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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M─ (22/101)

22 .M─

어둠속에서 하얀 결정체가 뒤엉켜 소용돌이쳤다. 차창 밖에서 가로등 불빛과 눈송이가 빠르게 옆으로 밀려났다. 마넨을 만나러 수도 변두리로 향하는 중이었다. 빌어먹을 가면 때문에 담배도 피우지 못하고 있었다.

옆에 앉은 레오파드는 온종일 내게 말 한마디 던지지 않았다. 그 역시 충격을 받은 기색이 역력했다. 7년간 나는 작정하고 저지른 일에 단 한 번의 실수도 없었다. 레오파드는 그 모든 것을 옆에서 지켜본 녀석이었다. 차 내부를 흐르는 분위기가 새벽녘 안개처럼 써늘했다.

어떻게 알았을까.

도대체 어떻게?

뇌리에서 끊임없이 “어떻게?” 한마디가 맴돌았다. 스파이가 얼마 못 가 실토했는데도 완벽을 기하고자 끝까지 취조했다. 스파이는 “평소같이 검찰 감시를 하라고 위에서 명령이 떨어졌고, 여자 검사들을 담당한 제가 브레디 검사를 만나서 의심스런 것을 물어봤을 뿐입니다.”라고 일관했다. 이 생활 7년째인 내가 참과 거짓을 구분 못할 리 없었다. 스파이의 말은 참이었다.

그들의 입장에 서서 생각해 보았다. “검사와 가이거가 비밀리에 추진하는 일이 있긴 하다”는 정보에서 그들이 유추해낼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구체적으로 어디까지 추적할 수 있는가.

이쪽에게서 구린내를 맡았다면 사람을 여럿 풀어 난리쳐야 마땅했다. 그러나 근래 일주일은 외려 쥐죽은 듯 조용하다고 하지 않았던가. 설마 내부의 적인가.

지프가 멈춰 섰다.

“본부장님. 도착했습니다.”

대원의 말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차창 밖에서 표백한 뼈처럼 희디흰 눈이 깔린 황야가 펼쳐졌다. 조금 떨어진 앞에 헛간에 가까운 투박한 농가가 보였다. 마넨과 협상하고자 긴급하게 세낸 이탈리아 레스토랑이었다. 반경 15킬로미터 이내에서 건물이라고는 저 레스토랑 하나뿐이었다.

나와 레오파드만 내려서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워커가 바닥을 밟을 때마다 묵직한 소리가 울렸다. 레스토랑의 붉은 정문이 가까워 올수록 안에서 뭔가가 끓어올랐다. 뒤통수를 강타한 충격으로 분노조차 느끼지 못했음을 비로소 깨달았다.

라이트크로스.

어린 시절, 길거리 싸움에서 어느 복서에게 라이트크로스를 먹은 적 있었다. 나는 그때의 충격을 아직도 잊지 못했다. 뺨에 뭔가가 닿았다고 느낀 순간 천천히 몸이 하강했다. 띵한 감각은 그 다음이었다.

아, 이것이 제대로 된 주먹이구나…….

뻗어 누운 내 위에서 환호하는 사내들을 응시하며 겨우 인지했다.

아, 이것이 제대로 된 주먹이구나.

나는 문을 열었다.

벌건 불빛을 일렁이는 벽난로 앞에 마넨과 그의 측근 드리아스넨이 앉아 있었다. 마넨을 보는 순간 전신으로 맹렬한 증오심이 번졌다. 그것은 거의 폭발에 가까웠다. 황새같이 가냘픈 목을 배배 비틀어 꺾고 싶었다. 자연 청금석 염료로 물들인 값비싼 로브를 갈기갈기 찢어발기고 싶었다. 살가죽을 벗기고 눈알을 도려내고 싶었다. 당장 죽여 버리고 싶었다.

나는 채찍을 꽉 움켜쥐며 냉정을 유지했다. 성질대로 마넨의 목을 꺾어 버리기란 식은 죽 먹기였다. 그러나 저 마넨이 아무 대책도 없이 이곳까지 올 리는 만무할 터.

참자…….

마넨이 이쪽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앉게.”

나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침묵을 지키는 내게 마넨이 다시 말했다.

“할 말은 없는가?”

물론 할 말이야 많았다. 그러나 지금 입을 열면 욕설부터 튀어나올 것이다. 욕설과 함께 주먹도 뻗어나갈 터였다. 그리고 지금의 내 주먹은 살인적인 위력을 발휘할 것이 뻔했다.

