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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L. (23/101)

23 ─L.

왕국의 겨울은 어둡다. 하루에 태양이 떠 있는 시간이 길어야 일곱 시간이다. 노르웨이 최북단의 어느 섬은 겨울이면 하루 24시간 내내 밤이 지속된다고 했던가. 그 섬에 뿌리박은 식물들은 어떤 모습일까. 아니, 나무와 꽃이 존재하기는 할까.

부족한 일조량과 혹독한 추위 탓에 왕국의 국토 대부분은 수풀이 엉클어져 누렇게 말라붙은 황야였다. 띄엄띄엄 들어선 숲은 칙칙한 잿빛이었다. 그러나 지금 내 앞에는 파란 숲이 펼쳐져 있었다. 보고 있자니 눈이 시렸다.

나는 주검같이 차가운 벤치에 앉아 숲을 응시했다. 병원 앞 숲이 새파랬다. 겨울에도 푸르디푸른 전나무 숲은 검은 하늘로 높다랗게 뻗어 있었다.

“춥습니다. 언제까지 여기 있을 겁니까.”

남자가 내 어깨에 카디건을 덮어 주며 말했다. 나는 움직임 없이 전나무 숲을 응시했다. 바람소리가 여자의 울음처럼 황폐했다.

숲에 정령이 산다고 했던가…….

죽은 후 정령으로 환생하고 싶다. 다이애나와 함께 노래를 부르며 숲을 노니는 정령. 기억 없는 영원을 사는 생명체로.

병원에 온 지 나흘째였다. 겨우 정신을 차린 때가 어제였다. 몸은 대충 추슬렀지만, 휴대전화를 붙들고 안달복달할 마넨 경을 생각하니 웃음이 나왔다. 웃음이 나오다 못해 허탈했다. 어쨌든 아직 울프삭 천하는 아니었다.

“이만 들어가는 편이 좋겠습니다. 슬슬 눈이 떨어지는군요.”

남자가 나를 억지로 일으켜 병실로 데려갔다. 의사는 2주일간 입원치료를 권했다. 잘못하면 폐렴까지 갈 뻔했고, 독감에 과로와 영양실조가 겹쳐 안정이 필요하다고 했다.

병명 한번 끝내주게 궁상이다…….

나를 입원시킨 남자는 오늘 두 번째로 방문했다. 길바닥에서 동전 구걸하는 거지가 된 기분이었다. 하기야 지금 내 꼴이 거지와 다를 바가 무엇이랴만. 이제는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었다.

“부담 가지지 마세요. 저는 부양가족 없는 게이 놈이라서 돈이라면 넘치니까요. 그쪽 말대로 내가 지나쳤던 것도 있으니까, 선물이라고 생각하십시오.”

남자가 내게 시트를 덮어 주며 말했다.

“……그래도 개인병실은 싫군요.”

“비용 차이 얼마 안 납니다. 그리고 이쪽 직장도 직장인지라 괜히 일반병실 들락거리다가 혹시나 내게 두들겨 맞은 부랑자를 마주치는 일이라도 생기면 큰일이죠. 일반병실에서 바글거리는 환자 거개가 가이거에게 부상당한 시위대 투사들이신데 저 혼자선 감당 못합니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남자가 가방에서 내 휴대전화와 충전기를 꺼냈다. 내가 부탁한 물건이었다.

“미안해요. 번거로운 부탁을 해서.”

“상관없습니다. 어차피 오늘은 42번가로 시위대 때려잡으러 갔으니까. 그나저나 눈 뜨자마자 휴대전화부터 찾다니 간절히 기다리는 사람이 있나 보죠.”

“뭐…… 비슷해요.”

나는 우물쭈물 얼버무렸다. 남자가 의자에 앉았다. 동작 하나하나에 절도가 잡혀 있었다. 저런 사소한 행동거지에서도 빈틈이 안 보였다. 가이거 대원이라서 그런가. 함께 있노라면 남자와 나의 차이를 뼛속까지 통감했다.

남자가 이쪽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의욉니다.”

“뭐가요.”

“흠…….”

남자가 말꼬리를 흘렸다.

“이런 말은 뭣하지만 가족이나 친구는 없어 보여서요, 그쪽이. 그런데 기다리는 상대가 있다니 의외죠.”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내가 그였더라도 충분히 이상하다고 느낄 터였다.

“남자?”

“……남자이긴 해요.”

“역시 그렇군요. 하룻밤 상대?”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더니…….

나는 쓰게 웃었다. 남자의 오해에 어이가 없었지만, 그렇다고 내가 기다리는 상대가 마넨 경이라고 솔직하게 밝힐 수는 없었다.

남자가 내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또 어딘가 생각에 빠진 표정으로 미소를 지었다. 저런 때 남자의 한구석에서는 묘한 잔인함이 흘렀다.

무슨 생각을 하길래 저런 분위기를 풍길까.

