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 .M─ (6/101)

6 .M─

가면무도회가 종반으로 향했다. 황금빛 몰딩이 굽이치는 홀 한쪽에서 악단이 음악을 연주하고 있었다. 수백 개의 촛불이 타오르는 샹들리에 아래에서 가면을 쓴 귀족들이 웃고 떠들며 춤추었다. 붉디붉은 홀을 일렁일렁 떠도는 그 모습은 마리오네트 인형극처럼 보이기도 했다.

가이거 부장들이 울프삭 경을 그림자처럼 뒤따라갔다. 가면을 쓴 귀족들 속에서 울프삭 경 무리는 하얀 린넨 커튼에 묻은 핏방울처럼 도드라졌다. 나는 홀 기둥에 등을 기대고서 그들을 주시했다. 손에 든 글라스에서 적색 와인이 찰랑찰랑 흔들렸다.

울프삭 경이 귀족들과 떠들썩하게 악수를 나누었다. 그를 호위하는 부장들은 오늘도 하나같이 사신 가면을 쓰고 제복코트를 걸치고 있었다. 부장들 중 한 명이 이쪽으로 흘끗 시선을 던졌다. 레오파드였다.

우리는 잠깐 눈빛을 교환했다. 레오파드가 제복코트 깃을 슬쩍 세웠다. 사냥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였다.

나는 빙글 몸을 돌렸다.

오늘의 사냥감은 아리스티안 코트비카 후작. 마넨의 측근인 그는 사교계에서 인기를 끄는 미남이자 왕비의 불륜 상대였다. 하기야 내가 봐도 ‘양치는 소년’ 같은 얼간이보다는 코트비카 후작이 백배 나았다.

‘양치는 소년’. 왕의 별명이었다. 외척이 세를 떨치면서 귀족들은 자신들에게 위협이 될 만한 왕실 후손에게 족족 죄를 덮어씌워 죽이거나 암살해 왔다. 선왕의 아들들도 마수를 피하지 못했다. 급기야 최악의 사태가 발생했다. 왕좌를 이어받을 씨가 말라 버린 것이다.

다급해진 울프삭 경과 마넨은 먼지 묵은 족보까지 뒤진 끝에 겨우 왕손을 발견했는데, 그가 이른바 ‘양치기 소년’ 크루거였다. 그의 조부가 테렌스 4세의 일곱 번째 왕자였다. 외척의 탄핵을 받아 먼 시골로 쫓겨났던 그 조부는 이 여자 저 여자를 건드리며 시름을 달래다가 사망했다.

크루거는 그 왕자가 귀양지에서 뿌린 씨앗의 산물이었다. 제 몸속에 왕가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사실은 꿈에도 모르고, 나이 오십이 넘도록 평범한 목동으로 살아가던 크루거는 졸지에 금의환향했다. 물론 공짜는 아니었다. 크루거는 아내와 이혼하고 마넨의 딸과 결혼해야 했다. 부친의 권력욕에 떠밀려 늙은 크루거와 결혼한 왕비가 바람을 피우게 된 것은 당연지사였다. 코트비카는 왕비의 다섯 번째 불륜 상대였다.

나는 소리 없이 무도회장을 나섰다. 대리석 계단을 내려가 별궁 밖으로 나왔다. 프랑스식 정원은 눈송이로 희끗희끗 얼룩져 있었다. 밤하늘은 해저처럼 검고 깊었다. 먼 성당에서 울리는 종소리가 바람결을 타고 날아왔다. 영하 23도의 혹한이 몰아치는 밤이었지만, 나는 조바심 내지 않고 천천히 걸어갔다.

별궁을 돌아 한참 걸어가자 온실이 보였다. 유리온실에서 흘러나오는 붉은 빛이 컴컴한 어둠을 가스등처럼 밝혔다. 온실로 가까이 다가서서 안쪽을 살펴보았다. 물방울이 맺힌 유리 너머에서 열대식물들이 숲처럼 무리를 짓고 있었다.

