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 ─L. (7/101)

7 ─L.

“코트비카가 죽었어.”

“잘된 일 아닙니까. 어차피 예상대로였는데요. 이것까지 기회로 바꾸십시오.”

“아냐, 아냐. 곤란해. 놈들이 이중으로 덫을 쳐 놓았어. 터뜨리면 이쪽이 아주 더러운 스캔들을 뒤집어써서 외려 역풍이 불어올 일이야. 비열한 놈들!”

“이중의 덫이라니요?”

“……코트비카가 왕비와 함께 있었다. 하필이면 그 자리를 습격했더군. 그것까지는 자네가 읽어내지 못했잖은가. 이거 불안하군.”

“그 정도 오차야 자주 있지 않았습니까. 놀랄 필요는 없습니다. 자객의 즉흥적인 계획일 겁니다. 제법 영리한 놈이군요. 다시 읽어 봐야겠습니다. 울프삭과 악수는 하셨습니까?”

“물론이다마다.”

“손을 대 보십시오. 한번 훑어보지요.”

“어떤가? 가능하면 자객도 한번 채집해 주게. 왕비의 말로는 젊은 귀족이었다고 하더군. 가면 때문에 얼굴은 보지 못했다고 했네.”

“기다려 보십시오.”

나는 정신을 집중했다.

“……울프삭은, 이번 일은 단지 경고일 뿐이라며 웃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의 뒤에…… 검은 기운이 도사리고 있군요. 어쩌면 저 검은 기운이 자객일지도요. 명확하지는 않습니다만. 검은 기운…… 날카롭고 잔인한 느낌이네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나?”

“경을 통해서 울프삭을 보는 것이고, 그를 통해서 검은 기운을 보는 겁니다. 검은 기운의 구체적인 의중까지 잡아내기에는 벅찹니다. 잘 아실 텐데요. 이게 한곕니다. 한데 3차 투시인데도 저렇게 뚜렷할 정도면 울프삭과 보통 가까운 사이는 아닌 것 같습니다. 누군지 감은 잡히십니까.”

“의심이 많은 울프삭이 수족처럼 가까이 두는 놈이라면 호위병밖에 없는데. 가이거 부장들인데 한두 명이 아니야. 설마 그 왈패들일까? 그럴 리는 없다고 보네만. 부랑자와 삼류귀족이나 납치해서 두들겨 패기나 하는 게 고작인 놈들 아닌가.”

가이거 부장들…….

나는 자작나무 가지로 이마를 문지르며 생각에 잠겼다. 그들이라면 나도 몇 주 전 코앞에서 마주친 적 있었다. 가이거의 리더 집단으로서, 그들끼리도 서로 이름을 모를 만치 비밀에 싸여 있는 사내들이었다. 듣기로는 맹수 이름에서 따온 호칭으로 부른다고 했다. 평소에는 일반대원으로 위장했고, 대외로 나설 때는 언제나 사신 가면을 쓰는 통에 일반인들에게는 얼굴조차 알려져 있지 않았다.

울프삭의 심중에서 부장들에 관한 글자가 간혹 나오기는 했다. 거개가 “건방진 자식들” 내지는 “이번에는 제법이었단 말이야” 등등이었다.

나는 자작나무 가지를 내려놓고 상담노트를 펼쳤다.

“혹시 모르지요. 그들과 접촉할 수는 있겠습니까?”

“어려워. 훈련받은 놈들이라 한 치의 틈도 없어. 울프삭과 악수하는 것만도 벅차다네. 나니까 감당하지, 대부분의 귀족은 울프삭이 조금만 가까이 다가와도 까무러쳐. 호위병들에게 둘러싸여서 돌아다니는 모습이 압권이야. 그리고 놈들은 깡패라서 모사까지 꾸밀 머리는 없다고 보네.”

“다른 쪽으로 짐작 가는 사람은 없습니까?”

“롭 스타소프, 해리 알토넨. 최근 급부상하는 신진들이지. 놈들을 중심으로 젊은 무신귀족들이 부쩍 뭉치고 있어. 항간에는 세대교체의 시기가 왔다느니 해서 말이 많지. 하긴, 울프삭과 내가 이 판에 뛰어든 지가 벌써 삼십 년이니……. 스타소프와 알토넨이 요즘 울프삭과 만남이 잦긴 해. 그러고 보니 놈들도 성질이 잔인하군. 하여튼 무신종자들이란…… 쯔쯔. 그나저나 이거 참 애매하게 되었군.”

