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화 (19/51)

18. 

늦은 시각.

서로 아무런 말없이 펌으로 돌아온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송 변호사의 사무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블라인드부터 착, 내린 미희는 책상을 두 손으로 짚었다. 타악! 짜증스럽게 내려친 테이블 매트 위에 그녀의 손자국이 선명하게 남았다.

세헌은 개의치 않고 접견용 소파에 다리를 척 꼬고 앉았다. 그 여유로운 모양새를 물끄러미 살피던 그녀가 느닷없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세헌이 너 이미 다 알고 있었던 거지? 반응이 그렇더라.”

그는 굳이 거짓말할 필요를 못 느꼈다.

“어쩌다 보니.”

너무 대수롭지 않아 하며 대꾸했던 터라, 미희가 버럭 소리를 높였다.

“그걸 나한테까지 숨겨! 언제부터? 이래서 도 관장이 준 건 안 맡은 거야?”

“거절할 당시엔 상황을 정확하겐 몰랐어. 최근에 상황을 알게 됐고.”

“세상에. 설마설마했는데 불화설이 진짜였구나. 제기랄, 어쩐지 유 대표가 본인 아내 감당 안 된다고 직접 한 소리 했다는 게 이상하게 신경 쓰이더라니. 아무것도 모르고 내가 도 관장한테 호구 잡혔던 거네. 내가 잘못했던 거야.”

입술을 잘근잘근 씹던 그녀는 결국 세헌이 있는 쪽으로 다가와 그와 마주 앉았다. 말을 이어 가는 미희의 음성에는 여느 때의 차분함이 거의 사라져 있었다.

“강 변, 이거 그냥 두면 안 돼. 여긴 로펌이야, 법 다루는 곳이라고. 도이경 관장이 이혼 소송을 한다? 이거 그냥 재벌 부처 송사 아냐. 그 부부 사이좋은 거 매번 전 국민 앞에서 자랑했었고, 자연히 소송을 하게 되면 온 나라가 시끄러워질 거야. 법적 공방 오가고, 서로 언론 통해 비난할 거고, 그런 상황에서 우리가 도 관장 동생을 보호하듯 데리고 있는다?”

“소송을 맡든, 아니든 최소한 도국이 최전방에서 수한을 척지는 모양새가 되겠지.”

바로 그거라는 양 심각하게 눈짓을 보낸 그녀가 꽤 단정적인 어투로 말을 이어 붙였다.

“최악의 경우 단순히 수한을 척지는 양상에서 안 끝나. 수한이랑 거래하는 모든 크고 작은 업체들이 서서히 다 도국에 수임을 끊을 거야. 얼마든지 그렇게 될 거라고. 수한 홀딩스 유 대표, 한번 밉보이면 끝까지 옹졸하고 잔인하게 밟는 걸 내가 몰라, 네가 몰라.”

“새삼스럽게 주지해 줘서 고맙군.”

“무엇보다 이경 씨는 이제 동생 외에 비빌 언덕이 없잖아. 우리가 표적이 될 거야. 유 대표가 자기 외부에서 욕먹을 때마다 애꿎은 우릴 얼마나 괴롭힐지 끔찍해.”

그렇게 나올 줄 알았다는 듯, 그는 잠시 침묵했다. 모두 그럴싸하게 들리긴 했다. ‘에이, 설마 그렇게까지 할까.’ 싶은 모든 일들을 실제로 하는 사람이 있었고, 도 관장의 남편은 정확히 그 범주 안에 속하는 아주 다채로운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세헌은 바로 동의해 주는 대신, 몸을 편안하게 뒤로 젖혀 등받이에 하중을 의탁했다. 뒤이어 퍽 지친 기색을 굳이 감추지 않은 채 제 이마를 손으로 짚었다.

사실 오히려 도이경 관장을 통해 상황을 직접 듣고 나니 뇌리가 한결 맑아진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는 이런 감각을 선호했다. 어두운 가운데 빛이 한 줄기 스미거나, 안개로 부옇던 사위가 깨끗해지는 그런 느낌 말이다. 상황은 보다 복잡해졌지만, 머릿속은 말끔했다.

“응? 세헌아, 뭐라고 말 좀 해 봐.”

“좋다고 받아 줄 땐 언제고 이제 와서 안절부절못해.”

“그땐 도 변이 앞으로도 계속 수한 사돈일 줄 알았으니까.”

“나 설득하면서 도 교수님 핑계 댔던 건 까맣게 잊어버렸어?”

원하는 답이 있는데 그가 다 알면서도 계속 은근하게 어기대자 흥분한 그녀가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고 또 다시 언성을 높였다.

“강세헌, 나한테 도국은 내 목숨이야. 내가 우리 펌 어떻게 키웠는지 잊었어? 아버지 눈치 봐 가면서, 다른 파트너들 비위 살살 맞춰 가면서. 네 지랄 같은 성질머리 다 감당해 가면서! 여태 악으로 지켰어. 대표직 물려받아 취임하기가 코앞인데, 이슈가 너무 커.”

“그러셨지. 고생 많았어. 미리 축하해.”

“강세헌!”

“어쩌자고.”

“우리 도 변 내보내자.”

여기까지도 그가 예상한 그림에서 한 치의 어긋남이 없었다. 이래서 그는 약점이 생기는 게 싫었다. 미희에게는 도국이 바로 그 약한 부분이었다. 그가 깊은 생각에 잠겨 있을 뿐 계속 제대로 된 답을 주지 않으니, 매우 인내심 있는 편인 그녀도 세헌을 보채기에 이르렀다.

“시끄러워지기 전에 손 털자고. 교수님껜 죄송하지만. 이게 최선이야. 난 그 부부 싸움에 손톱 하나 담그고 싶지가 않아. 네 밑에 있는 애니까 직접 그림 좀 만들어 봐. 전문이잖아.”

“일단 기다려.”

“그럴 시간 없어. 우선 탁 비서한테 이 얘길 전해 두고, 도 변한테 지금부터 우리 펌 내부 정보들 전달은 중단하라고 언질을……. 너 지금 그 M&A부터 걔 선수 아웃시켜.”

말을 하면서 내선 인터폰으로 손을 뻗은 그녀가 버튼을 누르려 했다. 그 순간, 줄곧 반쯤 관망하고 있던 세헌이 직접 움직였다. 그는 미희의 팔을 막아 내고, 수화기를 앗아 가 대신 제자리에 내려놓았다. 달리 뾰족한 수가 있냐는 듯한 시선이 닿자, 그가 친절하게 답했다.

“기다리라고 했잖아.”

“뭐 괜찮은 아이디어 있어?”

“아직. 얠 어떻게 하면 사수할 수 있을지 궁리 중이야.”

이 대답이 하늘이 무너졌다는 말도 아닐진대, 미희의 표정은 마치 그런 말을 들은 것처럼 충격을 받은 듯이 보였다. 아무리 윤신에게 긍정적인 감정을 갖고 있다고는 하나, 다른 사람도 아닌 세헌이 그를 안고 가겠다고 말하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듯했다. 최소한 그녀가 아는 바로는 누군가를 지킨다는 개념이 그간 그의 인생을 통틀어 전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너 미쳤니? 이렇게 충동적으로 결정할 일이 아니야!”