나는 기척 없이 유리문을 열었다. 온실 내부는 열기로 후끈거렸다. 유리벽 곳곳은 물방울이 가늘고 길게 흘러내린 자국이 나 있었고, 축축한 공기와 뒤섞인 열대식물 냄새는 하수구에서 올라오는 악취처럼 역했다.

어딘가에서 신음이 새어나왔다. 나는 소리 없이 걸어가며 포켓에서 실크 천을 꺼내들었다. 우거진 열대식물 사이에서 얽히고설킨 반라가 드러났다. 이쪽으로 등을 드러낸 남자가 활짝 다리를 벌리고 누운 여자에게 부지런히 허리를 박아 대고 있었다. 나는 남자의 뒤쪽으로 슬그머니 다가섰다. 신음을 흘리던 여자가 돌연 다가서는 그림자에 흠칫했다.

한순간에 나는 실크 천으로 사내의 목을 감아 죄었다. 비명을 지르려던 여자가 손으로 황급히 입을 막았다. 왕비답게 침착한 처세였다. 속수무책으로 목이 졸리는 코트비카가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나는 실크 천을 쥔 손으로 더욱 강한 힘을 실었다. 실크 천에서 전달되는 꿈틀꿈틀한 움직임이 아주 짜릿했다.

코트비카가 손가락으로 실크 천을 잡아 뜯기를 서너 번, 그러나 불가항력이었다. 이내 그의 두 팔이 축 늘어졌다. 나는 틈을 놓치지 않고 속삭였다.

“왕비의 몸속에서 맞이하는 죽음이니 영광스러울 겁니다.”

코트비카의 허리가 움찔움찔 경련했다. 왕비의 몸속으로 사정하고 있음을 알리는 징후였다. 교수형 당한 시체의 바지는 대개 정액으로 젖어 있다. 교살은 절정의 황홀감을 선사하는 죽음이었다. 더불어서 오물도 선사했다. 사정 다음 단계에서는 괄약근이 벌어지면서 똥이 흘러나온다. 문자 그대로 폭우처럼 후두두 쏟아진다.

코트비카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의 항문에서 쏟아진 오물이 왕비의 가랑이로 웅덩이처럼 고였다. 나는 재빨리 떨어져, 옷에 악취가 배는 불상사를 간단하게 피해 버렸다. 왕비가 소리 죽여 흐느꼈다.

나는 실크 천을 바르게 접어 왕비에게로 던졌다.

“전하께서 기다리십니다.”

그러고는 망설임 없이 몸을 돌렸다.

왕비가 누구에게 제일 먼저 연락을 취할지는 뻔했다. 오늘의 간단한 업무는 내가 기획한 작품이었다. 일명 《사랑의 슬픔》. 정적의 측근을 제거하고 유일한 목격자이자 마넨의 딸인 왕비를 통해 이쪽의 의지도 보여 준다는, 이른바 꿩 먹고 알 먹고 작전이었다.

코트비카의 죽음은 상당한 파문을 일으킬 테지만 큰 걱정은 하지 않았다. 목격자는 왕비밖에 없고, 왕실의 체면은 진실보다도 소중하며, 코트비카를 교살한 나는 가면을 쓴 젊은 귀족 차림이었으니까.

여유롭게 무도회장으로 돌아갔다. 시종을 불러 “울프삭 경께서 목이 마른 듯하니 백포도주를 갖다 드려라.”고 시켰다. 백포도주는 업무가 성공했다는 의미였다. 시종에게 건네받은 백포도주를 마시는 울프삭 경의 표정이 시원해 보였다.

울프삭 경과 웃음을 교환한 후 잠깐 음악을 감상했다. 가면을 쓴 여가수가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드보르작의 오페라 『루살카Rusalka』, 「달에게 바치는 노래Song to the Moon」. 내가 좋아하는 곡이었다. 나는 와인글라스를 느릿느릿 흔들며 귀를 기울였다.

오, 달님. 그 자리에 멈추세요.

사랑하는 내 님이 어디 있는지 말해 주세요.

부디 그에게 말해 주세요.

