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화 (13/51)

12. 

밖은 이미 밤이었다. 저녁 시간이 지나 하늘이 어두컴컴했다. 병원 앞인지라 차들이 분주하게 많이 왔다 갔다 했다. 이 덕분에 다른 곳에 비해 붐비긴 했으나, 그 에너지들이 모두 사람들의 활력은 아니었다. 도리어 그 반대에 가까웠다.

오늘따라 일교차가 심해 밤공기가 유난히 쌀쌀했다. 성큼 다가온 겨울이 기꺼이 선사한 추위를 여실히 느끼며, 윤신은 입원 병동의 출입구를 나섰다. 옷깃을 여미곤 화단 앞 벤치에 잠시 앉았다.

후우, 하고 숨을 뱉어 하얀 김이 나오는 모양새를 가만히 보던 그는 일단 의뢰인에게 전화부터 걸었다.

“저 도국 도윤신입니다.”

- 변호사님? 병원 가신다면서요. 어떻게 됐어요?

“네, 뭐 지금 나왔어요. 일단 몇 가지 구두로 알려 드릴 게 있어서 걸었습니다. 잠시 통화 괜찮으세요?”

교통사고를 당한 아이의 부모를 직접 만나 보자, 일은 잘 해결될 기미가 보였다. 처음 병문안을 허락했을 때부터 심성이 나쁘거나, 매몰찬 사람이 못 될 거라는 건 짐작했다. 그래서 일부러 친밀감으로 공략해 보고자 그쪽 부모와의 연결 고리를 찾았던 것이다.

다행히 아이 어머니 출신 초등학교가 윤신의 사촌 동생이 졸업한 곳이었다. 어릴 때 몇 번 간 기억도 있었다. 교내 조그만 운동장 이야기 따위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벽을 허물었다.

예전부터 윤신은 그런 걸 잘했다. 아버지가, 또 누나가 늘 그렇게 했기 때문이다.

- 괜찮아요. 돈 많이 준단 얘긴 전했죠?

글쎄 돈이 다가 아니라니까.

천박한 대꾸에 속으로 조용히 발끈한 윤신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고는 응답했다.

“그 이전에 직접 사과를 하셔야 할 거 같아요. 진심으로요.”

- 그거야 당연히, 그쪽에서 허락만 하면 제가 정식으로 찾아가 사과할 거예요.

“그럴 생각이 있으시면 다행이고요. 말씀하신 대로 합의금을 넉넉하게 주시는 편이 좋겠어요. 정확한 기준은 없지만 원래 전치 1주당 계산을 해요. 그래서 천차만별이기도 한데요. 아이는 여러 가지 제반 상황이랑 병원비 고려해서 2800만 원 선에서 책정해 봤어요.”

- 차라리 딱 떨어지게 3천만 원은 어때요?

“그 정도면 아이 부모님께서도 동의해 주실 거 같아요. 액수보다는 진정성이 더 중요해요.”

- 금액이 곧 진정성이죠. 혹시 모자라면 더 써도 돼요.

의뢰인이 이렇게 돈으로라도 적극적으로 해결하겠다고 나와 준다면 그나마 다행인 일이다. 윤신은 휴대폰을 고쳐 쥐며 조용히 벤치에서 일어났다.

“그럼 좀 더 상향 조정해 보죠. 사과하러는 병원으로 직접 오셔야 해요. 아이 부모님 측에서 저랑 같이 방문하길 원하니 적당히 날짜를 잡아 봐요. 제가 서류 정리해서 조만간 다시 연락드릴게요.”

- 네, 전화 기다릴게요. 고생하셨어요.

통화를 마친 윤신은 몸을 일으켜 택시 정거장 방향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차를 가져오지 않아 다른 교통수단을 이용해야 했다. 길게 줄 서 있는 사람들의 뒤편에 자리를 잡고, 휴대폰 통화 기록을 눈에 담았다. 아래쪽에 어제 세헌과 통화한 증거가 남아 있었다.

‘결국 오늘은 이렇게 못 보는 건가.’

밤에 잠깐 보자고 했던 제 제안에 그는 끝내 답하지 않았다. 그 뒤에 키스는 ‘또’ 했지만, 왜 우리가 데이트를 해야 하는 거냐던 말을 번복하는 일은 없었다.

물론 자신이 먼저 연락을 해 볼 수도 있을 터다. 다만 최소한 먼저는 절대 좋아하지 않을 거라고 호언장담해 놓고 바로 꼬리를 흔들기가 꺼려졌다. 너무 혼자 속을 태우는 것처럼 보일까 봐 내키지가 않았다.

아쉬움을 숨기듯 손가락 끝으로 툭, 세헌의 이름 위를 건드린 윤신이 휴대폰을 재킷 주머니 안에 넣었다. 그러고는 앞사람들을 따라 한 걸음씩 앞쪽으로 이동했다.

그때였다.

빠앙. 빵. 오른편에서 커다란 경적 소리가 울렸다. 기다리던 이들의 고개가 돌아갔다. 윤신도 마찬가지였다. 소리의 진원지에 고급스러운 세단이 한 대 정차해 있는 게 보였다.

이윽고 소음 없이 내려간 운전석 창문 너머로 핸들을 붙든 채 이쪽을 보고 있는 세헌이 걸렸다. 그의 수려한 외모 때문인지 사람들이 조금 웅성거렸다.

“강 변호사님?”

놀란 윤신이 빠르게 인파를 헤치고 그의 차 쪽으로 뛰어갔다. 불특정 다수의 시야를 가리듯 운전석 창 앞에 서서 안의 세헌을 들여다보았다.

“여긴 어쩐 일이세요?”

“혹시 손 부러졌어?”

뜬금없는 소리에 반사적으로 제 두 손을 살핀 윤신이 고개를 저었다. 왜 전화하지 않았냐는 물음인가도 싶었으나, 그런 건 아닌 듯했다. 아무런 약속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등장이 더욱 반갑고 놀라웠다. 이 반가움을 떠받치고 있는 감정이 세헌을 향한 호감인지 아니면 거기에 닿아 있는 보다 진일보한 어떤 감정인지는 헷갈렸다. 어찌 됐든 기뻤다.

“아뇨. 멀쩡한데요.”

“잘됐군. 나 내려서 문 열어 주는 간지러운 짓 못 해. 타.”

“그 말을 꼭 그런 식으로 하셔야 해요? 그냥 타라고 하셔도 됐어요.”

“네가 일일이 발끈하니까 재미있어서 더 그러잖아. 잔소리 그만하고 타.”

