.”
구레나룻이 천으로 눈을 가렸다. 벌써부터 발기해 있었다. 작자에게 옷을 벗으라고, 시간을 들여 섹시하게 스트립 하라고 주문했다. 구레나룻이 순순히 따르며 대뜸 말했다.
“자네가 왜 매력적인지 그 이유를 아는가?”
“글쎄요.”
나는 무성의하게 대꾸했다. 레오파드가 문을 슬며시 열고 들어왔다.
“지금처럼 글쎄요, 하는 그런 면 때문이지. 무심하면서도 차가워…… 섹시해. 아아……앙.”
참자.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당장 이 채찍으로 저놈의 목을 졸라 버리고 싶었다. 레오파드가 몸을 부르르 떨며 필사적으로 폭소를 참고 있었다.
더는 늦추면 안 될 것 같았다. 바로 신호를 보냈다. 레오파드가 즉각 작업에 들어갔다. 역시 프로답게 노련미 넘치는 솜씨였다. 오늘의 업무는 매우 중요하니 갖은 테크닉을 동원하여 구레나룻을 확실히 보내 버리라고 미리 지시 내린 터였다.
나는 의자에 앉은 채 그 꼴을 구경했다. 평소라면 제법 즐거웠을 터였으나 지금은 썩 내키지 않았다. 설핏한 긴장감이 온몸을 감쌌다. 뚜렷한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끈끈한 신음을 뒤로 하고 방을 나섰다. 복도에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사위가 묘지처럼 고요했다. 달빛이 복도 벽을 외롭게 밝혔다. 2층에도 그림과 태피스트리 등이 빼곡했다. 화랑에 온 기분으로 작품들을 감상하며 느리게 걸어갔다.
그림들은 대개 몇 백 년 된 초상화나 풍경화였다. 풍경화에 그려진 숲은 화폭 바깥까지 싱그러운 향기를 풍기리만치 생생한 초록빛으로 넘실거렸다. 들판에는 색색의 꽃이 우거져 있었다. 옛날에는 이 왕국에도 카미유 코로의 그림에나 나올 법한 아름다운 숲과 들판이 많았던 것이다.
야릇한 감상이 들었다. 왕국을 뒤덮은 이상기후가 바야흐로 백년을 넘어서고 있었다. 왕국은 누렇게 말라붙은 황무지와 앙상한 침엽수 일색이었다. 22세기 사람의 눈에 옛날 풍경화 속 아름다운 숲과 들판은 전차를 타고 하늘을 나는 제우스와 헤라처럼 보였다. 처음부터 이 왕국에는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오직 화가의 상상력이 빚어낸 산물.
어느새 복도의 끝이었다. 프렌치도어 너머로 발코니가 보였다. 갑자기 담배가 고파졌다. 저기서 가면을 벗고 한 대 피울까, 하는 가벼운 마음으로 걸어가다가 멈칫했다.
발코니에서 붉은 로브가 보였다.
나는 눈을 크게 떴다. 뒤돌아 주저앉은 붉은 로브 자락 아래에서 아마빛 머리카락 몇 가닥이 펄럭펄럭 나부꼈다.
이…… 무슨.
나는 잠깐 우두커니 있었다. 곧이어 차가운 전율이 온몸을 에워쌌다. 총탄이 머리를 관통하는 느낌이었다.
의심이 들었다. 도무지 눈앞의 광경을 믿을 수가 없었다. 황급히 정신을 차렸다. 레이일 리 만무했다. 그가 이곳에 있을 리 없지 않은가. 분명히 다른 사람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못이라도 박힌 듯 그 자리에서 시간을 흘려보냈다. 자리를 떠야 할 것 같았지만 한 치도 움직일 수 없었다.
붉은 로브는 허리를 숙인 채 어깨를 떨고 있었다. 어딘가 아픈 모양이었다. 저런 모습까지 레이와 비슷했다.
나는 숨을 가다듬었다.
그럴 리 없지…….