“누가 그래 충동적이라고. 난 꽤 오래 생각했어.”

윤신이 이 펌에 입사한 이후부터 지금까지 수개월 동안 세헌은 계속 헷갈렸다. 처음엔 쫓아낼까, 데리고 있을까를 고민했고, 그 뒤로는 못 이긴 척 이용당해 줄까, 그냥 모르는 척할까를 궁리했다. 큰 얼개에서 보면 이 모든 갈등들은 ‘윤신을 사수하느냐, 마느냐.’였다.

비는 시간마다 족족 윤신의 거취와 자신의 입장에 대해서 연구했던 탓에, 이제는 물릴 지경이었다. 오늘에야 머리가 좀 깨끗하게 비워졌던 터다. 차라리 잘됐다 싶었다.

“앞일은 몰라. 수한에서 딱히 손쓰지 않을 수도 있어. 도 관장도 그걸 기대한 것 같았고.”

“너 설마 도 변 데리고 있으려는 거니? 그건 같이 죽자는 거야. 너 불투명한 미래에 배팅하는 사람 못 되잖아. 위험 요소는 제거하는 게 맞아.”

“이렇게 하지. 혹시 수한에서 부당한 압력 들어오기 시작하면, 내가 도윤신을 데리고 도국을 나갈게. 그러니까 다른 파트너들한테는 이 상황 알리지 마. 꼰대들 지랄할 거 뻔해.”

당연히 세헌과 같은 필드에 서 있다고 여기고 있었던지라, 미희의 반응은 그저 아연했다. 황당하다 못해 황망했다. 날카롭게 곤두서 있던 음성 끝마저 조금 누그러졌다.

“너 제정신이야? 미친 거 아니고? 의사 상담부터 잡아야겠다.”

“안됐지만 난 여기 아닌 어느 펌에 가서도 지금처럼 잘 먹고 잘살 거야. 업계 1위 로펌이 아니라 여기여야 했던 이유는 중학교 때부터 로스쿨까지 학비, 생활비, 식대 다 대 줘 가며 날 지원했던 송미희 선배가 부탁했기 때문이고. 이만하면 빚은 다 갚았다고 봐. 그러니까 이제부턴 송 수석과 난 별개야. 도국에 내가 필요하다면, 이제부턴 펌이 나한테 맞춰.”

그녀는 도저히 이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어 보였다. 게다가 그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도 없었다. 세헌은 도국의 최대 매출처였다. 때론 존재만으로도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 펌의 가장 큰 자산이었기에 놓아줄 하등의 이유가 존재하지 않았다.

“너 자본 출자한 구성원 변호사야. 이 명성, 이 지위, 안 아까워? 대체 왜 이래. 이렇게까지 지키려는 이유가 뭐야? 둘이 사귀어?”

“선배가 말했듯이 난 도윤신한테 관심, 호기심, 흑심. 다 있어. 그래서 쓸모없어지니 팽 하는 이런 식으로 내보내기가 싫어.”

“도 변은 원래 밖에 있던 애야!”

“걜 아무도 보호하지 않으면 혼자가 될 거 아냐. 걔 옆에 아무도 없이 쓸쓸하게 만들기가 싫다고. 그 기분이 얼마나 엿 같은지는 누구보다 내가 잘 아니까.”

움찔한 그녀는 말문을 잠시 닫았다. 굳게 다물린 미희의 분홍색 입술을 응시하는 세헌의 입매가 단단했다.

두 사람을 동일시할 게 아니라는 걸 모르지는 않았다. 윤신이 어린애가 아니라는 것도 잘 알았다. 하지만 그들은 본질적으로 충격과 쓸쓸함에 대한 기본값이 매우 차이가 났다. 아마 똑같은 일을 당한다면 세헌은 가뿐하게 이겨 내고 또 다른 활로를 모색했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윤신은 그러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마음이 절로 움직였다.

도이경 관장 쪽에서 세헌에게 직접 손을 뻗었다는 건 그쪽 상황이 영 여의치 못하다는 뜻이었다. 여태 윤신의 삶에서 가장 큰 의지가 돼 주었을 그녀는 앞으로 본인의 전쟁을 치르느라 동생에게 눈길 하나 주지 못하게 될 터다. 이미 그 때문에 불안해진 윤신이 제게 자꾸 마음을 기댄다는 걸 은연중 눈치채고는 있었다.

그런 진퇴양난의 형국에서 끈 떨어진 연처럼 펌 밖으로 내몰려 매형이 퍼붓는 공세를 혼자 감당하게 될 윤신을 보기가 싫었다. 그건 상상만으로도 꽤 끔찍한 기분이었다.

“계산기 그만 두드리고, 은사님의 아들딸에게 연민을 좀 가져 봐.”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려. 내가 그 말을 강세헌한테 들을 줄은 몰랐다. 좀 비웃어도 되니?”

“이미 한 거 아니야? 더 하시든지.”

그가 필요한 대화는 모두 마쳤다는 듯 먼저 몸을 일으켰다. 길쭉하고 늘씬한 몸을 따라 밑에서부터 위로 시선을 끌어 올린 미희의 표정이 허탈했다. 그가 더 할 말 있으면 하라는 듯 가볍게 턱짓했다. 그녀는 마다하지 않았다.

“지켜야 할 건 곧 약점이고 약점은 그 사람을 언젠간 반드시 갉아먹는다.”

이는 세헌이 종종 했던 말이었다. 그는 입을 다물고 그저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미희는 그 단단한 시선을 정통으로 받아 내며 문장을 이어 붙였다.

“그래서 돈은 열심히 벌지만 물질에 지배되어선 안 되고, 연애는 하게 되더라도 진짜 감정은 쓰면 안 된다고. 네 마음만은 늘 오직 네 거여야 한다고. 그걸 빼앗기면. 모든 균열은 거기서부터 시작된다고. 이거 다 강세헌 네가 했던 말이야. 잊어버렸어?”

세헌의 얼굴에 더는 못 들어 주겠다는 양 지루해하는 기색이 완연했다. 그는 차갑게 대꾸했다.

“내가 이 펌에서 제일 아이큐 높은 거 몰라? 아주 잘 기억하고 있어. 그럼 역으로 나도 한 가지 묻지. 도윤신 받아들이면서 선배랑 내가 했던 딜 잊었어? 이런 일로 기어코 그 계약서까지 들먹이게 만들 건가? 그래?”

〈앞으로 펌 내에서 내가 하는 모든 일에 이래라저래라 하지 마.〉

그날의 기억을 떠올린 모양인지 어깨를 흠칫한 미희의 입이 돌연 꾹 다물렸다. 하나 세헌에게 초장부터 이런 식으로 말리게 되면 꼼짝없이 끝까지 당하게 되리란 걸 잘 아는 터라 금세 퍽 강경한 태도로 말문을 다시 열었다.