“그럼 먼저 말하지. 우리를 얼마나 우습게 보고 그런 일을 꾸몄는지는 모르겠으나……. 지금 내 신문사 편집국에 일주일간 정성껏 준비한 기사가 인쇄만 기다리고 있다네. 울프삭 경의 방송국 비리에 관한 것이지. 탈세는 기본이요 온갖 로비부터 시작해 금품수수, 배우들을 귀족에게 알선하는 뚜쟁이 사업까지 했더군. 어떤가.”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쪽 디데이가 모레라고 알고 있네만. 우리가 내일 방송국 비리를 터뜨려도 좋겠는가.”

마넨이 와인 잔을 느긋이 흔들었다.

“조용히 지내게. 암, 조용히 지내야지. 평민이 울프삭의 셰퍼드가 된 것만도 굉장한 출세일 터. 그러면 당연히 분수도 지키며 살아야지. 셰퍼드 역할에만 충실하게. 그리고 자네가 고용한 검사들은 지금쯤 타마린 호수 아래에서 영원한 잠을 자고 있을 걸세.”

살의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그러나 지금은 내 생애에서 최고의 인내심을 발휘해야 할 때였다.

“말해 보게. 내가 어떡하면 좋겠는가.”

“받아들이지.”

곧바로 말하자 마넨이 멈칫했다. 미동도 없는 그 모습이 흡사 정지화면 같았다. 그의 손에 들린 잔에서 붉은 와인만 차랑차랑 흔들렸다. 마넨이 대노한 눈초리로 이쪽을 뚫어지게 쏘아보았다.

나는 그의 반응을 무시하고 몸을 휙 돌렸다. 몇 초라도 더 있다가는 채찍으로 마넨의 목을 졸라 버릴 것만 같았다. 온몸을 덮치는 노여움이 불덩이 같았다.

“잠깐 거기 서게나.”

뒤에서 마넨이 말했다.

“악수나 하세. 나름대로 이번 건은 동업자가 된 셈 아닌가. 이것으로 이번 일은 깨끗이 털고 새로 시작하세.”

나는 숨을 가다듬었다. 마넨의 언행 하나하나에 열이 치달았다.

악수라?

승리자로서 여유를 베푸시겠다……?

하하하, 이런.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마넨이 이쪽으로 손을 내민 채 잔잔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푸른 로브 밖으로 드러난 팔뚝이 거미 다리처럼 가늘었다. 나는 마넨의 앙상한 손을 긴 시간 내려다본 끝에 입을 열었다.

“엿 같은 손 당장 거두는 편이 좋을걸. 펜대를 오늘부터 잡기 싫다면 계속 내밀고 있어도 좋아. 근육이란 근육은 모조리 다져 줄 테니.”

쇠가 긁히는 듯한 음성이었다. 내 목소리지만 끔찍했다. 주저 없이 몸을 돌려 레스토랑을 나섰다. 대단하신 로터스께서 분노하든 말든 내 알 바 아니었다. 눈의 여왕이 어둠을 화폭삼아 점점이 눈송이를 수놓았다. 좆같은 밤이었다.

본부에서 빌어먹을 가면과 제복코트를 벗어던지고 뛰쳐나왔다. 자동차를 몰며 몇 번이고 핸들을 주먹으로 쳤다. 빙판길을 아랑곳 않고 속력을 높였다. 격렬한 노여움이 전신을 덮쳤다. 사그라지기는커녕 갈수록 커져 갔다. 나는 담배를 뽑아 물고 불을 붙였다. 다시 한번 주먹으로 핸들을 쳤다.

“제기랄!”

패배였다. 의심할 수 없는 내 실패였다. 극비로 추진했기에 망정이지 이번 건이 울프삭 경의 귀에 들어갔다면 당장 옷을 벗고도 남았을 것이다. 운이 좋은 셈인가. 나쁘지도 좋지도 않았던 직감이 결국 이따위 결말을 가리키는 예고장이었나.

“빌어먹을!”

연속으로 핸들을 쳤다. 화를 가라앉힐 방법은 하나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레이의 집으로 방향을 틀었다.