붉은 입술을 우물거리던 윤신이 바로 조수석으로 뛰어갔다. 문을 열어젖히고 앉아 그의 선명한 옆모습을 보는 사이, 창문을 올린 세헌이 몸을 기울여 왔다.

당연히 저들이 무례하게 차 안을 뚫어져라 지켜보지야 않겠지만 아직 주변에 사람들이 많았다. 그런 것조차 아랑곳하지 않고 키스를 하려는 것 같았다.

안 되겠다 싶어진 윤신이 그의 손목을 조심스럽게 붙들었다.

“여기서는 좀…….”

완곡하게 거절하자, 세헌은 눈을 가늘게 뜨고 윤신을 직시했다. 그러다가 자유로운 다른 한 손으로 벨트를 끌어다 꼼꼼하게 매 주고는 이내 붙들린 손목을 비틀어 빼냈다.

그가 다시 핸들을 잡는 순간, 윤신도 대충 상황 파악이 됐다. 혼자 앞서 나가 착각한 게 창피해 반대편으로 고개를 확 돌려 버렸다. 수치심으로 얼굴이 하얗게 식어 있는 게 유리에 비친 모습만으로도 죄다 드러날 정도였다.

이 일련의 모습을 모두 지켜본 세헌이 핸들을 꽈악, 힘주어 잡은 채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는 잠시 솟구치는 웃음을 참다가 바람 빠지는 숨소리를 내뱉곤 주행을 시작했다. 대놓고 비웃으려나 싶었는데 그러지 않아서 한 시름을 덜은 윤신의 굳은 안색도 조금씩 누그러졌다.

얼마쯤 갔을까.

창피해서 눈만 깜빡이던 윤신은 용기를 내 운전 중인 세헌을 힐끗 훔쳐보았다.

“여긴 어떻게 오셨어요?”

“인질 잡으러.”

“저 볼모로 뭐 하시게요?”

“글쎄. 그건 생각 중이야. 탁 비가 너 차 안 가지고 갔다길래 겸사겸사 온 거야. 어차피 퇴근은 하는 거고. 마침 같은 동네 살고.”

“저를 데리러 오셨다고요? 면담 언제 끝날 줄 알고요.”

“병원에서 허락하는 면회 시간 꽉꽉 채워서 같이 있어 주다 나오겠지. 너 같은 애들 뻔해.”

마치 그의 손바닥 안에 자신이 있는 것 같았다. 사실 몰랐던 일도 아니었다. 반박할 계제가 없어진 윤신이 말을 돌렸다.

“저녁은 드셨어요?”

이 사소한 질문에, 의외로 세헌은 꽤 부드러운 어투로 응수했다.

“응, 클라이언트랑 먹었어. 너는.”

“저는 아이 부모님이랑 대충 때웠죠. 그런데 오늘 왜 이렇게 순순하게 대화가 이어지는 느낌이죠? 비꼬기, 비아냥거리기, 다 1급 자격증 있으시잖아요. 잘해 주면 어색해요.”

그가 그제야 퍽 황당해하며 윤신을 돌아보았다.

“넌 왜 제대로 된 취급을 해 줘도 유난이야.”

“평소 본인의 냉정하고 까칠했던 태도를 돌아보시는 반성 같은 건…….”

“안 해.”

“출퇴근 시간은 혼자만의 시간이라 방해받기 싫으신 거 아니었어요?”

“싫어, 여전히.”

단순히 기분 나쁘라고 하는 말 같진 않았다. 정말로 제 사적인 영역을 방해받고 있는 듯한 표정과, 말투였다. 예전엔 분명 세헌이 이렇게 차갑게 나와도 크게 아무렇지 않았는데, 이상하게 윤신은 지금 이 순간 조금 상처받았다. 제 질문에 솔직하게 대답했을 뿐이라는 걸 아는데도 섭섭하게 느껴졌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다친 일이 많지 않아서 낯설었다.

차마 그 이상 말을 이어 나갈 자신이 고갈된 윤신의 입이 다물렸다. 공간이 침묵으로 휩싸이기 직전, 세헌이 금세 잠긴 음성으로 덧붙였다.

“넌 참을 만해.”

움찔한 마른 어깨가 가파르게 들썩였다. 이는 단순히 자신만 예외라는 의미가 아니었다. 여전히 그의 삶은 쳇바퀴 돌듯 굴러가지만 이제는 그 안에 자신이 같이 있다는 뜻이었다. 그는 그 이변을 허락한 것이다. 너무 놀라면 어떤 반응도 할 수 없어진다더니, 지금이 딱 그랬다. 세헌도 잘 알고 있는 모양인지 낮고 균일한 주파수를 연결해 나갔다.

“네가 날 어떻게 보고 있는지는 알아. 재고, 따지고, 상처 주는 거 제일 잘하고, 다 정답일지도 몰라. 하지만 결정한 이상 돌아보는 일은 안 해. 우린 직장 동료의 선을 넘었고. 네 생각이 어떻든 최소한 난 줄곧 그러고 싶었어.”

홀린 듯이 세헌의 옆태를 주시하던 윤신은, 그가 잠시 고개를 돌릴 기미가 보이자 공연히 제 무릎으로 눈길을 돌렸다. 바지 위로 도드라진 뾰족한 무릎뼈를 광선 쏘듯 빤히 응시했다. 그의 동공이 다시 정면의 도로로 되돌아갔을 때라야 조금 전처럼 세헌의 옆모습을 훔쳐볼 수 있었다. 그는 그 번잡한 행동을 전부 느끼고 있는 듯 덤덤하게 말들을 이어 붙였다.

“다만 난 의미 있는 타인이 내 인생에 있는 게 낯설어. 다른 사람이랑 함께 있어 본 적이 없어. 누군가 나한테 옆에 있어 달라고 말한 것도 장례식장에서 누가 했던 게 처음이었지.”

이는 필시 자신을 말하는 것이다. 윤신이 입술을 달싹이는 동안, 그가 덧붙였다.

“당연히 네가 선 자리가 과도기야. 거기 계속 서 있을 생각이라면 아마 너도 같이 풍랑에 휩쓸리게 될 거야.”

그는 자신을 상처 줄 수도 있으며, 그러다 보면 서로가 힘에 부칠 수도 있으리란 경고 같았다. 자신 없으면 여기서 떨어져 나가라는 충고도 겸한 듯했다.

본인이 깊은 관계를 만드는 일에 서투르다는 말을 이렇게 장황하게 하는 건 그가 변호사라서 그런 걸까. 아니면, 그도 속으로는 두렵기 때문일까.

어쩌면 그는 제 짐작대로 겁쟁이 또한 맞는 모양이다.