“강세헌. 너 그게 얼마짜린데. 그걸 어쏘 하나 지키자고 쓰겠다는 거니?”

“내가 가진 게 아주 많아. 그 까짓것 하나 없어도 잘 살아.”

“안 그러길 바라지만 수한이 나서면 난 널 버리게 될 수도 있어. 내가 차라리 그 계약 파기하고 위약금 물겠다고 할 수도 있다고. 그것도 감당할 수 있고?”

그녀는 냉정한 성미의 세헌을 잘 알았다. 해서 그와 인간적인 교감을 나누리란 기대조차 없는데도 조금은 섭섭할 정도로, 그는 고민 없이 즉답했다.

“선밴 그렇게 사랑하는 도국이나 열심히 지켜. 난 내 할 일 할 테니까.”

“세헌아.”

“얘기 끝난 걸로 알고 먼저 나간다.”

대화를 매조진 그가 눈인사했다. 미희는 도저히 설득이 안 되는 그가 꼴 보기 싫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더니 나가 보라는 듯 손짓했다.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처럼, 두 사람 간에 근원적 의견 차는 좁힐 수가 없었다. 다만 세헌의 공백이 도국에 치명적이리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미희 쪽이 일단 시간을 좀 더 두고 수한그룹이 어떻게 나오는지를 지켜본 뒤 차후의 일을 판별하려는 듯했다.

딸칵. 문을 닫고 완전히 집무실에서 나온 그는 제 방으로 향했다. 늦은 저녁 시간이라 사무실로 가는 길목의 비서실엔 빈자리가 듬성듬성 있었다. 다가오는 세헌의 눈치를 살피던 탁 비서는, 그가 책상 앞 파티션을 지날 때쯤 주변에서 뭔가를 찾아 챙기더니 조용히 몸을 일으켜 그를 쫓았다.

제 방 안에 들어와서 책상 앞에 앉은 세헌이 정면 윤신의 방을 힐끗 쳐다봤다. 퇴근한 모양인지 불이 꺼져 있었다. 그 시야를 가리듯이 우뚝 선 탁 비서의 안면에 호기심이 가득했다.

“수석님?”

“뭐가 궁금한데.”

“금융 팀 비서실 친구가 알려 줬는데, 송 수석님이랑 두 분 언성 높이시는 거 바깥까지 느껴졌대요. 뭐 안 좋은 일 있으신 거냐고 묻더라고요.”

“내가 개기는 거 하루 이틀이야? 사이 아주 상냥하고 다정하니까 쓸데없는 잡담 할 시간 있으면 일들이나 제대로 하라고 해.”

“그럼 다행이고요. 아, 지난번 보고드렸던 대영 그룹 계열 언론사 〈대영일보〉 창간 70주년 파티가 이번 주 금요일 밤이에요. 초대장이 정식으로 왔어요. 꼭 참석하셔야 해요.”

품 안에서 카드를 꺼낸 탁 비서가 그의 책상 위에 놓아 주었다. 귀찮다는 듯 그걸 들여다보던 세헌이 되물었다.

“다른 파트너 중에 내 대신 갈 만한 사람 없어? 적당히 수배해 봐. 다들 본인이 참석하겠다고 아우성일 거야.”

“아예 불참하시면 모를까, 대신 보내시는 건 절대 안 돼요. VVIP들만 초대한 소규모 행사인 것 같았어요. 왜, 예전에 대영 한국 항공 한태주 기장님 송사 하나 맡아 주신 적 있죠. 그때 인연으로 변호사님께만 온 거라고 하더라고요. 이건 송 수석님도 못 받으셨어요.”

다른 때였다면 기꺼이 참석했겠지만 지금은 당장 골치 아픈 일이 눈앞에 있어서 외부 행사가 영 안 내켰다. 이런 경우 거의 친목 도모 형식의 행사라 계속 사람들 사이를 다니면서 말을 하고, 그 과정에서 정·재계의 최근 이슈들을 교환해야 할 게 훤했기 때문이다.

차라리 사무실에 틀어박혀 일에 파묻히는 편이 훨씬 정신 건강에는 나았다. 세헌이 선뜻 결정하지 못하고 있는 동안 탁 비서는 그의 답을 기다렸다. 이윽고 최선의 방법을 찾아낸 그는, 탁 비서가 선 방향으로 카드를 밀어 넘겼다.

“도윤신 내일 출근하면 이거 전해. 날짜 맞춰 시간 내라고.”

“보내시게요? 안 된다니까요.”

“동행할 거야. 기왕 갈 거면 뭐라도 얻어 와야 할 것 같아. 드레스 코드는?”

윤신과 함께 가겠다는 이유치고는 매우 모호해서 순간적으로 탁 비서의 낯에 의아해하는 기미가 스쳤다. 그러나 노련한 그는 비서로서의 제 할 일에만 열중했다.

“블루요. 포인트만 주세요. 타이 준비할까요? 아니면 행커치프.”

“됐어. 내가 알아서 할게. 나가 봐. 할 일 다 했으면 퇴근하고.”

“알겠습니다.”

인사하고 탁 비서가 바로 나가자, 그제야 세헌도 좀 더 흐트러진 자세로 고쳐 앉았다. 전신마취를 한 것처럼 순간적으로 눈앞이 어질어질했다. 이러다가 정신이 휙, 나가 버릴 것 같았다. 미희의 앞에선 최대한 동요를 감췄지만, 내심 그도 이런 스스로가 낯설었다. 자신 외에 어떤 대상을 수호하기 위해 지니고 있는 뭔가를 거는 건 난생처음이었다.

〈선밴 계산기 그만 두드리고, 은사님의 아들딸에게 연민을 좀 가져 봐.〉

이런 말을 자신이 했다는 게 믿기지가 않았다.

일을 너무 해서 드디어 미친 건가.

수치심인지 모멸감인지 알 수 없는 기분으로 얼굴이 뜨거웠다.

‘하다 하다 별짓을 다 하게 만드는군.’

타인에게 홀린 스스로에게 어이없어하던 그가 냉정함을 잃고 마른세수를 반복했다.

* * *

행사장인 모 호텔 연회장은 꽤나 붐볐다. 누나의 결혼식 이후, 각계의 저명한 인사들이 빼곡한 장소에 오게 된 건 근 10년 만이었다.

연신 얼떨떨해하던 윤신은 이곳에 온 지 두 시간이 훌쩍 흐른 뒤였는데도 계속 속으로 혼자 낯을 가렸다. 반면 세헌은 이런 자리가 매우 익숙해 보였다. 업계 까마득한 선배들이나, 재계·정계·언론계의 유력 인사들과 그가 노련하게 대화하는 모습을 지켜보다 보니 두 사람이 확실히 전혀 다른 세계에서 살아왔다는 게 실감 났다.