하늘의 은빛 달님,

내가 그이를 꼭 껴안고 있다고,

그이는 잠시만이라도

그 꿈을 생각해야 한다고…….

노래가 끝나자 바로 무도회장을 빠져나와 버렸다. 벌써 자정을 넘어선 시각이었다. 나는 귀족들의 지루한 파티를 끝까지 참아 줄 만큼 인내심이 강하지는 않았다.

자동차를 몰고 왕궁을 빠져나왔다. 가면을 벗어 도로로 내던져 버렸다. 바람에 휩쓸린 가면이 뒤쪽으로 훌쩍 사라졌다. 곧장 42번가로 향했다. 스노우 화이트에서 남자를 골라 하룻밤을 즐길 작정이었다. 왕궁에서 두 시간 거리였지만 개의치 않았다.

나는 웃으면서 담배를 뽑아 물었다. 오늘은 예감이 좋은걸.

은빛 달이 먹장구름 속에서 얼굴을 드러냈다. 겨울의 지겨운 한설에서 이것만으로도 유쾌했다. 두 시간 거리를 한 시간 삼십 분 만에 주파했다. 42번가 광장 한복판은 변함없이 메두사의 목을 치켜든 페르세우스 청동상이 지키고 있었다. 광장을 지나치자 매음굴이 펼쳐졌다. 도로와 인도를 가리지 않고 매춘부들이 호객행위에 열중하고 있었다.

자동차를 천천히 몰며 상대를 물색했다. 마음에 드는 남자가 눈에 띄면 굳이 스노우 화이트까지 가지 않고 길거리에서 결정할 생각이었다. 스노우 화이트를 들락거린 지도 어언 석 달째였다. 그새 나와 레오파드는 스노우 화이트에서 ‘질 나쁜 섹스를 즐기는 놈’들로 평판이 자자해져 버려, 요즘에는 파트너 잡기가 쉽지 않은 터였다.

질 나쁜 섹스라……. 나는 코웃음 쳤다.

“어림없는 이야기지.”

겁쟁이들이나 하는 소리다. 엽색행각이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었지만 질 나쁘다는 평판까지 받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 명칭은 서툴기 짝이 없는 초보에게나 어울렸다.

노련한 싸움꾼은 상대방에 따라 적절하게 힘을 조절할 줄 알았다. 우리는 사람을 죽고 다치게 하는 방면에서 이골이 난 프로였다. 한 시절 고문깨나 하고 다닌 레오파드와 나는 어떻게 해야 사람의 몸이 한계까지 버티는지, 혹은 한계를 넘어서는지 정확하게 알았다. 그런 우리가 섹스 따위에 힘을 조절하지 못할 리 있겠는가. 문제는 파트너 쪽이었다.

우리가 “저흰 하드섹스를 선호합니다. 가능합니까?” 하고 의사를 물으면 대개가 줄래줄래 따라왔다. 적당히 즐기는 초기단계에서는 파트너도 적극적으로 호응했다. 되레 껌뻑 죽으며 더 쑤셔 달라고 질질 싸 댔다. 문제는 다음부터였다. 분위기가 돋은 우리가 요구의 강도를 높이면 그때야 파트너는 스리슬쩍 태도를 바꾸고는 했다.

이를테면 2주 전, 우리는 상대에게 피스트 퍽을 원한다고 처음부터 분명히 의향을 밝힌 뒤 호텔로 갔다. 초반을 가볍게 즐긴 다음, 본격적으로 판을 벌리고자 파트너를 침대에 눕히고 팔과 다리를 벌려 묶었다.

「왜…… 묶는 거예요, 자기들?」

누렇게 뜬 얼굴로 파트너가 물었다.

나는 근육이완제를 그의 엉덩이 사이에 바르며 대답했다.

「피스트를 할 때 몸부림치는 경우가 있거든요. 장이 호되게 다치는 걸 방지하기 위해섭니다. 우리만 믿고 가만히 있으면 됩니다. 괜찮습니다. 안 다치게 할 테니까.」

뒤이어서 레오파드가 바삭거리는 투명 비닐장갑을 꼈다. 파트너가 이쪽을 흡사 루마니아의 흡혈박쥐라도 되는 양 쳐다보았다.