“아직 뭐 해 보기도 전인데 겁부터 주시네요. 하지만 전 변호사님이랑 달라요.”

“맞아. 네 인생엔 늘 주변인이 있었을 거야. 네가 그 다른 사람들이 아니라 이번에도 나랑 같이 있고 싶다면, 난 참을 만하니 내 시간을 방해해도 된다고.”

“…….”

“더 궁금한 거 있으면 물어봐.”

최대한 신중하고, 진지하게 답해 주겠다는 의미로 들렸다. 갑자기 생각지도 못한 타이밍에 그가 누우라고 돗자리를 깔아 주자 머리가 새하얗게 변해서 뭐부터 물어봐야 할지 흐렸다. 심호흡한 윤신이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이거 데이트죠? 전 그래 달라고 한 적 없는데 수석님이 절 데리러 오신 거예요. 맞죠.”

“그건 먼저 오늘 퇴근 후 일정을 읊으신 분이 더 잘 알겠지.”

“맞다, 아니다로만 대답할 수 있어요.”

대꾸 대신 픽 웃음을 터트리는 미소가 그의 것이라곤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싱그러웠다. 분명 그는 어제와 같은 강세헌인데, 미묘하게 달랐다. 자신과 함께 있는 게 즐거워 보였다. 윤신이 선뜻 확신할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이윽고 왼손의 손목시계를 확인한 그가 고개를 미세하게 갸웃했다.

“어디 들르기엔 시간이 좀 애매하네.”

“맞다? 아니다?”

유치하게 이게 뭐 하는 짓이냐고 묻는 양, 지그시 힐난의 기미를 섞은 시선을 보낸 세헌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레 찔린 윤신은 하는 수 없이 한 수를 물렸다.

“그럼 저 집 앞에서 커피 한 잔 사 주세요.”

“그러지.”

“저 보고 싶어서 오신 거예요?”

차선을 변경하는 세헌의 입이 잠시 다물렸다. 입술을 달싹일 때마다 맞닿은 보드라운 표피끼리 마찰했다. 윤신이 그 위에 손가락을 대서 얼마나 열기가 일어난 건지 확인해 보고 싶다는 충동을 느낀 순간, 세헌이 느닷없이 타이를 잡아당겼다.

“윽…….”

확, 고개가 운전석 방향으로 이끌려 간 윤신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상황을 가늠했다. 그가 운전 중이라 피차 위험해질까 봐 함부로 버둥거릴 수도 없었다. 아연해져 일단 얌전히 있는 사이, 세헌은 신호가 걸린 사이 얼굴을 기울여서 입을 맞춰 왔다.

쪽, 하고 가볍게 닿은 살갗이 녹은 젤리처럼 붙어 있다 떨어져 나갔다.

당황해서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손등으로 훔치자, 그가 분한 듯 다시 얼굴을 마주해 좀 더 진하게 키스했다. 살짝 벌어진 틈새로 침입해 온 그의 혀끝이 고른 치아를 슬그머니 건드렸다가 차츰 멀어졌다.

그는 뒤이어 무슨 일이라도 있었냐는 양 천연덕스럽게 다시 운전을 시작했다. 세헌의 몸으로 한 응답은 말보다 훨씬 더, 쉽게 이해됐다. 누군가 자신을 원한다는 감각으로 기분이 들떴다. 그럼에도 윤신은 부끄러워서 속에 없는 말로 방어했다.

“그냥 말로 하시지. 운전 중에 위험하게 이게 뭐예요.”

“누구 좋으라고.”

“저 인질이라면서요. 일단은 저를 지켜 주셔야죠.”

“나를 죽었다 깨어나도 좋아하지 않을 사람한테 내가 왜.”

지고 들어가는 게임이 싫다던 그는, 제가 했던 그 말이 퍽 불만이었던 것 같았다. 똑같이 갚아 줘 놓고도 모자라서 굳이 또 한 번 되새겨 주는 그의 반응이 사랑스러웠다. 윤신은 픽 웃음을 터트렸다. 가슴 아득한 밑바닥부터 즐겁고, 설레는 기분이 해수면이 차올라 만조가 되듯 끓어올랐다.

“그 말은, 전제가 있는 거고요.”

“그런 거치곤 아주 결연하시더군.”

“수석님이 절 먼저 좋아하시면 해결될 간단한 문제예요.”

“혹은 난 마음을 줬는데 넌 영영 날 좋아하지 않게 될 수도 있겠지.”

“그럴 일은 없을걸요.”

“그래? 그럼 넌 이미 내가 좋은 거구나.”

덤덤하게 토해 내는 그의 대꾸를 들은 순간, 머릿속에 번뜩 이게 아니라는 생각이 스쳤다.

“잠깐만요. 또 어영부영 제가 먼저 한 걸로 하시려는 거죠. 두 번은 안 당해요.”

굳이 부정하지 않은 그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 모습을 가만히 주시하던 윤신은 창문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묵비권을 행사했다. 그러고는 창에 비친 제 모습과, 희미한 세헌의 형태를 눈으로 그렸다.

그와 함께 있으면 마음이 조금씩 안정을 찾아 갔다. 세헌과의 사이에서 빚어진 긴장은 여전했는데도 그랬다. 자연스럽게 그와의 관계에서도 여유를 갖고 싶어졌다. 하나씩 그를 자세히 알아 가고 싶다는 욕망이 샘솟았다.

사실 윤신은 세헌과 함께 있는 이 순간이 아주 좋았다. 그가 자신을 데리러 와 주어서 기뻤다. 오늘 밤 잠시 보자던 제 말을 허투루 듣지 않고 나타나 주어, 설렜다. 그가 키스하면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서툰 부분이 싫지 않았다. 제게만 내어 주는 여지는 고마웠다.

그가 비옥하게 가꾸어 둔 땅을 밟은 최초의 인류가 자신이라는 건 가슴이 벅찼다.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세헌의 촉감이 여전히 남아 있는 듯한 입술을 매만져 봤다. 유난히 부드러운 느낌이었다.

〈난 참을 만하니 내 시간을 방해해도 된다고.〉

그의 허락을 떠올리며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문 윤신은 결국 입꼬리를 매끄럽게 끌어 올렸다.

* * *

집 근처 편의점에 들러야 한다며 세헌을 먼저 카페로 보낸 윤신은 수 분만에 나타났다.

좀 더 기다려야 할 줄 알고, 밖에서 담배를 한 대 피운 뒤 커피를 주문하러 들어오던 세헌은 카운터 앞에서 윤신을 마주쳤다. 꽤 열심히 뛰었던 모양인지 바깥의 날씨가 아주 쌀쌀한 편인데도 매끈한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혀 있었다. 퍽 황당해하며 돌아본 세헌이 큼지막한 손으로 윤신의 앞머리를 확, 들추면서 헛웃음을 터트렸다.