그를 따라다니면서 함께 인사를 하는 동안, 때때로 윤신에게 관심을 표하는 이들도 있었다. 처음에는 ‘그’ 강세헌이 동행한 후배라는 데 호기심을 크게 느끼는 듯하다가, 곧 자신이 수한그룹 둘째 며느리의 남동생이자 작고한 도 교수의 아들이라는 걸 알게 되자 호의를 표했다.

제게 누나의 이야기를 할 때마다 억지로 웃어 보이느라 얼굴에 경련이 일 것 같았다. 몸은 아직 에너지가 남아 있었는데, 자꾸 가족들 이야기를 이곳에서 듣게 되니 마음이 지쳤다. 버티기가 힘겨워진 윤신이 세헌의 옷자락을 붙들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사각지대에서 시도하긴 했지만, 혹시나 싶어 손짓이 매우 조심스러웠다.

“수석님, 저 좀 잠깐.”

지인과 눈인사하며 샴페인을 마시던 그가 옆을 돌아봐 주었다. 짧은 시간 동안 아주 집중해서 윤신의 안색을 살피는가 싶더니 대충 할 말이 파악된 듯 핵심을 찔러 왔다.

“피곤해?”

“이거 진짜 장난 아니에요. 기력 다 소진됐어요.”

훑듯이 파티장 내를 지켜보던 그는 이쯤이면 된 것 같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대강 인사는 다 했고, 쓸 만한 정보들도 얻었고, 슬슬 가자.”

“그래도 돼요?”

“그러지 뭐. 정 힘들면 위에서 좀 쉬었다 갈까?”

음성이 유난히 다정했다. 최근 들어 오묘하게 그런 느낌을 받긴 했지만 오늘 이곳에선 특히 세헌의 태도가 남달랐다. 그는 시종일관 자신을 옆에 딱 붙여 데리고 다니면서 사람들과 나누는 이야기들을 모두 듣게 만들었다. 상대방이 관심을 표하면, 직접 소개했다.

처음 동행 제안을 들었을 땐 필요한 순간 잡일 정도 시키려는 게 아닐까 했는데 전혀 아니었다. 도리어 세헌이 자신에게 눈을 떼지 않으며 끊임없이 살폈다. 뭐랄까, 보살핌받는 느낌이었다. 파티장에 업무적으로가 아니라, 애인을 데려온 듯이 굴었다. 그래서 위에서 쉬었다 가겠냐는 질문을 들었을 때 사고 흐름이 자연스럽게 그런 식으로 흘러갔다.

“둘이 객실로 올라가면 이상해 보이지 않을까요.”

시종일관 평균적인 데시벨로 말을 내뱉던 윤신이 뺨을 붉히곤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여 매우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에 발그레해진 얼굴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세헌이 아랫입술을 슬그머니 감쳐물었다. 그 순간 윤신은 깨달았다. 또 자신이 뭔가 앞서갔던 모양이다.

“이거 아니에요?”

왠지 부끄러워서 그의 옷자락 쥔 손을 괜스레 쥐락펴락했다. 세헌은 그 기척을 느끼곤 이마를 아주 짧게 부딪쳐 왔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냐고 놀릴 줄 알았는데 그는 사실 관계만 바로잡아 주었다.

“라운지에서 잠시 쉬면서 차 한잔하자고. 너 정 힘들면 숨 돌리고 가게.”

“아, 아니에요. 넋이 고갈이지 아직 체력은 남아 있어요. 게다가 탁 비서님이 오늘은 댁으로 잘 모셔다 드려야 한다고 그랬어요. 오늘 얻은 정보들 다 복기하면서 정리해 두셔야 한다고요. 데이트는 다음에 마저 해요.”

조용히 눈을 깜빡이는 모양새가 진심이라고 판단한 건지, 세헌이 출입문 방향으로 손짓했다. 그러고는 함께 밖으로 나가는 길에, 조금 전까지 대화를 나눴던 사람들과 일일이 눈을 마주치며 인사했다. 이런 일이 체질에 맞아 보이지도 않는데 피곤하거나 짜증 나는 기색 하나 없이 저러는 것도 능력이다 싶었다.

말없이 그를 따르던 윤신은 승강기 앞에서 주변을 둘러보며 사람이 없다는 걸 확인했다. 다행히 이 위치엔 그들뿐이었다. 안심하고 세헌에게 기대려고 상체를 조금 비스듬히 했다. 그가 어울리지 않게도 어리광을 받아 주려는 건지 윤신의 푸른색 넥타이 위로 손을 뻗어 그 끝에 입 맞췄다. 언젠가의 일이 생각난 두 사람이 동시에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바로 그 순간, 뒤편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윤신이 재빨리 몸을 바로 세우고 정면만 응시했다. 그러자 세헌이 소소한 게임에 진 양 묘하게 분한 기색으로 얼굴을 기울여 속삭였다.

“그냥 객실 잡을까.”

“방 잡고 뭐 하시게요.”

“네가 조금 전에 상상한 짓.”

반사적으로 반박하려던 윤신은 이내 입술을 감쳐물었다. 아주 여러 가지를 상상했던 게 맞았기 때문이다. 싫은 건 아니다. 그의 마음도 잘 알았다. 하지만 사귀자는 얘기도, 좋아한다는 고백도 제 쪽에서 먼저 한 판국에 직접 좋아한다는 얘기 정도는 듣고 시작하고 싶은 것도 사실이었다. 복잡한 마음을 일일이 설명하기는 창피해 말을 돌리는 게 최선이었다.

“오늘 좀 이상하신 거 아세요?”

“내가 뭘.”

“저 물가에 내놓은 어린애처럼 대하고 계시잖아요. 진짜 안 어울려요.”

“넌 잘해 주면 이러더라. 제 밥그릇 못 찾아 먹기 딱 좋아. 나니까 참지.”

“그건 제가 할 말이고요. 솔직히 본인도 인정하시죠?”

긍정인 듯, 부정인 듯 툭, 긴 손끝으로 이마를 건드린 그가 마침 문이 열리는 승강기에 올라탔다. 뒤쪽에서 느긋하게 걸어오던 사람들의 목적지야말로 아래층이 아니라 위의 라운지였던 모양인지, 세헌을 향해 가볍게 묵례하고 탑승하진 않았다.

문이 닫힌 뒤, 밀폐된 공간에 둘만 남겨졌다. 몸도 마음도 노곤해진 윤신이 그의 어깨에 고개를 기댔다. 딱딱한 어깨는 편하다고는 말할 수 없었는데, 이상할 정도로 마음이 놓였다.

“저 오늘 여기 왜 데려오신 거예요? 옆구리에 끼고 있느라 번거로우셨잖아요.”

“슬슬 걸음마 시키려고.”

“저 언제 그렇게 컸대요?”

“언론사 행사라 일부러 데스크 출신 중진들 위주로 소개했어. 오늘 인사했던 사람들 얼굴 까먹지 말고, 개별적으로 먼저 메시지 보내서 너와의 길을 열어 둬. 당연히 공짜는 없겠지만, 언젠가 서로 필요해서 의기투합할 일이 생길지도 모르지. 수한은 아군만큼 적이 많거든. 그걸 활용하는 것도 네 기술이야.”