“울프삭 뒤에 도사린 검은 기운이 그를 든든히 보완할 만큼 영리해 보입니다. 기운이 굉장히 날카로워요. 3차 투시인데도 이 정도면 상당한 인물이라 봐도 좋겠죠. 조심하셔야겠습니다. 우선 그들과 접촉을 시도해 보십시오.”

“언제까지?”

“빠를수록 좋습니다. 염려하지 마십시오. 코트비카의 죽음이야 어차피 익히 예상하지 않았습니까.”

“허허.”

고객이 깊이 탄식했다.

“알겠네. 자네 때문에 팔자에도 없는 파티광 노릇을 하려니 힘들지만 어쩌겠는가. 모두가 이 나라를 위한 일.”

“힘내십시오.”

“그렇다면 앞당겨야 할까.”

“물론입니다. 울프삭은 이번 일로 우리가 위축되리라 예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애당초 코트비카는 울프삭에게 제물로 던지기로 작정했던 것. 앞으로가 중요하지요.”

“내게 믿을 사람이라곤 자네뿐이야. 몸은 이제 괜찮은가? 지금은 바쁘니 나중에 자세히 대화를 나누도록 하지. 이만 가 봐야겠네.”

나는 말을 할까 말까 망설였다.

제가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습니다…….

관둬 버리고 상담을 끝냈다. 침대 밑에 상담노트를 던지고 자작나무 가지도 화병에 도로 꽂아 넣었다.

헌책방으로 향했다. 요즘은 집보다는 헌책방이 편했다. 밤낮 가리지 않고 헌책방 카운터를 지키기 일쑤였다. 겨울이 긴 왕국에서 사람들의 가장 보편적인 취미는 독서였다. 어린아이도 세 권짜리 장편소설을 거뜬하게 읽어낼 정도였다. 춥고 지루한 밤을 보내는 데 독서만큼 적당한 소일거리는 없었다. 매음굴에 위치한 헌책방이었지만 장사는 그럭저럭 되는 편이었다.

오늘로 가게를 연 지 2주째였다. 병마는 여전하지만 스노우 화이트에 달려가는 짓 따위는 일절 하지 않았다. 돌이킬수록 이름 모를 남자들과 뒤엉키며 병마를 떨치려 애쓴 자신이 한심했다.

어제는 대나무를 사서 화병에 꽂아 책방 곳곳을 장식했다. 칙칙한 실내에 마술처럼 생기가 감돌았다. 조만간 닥쳐올 순간을 조용히 기다리기로 했다. 확률은 낮았지만, 되도록이면 평화롭길 바랐다. 이따금 유리문으로 눈길을 주노라면 어김없이 자작나무가 보였다. 거리로 흩날리는 눈발에도 불구하고 그 형체는 뚜렷했다.

책을 읽다가 깜빡 잠들어 버린 듯했다. 출입문에 달아 놓은 방울이 딸랑딸랑 흔들리는 소리가 들렸다.

야심한 밤에 웬 손님이지…….

굳이 고개를 들지는 않았다. 설사 도둑이라도 훔쳐갈 만한 물건이라고는 헌책뿐이고, 카운터 금고에는 몇 장의 지폐밖에 없었다. 나는 아예 팔에 얼굴을 파묻고 엎드려 버렸다.

묵직한 구두소리가 실내를 천천히 돌더니 안쪽에서 멈추었다. 그러다가 금방 이쪽으로 뚜벅뚜벅 다가왔다. 그리고 정적.

도둑이구나.

졸음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돈이라면 내 뒤쪽 금고에 들어 있어요. 그게 전부예요. 가지고 나가요.”

잠깐 뒤 허공에서 나직한 웃음이 터졌다.

“이거 섭섭하군요. 쳐다보지도 않고 축객령이라니, 진짜 좀도둑도 실망할 것 같은데요.”

비로소 나는 눈을 비비며 고개를 들었다.

누구지…….

탁한 기억에서 남자를 끄집어내기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아아, 하며 무심결에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그’였다. 금발. 회색 눈동자. 입가에 띤 옅은 웃음.

남자가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입니다. 여기서 일하나 봐요?”

나는 예, 하며 허리를 부스스 폈다.

“바에 가다가 우연히 들렀습니다. 이 늦은 밤까지 불이 켜진 책가게라니 멋진데요. 요즘 스노우 화이트에 잘 안 들르는 이유가 일 때문이었습니까?”

“뭐. 그런 것 같습니다.”

나는 건성으로 대꾸하며 카운터를 정리했다. 불쾌했다.