“나 어디 도망가?”

허억, 허억. 헐떡이는 숨을 고르듯이 연방 날숨을 뱉어 내던 윤신이 겨우 대꾸했다.

“그냥, 마음이 좀 급해서요.”

“기다릴까 봐? 대천사 나셨네.”

“아니, 수석님이 저 두고 가 버릴까 봐요. 첫 데이트여도 수틀리면 망치고도 남을 분이시라…… 그럼 안 되잖아요.”

“뭐 하고도 남을 분?”

“모르셨어요? 자기 객관화가 가끔 잘 안 되시는 거 같아요.”

윤신은 더 대꾸할 힘도 없다는 듯 손에 든 편의점 봉투를 흔들어 보이더니, 이내 늘 앉곤 하던 모퉁이 구석 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황망히 그런 윤신을 직시하던 세헌은 주문한 커피를 받아 든 뒤라야 그 옆으로 가 앉았다. 탁, 잔을 놓아 주곤 손등으로 이마를 훔치는 윤신을 꿰뚫어 버릴 기세로 관찰했다. 그러다 입을 열었다. 그런대로 덤덤한 어투였다.

“간 수치를 좀 재 보자.”

“저 건강한데. 입사 전에 건강 검진 표 제출했어요.”

“아니 얼마나 부었나 좀 보게. 결과치가 매우 궁금해.”

대답 대신 물끄러미 세헌을 보던 윤신은 아랫입술을 꽉 감쳐물었다. 반박을 할까, 말까 내부적으로 치열하게 번민하는 듯했다. 그러다 관두고 편의점 봉투를 테이블 위에 올렸다. 그 안에는 목을 시원하게 해 주는 레몬 맛 캔디와 연고, 면봉, 그리고 밴드가 들어 있었다. 캔디는 꺼내 재킷에 넣고, 의약품들은 포장을 까더니 세헌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온도 차 때문에 붉은 기운이 조금 남은 손바닥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그가 턱짓했다.

“어쩌라고.”

“손 달라고요. 밴드 갈아야 돼요.”

“어차피 곧 집에 올라갈 거고, 씻을 거고, 굳이 갈 필요 없어.”

“지금 갈고 수석님이 생각하신 것보다 더 오래 같이 있게요. 얼른 주세요.”

세헌이 선뜻 주지 않으려 드니, 윤신 쪽에서 보다 적극적으로 나섰다. 함부로 손대지 말라고 했던 경고는 까맣게 잊어버린 듯 그의 커다란 손을 끌어다 제 쪽으로 당겼다. 뒤이어 그의 길쭉한 검지를 감싼 밴드를 뜯어냈다.

“제가 매 줬던 건 어디 갔어요. 악어.”

“오전에 해 준 걸 아직 달고 있어? 위생 관념이란 게 없으신가 봐.”

“수석님은 손이 항상 청결하고 깔끔해요. 처음부터 느꼈어요. 자주 씻는단 소린데, 그런 거치곤 부드럽고…… 뭐 바르는 것 같지도 않던데요. 체질인가?”

긴 손가락의 끝에 남아 있던 뜨거운 물에 덴 상처는 거의 아물었다. 안도한 윤신이 면봉에 연고를 짜내 붉은 자리 위에 발랐다. 아주 신중하게 새 밴드를 까서 그 위에 덮는 동안 세헌은 별말이 없었다. 샛노란 색 스티커 끝 부분을 야무지게 붙여 준 윤신은 손을 놓아주려다가 말고 돌연 깔끔하게 정리된 세헌의 손톱을 손가락으로 둥글게 쓸어 봤다.

그의 손이 흠칫하는 게 느껴져서, 덩달아 당황하는 바람에 손을 놓쳤다. 한데 이번엔 세헌 쪽에서 다시 붙들어 접촉했다. 서로의 손가락이 깍지 껴지듯이 어설프게 걸렸다. 그는 윤신의 손가락 사이 계곡에 손끝을 밀어 넣어 여린 살을 지분거렸다.

“수석님?”

얼굴이 벌게진 윤신이 보는 사람이 없나 반사적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모퉁이 쪽이라 오늘도 늘 그렇듯 인적은 거의 없었다. 다만 세헌이 등진 테이블 끝에 노트북을 켜 놓고 공부하고 있는 젊은 여자 한 사람이 있었다. 거리가 좀 있는 데다 귀에 뭔가를 꽂고 있어 이쪽 사정이 안 들릴 것 같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도 동네에서 이러는 건 위험했다.

야릇한 공기를 들키기 전에 밀어내야 한다는 생각을 하며 손을 비틀었다. 그런데 기묘할 정도로 힘이 잘 안 들어갔다. 목소리도 자연히 기어들어 갔다.

“읏, 이제 놔주세요…….”

“먼저 부추긴 건 너잖아.”

제가 언제 그랬냐고 반론을 펼쳐 보려 했으나, 금세 입이 다물렸다. 관점에 따라선 자신이 그의 손가락을 붙들고 했던 모든 행위가 그렇게 느껴졌을 수도 있었다. 아니, 어떤 의미에선 아주 완벽한 공식이었다. 시간을 돌이켜 보니 밴드를 갈아 주는 데 잔뜩 몰입해서 정신이 팔려 있는 동안, 세헌이 그런 자신을 꽤 집요하게 쳐다봤던 것도 같았다.

곤란해하며 시선을 피한 윤신이 계속 그의 어깨 너머를 살폈다. 눈치를 보고 있다는 걸 안 건지 그도 힐끗 뒤쪽을 보고는 마음에 안 든다는 기색으로 겨우 손을 놓아주었다. 괜스레 애꿎은 제 목을 손바닥으로 쓸어 본 윤신이 헛기침했다. 그러고는 그가 주문해 준 따뜻한 커피를 한 모금 입에 댔다. 그런데 맛이 상상했던 것과 달랐다.

미간을 미세하게 좁힌 윤신이 세헌에게 항의했다.

“제가 따뜻한 카페라테 주문해 달라고 하지 않았어요?”

제 몫의 머그 컵에 든 새카만 색 아메리카노를 맛보던 세헌이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손가락에 걸린 노란색 밴드가 우습게도 너무나 잘 어울렸다.

“했지.”

“이 강렬한 시럽 맛은 뭐죠?”

“마음에 들어?”

“드는데 이런 표정으로 물어볼까요? 뭐 이런 식으로 괴롭혀요, 유치하게.”