“아군만큼 적이 많다, 그거 꼭 강 변호사님 같네요.”

이렇게 하나하나 가르치고 이끌어 주는데 고마운 마음이 드는 만큼 부끄럽고 민망했다. 먹이를 받아먹는 작은 생물체가 된 느낌이다. 그런 기분을 감추고 애써 대수롭지 않게 답하던 윤신은 돌연 제 몸을 떼어 내고 힐끗 그를 올려다봤다. 세헌의 시선은 제게 닿아 있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자신에게 집중하고 있다는 걸 느끼지 못할 만큼 둔하진 못했다.

넓은 의미에서 적의 적은 곧 아군이다. 마치 수한의 적이 미래에 자신과 의기투합할 일이 생길 거라는 예언이라도 하는 것 같아서 묘했다. 딱히 누나의 상황에 대해 말한 적은 없었다. 함구하라는 그녀의 당부가 있기도 했으나 그게 다는 아니었다. 세헌에게 괜히 얘길 꺼냈다가 그가 자신과의 관계에서 몸을 사리고 한 걸음 물러날까 겁이 나 꺼려졌던 것이다.

혹여 소문이라도 나게 된 걸까 우려됐다.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건 아닐까. 그래서 그가 자꾸 제게 청구서를 보내라느니, 이용당하는 건 익숙하다느니 말하며 선을 그었던 걸까. 그러나 심증만으로 그를 추궁할 수가 없어 망설이게 됐다.

“변호사님.”

“가지.”

불행인지 다행인지 윤신이 입을 뗌과 동시에 승강기의 문이 다시 열렸다. 지하 주차장이었다. 그들이 모습을 드러내자, 차 안에서 두 사람이 돌아오길 기다리고 있던 펌 소속 운전기사가 바로 나와 뒷문을 열어 주었다.

세헌이 먼저 타고, 그 뒤에 윤신이 탑승했다.

더 말을 하고 싶었는데, 그가 일에 열중하는 바람에 방해할 엄두가 안 났다. 자연히 돌아가는 길에 두 사람 사이엔 대화가 거의 없었다. 낯선 고요가 그들의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 * *

머리를 비우기 위해 늦은 밤 산책을 나온 세헌은 피부를 엘 듯 쌀쌀한 날씨마저 잊고 한참을 거닐었다. 쭉 뻗은 긴 다리를 감싼 검은 바지와, 탄탄한 상체에 걸친 도톰한 목 폴라 니트, 그리고 그 위를 덮은 코트가 그가 입은 옷의 전부였다. 하나 그는 개의치 않고 계속, 계속 걸었다. 한 시간여쯤 걸었을까. 어느새 다시 집 근처에 다다라 있었다.

하아, 한숨을 몰아쉰 그는 별안간 걸음을 멈추고 머리 위를 올려다봤다. 새카만 하늘에 밝은 달이 틀어박혀 있는 듯했다. 정면의 아파트를 한 번, 그 측면의 상가 건물을 한 번 확인하곤 이내 결심한 듯 편의점에 들렀다.

콘돔과 윤활제를 적당히 고르고, 탄산수도 함께 내밀었다.

“담배도 하나.”

종종 태우는 담배를 가리킨 그는 결제를 하기 위해 직원에게 카드를 건넸다. 그러다 돌연 떠오르는 게 있어 스낵 코너 아래쪽을 훑어보았다. 윤신이 언젠가 그의 입 속에 넣어 주었던 레몬 맛 사탕이 보였다. 그것도 함께 계산한 뒤, 밖으로 나왔다.

걷는 내내 추운 줄 전혀 몰랐는데, 갑자기 냉랭한 공기가 머리 위로 엄습하는 것만 같았다. 느닷없이 기온이 낮아진 게 아니라, 지금 그가 갈 곳이 자신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따뜻한 장소이기 때문에 발현된 기대 심리라는 걸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픽 웃음을 터트린 세헌은 곧장 목적지로 향했다. 제집 동이 아닌 다른 동으로 들어와서, 그 언젠가 들렀던 집 앞에 우뚝 섰다. 초인종을 누르자 월패드로 방문자의 얼굴을 확인한 듯 안에서 분주한 소리가 이어졌다. 뒤이어 문이 벌컥 열렸다.

“강 수석님? 이 시간에 어쩐 일로 여기까지 올라오셨어요.”

“너 보러. 잠깐 괜찮나?”

“시간은 괜찮은데……. 미리 연락을 주시죠. 집 좀 치워 놨을 텐데. 지금 엉망이에요.”

이미 잠자리에 들 작정으로 씻은 모양이었다. 밝은 색 파자마 차림인 윤신의 말간 얼굴이 세헌을 마중 나왔다. 앞머리가 거추장스러웠는지 노란색 머리핀까지 하나 꼽고 있었다.

세헌의 느른한 시선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매끈한 이마와, 그 위의 부드러운 터럭들을 한데 모아 고정하고 있는 핀에 순차적으로 닿았다. 그 눈의 길을 함께 따르던 윤신이 뒤늦게 몹시 당황한 기색으로 허둥지둥했다.

“아, 이거, 조, 조카가 예전에 준 건데요. 머리가 자꾸 내려와서.”

바로 그것을 빼내려고 하자, 세헌이 손목을 붙들어 만류했다. 그러고는 반질반질한 뺨을 제 손끝으로 쿡 찌르더니 그 위에 뽀뽀했다. 귓전에 속삭이는 목소리가 달떴다.

“귀여워. 그냥 하고 있어.”

“뭐라고요?”

“귀엽다고.”

보다 분명히 음절들을 뱉어 낸 그는 이젠 아예 두 뺨을 손으로 붙들고는 촉촉한 입술 위에 쪽쪽, 키스를 퍼부었다.

“읏, 어? 수석님!”

야심한 시각에 느닷없이 나타나 어울리지 않게 애정 공세를 퍼붓는 그 때문에 윤신은 도저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쿨럭, 헛기침을 하고는 눈살을 슬쩍 구겼다. 무심코 세헌의 손으로 눈길을 옮긴 순간, 불투명한 편의점 봉투 안 탄산수가 익숙한 브랜드라는 걸 인지했다. 그걸 발견하곤 꽤 확신에 차 물었다.

“변호사님 혹시 술 드시고 오셨어요?”

“그냥 걷다 왔는데. 밖에 되게 추워.”

“정말 왜 그러세요. 요즘 이상하다 싶었어요. 병원 갔더니 불치병이라도 걸렸대요? 여태까지 잘못한 모든 사람들에게 사죄하고 아름답게 여생을 살라고 충고해요?”

“앞서가시는 건 여전하고. 새파란 게 언제까지 까불래?”

그는 기가 막히다는 양 헛웃음을 터트리긴 했지만, 별로 기분 나빠 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어딘지 뭔가를 체념한 듯도 했고, 또 한편으론 결심을 한 듯도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현관 앞에 선 세헌으로부터 그 상반되는 감각이 동시에 느껴졌다.