차라리 좀도둑이었으면 더 좋았을지도.

하룻밤 상대를 또 여기서 마주치다니 전혀 달갑지 않았다. 스노우 화이트가 이 근처인 것이 문제였다. 나를 의자에 묶어 놓고 두 시간이나 두들겨 팬 변태가 우연히 여기에 들렀다가 행패를 부려 대 연행된 때가 고작 일주일 전이었다.

“흠.”

남자는 카운터를 정돈하는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노골적인 눈초리였다.

정리를 하는 와중에도 뚜렷이 느낄 정도였다. 그의 시선이 내 뺨과 입술을 더듬더니 몸을 훑어 내렸다. 허리 부분에서는 눈길을 고정한 채로 한참을 뜯어보았다. 나는 원래부터 타인의 시선을 싫어했다. 의식하지 않으려 애써도 소름이 돋았다.

“이제 정리하고 돌아가려는 겁니까?”

“예, 집에 가야지요. 내일을 위해서라도.”

나는 딱 잘라 대답했다. 남자는 예의가 깍듯했다고 기억했다. 이만큼 단호하게 답하면 이쪽이 하룻밤을 함께할 생각이 없음을 간파하고 물러서리라 판단했다.

내가 코트를 걸치는 동안에도 남자는 시선을 떼지 않았다. 모자를 쓰고 가게 열쇠까지 챙길 즈음,

“옷이 바뀌었군요.”

남자가 불쑥 말했다.

나는 “예?” 하며 옷을 내려다보았다. 남자가 빙그레 웃었다.

“그 옷이요. 언제나 입던 검은 코트가 아니어서 말입니다.”

“아. 그건 세탁소에 맡겼어요.”

“그렇습니까? 그런데 이쪽이 더 낫군요. 검은색보다는 밝은 색이 훨씬 어울립니다. 털 소재보다는 이런 트위드 소재가 당신 얼굴을 돋보이게 하는군요.”

품평이라도 하는 어투였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직업이 디자이너라도 되나 보지요?”

“디자이너가 아니라도 누구나 그렇게 생각할걸요. 그 옷은 정말 그쪽에게 안 어울렸다구요.”

“저는 옷차림에 관심을 두는 편이 아니어서요. 저, 이만 문 잠가야 합니다만.”

내 재촉에 남자가 다시 한번 웃었다. 쾌활하고 여유로운 미소였다.

정적이 느릿느릿 지나갔다. 점차 야릇한 기분이 몰려왔다.

기억 속에서 하룻밤 상대들은 화가가 목탄을 묻힌 손끝으로 대충 그린 소묘처럼 흐릿한 형상으로만 남아 있었다. 눈앞의 남자도 그중 하나일 뿐이었다. 나는 그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타인을 잘 쳐다보지 않는 나로서는 드문 행동이었다. 잠자코 웃는 그가 흠잡을 데 없는 미남임을 불현듯 깨달았다. 허점을 찾을 수 없는 매너만큼이나 그의 얼굴은 단정하고 날카로웠다.

그러나 나는 저 빈틈없는 얼굴 뒤에 숨겨진 역한 취미를 알고 있었다. 그것만은 똑똑히 기억했다. 남자가 요구한 온갖 행위가 뇌리에 되살아났다. 갑자기 한기가 전신을 타고 돌았다. 나쁜 예감이 스쳤다.

뚫어지게 쳐다보는 내 시선이 되레 즐겁기라도 한 양 남자는 계속 웃고만 있었다.

한참 후 나는 충동적으로 말했다.

“디자이너가 아닐지는 몰라도 그쪽이야말로 옷이 멋지군요.”

“제가요?”

남자가 자신의 옷차림을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나는 “예.” 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남자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하긴…… 그렇긴 하군요. 신경 좀 썼습니다. 오늘은 그럴 수밖에 없는 날이어서 말입니다. 중요한 모임도 있고, 이런저런 사람을 만나는 날은 어쩔 수 없지요.”

문득 어떤 생각을 떠올린 듯 남자가 픽픽 웃었다. 그러다가 내게로 시선을 맞추었다. 회색 눈동자가 차갑게 빛났다.

“그나저나 어떻습니까. 오늘밤 시간이 되면 저와 보내는 게.”

“싫습니다.”

남자는 미소를 잃지 않았다. 그가 돌연히 움직인 때는 잠시 뒤였다. 날렵한 커팅의 전신코트 아래에서 구두소리가 묵직하게 울렸다. 남자가 내 앞에 멈춰 섰다.