“난 키스할 때 침에서 단맛 나는 게 좋아.”

화들짝 놀란 윤신이 손바닥으로 세헌의 입을 턱 막았다. 그러자 그가 이게 뭐 하는 짓이냐는 눈빛을 강렬하게 쏘아 보냈다. 머뭇거리던 윤신은 마지못해 손을 떼어 냈다. 그러고는 확인하듯 세헌의 매끈한 이마 위를 마저 짚었다. 한 번은 참아 주었던 그도 두 번째까지 마냥 두고 보진 않았다. 탁, 매정하게 윤신의 손을 쳐 냈다.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만지지 마.”

“지금 감정 실으신 거죠.”

“안 실었으니까 상처가 안 난 거야. 논리적으로 생각해.”

“근처에 사람 있는데 슬슬 선 넘으시는 거 보니까 혹시 어디 아프신 건가 해서요. 가끔 정신 오락가락하시거나 뭐 그러시다면…….”

쯧, 혀를 찬 그가 윤신 쪽으로 몸을 기울이고 속삭이듯, 그러나 아주 분명하게 말했다.

“넌 손 떼면 끝인지 모르겠지만. 난 네가 한번 건드리면 계속 더듬고 싶어. 경고했지. 난 내가 나를 통제하지 못하는 일에 익숙하지가 않다고. 눈 뒤집혀서 여기서 네 셔츠 단추라도 풀기 시작하면 그건 네 책임이 반이야. 무슨 얘긴지 알아들었으면 고개 끄덕여.”

본인의 한계 속도를 스스로도 잘 몰라 어찌 될지 모르니, 외부에서 이러는 게 부담된다면 자꾸 스위치를 눌러 대지 말라는 뜻 같았다. 고개를 끄덕이다 순수하게 궁금증이 인 윤신이 반문했다.

“제가 만약 플라토닉을 원한다면요?”

“다른 연애 상대를 찾는 게 좋을 거야.”

“혹시 저랑 자는 거 상상해 본 적 있으세요? 계속 궁금했는데…….”

“지금도 하고 있어.”

“뭐라고요?”

“넌 아까부터 알몸이야. 그리고 지금 막 나한테 박혔어.”

그렇지 않을까 짐작하긴 했지만, 이렇게 날것 형태의 답을 듣게 되리라곤 예상 못 했다.

놀란 윤신의 입이 굳게 다물렸다. 뺨이 붉어져 입술 색을 닮아 가기 시작했다. 그 모양새를 고스란히 주시하던 세헌이 나지막한 어투로, 유혹하듯 덧붙였다.

“찔러 넣을 때마다 침 흘리면서 헐떡이고 있어. 좋은가 봐.”

또렷하게 마주친 시선이 부담스러울 만큼 강렬했다. 은근한 어투였으나 내용은 꽤 노골적이었던 터라, 윤신은 마른침만 삼켰다. 부끄러움이 몰려와 고개를 슬그머니 숙였다. 그러자 그가 벌게진 귀를 힐끗 보다가 관두자는 양 커피를 마저 마셨다. 이쯤에서 멈추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던 모양이었다. 침묵이 맴돌았다.

어느 정도 심리적 위기감이 생긴 두 사람은 삽시간에 에로틱해진 분위기를 식히기 위해 동시에 유리창 쪽으로 몸을 틀었다. 곧이어 창밖의 어느 날 밤 정경을 감상했다.

나란히 앉아 밤 풍경을 보는 건 생각보다 훨씬 더 로맨틱했다.

윤신이 처음에 로펌에 들어갈 땐 분명 옷차림이 얇았는데 이젠 날씨가 겨울에 다다라 있었다. 계절은 두 번쯤 지난 것 같았다. 그사이 많은 일들이 있었다. 주마등처럼 떠오르는 그간의 일들을 되새기고 있자니, 세헌이 불현듯 말을 걸었다.

“소개팅 애프터는 어떻게 할 생각이야?”

아. 슬그머니 벌어진 입술 사이로 탄성 같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잠시 달콤한 공기에 취해 현실을 잊고 있었다. 세헌의 눈치를 힐끗 살핀 윤신은 미안한 기미를 가득 담아 답했다.

“당연히 없던 일로 해야죠. 그런데, 당장 칼같이 정리할 수가 없어요.”

“어째서.”

“저한테도 사정이 좀 있어서요. 그 댁에 거절의 말을 꺼내기까지 시간이 약간 필요해요. 정말 죄송해요. 그래도 그분은 절대 다시 안 만날 거니까 좀 기다려 주시면 좋겠어요.”

그와 서로 확인한 입장만 생각한다면 가능한 한 빨리 거절하는 게 맞는다는 걸 알았다. 아니, 이미 깨끗하게 정리했어야 옳았다. 피차 깊은 속마음까지 들킨 건 아니지만, 어찌 됐든 두 사람은 능선을 넘었으니 그게 모두에게 최선인 길이었다.

다만, 그녀와의 관계는 단순히 남녀 사이의 사건이 아니었던 터라 차마 당장 누나를 분리해서 보고 딱 잘라 거절할 엄두가 안 났다. 한데 누나의 상황이 하루아침에 바뀌지 않는 이상, 앞으로도 답이 나오긴 할지 모르겠다.

맺고 끊는 게 확실한 세헌의 성격상 이런 상황을 초래한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리라.

“납득 안 되시죠.”

그는 대답 대신 깊이 생각에 잠긴 듯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윤신이 왜 이러는지를 어림짐작해 보는 듯했다. 그러다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

“너 같은 애가 여기저기 발 걸치고 있다면 무슨 사정이 있는 것 같은데. 그걸 나한테 상세하게 말해 줄 의지는 없어 보이는군. 이건 대체로 솔직한 네가 필요에 의해 완급 조절을 한다는 뜻이고. 고로 꽤 복잡한 문제겠네.”

“욕하셔도 돼요.”

“네 마음 편해지고 싶으니까?”

정답이다. 그가 꿰뚫어 볼 줄은 처음부터 알았다.

“안 되겠죠?”

“묵비권.”

여느 때의 그라면 좀 더 원색적인 비난을 하거나, 혹은 은근하게 비꼬면서 힐난하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당장 상황을 정리하라고 직접 나섰을 텐데 이 순간의 세헌은 그 어떤 행위도 하지 않았다. 도리어 자신의 비겁함을 이해하는 듯한 뉘앙스를 풍겼다. 뭔가를 아는 것 같기도 했고, 또 그저 변덕을 부리려는 것 같기도 했다.