“저도 이제 해 지났으니 5년 차라고요. 하나도 안 새파래요. 변화를 좀 받아들이세요.”

“연차는 허수가 너무 크다. 우리 연애도 2년짼가?”

일순 할 말이 없어진 윤신이 물끄러미 그를 쳐다보기만 했다. 그러자 세헌이 허리를 조금 굽혀 눈높이를 맞추며, 나른한 어투로 물었다.

“그래서. 집이 엉망이라 들어오라고도 안 해?”

아. 그제야 슬쩍 문 옆으로 비켜 준 윤신이 세헌에게 손을 뻗어 안내했다. 그는 거절하지 않고 앞서 들어갔다. 꼭 제 공간인 것처럼 행동이 익숙하고 능숙했다. 뒤편에서 문을 닫고 뒤쫓는 집주인 쪽이 외려 어색해 보일 정도였다.

“가뜩이나 추운 날씨에 그렇게 입으시니까 더 춥죠. 차라도 한잔 드릴까요? 녹차, 홍차, 유자차. 웬만한 건 있어요.”

“응, 아무거나.”

“그럼 녹차 드릴게요. 누나가 주고 간 찻잎이 있어서요.”

“녹차 빼고. 아, 홍차도 빼고.”

“그건 아무거나가 아니죠. 유자차 드릴게요.”

“유자차도 빼. 향 강한 거 싫어해.”

걷다 멈칫한 윤신이 그의 길쭉한 뒷모습을 황망히 쳐다봤다.

“그럼 뭘 드려요? 물?”

“커피. 없으면 관두고.”

“있어요. 아니 처음부터 말씀을 하시지. 성격 진짜 이상해.”

윤신이 툴툴거리면서 주방으로 향하는 동안, 픽 웃음을 터트린 세헌은 뚜벅뚜벅 거실로 입성했다. 그는 일단 편의점 봉투를 테이블 위에 던지듯 내려놓고, 코트를 벗었다. 그러고는 그 주변에 잔뜩 널려 있는 서류들과 책, 노트북 따위들을 일일이 눈에 담았다. 글자들이 인쇄된 종이엔 이혼 관련 판례들이 잔뜩이었다. 못해도 수천 장은 돼 보였다.

이윽고 소파에 앉은 그는 윤신을 기다리며 그것들을 눈대중으로 읽어 내려갔다. 여기저기 인덱스 스티커가 붙어 있는 것을 보니, 누나로부터 직접 도움을 요청받진 않았지만 나름대로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보는 모양이었다. 주말에도 거의 못 쉬고 본인의 업무에 매진하는데 이 방대한 양을 하루아침에 다 봤을 리는 없었다. 그동안 아주 짬짬이 했으리라.

흐음. 가벼운 추임새를 뱉어 내며 다리를 척 꼰 그가 윤신이 메모해 둔 글자를 살폈다. 이혼 소송은 그 어떤 송사보다 판례가 중요했다. 일단 주안점은 잘 찾은 것이다.

그러는 사이 커피를 내려 온 윤신이 모습을 드러냈다. 세헌이 종이 위에 동공을 고정하고 있는 모습을 보며, 당황스러운 기색으로 잠시 서 있다가 곧 컵을 내려놓았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그가 설명을 요구하는 얼굴로 윤신을 바라보았다.

“누가 이혼해?”

사실대로 말하는 게 나을까, 아니면 적당히 넘어가는 게 좋을까 내적으로 갈등하던 윤신이 이내 후자를 택하며 시선을 피했다.

“그게, 제가 사단 법인 일 자주 도와 드리는 거 아시죠. 거기서 무료 법률 상담을 하는데 애프터를 요구하는 분들이 가끔 계세요.”

세헌은 아무 말이 없었다. 그래서 윤신은 자신도 모르게 계속 말을 이었다.

“제가 자발적으로, 그냥……. 페이지 수 많아 보여도 실제론 얼마 안 돼요. 그리고 어차피 틈틈이 보는 거라서요. 제 일에 방해받으면서 하는 건 절대 아니에요.”

“무료 상담의 연장선상이다. 이렇게 이혼만 줄줄? 네가 이혼을 해도 판례 조사를 이렇게까진 안 하겠다. 이게 다 몇 건이야.”

“이왕 시작한 거 끝까지 도와 드리면 좋잖아요. 대신 소송해 드리는 것도 아니고. 일반인들은 아무래도 법에 접근하기가 어려우니까 가능하면 자문 정돈 지속적으로 도와 드리려고요.”

내용은 장황하지만 어투에는 썩 자신이 없었다. 결국 더 거짓말을 할 동력을 상실한 윤신이 입을 다물었다. 그제야 세헌이 재미있다는 듯 오묘한 표정과 음성으로 대꾸했다.

“팁을 하나 줄게. 원래 거짓말은 세포 증식을 하거든. 없는 얘길 만들어 낼 땐, 그냥 골자만 한마디 하고 입을 다물어. 안 그러면 말이 길어져. 지금의 너처럼.”

움찔한 윤신이 그를 멀거니 쳐다보았다. 그가 덧붙였다.

“무슨 얘긴지 알아들었으면 이리 와 봐.”

“…….”

“이게 뭔지 더 안 물어볼 테니까 이리 오라고.”

손을 까딱하는 기척을 느낀 윤신이 마지못해 한 걸음을 옮겼다. 오만한 성격을 고스란히 드러내듯 다리를 꼬고 비딱하게 앉아 있는 세헌은 마치 이곳이 제집인 양 굴었다. 그게 위화감이 없다는 게 유일한 문제였다. 저토록 여유로운 그에게 속내를 들킨 게 머쓱해 괜히 반기를 들고 싶은 마음에 가던 길을 멈추고 되물었다.

“왜요?”

“왜요? 파트너가 시키는데, 왜요? 네 억대 연봉 누가 벌어다 통장에 꽂아 주는지 몰라? 개같이 벌어서 먹여 살렸더니, 은혜도 모르는 걸 내가 키웠군.”

“여기 구성원 변호사로 오신 거예요?”

“네 남자 친구로 온 거야. 보고 싶어서. 이리 안 올 거야?”

썩 횟수가 많다고는 할 수 없지만 여태까지 ‘남자 친구’의 역할을 했던 건 늘 윤신 자신이었다. 그런데 두 사람을 호명하는 이름이 똑같은 이 색다른 기분이 싫지 않았다.

허탈한 듯, 그런 한편 기쁜 듯 가볍게 웃은 윤신이 세헌의 옆으로 다가가 풀썩, 소파에 앉았다. 뒤이어 여전히 찬 기운이 조금 남아 있는 그의 상체를 와락 끌어안고 얼굴을 어깨에 기울여 표정을 숨겼다.

“옷이 차가워요.”

“그럼 좀 문질러 봐. 열나게.”