프렌치도어를 열고 발코니로 나갔다. 차디찬 눈바람이 몰아쳤다. 로브는 기척을 느끼지 못한 듯 돌아보지 않았다. 발코니 턱을 움켜쥔 그의 손이 심하게 경련했다. 로브 자락 아래에서 드러난 하얀 손까지도 레이와 똑같았다.
나는 침을 삼켰다. 침착해라, 포우.
반사적으로 입을 열려다가 멈칫했다. 만에 하나 진짜로 레이라면 낭패할 상황이었다. 지금 내가 이 무슨 꼴이란 말인가. 빌어먹을 가면에 제복코트 차림이었다. 레이의 야릇한 미소가 떠올랐다. “……무신귀족들 자체가 싫다고나 할까요.” 했다. 오늘처럼 내 직업이 저주스런 때가 없었다.
나는 긴 시간 동안 로브를 노려보았다. 계속 몸을 떨던 로브가 문득 숨을 나직하게 몰아쉬었다.
레이가 아니라고 확신하면서도, 저 숨소리에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저 사소한 기척마저 레이와 흡사했다. 아니, 똑같았다. 정말 그 사람일까. 레이일까.
쿠퍼헤드가 장난처럼 주절거린 말이 떠올랐다.
우연이 중첩되면 그것은 우연이 아니다…….
기척을 죽여 로브에게 다가갔다. 느리게 손을 뻗어 로브를 끌어내렸다. 일순간이었다. 폭포수 같은 금발이 쏟아져 내렸다. 단숨에 어둠을 치워 버리며 그야말로 환히 밝혔다. 심장이 성난 듯이 고동쳤다. 터질 것 같았다.
그제야 다른 이의 존재를 느낀 듯 금발이 몸을 움찔했다. 짧은 시간이 지나갔다. 나는 뻣뻣이 굳은 채 금발의 뒷모습만 응시했다. 타는 듯한 긴장감이 전신을 타고 돌았다.
금발이 서서히 몸을 돌렸다. 텅 빈 푸른 눈동자가 내게 정지했다. 초점이 나간 시선이었다. 놀라움도 공포도 없었다. 그저 공허했다.
레이였다.
레이였다. 꿈도 아니고 헛것도 아니었다. 레이가 틀림없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 레이였다. 무의식중에 “레…….” 하고 음성이 새어나왔다.
삽시간에 뭔가가 눈앞으로 확 달려들었다. 세차고 빠른 기세였다. 잠깐 뒤에야 나는 정신을 차렸다. 레이가 안겨왔다. 믿을 수 없으리만치 강한 힘이었다. 내 허리를 꽉 끌어안으며 내 품으로 얼굴을 파묻었다.
그 갑작스런 행동에 하마터면 정신을 놓칠 뻔했다. 나는 급히 레이의 양 뺨을 잡아서 내게 고정시켰다. 이쪽은 지금 가이거 본부장 행색이었다. 그렇건만 레이가 이런 식으로 안겨 오는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아니, 안겨 오는 정도가 아니었다. 명백한 유혹의 몸짓이었다.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혹여 레이가 누군가에게 지시를 받은 것이라면……?
나는 뚫어지게 그를 응시했다. 레이가 이쪽으로 두어 번 눈을 깜박거렸다. 기계 같은 움직임이었다. 술 냄새도, 대마초 향도 풍기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눈동자에서는 분명히 뭔가가 부재해 있었다. 한 시절 꽤나 고문을 하고 다니며 사람 몸뚱이에 달관해 버린 나는, 저 상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았다. 머리가 하얗게 비었다.
설마.
목덜미가 차가워졌다. 레이가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가슴 한구석에서 저릿한 감각이 달렸다.
사실 나는 레이와 만남을 거듭하며 그를 면밀히 관찰해 왔다. 감정을 깨닫지 못하고 있을 때에도 그의 사소한 습관이며 행동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았다. 마음에 걸리는 것은 슬쩍 캐물으며 반드시 이유를 확인했다. 그런데 이게 뭔가. 부정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레이가 파리한 입술을 열었다.
“아…… 나의 왕이시여.”