어찌 됐든 모호한 답을 준 그는 커피를 조금 더 마시더니, 느긋하게 몸을 다시 틀었다. 갑자기 생각난 화두가 있는 듯했다.

“병원 갔다 왔잖아. 애 상태는 어때.”

언젠가 그의 집무실에서 봤던 제 사건 관련 자료들을 떠올린 윤신이 떠보듯이 대꾸했다.

“전 사건 보고를 아직 안 드렸는데 수석님은 다 알고 계신다는 느낌이 드네요.”

“그러니까. 네가 안 하니까 내가 직접 알아봐야 하잖아. 가뜩이나 바빠 죽겠는데 일 보태지 말고 따박따박 보고해.”

황당해진 나머지 고개를 갸웃하게 됐다. 처음에 펌에 들어갈 때 탁 비서를 통해 몇 가지 업무 규칙을 전달받았다. 그 기억을 떠올리며 스스로를 변호했다.

“프로 보노는 상부에 알림 할 필요 없다고 들었는데요.”

“룰은 내가 정해. 넌 무조건 나한테 다 알려.”

“저만요?”

“그래 너만.”

왜냐고 질문하려고 윤신이 제 입술을 벌렸다. 하나 말을 꺼내기도 전에 주도권을 앗아 간 세헌이 덧붙여 말했다.

“왜냐고 물어볼 거지. 내가 알고 싶으니까. 앞으로 어디 가는지도 싹 다 보고해. 한 건이라도 누락되면 연봉 천만 원씩 깎는다.”

“그럼 수석님도 그렇게 하세요. 24시간 무슨 일 하시는지까진 저도 안 물어봐요. 그래도 어디 외출하는지 정도는…… 휴일이나, 외근하실 때나.”

“상황 봐서.”

“전 무조건이고요? 불공평해요.”

“억울하면 네가 구성원 변호사 하든가.”

“이건 직급과는 별개죠.”

“아냐. 나한테는 연장선상이야. 넌 내 명령에 복종할 의무와 책임 모두가 있어.”

솔직히, 저렇게 나올 줄 또한 알았다. 처음부터 세헌은 본인은 돼도, 상대는 안 되는 게 많았다. 이 고착된 상하 관계에 순응하기로 내심 결정한 윤신에겐 그것도 익숙할 지경이었다. 상황 봐서 적당히 필요한 건 알려 주겠다는 말이니 최악보단 사정이 나은지도 몰랐다. 흘기듯이 그를 보다 결국 하는 수 없겠다는 듯 타협했다.

“아이는 괜찮아요. 어머니 쪽이 제 사촌이랑 같은 초등학교를 나왔어요. 그 이야기 하다가, 나중에 은근슬쩍 합의 얘길 꺼냈죠. 다행히 잘 해결될 것 같아요. 합의금 최대치로 받아 내  드리고, 진심으로 사과도 전달해 드릴 예정이고요.”

아직 하고 싶은 말을 다 끝내기도 전이었는데 실망스러워하는 기색이 세헌의 얼굴에 이미 완연했다. 그는 골치 아프다는 양 커다란 손바닥으로 이마를 슬쩍 쓸었다. 사건의 진행에 대해서 묻기에 있는 대로 대답한 건데, 윤신은 영문을 몰랐다.

“왜 그런 표정이신 거예요?”

“어째서 원점이지?”

“뭐가요?”

“이번엔 문제조차 파악을 못 하고 있군. 내가 너무 풀어 주는 게 원인인가? 몇 달에 걸쳐 수차례 반복 설명했잖아. 넌 이제 도국 사람이니 피아 식별 제대로 해야 한다고.”

화를 내는 어투는 아니었다. 굳이 따지자면 도리어 무감각했다. 그러나 분명히 그 안에는 약간의 책망이 담겨 있었다.

대답을 듣고 곰곰이 되짚다 보니 얼추 세헌의 생각이 잡혔다. 거대 로펌 변호사로서의 자질을 가르치고 길들여 이제 겨우 섭외 사건에 써 보려고 하는데, 제 태도가 다시 피해자 중점으로 되돌아가 허무함을 느낀 듯했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는 말이 있듯, 그는 근원적인 제 태도를 지적하는 것이다.

사실 변명할 말은 있었다. 송 변호사가 직접 부탁했을 만큼 깔끔한 해결이 중요한 일이어서 원만하게 상황을 매조질 방법만을 생각했다. 그와 동시에 피해 아동의 아픔을 보듬어 줄 수 있는 길을 도모했던 거였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세헌의 눈엔 탐탁지 않을 것도, 이해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저는 최선을…….”

“다했겠지. 피해자를 위해.”

“의뢰인의 입장도 고려했습니다. 안 믿으셔도 어쩔 수 없다곤 생각하지만, 사실이에요.”

“하, 너한테 일 맡겨도 되겠어? 이건 작은 공익 사건이지만, 내 사건은 판돈이 달라.”

“잘할 수 있어요. 증명해 보일게요.”

짐작건대 그는 사건이 크든 작든 기본적인 자세는 썩 다르지 않다는 반박을 하고 싶었던 것 같았다. 하나 그렇게 응답해서 미묘하게 불편해진 분위기를 더 날 서게 만드는 대신 말을 아꼈다. 단둘이 있는 지금 이 짧은 순간을 그런 식으로 허비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제야 진짜로 자신이 그와 사귀고 있다는 걸 인지하게 됐다.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가만히 윤신을 보던 세헌이 차분하게 말문을 열었다.

“송 선밴 쪽팔린 일을 아주 싫어해. 사람 좋은 척하지만 진짜 중요할 땐 나보다 더 냉정하게 판단하는 사람이야. 잘 마무리해.”

세헌이 준 조언을 뼈에 새기듯 곱씹던 윤신이 돌연 이질감을 느끼고 멈칫했다.

“거긴 선배라고 부르시네요?”

“뭐 문제 있어?”

“그렇게 가까운 분인데도 언제든 등 돌릴 수 있는 상대라고 보고 저한테 잤냐고 물어보신 거예요? 수석님은 대체 누굴 믿나 싶어서요.”

늘 하던 대로 이 질문을 흘려 넘기거나, 대충 뭉개서 대꾸할 거라고 예상했다. 세헌은 사적인 영역에 대한 호기심을 즐기지 않았으니까. 한데 오늘은 달랐다.

그는 고민할 거리가 많아진 듯 심각하게 유리창에 비친 스스로를 응시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턱을 괴고 사념에 푹 잠겼다. 윤신은 그에게 시간이 필요한 듯해 달콤한 커피를 마시며 묵묵히 기다렸다.