착하게도 이마와 뺨 등지를 세헌의 니트 위에 마구 문지르던 윤신이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 순간, 세헌이 마른 몸을 번쩍 들어 올려 제 허벅지 위에 앉히고는 정면에서 윤신을 직시했다. 곧이어 두 개의 입술이 제대로 맞물릴 수 있도록 턱을 비스듬히 해서 짧게 입 맞추고 떼어 냈다.

유려한 이목구비를 정통으로 마주하게 되자, 윤신은 괜히 부끄러운 마음에 눈을 돌렸다. 그러자 그가 안 된다는 듯 한 손으로 목덜미를 받치듯 붙들어 얼굴의 위치를 고정시켰다.

“백지 수표 받아 본 적 있어?”

“뜬금없이 무슨 백지 수표요. 저 주시게요? 그러고 또 은혜 타령 하실 거죠? 안 받을래요.”

“나중에 땅 치고 후회하지 말고, 지금부터 내가 묻는 말에 대답 잘해. 내가 좋아, 너희 누나가 좋아.”

어린애나 할 법한 질문에 기막혀하던 윤신이 분명히 대꾸했다.

“범주가 다르죠. 누나 허벅지 위에 걸터앉진 않잖아요. 그런데 갑자기 이런 뜬금없는 질문들은 왜 자꾸 하시는 겁니까?”

“얼마 전에 너희 누날 만났거든. 나한테 널 좀 부탁한다고 말하더라. 남편이랑 사이가 좀 안 좋다면서.”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윤신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와 닿아 있는 동안 계속 희미하게 홍조가 떠 있던 얼굴색도 삽시간에 하얗게 질렸다.

어제 호텔에서 세헌이 했던 의미심장했던 말과, 지금 그가 꺼낸 이야기들을 이리저리 조합해 보니 분명히 뭔가가 있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확실히는 모르지만 누나의 상황에 어떤 변화가 생긴 듯했다. 그리고 세헌은 대강 전체적인 그림을 파악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얘길 누나가 직접 해요? 뭐라고……. 다른 얘긴 없었어요?”

“있어야 돼?”

“저도 모르겠어요. 아는 게 별로 없거든요. 수석님은 어디까지 아세요? 누난 저한테는 아무것도 얘기 안 해 줘요. 제가 아직도 어린애 같은가 봐요. 누나가 뭐라고 했는지는 모르지만 아무것도 안 하셔도 되니까 너무 부담 느끼지 마세요. 저는 제가 알아서 할 거예요.”

“…….”

“우, 우리 헤어지는 건 아니죠?”

세헌을 마주할 때 설렘과 부끄러움으로 반짝거리던 눈동자가 탁한 색 물감을 탄 듯 금세 어두워졌다. 그가 어느 정도는 상황을 짐작하고 있으리라고 완벽히 확신을 한 건지 속마음을 토로하는 말투에 그간 초조했던 진심이 가득 묻어났다. 안달이 난 윤신을 유심히 보는 세헌에겐 특별한 표정이 떠올라 있지는 않았다. 다만, 아주 신중했고, 또 진지했다.

적어도 그는 윤신을 또렷하게, 온 신경을 다 기울여 응시하고 있었다.

“당연히 아니지.”

겨우 안도하는 윤신에게, 그는 덧붙였다.

“펌 들어왔을 때 첫인상이 맞는다니까.”

“첫인상요?”

“넌 완전히 머저리야. 차라리 다 털어놓지 그랬어. 누나 말이 무슨 법이라도 돼? 어차피 변호사는 상담한 내용 발설 못 해. 말 새 나갈 일 같은 거 없다고. 이 새끼 아주 바보 아냐?”

“수석님 같은 사람을 어떻게 믿어요. 뒤에서 매형이랑 내통할지 알 게 뭐예요. 그리고 일이 귀찮게 됐다고 차이면 전 어떡해요.”

지금은 믿고 의지하는 마음이 훨씬 더 커졌지만, 몇 개월 전만 해도 윤신의 안에서 세헌은 가장 신뢰할 수 있으되, 또 가장 신뢰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 생각을 아는 모양인지 어쭈, 하듯 미간을 구긴 그가 윤신의 뺨을 손가락으로 집어 찌익 늘렸다.

“누가 할 소린데. 새벽에 집무실에 도둑고양이처럼 쳐들어오질 않나.”

화들짝 놀란 윤신이 몸을 들썩였다.

어쩐지. 이따금 뜻 모를 말들을 한다 싶더니, 처음부터 전부 알고 떠봤던 것인 모양이다.

“오해예요. 거긴 누나 일 때문에 들어갔던 거 아닌데. 그때 주신 자료 때문에요. 어떻게 취득하신 건지 궁금해서요.”

“오해 확실해?”

“대체 절 뭘로 보시는 거예요?”

“좀도둑.”

일순 자기변호 욕구가 치밀어 아니라고 바로 손을 내저으려다가 그 부분에 완전무결하지는 않다는 사실을 돌이키곤 고개를 주억거렸다.

“건진 것도 없었는데 도둑은 좀……. 절도 미수 정도?”

“그래서. 가져간 거 없으니까 떳떳하시다?”

약한 자는 결정하기 전에 의심하고, 강한 자는 결정한 뒤에 의심한다는 말이 있다.

눈이 마주친 순간, 세헌은 이미 자신의 그 행위를 이해하기로 결정했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윤신은 심경이 더 복잡해졌다.

“그럴 리가요. 안 그래도 사과드리려고 했거든요. 타이밍을 놓쳐서 뭐라고 말을 꺼내야 할지 몰랐어요. 수석님은 커트라인이 높은 분이고, 겨우 사이좋아졌는데 차일까 봐 엄두가 안 나더라고요.”

“좋아, 엄숙한 회개 시간이야.”

“죄송해요.”

잘했다고 칭찬하는 것처럼 그의 커다란 손이 윤신의 파자마 위를 어루만졌다. 깡말라 뼈가 도드라진 등 주변을 차분히 쓸어 주다가, 이내 두 팔로 허리를 끌어안고 제 쪽으로 더 당겼다. 빈틈 하나 없이 빠듯하게 서로의 몸이 겹쳐졌다. 윤신은 그에게 안긴 채로 복잡한 머릿속을 하나씩 정리해 나갔다.

그동안은 추측이었던 것들이 죄다 확신으로 굳어 갔다. 얼기설기 얽혀 있던 실들의 올이 하나씩 풀리는 듯했다. 짐작건대 세헌은 꽤 오래전부터 자신을 두고 봐 주었던 것 같았다. 그런 그가 오해하고 있는 다른 부분도 이참에 제대로 사과해야 할 것 같았다.

“제가 이용하려고 했다고 생각하셨군요. 빈 청구서는 그래서 주셨던 거고요.”

“아닌가?”

“선배님을 좋아한다고 느끼기 전엔 그런 생각도 약간 했어요. 날 좀 도와주면 안 되나……. 제가 아는 한 우리나라에 수석님만 한 변호사가 없어서요. 송사에도 강하고, 언론도 움직이실 수 있잖아요. 그래도 그 뒤엔 안 그랬어요. 누나가 뭐라고 했는진 모르지만…….”

“안됐지만 그건 거절했어.”