잠깐 나를 내려다보던 그가 싱긋 웃었다.

“섭섭하군요.”

그렇게 말하며 갑자기 내 손에서 열쇠를 낚아챘다. 행동이 매우 빨라 손쓸 틈이 없었다. 그러나 나는 놀라지 않았다. 남자가 여차하면 돌발적인 짓을 하리라고 어렴풋이 직감한 터였다.

“아무래도 안 되겠습니다. 오늘은 제가 좀 급해서요. 그쪽도 썩 힘들진 않을 겁니다. 오늘은 친구도 없고 저뿐입니다.”

나는 그에게 싫다는 말이 통하지 않을 것임을 깨달았다. 또한 이 사내가 마음만 먹는다면 일주일 전의 그 변태보다 몇 배는 위험해지리라는 사실도. 지금은 늦은 밤이어서 도와줄 경관도 없었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타협뿐이었다.

“그럼 잠깐 여기서 하고 돌아가요. 그 이상은 안 됩니다.”

“잠깐 여기서? 뭘 말이죠?”

남자가 짐짓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면서도 능청스럽게 가게 문을 안에서 잠갔다. 공중으로 가볍게 열쇠를 띄워 손에 움켜쥐고는 포켓으로 넣어 버렸다. 사소한 동작이었지만 그 움직임은 매섭고 날렵했다. 나는 처음으로 화가 났다.

“키는 돌려주시죠.”

“나중에요.”

남자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잘라 대답했다.

“그쪽 말대로 잠깐 여기서 해 보기나 합시다. 그런데 할 장소가 있긴 한가요.”

남자가 헌책이 가득 쌓인 실내를 빙 둘러보았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예의가 깍듯한 줄로만 알았는데 이제 보니 넉살이었다. 그것도 수준급의 넉살이었다.

“저쪽에 가면 밖에서 보이지 않을 거예요.”

실내의 가장 안쪽 모퉁이로 향했다. 나를 따라오며 남자가 또 넉살을 떨었다.

“너무 좁군요. 이런 곳에서 뭘 하겠다고? 책이라도 낭독해 줄 셈입니까?”

“여기 앉아요.”

내가 가리킨 책 더미에 남자가 앉았다. 입가에 띤 미소가 변함없었다. 무엇을 하려는지 다 알고 있다는 듯 다리를 지그시 벌렸다. 자신의 코트 단추를 풀어 내가 그의 다리 사이에 앉기 편하도록 했다.

“모자는 벗지요.”

“예?”

나는 남자의 바지 지퍼를 내리다가 반문했다.

“모자는 왜요?”

“머리카락 만지고 싶거든요. 그 정도는 되겠지요?”

“……마음대로 해요.”

남자가 내 모자를 벗겨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굉장히 길어요…… 머리 감을 때 시간이 많이 걸릴 것 같군요. 안 불편합니까?”

“습관 들이기 나름입니다.”

나는 짤막히 말한 다음 발기한 그의 남성을 삼켰다. 냄새가 시큼했다.

“혀를 움직일 필요까진 없습니다. 그냥 빨기만 해요.”

남자가 자신의 코트로 나를 감쌌다. 그러고는 내 머리를 뒤에서 눌러 남근을 깊숙이 빨도록 했다. 조용한 실내에서 질척이는 소리가 흩어졌다.

오럴을 하기 위해선 그의 허벅지를 양손으로 잡을 수밖에 없었다. 돌같이 단단한 허벅지였다. 지금쯤 코트비카 후작의 죽음에 비탄에 빠져 있을 고객이 이 꼴을 본다면 기절해 나자빠질 것이다. 유일하게 의지하는 사람이 가이거 대원의 남근을 빨고 있으리라고는 상상조차 못할 터였다. 그러나 우리의 계약조항에 사생활까지는 포함되지 않았으므로, 고객이 지금 이 상황을 아는 날이 오더라도 내게 간섭할 권리는 없었다.

남자가 나직이 신음했다. 허리를 들어 올려 성기를 목구멍 깊숙이 삽입했다. 성기가 철퍽철퍽 꽂혀들었다. 흡사 질식할 것처럼 숨이 막혔다. 지나칠 만큼 힘이 넘치며 울퉁불퉁한 남근이었다. 난폭하게 목구멍을 헤집던 성기가 잠깐 속도를 멈추었다. 남자가 작게 속삭였다.

“놀랄 필요 없습니다. 가만히 있어요.”