그러며 희미하게 웃음을 흘렸다. 나는 확신에 쐐기를 박을 수밖에 없었다.
레이에게는 정신이상 증세가 있었다.
일단 그를 안아들고 복도로 향했다. 이 추위에 계속 있다간 몸이 배기지 못할 터였다. 복도의 아무 문이나 열고 들어갔다. 어둑하지만 넓은 침실이었다. 침대에 레이를 눕혔다.
이를 어떡한다…….
잠깐 고민했다. 상황만 허락한다면 레이의 곁을 지키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가 정신을 차릴 때까지 손을 잡고 지켜보고 싶었다.
무엇보다도 레이가 나를 원하고 있었다. 그가 내 허리를 끌어안으며 눈짓했다. 새끼 고양이처럼 집요하게 달라붙었다. “가지 말아요…….” 하며 내 가슴에 머리를 파묻었다. 무신경한 태도로 일관하던 모습을 상상하기 힘들 정도였다. 손짓부터 눈빛 그리고 표정까지, 나를 갈구하고 호소하고 있었다. 나를 갈망하며 매달렸다.
레이와 헤어진 뒤 내내 꿈꾸었던 바로 그 모습이었다. 그가 나를 갈망해 주기를 얼마나 망상했던가. 얼마나 절실히 꿈꾸었던가. 그러나 레이를 뿌리치고 일어서야 했다. 그래야 하는 것이 옳았다. 지금 레이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런 그를 안는 것은 하지 말아야 할 짓이었다.
정신 차려라, 포우.
순간 흠칫했다. 레이가 내게 키스하고 있었다. 차가운 가면 위로 입술을 부딪쳤다. 싸늘한 금속 가면 위로 그 감촉은 생생했다. 다음 순간 레이가 팔을 내 목으로 둘렀다. 익숙한 체향이 코끝을 찔렀다. 눈앞이 아득해지는 기분이었다. 결국 이성을 놓쳤다. 나는 레이를 으스러지리만치 끌어안았다.
장갑을 벗고 로브 안으로 손을 넣었다. 습하고 차가운 피부가 닿았다. 레이의 다리가 내 허리를 휘어 감았다. 결합은 삽시간이었다. 혼이 빠질 것 같은 느낌을 맛보며 그의 아래로 스며들었다. 내 허리에 매달린 레이의 허벅지가 부들부들 떨리며 경련했다. 안으로 파고든 나를 한도까지 조이며 빨아들였다. 쾌락과 고통으로 일그러져 애원하듯 신음했다. 파란 눈에 눈물이 고였다.
나는 레이의 골반을 내 쪽으로 밀며 결합이 더욱 깊어지도록 했다. 레이의 허리가 뒤로 휘었다. 로브가 구겨지며 버석거렸다. 침대 스프링이 삐걱삐걱 흔들렸다.
나는 아마빛 머리카락에 얼굴을 파묻으며 입술로 훑었다. 눈앞에서 그의 움푹 파인 쇄골이 드러났다. 가면을 벗어 버리고 피부를 핥고 싶은 욕구가 간절했으나 내 어깨를 감싸 쥔 레이 때문에 불가능했다. 레이가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그가 원하는 대로 꽉 끌어안아 주며 허리를 힘껏 치켜 박았다.
“아…….”
레이의 파리한 입술이 떨렸다. 나도 절정이었다. 그의 안에 한계까지 넣고 정액을 사출했다. 두 번, 세 번, 연달아 쏘아 내보냈다. 젖어가는 내벽이 꿈틀거리며 성기를 욱죄어 물었다. 눈앞이 하얗게 변했다. 전류처럼 찌릿한 쾌감이 온몸을 치달렸다. 소름끼치는 오르가즘이 전신을 파고들었다.
잠깐 그렇게 끌어안은 채 숨을 내몰아 쉬었다. 레이가 눈을 서서히 감으며 내 어깨에서 손을 풀어 떨어뜨리듯 내렸다. 내 허리를 죄어 감은 허벅지도 조금씩 떨어졌다.