끝은 어처구니없었다. 피스트는커녕 손가락도 넣기 전에 파트너가 오줌을 질질 싸 버리고 말았다. 기가 막혀서 「그럼 왜 따라온 거지?」 하고 묻자 파트너가 훌쩍훌쩍 울며 대답했다.

「정말로 할 줄은 몰랐어요.」

어이가 없었다. 웬만해서는 무시하고 감행했을 터지만, 눈치를 보아하니 작자가 똥까지 싸지를 기세였다. 그래서 그냥 돌려보냈다.

야밤에 코미디 한 판을 벌인 셈이었다. 파트너를 공포로 몰아간 것은 피스트 퍽 따위가 아니라 그의 상상력이었다. 이완제를 바르는 단계에서 이미 그의 머릿속은 장이 터져 죽어가는 자신의 모습으로 뒤죽박죽 엉켜 버린 것이다.

단언하지만 그런 일은 조금도 없었다. 어느 선까지 해야 찢어지고 터지고 피가 나는지 속속들이 꿰고 있는 우리가 그런 한심한 실수를 저지를 리 만무했다. 그래서 보통은 상대가 겁을 먹든 말든 개의치 않고 행위에 들어갔다. 결과는 장담한 대로였다. 털끝이라도 다친 파트너는 단 한 사람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부터인가 스노우 화이트에서 우리는 ‘질 나쁜 섹스를 즐기는 놈들’로 소문나고 말았다. 이런 제기랄.

나는 투덜거리며 핸들을 돌렸다.

“레드폭스가 딱 좋았는데.”

그러나 레드폭스에게 피스트 퍽까지는 시도하지 못했다. 체구가 너무 작아서 관둬야 했다. 그것은 참 아쉬운 일이었다.

사흘에 한 번은 바에 들르던 레드폭스는 일명 《고등어로 나를 유혹한 날》 이후 자취를 감추었다. 2주간 머리털 한 올도 보지 못했다. 그야말로 한순간의 신기루였던 양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어쩌면 병 때문에 죽었을지도.

휑한 집에서 썩어 가는 그의 시체를 상상하니 웃음이 나왔다. 죽이게 웃겼다. 오줌을 싸 댄 그 겁쟁이 놈이 했던 상상에 필적할 만큼 한심한 상상이었다. 갑자기 짜증이 치솟아서 카 라디오를 켰다. 코트비카의 돌연사가 벌써 속보로 나왔다. 사인은 심장마비. 마넨의 행동력에는 감탄사가 나왔다.

나는 픽픽 웃으며 길거리를 응시했다. 호객행위에 여념 없는 매춘남녀를 훑어보다가 멈칫했다.

하하하. 이게 누구신가.

어쩐지 예감이 좋았다 했지…….

나는 지그시 웃었다.

인파 너머 어둑한 골목 모퉁이에 한 사내가 서 있었다. 벌건 눈초리로 이쪽저쪽을 둘러보는 중이었다. 누군지 단박에 알아보았다. 얀 머진, 엑달 공의 측근으로 활약하다가 상관의 실각 이후 자취를 감춘 문신귀족이었다. 경찰과 가이거가 2년간 수배를 해 왔지만 이제껏 잡지 못한 쥐새끼였다.

잘 걸렸다, 이 푸들 새끼.

체포 따위 귀찮은 절차 모두 생략하고 즉각 보내 버리기로 작정했다. 왕비의 몸속에서 최후를 맞이한 코트비카와 매춘거리를 쓸쓸히 뒹굴며 죽어갈 머진이라.

잘 나가는 귀족나리나, 못 나가는 귀족나리나 아랫도리 간수에 실패하여 족족 죽어나가는 밤인가.