〈난 키스할 때 침에서 단맛 나는 게 좋아.〉

그의 의미심장한 말을 떠올리자 마음속이 복잡해졌다. 입에 잘 맞지 않는데, 왠지 더 마셔야 할 것 같아서였다. 자신도 모르게 한 모금 더 입에 댄 순간, 민망한 기분이 들어 컵을 내려놓았다. 괜히 휴지로 입가를 닦고 있자니 세헌이 뒤늦게 대꾸했다.

“난 그게 대체 어떤 감각인지 잘 모르겠다. 누굴 믿는 거.”

그동안 윤신이 보아 온 강세헌은 완벽주의라는 도식에 딱 걸맞은 사람이었다. 그건 스스로를 신뢰하고, 또 실제로도 그에 상응하는 능력을 지녔기 때문일 터다. 저렇게 완전한 형태가 되어 갈 때까지 단 한 사람도 믿어 본 적 없다는 건 그에게 독일까, 약일까.

아버지, 누나, 친구들, 동기들, 은사님들. 그뿐만 아니라 갓 변호사 자격증을 딴 자신을 받아 주었던 까마득한 업계 선배나 여태까지 곤란한 일에 처했던 수많은 의뢰인들까지. 주변 사람들을 신뢰하며 지금까지 버텨 온 윤신으로선 가늠도 안 갔다.

“본인만 모르는 거 아닐까요? 경험해 봤지만, 모를 수도 있어요. 사랑도 그렇대요. 지나고 나서 깨닫는 경우도 있다고요.”

“난 모르는 거 없어.”

“가끔 있을 수도?”

“없어.”

스스로의 말에 확신하듯 고개를 가볍게 끄덕인 그는 푹 가라앉은 음성으로 덧붙였다.

“저 사람이라면 내 일을 믿고 맡겨도 되겠다, 그런 생각이 한 번쯤 든 적은 있었어.”

자신이 세헌을 통해 느끼는 감각이다. 그건 큰 테두리의 신뢰였다. 당장 세헌에게 그런 걸 느끼게 만들었을 만한 사람이라곤 한 명밖에 안 떠올랐다.

“송 변호사님요?”

“너희 아버지.”

여기서 듣게 되리라곤 짐작조차 하지 못했던 명사여서, 윤신의 입이 절로 다물렸다.

마치 불현듯 불어오는 바람처럼, 아버지의 마지막을 보내 드리던 날의 정경이 떠올랐다.

새카만 색 슈트를 정갈하게 갖춰 입은 세헌이 정중하게 분향하고 돌아 나오던 그때. 복도 끝에서 우느라 손님맞이도 하지 못했던 자신은 충동적으로 그를 붙잡았다.

장례 내내 식장에 온 아버지의 조문객들은 모두 얼굴에 침통한 슬픔을 가득 담고 있었다. 하지만 오직 그만은 그런 게 보이지 않았다. 창백한 얼굴은 침착했고, 날카로운 눈매는 초연했다. 함께 무너지지 않을 사람이라는 판단이 들었기에 잠시 같이 있어 달라고 부탁할 수 있었던 거였는지도 모른다.

한데 제 판단이 틀렸던 것 같았다.

“딱히 나랑 접점이 없어서 그게 다였어. 내 짐작을 현실화할 계제가 없었지.”

덤덤하게 뱉는 그의 말은 연단에 올라 주의를 모두 집중시키고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호소하는 것보다 훨씬 더 정확하고, 분명한 형태로 귀에 감겼다. 다른 사람도 아닌 인간 불신 그 자체인 세헌의 입에서 그런 말을 들을 정도라면, 그야말로 성공한 인생 아닐까 싶었다.

“우리 아버지 인생 진짜 잘 사셨네요.”

그는 동의하는 듯 침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 이유 없이 장례식에 간 건 그때가 처음이야. 장례식, 결혼식. 그런 행사는 대체로 관계자와의 연이 중요하거나, 혹은 필요해서 참석하거든. 특히 그땐 주니어 때라 정말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는데, 중요한 약속을 취소하고 거길 갔었어.”

정작 세헌은 매우 차분하고 담담했는데, 왠지 울컥하게 된 윤신의 호흡 끝이 떨렸다. 괜히 땀이 차는 듯한 손을 쥐락펴락하면서, 언젠가 읽었던 소설책의 문구를 떠올렸다.

〈아마 난 모든 걸 그냥 받아들이는가 보지. 뭐, 감기에 걸리듯이 말이야.〉[3]

어쩌면 자신도 그런 것 같았다. 마치 감기에 걸리듯이, 세헌의 모든 걸 받아들이고 싶어졌다. 세상이나 사람을 잘 안다고 자부할 만큼 대단하게 통찰력 있는 사람은 못 됐다. 하지만 한 가지 정도는 본능적으로 알아챘다.

그동안 세헌의 인생은 아주, 무겁고 어둡고, 지루하며, 힘겨운 방식으로 흘러왔을 것이다. 어렸을 때는 요보호 아동. 자라서는 피도 눈물도 없는 변호사. 그 사이의 가파른 계단을 하나씩 차근차근 오르면서 그가 어떤 걸 포기하고, 또 얻으면서 그 누구도 믿어 본 적 없는 비뚤어진 어른이 됐을지 자신 같은 우물 안 개구리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자꾸 병이 옮듯, 그를 향해 마음이 옮겨 갔다. 세헌은 모두에게 강한 사람인데, 이상하게 제게는 약해 보였다. 남들이 모르는 그의 비참한 면들이 자꾸 시야에 잡혔다. 왜 세헌이 제게 자꾸 눈에 띈다고 말했던 건지 대충은 알 것 같았다. 그리고 윤신에겐 나쁘고도 좋은 버릇이 있었다. 제 눈에 약한 사람을 그냥 두고 보지 못했다.

“잘 오셨어요. 거기서 저 보셨잖아요.”

쓸쓸한 기억들을 떠올리는 듯하던 그의 눈매가 일순 낭만적인 빛깔로 변했다. 아주 희미했고 또 찰나였으나, 윤신은 분명히 인식했다. 아무도 믿지 않을 테지만 확실히 실재했다.

아찔해져 조금 더 원한다는 말을 하려 하는데, 세헌이 픽 웃었다. 여태까지 보아 온 여러 가지 웃음들 중 가장 부드러워 보였다. 그래서 차마 더 달라고 애원하지 못했다. 말을 꺼내면, 감정 교류에 방어적인 편인 그가 이 다정한 기류를 외려 꽁꽁 숨겨 버릴 것 같아서였다.