나는 입술을 지그시 물었다.
어떻게 할까.
정신을 차릴 때까지 기다린 다음, 내 정체를 털어 놓을까. 사정을 설명하고, 그에게 다시 구애해 볼까.
이대로 레이를 내버려둘 수 없었다. 잘나신 양반이 어떤 인간인지는 모르겠으나, 내가 작자라면 이따위로 레이를 내팽개치지는 않을 터였다. 라비린스에서도 그랬고, 지금도 레이는 섹스파티의 시종이나 하고 있었다. 이런 험한 일을 하는 것을 보니 어쩌면 잘나신 양반과 끝난 사이일지도 몰랐다.
나는 레이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돌이킬수록 기가 찼다. 왜 일찍 눈치 채지 못했을까. 그의 진료기록까지 빤히 훑어봐 놓고서는 어쩌자고 무심히 지나쳤단 말인가.
하나하나 들어맞았다. 레오파드와 했던 첫날밤부터 이상한 친구네, 생각했다. 필사적으로 눈길을 마주치지 않으려는 습관이며 온몸을 감싼 우울한 분위기까지. 정신과 의사가 아닌 이상 확실한 진단을 내리기는 어렵지만 레이의 괴상한 옷차림도 정신이상 증세의 일부일 가능성이 있었다.
“으음…….”
레이가 나직이 신음했다. 나는 아직도 그의 안에서 몸을 빼내지 않고 있었다. 그와의 결합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레이가 눈을 느리게 떴다. 아직도 초점이 나가 있는 동공이었다. 와중에도 자신의 몸속에 있는 나를 느꼈는지, 고개를 설핏 흔들었다. 그의 손이 아래로 파고들어 결합부를 더듬었다. 무의식적인 행동이겠지만 레이답지 않게 대담한 손짓이었다. 나도 모르게 웃음을 흘렸다.
섹스를 했는지도 몰랐단 말인가…….
레이가 아래를 더듬은 손을 눈가로 가져갔다. 이게 뭐지, 하는 눈초리였다. 정액이 손가락을 타고 흘러내렸다.
뒤늦게 파란 눈동자로 조금씩 초점이 잡혔다. 레이가 기지개켜듯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의 미간이 점차 일그러졌다. 지금의 이 상황을 납득하지 못하는 낯빛이었다. 레이의 입술에서 바람 빠진 숨이 샜다.
“하, 하…….”
경악에 들어찬 반응이었다. 저 모습을 보고 있자니 둔기로 뒤통수를 후려 맞는 기분이었다. 온몸이 싸늘하게 식어 갔다.
레이가 재차 자신의 손으로 눈길을 던졌다. 어둠속에서도 정액의 희뿌연 색깔이 선명했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가 자신의 손과 이쪽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이게……?”
그 말에 피가 거꾸로 돌았다. 나는 이성을 유지하려 필사적으로 노력하며 몸을 일으켰다. 그에게서 허리를 빼내고서 바지 지퍼를 채웠다. 졸지에 강간범으로 몰린 셈이었다.
이해해야 했다. 레이는 잠깐 정신이 나가 있었고, 나는 지금 가이거 본부장 꼴이었다. 레이의 오해는 당연했다. 이 상황에서는 가면을 벗고 사정을 설명할 수도 없었다.
그가 제정신이 아니었음을 똑똑히 알았지만 정황이 지독스레 처참했다. 어떻게 이럴 수 있단 말인가. 유혹의 눈짓으로, 고양이 같은 몸짓으로 나를 이끈 때가 불과 몇 분 전이었다. 아니, 다 떠나서 레이를 당장 한 대 갈기고 싶은 욕구를 억누르는 것만도 힘들었다.
침대에 걸터앉은 채 끓어오르는 분노를 삭이며 레이를 노려보았다. 레이의 파란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나에게 겁을 먹고 있었다.
열이 치달았다. 주체할 수 없는 노여움이 온몸을 파고들었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 권총을 뽑아들어 그를 죽이고 나도 자살해 버리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