갑자기 남자가 몸을 일으키더니 문을 잠갔다. 그만 나는 웃고 말았다. 마침 이쪽이 열도 떨어졌으니 오늘쯤에는 남자가 덤벼들지 않을까 어렴풋이 예상한 터였다.

“오해는 마십시오. 조금 만지고만 싶을 뿐이니까.”

남자가 내 상의 단추를 풀며 말했다. 옆에 드러누워서는 천천히 내 가슴을 만지며 눈을 내리깔았다. 아까처럼 또 깊이 생각에 잠긴 얼굴이었다. 내가 “무슨 생각 해요?” 하자 그가 “예?” 하며 고개를 들었다.

“뭐…… 직장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남자가 쾌활하게 웃었다.

“직종을 바꾸려구요?”

“그건 아니고요.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주먹질밖에 없는 나에겐 여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직장인걸요. 아직까지는 몸도 팔팔하고. 하하하.”

“그럼?”

“오늘 어떤 놈이 신입이랍시고 새로 들어왔는데 참 열 받게 하더군요. 재수 없었어요. 어디서나 똑같죠. 건방진 신참 때문에 열 받는 고참 말입니다.”

내뱉는 어투가 화가 많이 난 기색이었다.

“어떤 사람인데요?”

“구레나룻이 짙은 털북숭이. 잔머리는 좀 굴리는데 자기가 세상 최고인 줄 알더군요. 거기다가 꼴에 게이.”

“게이라면 좋지 않나요. 그쪽에게는.”

내 말에 남자가 어이없다는 듯 박장대소했다.

“푸하하하! 저도 취향이 있습니다. 그 털북숭이를 더듬는 나를 상상하니 끔찍하군요. 아니, 끔찍함이 지나쳐 웃기는군요. 그런 털투성이를 만지려면 두툼한 장갑은 필수겠는데요. 하하. 하하하하.”

남자가 연신 하하, 하하, 웃었다. 내가 머쓱해질 정도였다.

“그럼 어떤 취향인데요?”

“그쪽에게 달려드는 나를 보고도 몰라요?”

남자가 빙긋 웃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아래로 기울여 내 유두에 번갈아 입을 맞췄다.

“이렇게 말랑말랑한 젖꼭지가 취향이지요.”

“참나.”

남자의 노골적인 표현이 어처구니없었으나 가만히 있었다. 그의 부드러운 애무가 좋았다. 무의식중에 남자의 남근을 떠올리는 자신에게 입맛이 썼다.

“내 취향을 말했으니 그쪽 취향이 궁금한데요. 그쪽은 어떻습니까?”

“없어요. 취향이란 게 뭔지 감도 안 잡히고.”

“별거 있나요. 첫눈에 찌르르한 느낌이 오면 그게 취향이죠. 이를테면 마음에 드는 용모라든가 체격 같은 거. 스노우 화이트에서 만난 남자들 중에 그런 남자 없었어요?”

남자가 느리게 손을 움직이며 말했다. 나는 눈을 감았다.

“전혀. 첫눈에 찌르르하기는커녕 운이 나빠선지 모두 변태였어요. 예전에 그놈도 스노우 화이트에서 만났는데…….”

“그놈?”

“나를 패던 그 대머리 뚱보요. 다들 그런 타입이었어요. 그놈만 해도 나를 묶어 놓고 두 시간을 두들겨 팼어요. 그리고 어떤 남자는 나에게 여자 옷을 강제로 입히고 마구 해 대고선 이틀이나 감금해 놓고 물 한 모금도 안 줬어요. 그때가 제일 끔찍했어요. 연쇄살인마에게 혹시 잡혔나 싶어서 벌벌 떨었죠. 그 외에도 이상한 놈들뿐이었어요. 심한 구타를 즐기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어요. 당신들은 매너가 비교적 좋은 변태에 속했죠. 적어도 굶기거나 감금은 안 했으니까.”

남자가 “매너가 비교적 좋은 변태라…….” 하며 웃음을 흘렸다. 갑자기 이쪽으로 날아오는 회색 눈동자가 차가웠다. 나는 무의식중에도 움찔했다.

“그놈들 운이 참 좋았군요. 내 눈에 띄었으면 당장 목뼈를 돌려 주고 좆을 뭉개 줬을 텐데, 하하.”

“…….”

“또 겁먹었군요. 몸에서 닭살이 돋았습니다.”

남자가 장난스럽게 말하며 내게 키스했다. 부드럽고 친밀한 키스였다. 나를 끌어안는 그의 손길이 다정했다.

“이만 자요. 피곤해 보이니.”

남자가 내 상의 단추를 채우며 말했다. 나는 소리 나지 않게 한숨 쉬었다. 남자의 단단한 페니스를 자꾸만 원하는 자신이 당황스러웠다. 이 꼴이 되어 버린 내가 웃겼다. 그의 품에서 잠들며 문득 자작나무를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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