과격한 짓을 하기 전에 으레 하던 말이었다. 또 뭔가를 하려는구나…… 싶을 찰나 그의 손이 내 코트 깃을 헤치고 목덜미로 들어왔다. 동시에 성기를 꾹 누르며 삽입했다.

갑자기 남자가 내 목을 졸랐다. 엄청난 힘이었다. 본능적인 공포가 온몸을 감쌌다. 숨을 쉬려 애썼지만 조임만 더해 갈 뿐이었다. 반동으로 기도의 흡입이 박차를 가했다. 보통 때와 비교도 할 수 없이 거센 힘으로 남근이 빨렸다. 내 허리를 졸라 내벽의 수축을 유도했던 것과 동일한 방식이었다. 남자가 더더욱 가혹하게 힘을 가했다. “괜찮아요…… 마음 놓아요…….” 하며 아랫도리를 거칠게 힘껏 밀었다. 음성은 다정하고 행동은 잔인했다. 불알이 턱에 철퍽철퍽 부딪쳤다. 느리게, 빠르게 속도를 조절하며 허리를 움직였다.

남자의 입술에서 새는 신음이 흥분으로 완연했다. 그러나 이대로라면 나는 꼼짝없이 죽을 것이다. 눈앞이 하얗게 변했다. 푸욱 푹 쑤셔지는 목구멍에 통증이 덮쳤다. 그의 허벅지를 잡고 있던 내 손이 스르륵 내려갔다.

의식이 아득해질 순간 남자가 손을 떼어냈다. 아슬아슬한 타이밍에 기도가 확 트였다. 나는 헐떡헐떡 숨을 들이마셨다. 동시에 성기가 사정했다.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두 번, 세 번, 연달아 쏘아 내보냈다. 남자가 내 턱을 치켜 올렸다. 속수무책으로 정액을 삼키는 이쪽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조차 의식 못한 채 나는 숨만 들이쉬었다. 비릿한 정액이 목구멍을 타고 질질질 넘어갔다. 남자가 성기를 뽑아내며 내 혀에 귀두를 비볐다.

“이거 끝내주는데!”

잔혹하리만치 즐거운 어투였다.

이윽고 성기가 입 밖으로 느리게 빠져나갔다. 목구멍 깊숙이에서 정액이 귀두에 실처럼 연결되어 나왔다.

“남김없이 핥아요.”

나는 그렇게 해 준 다음 기침을 하며 가슴을 탁탁 때렸다. 계속 헐떡거려도 숨이 찼다.

“조금 지나면 괜찮습니다. 목에 난 자국도 모레쯤에 가라앉을 겁니다.”

남자가 지퍼를 올리며 말했다. 지쳐 버린 나는 바닥으로 비스듬히 엎드렸다.

“끝났으니 나가요.”

내가 말했다. 그러나 눈앞의 구두는 떨어질 기미가 안 보였다.

“흠…….”

웃음이 섞인 침음.

남자가 바닥에 흐트러진 내 머리카락을 집어 만지작거렸다.

“더 하고 싶은데요.”

또 넉살 떠는 어투였다. 남자가 책 더미에서 내려와 내 옆에 앉았다.

“이제 좀 괜찮습니까? 등 두들겨 드릴까요?”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기침은 가셨고 더는 숨이 가쁘지도 않았다. 남자가 드러난 내 쇄골을 유심히 훑어보았다. 그 순간 나는 희망사항이 물 건너갔음을 깨달았다. 그래도 한 번 더 말했다.

“이만 돌아가요. 내 쪽에선 최대한 타협했어요.”

“흠.”

남자가 유들유들한 태도를 유지하며 딴청을 부렸다. 한손으로 내 이마를 훑으며 “땀을 많이 흘렸군요.” 하고 또 실없는 소리를 던졌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뜸을 들이던 남자가 말했다.

“그쪽이 오늘은 정말 하기 싫은가 봅니다. 그런데 이거 어쩌죠. 오늘은 저에게 상당히 운이 좋은 하루였거든요. 생각지도 않게 멋진 일을 두 건이나 해치워서, 마무리도 근사하게 하고 싶었습니다. 그쪽이 마음을 바꿔 줄 의향은 없습니까. 심하게는 안 하겠습니다.”

남자의 마지막 발언에 나는 웃고 말았다. 통하지 않을 것이 뻔했지만 재차 단호하게 말했다.

“안 됩니다.”

“흠.”

눈을 깜박거리던 남자가 다시금 쾌활하게 웃었다.

“그럼 강제로라도 해야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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