새벽 두 시를 넘은 시각이었다. 한 시간 넘게 달려 레이의 집에 도착했다. 5층까지 한달음에 계단을 달려 올라갔다. 룸에는 초인종도 달려 있지 않았다. 방문을 노크했다. 십 분 넘게 노크했다. 문은 열리지 않았다. 아까 분명 안쪽에서 설핏한 인기척이 있었다. 뒤통수에서 뭔가가 핑 날아갔다. 극도로 분노할 때면 으레 엄습하는 감각이었다.

문을 쾅쾅 두들기고 걷어찼다. 이런 내 꼴이 한심했다. 평소 혐오하던 길거리 잡배와 다름없었다. 애꿎은 레이의 몸에 분풀이할 자신이 구역질났다. 미치도록 역겹고 증오스러웠다. 그러나 자제가 불가능했다. 권총을 뽑아 문을 박살내려는 찰나 옆 룸에서 문이 열렸다.

“야밤에 무슨 일이우? 이거 시끄러워서 나 참.”

중년여자가 부스스한 머리를 긁으며 나왔다. 비로소 나는 정신을 차렸다. 가이거 일반대원은 권총 소지가 금지였다. 레이에게 내 정체를 노출하는 짓은 참아야 했다.

“죄송합니다. 안에서 문을 열어 주질 않아서. 가게에 있나 보네요.”

“저녁에 들어가는 모습을 봤는데? 그러고 보니 쓰러질 것처럼 휘청거리던데 혹시 아픈 거 아니우?”

“…….”

일순 전신이 싸했다. 불길한 직감이 뇌리를 스쳤다. 급히 관리실로 뛰어가 비상열쇠를 얻었다. 문을 열고 불을 켰다. 레이가 침대에서 바닥으로 몸을 반쯤 늘어뜨린 채 쓰러져 있었다. 주검처럼 미동도 없었다. 문을 열려고 나오려다가 기절한 것이 확실했다.

둔기로 후두부를 강타당하는 것 같았다. 급히 그를 안아들었다. 미약하게 숨은 쉬고 있었으나 온몸이 불덩어리였다. 입술이 완전히 말라 있었다. 혼수상태였다. 레이를 차에 태우고 병원으로 향했다.

“빌어먹을! 그러게 병원에 가라니까!”

달리는 내내 핸들을 쳤다. 병원에 도착할 즈음 핸들에는 자국이 가득했다.

끔찍스레 좆같은 밤이었다.

일반병실은 가이거에게 구타당한 부랑자들로 득실거렸다. 응급실에서 레이에게 수액을 맞힌 뒤 개인병실로 옮겼다. 나는 코트를 벗었다. 벽에 걸린 거울에 가이거 제복을 입은 남자가 비쳤다. 드물게 보는 지친 표정이었다.

쓰게 웃다가 레이를 바라보았다. 깊이 잠든 그는 창백하고 고단한 얼굴이었다. 수액 바늘이 꽂힌 팔목이 지나치게 가늘었다. 저런 사람을 붙잡고 화풀이삼아 좆을 휘두르려 했던 내가 한심했다.

기가 막힌다…….

레이가 중얼거리던 말을 뇌까렸다. 그도 한심했고 나도 한심했다. 엉망이었다. 29년 인생에서 이토록 엿 같은 날은 처음이었다. 일과 사생활 양면이 뒤죽박죽이었다. 일에서는 능구렁이에게 한 방 먹었고, 사생활에서는 총애하는 몸뚱이를 오밤중에 입원시켰다. 정말이지 개판이었다.

의자에 털푸덕 앉아 바닥을 노려보며 분을 삭였다. 창밖 어둠이 어슴푸레해질 즈음 침대에서 기척이 났다.

“음…….”

레이가 눈을 설핏 떴다. 방향을 잃은 듯한 눈동자가 멍하니 이리저리 움직이다가 이쪽에서 멈췄다.

“그냥 있어요. 혼수상태라서 병원으로 데려왔습니다. 며칠간 안정을 취해야 한다니까 푹 쉬는 편이 좋겠습니다. 그쪽이 나 때문에 이 꼴이 되었다고 했으니 치료비는 내가 내죠. 그럼 이만 나가야겠군요. 길거리로 시위대 때려잡으러.”

나는 코트를 집어 들었다. 벌써 일곱 시였다. 아홉 시까지는 출근해야 했다. 여기 있을 시간이 없었다. 레이의 저런 꼴을 보는 것도 참을 수 없으리만치 짜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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