머진이 코트 주머니에 손을 푹 꽂아 넣고 인도를 걸어갔다. 휘청거리는 걸음걸이에서 고독의 냄새가 짙게 풍겼다. 제법 볼만한 작품이 나올 것 같았다.

그의 걸음에 맞춰 느리게 차를 몰았다. 소음기 달린 권총을 꺼냈다. 내 자동차 창문 유리는 보안을 위해 검은 코팅이 되어 있었다. 이쪽이 들킬 염려는 없었다. 총구만 드러나도록 차 창문을 내려 그를 조준했다. 인파를 뚫고 머진까지 직선으로 총알을 박아 버릴 공간 확보가 쉽지는 않았다. 괜찮았다. 기다리면 허점이 생기기 마련이었다. 나는 살인에는 인내심이 강한 남자였다. 15분 후, 찰나의 틈이 생겼다. 놓치지 않고 총을 발사했다.

몇 초 뒤 관자놀이에서 피를 흘리며 머진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그래도 방심하지 않고 총구를 계속 겨눈 채 그를 살펴보았다. 머진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즉사가 분명했다.

재빨리 레오파드에게 전화를 걸어 “이봐, 지금 내가 뭘 했는지 알아? 얀 머진을 이 손으로 직접 보내 줬지.” 하고 약 올렸다. 그런 후 직속부하를 호출하여 머진의 주검을 비밀리에 본부로 가져오라고 지시했다.

후후후. 거물급 인사를 두 명이나 보낸 밤이라.

제법 괜찮은걸.

차 창문을 내려 상황을 관찰했다. 매음굴 길바닥을 나뒹구는 주검 따위에 신경 쓰는 행인은 없었다. 나는 담배를 뽑아 물며 느긋이 작품을 감상했다. 바닥을 스치며 머뭇머뭇 날아가던 신문지 조각이 머진의 송장을 덮었다.

기분이 날아갔다. 이제 남은 것은 상대를 물색하는 일뿐이었다. 그러나 매음굴답게 길거리에는 싸구려 몸뚱이만 득실득실했다. 이런 때는 내 까다로운 취향이나 탓할 수밖에 없었다. 레드폭스 때문에 눈이 하늘까지 치솟은 모양이었다.

담배를 차창 밖으로 던져 버리고 스노우 화이트로 향했다. 거기서도 상대를 못 잡으면 오늘밤은 용두사미였다. 스노우 화이트는 미로 같은 42번가의 한 으슥한 골목에 있었다. 대로에서 꺾어 들어가자 컴컴하고 비좁은 길목이 이어졌다. 뜨문뜨문 길목을 지키는 가로등은 임종이 임박한 노인의 눈동자처럼 미약한 빛으로 어둠을 희석시키고 있었다.

돌연 자동차 앞으로 뭔가가 확 뛰어들었다. 나는 무의식중에도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검은 고양이였다.

전조등 불빛으로 어둠이 증발된 하얀 길바닥에서 고양이가 이쪽을 흘끔 쳐다보았다. 호박색 눈동자가 날카롭게 빛났다. 이내 고양이는 긴 꼬리를 우아하게 흔들며 사뿐사뿐 걸어가 버렸다.

이거 괜히 얄궂은 기분인데.

나는 검지로 핸들을 톡톡 두들겼다. 어둠속으로 사라지는 고양이를 눈길로 좇아가다가 멈칫했다.

역시 내 예감이 틀릴 리 없지…….

나는 웃었다.

가라앉은 어둠속에 낡은 헌책방이 있었다. 가로등 불빛이 가게 유리문 표면으로 흐릿한 주황색을 얇게 덧바르고 있었다. 낡은 벽은 말라붙은 담쟁이덩굴을 가득 껴입고 있었다. 매음굴에 어울리지 않는, 고풍스럽고 아담한 헌책방이었다.

그리고 그곳 카운터에 레드폭스가 앉아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아마빛 머리카락을 먼지투성이 바닥까지 늘어뜨리고서.

오늘의 상대를 낙점했다. 나는 골목길 어귀에 자동차를 세우고 밖으로 나섰다.

달이 맑은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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