윤신은 자신도 모르게 그의 어깨 뒤편을 바라보았다. 언제 자리를 비운 건지 끄트머리 자리를 채우고 있던 여자는 사라지고 없었다. 그걸 인지한 순간 더 망설일 필요를 못 느꼈다.

덥석, 그의 뼈가 도드라진 딱딱한 손목을 붙잡고는 자신을 보는 세헌과 눈을 마주쳤다.

동시에 눈을 지그시 감고 고개를 틀어 그의 입술에 제 것을 부딪쳤다. 말랑말랑한 촉감의 살갗이 포개어지듯 겹쳐졌다가, 천천히 떨어져 나갔다. 다시 눈을 뜬 윤신은 여전히 자신을 빤히 지켜보고 있는 그의 끈질긴 시선을 기꺼이 모두 받아 냈다.

“단맛 나요?”

그 말을 하는 자신을 보는 세헌의 눈에 그의 생각이 다 쓰여 있었다.

“이걸로 어떻게 알아. 혀부터 내밀어 봐. 빨아 보고 얘기해 줄게.”

“여기서 이 이상은 안 돼요. 좀 구식이죠? 저도 알아요.”

슬쩍 이마를 좁힌 세헌이 바로 윤신을 밀어냈다.

“이제 그만 일어나. 난 슬슬 들어가서 할 일이 있어.”

“어, 조금만 더 같이 있으면 안 돼요? 저 집에 가면 혼자예요.”

“역시 집에서 둘인 편이 나을까? 대서사시 쓸 때 됐지.”

“우리 사귄 지 딱 이틀 됐는데요. 아직은 아까처럼 머리로만 하시는 편이…….”

“구식이란 말은 조금 전이 아니라 방금 같은 말 할 때 쓰는 거야.”

너무 이르다는 양, 윤신이 뺨을 벌겋게 붉힌 채로 손을 마구 내저었다. 강하게 부정하고 싶은 마음에 열심히 흔들다가 고개까지 도리질 쳤다. 늘씬한 몸을 반쯤 일으키고 그 모습을 내려다보는 세헌의 얼굴에 약간의 분노가 스몄다.

“한 번만 해도 알아들으니까 적당히 해라. 마음 바뀌어서 자빠뜨리기 전에.”

척척 머그 컵을 치워 픽업대에 옮긴 세헌은 여전히 창피해하는 얼굴로 자리에 앉아 있는 윤신을 일으켰다. 억지로 서게 하자, 제 동의는 구하지도 않고 느닷없이 돌아가자고 하는 게 퍽 불만이었던 윤신이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그러나 까마득한 상사인 세헌에게 선뜻 하극상은 펼치지 못하고 얌전히 뒤를 따라왔다.

바깥 날씨가 계절을 증명하듯 쌀쌀했다.

건물의 지하 아케이드로 들어온 그들은 아파트와 연결된 미로 같은 복도를 걸었다. 지하 주차장 로비로 향하는 긴 통로를 지날 때까지도 서로 아무 말이 없었다.

어느 틈에 조명이 꺼진 어두운 끄트머리에 다다랐다. 그 순간, 윤신을 벽 쪽 구석으로 몰아붙인 세헌이 날렵한 턱을 슬쩍 끌어다 입을 부딪쳤다.

“읏……!”

암흑이 두 사람을 포개듯 감쌌다. 수줍게 닿았던 입술이 동시에 벌어졌다. 두 개의 젖은 혀끝이 질척하게 닿았다. 엉겅퀴 꽃처럼 뾰족하게 선 돌기들이 맞물렸다.

이윽고 짧은 시간 동안 최대치로 바짝 접촉해 있던 표피가 떨어져 나가면서 투명한 타액이 길게 연결되었다가 뚝 끊겼다. 그 모양새가 몹시 아슬아슬했다.

숨을 몰아쉰 윤신은 세헌을 끌어안고 그에게 기댔다. 온 얼굴이 뜨끈했다. 그런 자신을 아는 건지 세헌의 큼지막한 손이 머리카락 사이를 파고들어 와 결 좋은 터럭들을 몇 번이고 쓸어내려 주었다. 저번부터 생각한 건데, 세헌은 의외로 손짓이 상냥하고 부드러웠다.

더 붙어 있고 싶었는데 안타깝게도 별안간 뒤쪽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자연스럽게 서로를 분리한 두 사람은 주민들이 지나가고 얼마 뒤 천천히 걸음을 내디뎠다.

로비의 중앙쯤에 다다르자, 언젠가 그와 마주쳤던 투명한 중문이 가시거리에 드러났다. 윤신은 그를 이렇게 그냥은 보낼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 세헌의 손을 살짝 붙잡았다.

그가 힐끗 옆을 돌아보았다.

“집까지 데려다줘?”

“아니에요. 그냥, 첫 데이트 엄청 좋았다고 말씀드리고 싶어서요. 같이 있으니까 별거 안 해도 좋아요. 시시콜콜한 얘기 하는 거요. 혼난 건 좀 아팠지만요.”

“다행이네.”

“혹시 시간 낭비 하는 거 같으셨어요?”

“나도 재미있었어. 그러고 보니 그런 생각을 안 했네. 나라면 했어야 하는데. 이상하다.”

세헌이 적확한 이유를 찾기 위해 눈을 가늘게 뜨자, 슬쩍 미소 짓던 윤신이 차선을 끼어드는 것처럼 덧붙였다.

“그거면 됐어요. 전 변호사님이 행복했으면 좋겠거든요. 그리고 저도요.”

“…….”

“그럼, 내일 봬요.”

안녕히 주무세요, 하듯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한 윤신은 그제야 세헌의 손을 놓았다.

C동 중문을 열고 들어가 마침 도착한 승강기에 빠르게 올라탔다. 세헌에게 손을 열심히 흔들어 주던 말간 얼굴이 그의 시야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우두커니 그 자리에 서 있던 세헌은 조금 전 윤신이 쥐고 있던 제 손을 내려다봤다.

오늘도 윤신은 그의 삶 속 논리적인 구조를 무너뜨렸다. 그간 연애 같은 건 시간 낭비를 일삼는 멍청이들이나 하는 가장 쓸모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한 번쯤 제대로 해 보고 싶어졌다. 끈질기게 억누르고 참다가 한 번 스위치를 누르고 나자, 도저히 걷잡을 수가 없었다.

마치 감기처럼, 정신을 차려 보니 빠져든 뒤였다.

“하아…….”

세헌은 깊은숨을 몰아쉬었다. 전처럼 심하진 않지만, 또다시 야릇한 편두통이 몰려왔다.

눈을 지그시 감아도, 그 안엔 윤신의 잔상만이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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