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
똑똑.
바깥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서류를 읽는 데 정신이 팔려 있던 윤신이 고개를 슬그머니 들었다. 벽시계를 확인하니 벌써 점심시간이었다. 오늘은 구내식당에 내려가 먹을 겨를이 없을 것 같아 탁 비서에게 샌드위치를 사다 달라고 미리 주문했다. 그인 모양이다.
“네, 들어오세요.”
문이 열리고, 누군가 안으로 입성했다. 윤신은 사 온 건 대충 거기에 두고 가라고 하기 위해 접견용 테이블을 손짓했다.
“거기 두시면 제가 알아서 먹을게요. 고마워요. 그리고 얼른 내려가서 식사해요.”
“자기 많이 바빠? 그냥 같이 먹으면 안 될까? 나도 아직 점심 전이거든.”
예상하지 못했던 주파수의 음성이 들려왔다. 깜짝 놀라 정면을 보자, 음료를 담은 캐리어와 샌드위치가 포장된 페이퍼백을 든 미희가 그것을 가볍게 흔들어 보였다.
“송 변호사님? 웬일로 여기까지 오셨어요.”
“내려가는 길에 탁 비를 만났는데 도 변은 사무실에서 먹는다고 하더라고. 점심 같이할까 싶어서 내가 직접 사 왔어. 괜찮으면 이쪽으로 오지?”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난 윤신이 그녀가 가리키는 자리로 다가갔다. 마주 앉은 두 사람은 간단하게 점심으로 때울 거리들을 꺼냈다. 세헌을 능가할 만큼은 아니지만 그에 준할 정도로는 바쁜 송 변호사가 일개 주니어 변호사를 찾아온 덴 이유가 있을 듯했다. 윤신이 그녀의 커피를 앞쪽으로 밀어 주며 넌지시 물었다.
“그냥 오신 건 아닌 것 같은데요.”
“정말 도 변이랑 도란도란 얘기나 할까 하고 온 거야. 일은 할 만해?”
제 몫의 커피를 한 모금 마신 윤신이 부드럽게 응답했다.
“아직까지는요. 특별히 제가 주도해서 맡고 있는 큰 건이 없기도 하고요. 지금은 따로 지시하시는 크고 작은 심부름을 하거나 강 수석님이 주신 공익 사건 정도만 훑어보고 있어요.”
“이 팀은 회사법 팀이지만 M&A가 주력이니까 노동법 전문가가 꽤 도움될 거야. 곧 팀 회의에도 참석할 수 있을 거고. 내 말 무슨 뜻인지 이해하죠?”
“그럼요. 받아 주신 게 어딘가요. 연봉도 4년 차 수준으로 올려 주셨고요. 어느 날 갑자기 뚝 떨어진 낙하산인데 저라도 미심쩍어요. 필요하다고 여겨지면 부르시겠죠. 제가 노력할게요.”
대꾸와 동시에 괜스레 창 너머를 힐끗 살핀 윤신이 일회용 컵의 뚜껑을 열고 커피의 향을 맡았다. 그러자 그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던 미희가 이어 물었다.
“누님은 잘 지내세요?”
“누나요? 요새 많이 바쁜가 봐요. 그래도 1주일에 한두 번씩 전화는 꼬박꼬박 하는 편인데 요샌 연락이 뜸해요. 조카들 얼굴도 슬슬 보고 싶은데 쉽지가 않네요.”
“실은 처음에 이경 씨한테 연락 왔을 때 깜짝 놀랐어. 수한이 우리랑 일을 많이 하긴 하지만 거의 법무 팀 상대하지 둘째 사모님이랑은 따로 볼 일이 없으니까. 몇 년 전 도 교수님 장례식 갔을 때 한 번 스치듯 뵙긴 한 적 있어도, 그냥 그렇게 끝날 인연인 줄 알았거든.”
누나가 왜 이곳으로 자신을 보낸 것이냐는 에두른 물음이다. 사실 윤신에게도 정답은 없었다. 대충 짐작이 가는 부분이 있을 뿐이었다.
“이건 그냥 제 생각인데, 아버지가 누나한테 송 변호사님에 대해서 말씀하신 적이 있었던 게 아닐까 싶어요. 생전에 가끔 퇴근하고 소주 한 잔씩 기울이실 때 눈에 띄는 제자들 이야기를 하셨거든요. 저는 그때 그게 다 무슨 소린지 몰랐지만…… 아무튼 절 맡길 만큼 신뢰할 만하다고 판단해서 연락했을 겁니다.”
“어, 우리 펌 굉장히 신뢰받고 있구나?”
다른 건 몰라도 그건 확실했다. 윤신은 그녀의 아픈 손가락이었다. 그래도 누나는 중학생이 될 때까지 어머니의 온기를 느끼며 자랐지만, 자신은 품에 한 번 안겨 보지도 못했다. 그걸 늘 안쓰러워하면서 윤신을 돌봤다.
맞는다는 듯 살짝 웃은 윤신이 샌드위치를 한 입 물었다. 열심히 내용물을 씹고 있는데 미희가 미소 지으면서 그런 자신을 현미경 너머 관찰하듯 빤히 응시했다. 당황한 윤신은 아무것도 묻지 않은 입가를 닦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저한테 뭐 묻었나요?”
“아니. 용케 세헌이가 자기 데리고 있나 싶어서. 내가 생각한 것보다 수긍이 빨랐어. 한 반년은 두고두고 괴롭힐 줄 알았는데 두 달 컷이더라? 뭐가 그렇게 급했는지 모르겠네.”
“괴롭힌다는 타동사가 강 수석님만큼 잘 어울리는 분 처음 봐요.”