사락. 크게 동요하는 바람에 몸을 들썩인 윤신의 파자마가 세헌의 옷 위에 쓸렸다.

“역시 저 데리고 있기 부담 되세요?”

“그런 건 네 입으로 해 달라고 말해야지. 난 네 누나랑 사귀는 거 아니잖아.”

입술을 달싹이던 윤신은 그의 목을 힘주어 끌어안았다.

“옆에만 있어 주세요. 그럼 제가 잘 버텨 볼게요.”

세헌은 어떤 대답도 해 주지 않고 그저 침묵을 지켰다.

그는 여전히 타인에게 책임감을 느끼는 덴 익숙하지가 않았다. 평생 동안 혼자였다. 문제를 혼자 해결하고, 또 뒷감당을 하는 쪽이 훨씬 익숙했다. 남을 보호한다거나, 보살피는 건 체질에도, 습관에도 어긋났다. 게다가 솔직히 말하자면 윤신의 모든 점이 좋은 건 아니었다.

가끔은 윤신을 보며 열이 치미는 기분을 느꼈다. 때로 지나치리만큼 완고해서 동선이 효율적이지 못한 건 불편하게 느껴졌다. 일단 말을 꺼냈다면 좀 더 해결이 빨랐을 일을 누나의 부탁을 지키느라 함구했던 그 순진한 배려심도 속 터졌다. 무엇보다 시킨 대로 악당들 매뉴얼을 달달 읊어서 나타나는 그 정직함이 신경질 나고, 두통마저 유발했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을 참아 낼 마음이 제 안에 있다는 걸 명확히 느꼈다.

그가 좋기 때문에 생긴 안쓰러움이라는 걸 겸허히 인정했기 때문이다.

다정하게 윤신의 마른 상체를 제게서 떼어 낸 세헌이 다시금 시선을 교환했다.

“자, 지금부터 내가 백지 수표를 줄 거야. 넌 가격을 기입해야겠지. 물론 공짜는 아니야.”

“전 뭘 해 드리면 되는데요?”

“연인 사이에 할 수 있는 최대치의 고백. 그러면 수지 타산이 좀 맞겠군.”

딱 한 가지의 말이 떠오르긴 했으나, 윤신은 바로 아연실색했다.

“저 그런 말 남한테 해 본 적 없어요.”

“그럼 이 수표도 거둬 가고. 난 아쉬울 거 없어.”

“잠, 잠깐만요. 사…….”

깊고 아득한 그의 동공이 윤신만을 오롯이 응시했다. 그래서 차마 말을 끝까지 이어 갈 수가 없었다. 얼굴을 확 붉힌 윤신이 자신 없는 어투로 혼잣말하듯 덧붙였다.

“그런 기분이 들면 할게요. 지금은 확신이 안 서요.”

“막다른 골목 주제에 왜 이렇게 뻣뻣해?”

“만난 지 반년 좀 넘었는데 무슨 사랑이에요. 수석님은 저 사랑하세요?”

“어차피 시간문제고 곧 하게 될 거잖아. 그냥 미리 앞당겨서 하라고.”

“왜?”

“내가 지금 듣고 싶으니까. 그 정도 담보는 있어야 나도 나를 던지지. 내가 사회 운동가인 줄 알아?”

단순한 자존심의 문제가 아니다. 사귀자고도, 좋아한다고도 자신이 먼저 했다. 그런데 그것까지 제 쪽이 앞서 해 버리는 건 꼭 외사랑을 하는 것 같아서 안 내켰다.

“수석님도 저 좋아하시잖아요. 좋아하는 사람이랑 같이 좀 있어 주는 게 그렇게 비싸게 굴 일이냐고요. 제시액이 너무 과하면 조정 위원회에서도 안 받아 줘요.”

아무래도 윤신은 핵심 맥락을 잘못 잡은 듯했다. 눈을 가늘게 뜨고 상대방을 관찰하던 세헌이 내친김에 힌트를 더 주겠다는 듯 투덜대는 붉은 입술 위에 제 것을 겹쳤다.

아랫입술을 한 번, 윗입술을 한 번 입 안에 삼키듯이 물고 키스한 그가 슬며시 벌어진 입술 틈새로 후, 하고 바람을 불어넣었다. 움찔한 윤신이 그의 니트를 쥔 손아귀에 더욱 힘을 주자, 탄력을 받아 그도 파자마 안으로 손을 넣고 등을 쓸었다.

“도윤신, 너 내 말 뭘로 들었어. 백지 수표 안에는 뭐든 쓸 수 있어. 이게 얼마짜린 줄은 알고 뻗대는 거야?”

세헌의 은근한 어투가 매우 의미심장했다. 그는 허튼소리를 하는 법이 없었다. 그리고 늘 중요한 화두를 꺼낼 때 언중에 의미하는 바가 있었다. 여러 가지 생각들을 반복하다 보니 윤신의 뇌리에도 어떤 중요한 가정이 스쳐 지나갔다.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않고 그를 빤히 보자, 세헌이 시선을 전부 내어 주며 눈빛으로 화답했다. 온몸의 떨림을 다잡듯이 그의 니트를 붙든 윤신이 입술을 달싹였다. 이윽고 쟁여 두고 있던 보따리 속 보물을 푸는 양 퍽 조심스럽게 언어들을 꺼내 놓았다.

“쉽지 않을걸요. 수석님은 이미 가진 게 많잖아요. 거기서 더 얻어 갈 게 없을 텐데…… 그냥 옆에만 있어 주셔도 돼요. 후회하는 꼴을 어떻게 보라고요.”

꾹 인장을 찍듯이 윤신의 매끄러운 이마에 입 맞춘 그가 콧잔등을 문질렀다. 아주 가까운 곳에 서로가 있었던 덕분에, 그들의 시야엔 상대방밖에 없었다.

심해처럼 푹 가라앉은 그의 음성이 그 어느 때보다도 진중했다.

“너 얻겠지.”

“…….”

“그거면 돼.”

언젠간 듣게 될 거란 기대가 막연히 있긴 있었다. 다만, 생각지도 못한 타이밍이었던 터라 윤신은 연신 입술만 달싹였다.

화끈거리는 얼굴의 열기를 수습할 새도 없었다. 계속 몸의 가장 낮고, 깊숙한 곳부터 들끓어 오르는 욕망 때문에 몸을 자꾸 들썩거리게 됐다. 솔직하지만 부끄러움을 모르는 건 아니라 제 입으로 직접 이런 말을 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윤신은 지금 그러고 있었다.

“저, 수석님이랑 섹스하고 싶어요.”

지그시 인상을 쓴 그가 윤신의 등 뒤로 손을 뻗었다. 그러고는 바스락거리는 봉투 안에서 콘돔 박스와 윤활제를 꺼내 윤신의 파자마 안으로 쓱 밀어 넣고는 그대로 몸을 벌떡 일으켰다.

“하고 싶은 건 해야지.”

이윽고 두 사람은 서로를 안은 채 허겁지겁 키스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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