이에 매우 동의하는 표정으로 미희가 박수를 짝짝 쳤다. 와하하 웃는 것은 덤이었다.
“걔가 좀 그렇지? 약간 가학적인 플레이 즐길 거 같은 이미지잖아.”
자신도 모르게 컵을 건드려 내용물을 쏟을 뻔한 윤신이 애써 평정을 유지하려 노력하며 숨을 골랐다. 이럴 땐 도대체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지를 몰라서였다. 그녀는 이쪽의 반응이 어떤지는 개의치 않고 덧붙였다.
“강 변이 돈을 되게 잘 버는데. 있잖아, 걔 돈 욕심은 별로 없다? 알아?”
“돈을 잘 번다와, 돈 욕심이 없다가 양립이 가능한가요?”
“본인의 가치를 증명하는 제일 가까운 척도다 보니 염두에 두는 거지. 변호사는 몸값으로 말하니까. 한데 걘 얼마나 비싼 딜이냐가 아니라 얼마나 본인 성취 욕구를 건드리느냐, 혹은 승부욕을 자극하느냐 같은 걸 기준으로 사건을 수임해. 그래서 항소심 건드리는 걸 특히 좋아하는 거고.”
윤신은 도저히 이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항소심을 좋아한다고요?”
“응. 자문 업무로 바빠 죽겠을 때 꼭 그런 거 하나씩 가져올걸? 송무 팀도 아니면서 항소심 재판은 포기가 안 되나 봐. 다들 저처럼 24시간 내내 일만 하는 줄 안다니까. 그래서 가끔 그 팀 시니어들이 욕을, 욕을…… 걘 먹어도 싸. 아무튼 때때로 그거 때문에 도 변도 자료 정리하느라 골치 아픈 일 생길 거야.”
“어려운 싸움 즐기실 줄은 알았지만, 다른 사람 손 탄 건 싫어하실 거라고 생각했어요.”
“반대로 생각해 봐. 원심에서 다른 변호사는 졌던 걸 자기가 뒤집는 매력이 있잖아. 그게 그렇게 짜릿하대. 원체 쉽지 않은 일이긴 하지.”
곰곰이 생각을 거듭하던 그가 이내 허탈하게 답했다.
“우월감 같은 건가요? 수석님이랑 너무 어울려요.”
“변태란 소리지.”
“제가 하고 싶었던 말이 바로 그…….”
차마 말을 끝맺지 못한 윤신이 어색하게 웃자, 미희가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세헌이 사람을 바짝 긴장하게 만든다면, 그녀에겐 그와 정반대로 상대방의 긴장감을 완화해 주는 능력이 있었다. 마치 여독을 푸는 것처럼 말이다. 처음 면담했을 때부터 줄곧 생각해 오던 거였다. 아마 그래서 까다로운 세헌도 여러 사정을 고려해 도국으로 왔던 걸지도 모르겠다.
머뭇거리던 윤신은 망설임 끝에 말문을 다시 열었다.
“저는 강 변호사님이 어떤 분인지 궁금해요.”
“세헌이? 걘 보이는 그대로예요. 똑똑하고, 능력 있고, 잘생겼고.”
그 말에 농담처럼 가볍게 맞장구치려던 윤신은 별안간 입을 한일자로 굳게 다물었다.
미희의 말을 듣자마자 자연스럽게 어떤 유려한 얼굴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 모습은 꼭 눈앞에 실재하는 것처럼 지나치리만큼 생생했다.
타인의 외모에 별 관심이 없는 자신이 이 정도로 뚜렷하게 되새길 수 있는 건 누나나 아버지, 혹은 가까운 지인들의 얼굴 정도였다. 그 사실을 인지한 순간 비로소 깨달았다. 줄곧 특별한 이유 없이도 종종 세헌을 훔쳐보고, 또 생각하고는 했기에 기억이 이토록 뚜렷하게 재생될 수 있었다는 것을 말이다.
곤혹스러워 마른침을 겨우 삼킨 윤신이 한 박자 늦게 응답했다.
“그 외에도 아주 많은 부분들이 있는 분 같아서요. 제가 오해했던 부분도 있었던 거 같고, 또 한편으론 짐작보다 훨씬 더 무서운 분인 거 같기도 하고요.”
“무서워? 아직 세헌인 제대로 뭐 보여 준 적 없는 걸로 아는데? 뭘 봤든 빙산의 일각일걸?”
“그게…… 얼마 전에 저한테 프로 보노 케이스 관련 자료들을 보내셨거든요.”
어떤 경로를 통한 건지는 모르지만 세헌이 제 일을 조금 더 수월하게 만들어 줬다는 건, 이미 미희도 알고 있던 얘기였던 모양이었다. 그녀가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경청하는 자세를 취했다.
“그 안에 뭐 들었어? 강 변 개인 조사원 썼다는 거 같던데. 아는지 모르겠는데 걔네 진짜 다루기 까다롭고 비싸. 매번 접선하는 장소도 달라서 나도 얼굴 한 번 본 적 없어.”
“그냥 뭐, 외부에선 견실해 보이던 중견 기업의 치명적인 약점이랄지. 한 남자와 그 가정까지 단숨에 나락으로 빠뜨릴 수도 있는 중요한 단서랄지.”
세헌이 준 건 언론에 보도한다고 협박 한마디만 하면 제 의뢰인이 당한 고소 취하와 손해 배상은 물론이고 사과 기자 회견까지도 불사할 거 같은 수위의 정보들이었다. 운영하고 있는 기업체 관련 비리들과 본인 추문들까지 없는 게 없어서 윤신은 취사선택만 하면 됐다.
빙빙 돌려 말했지만, 상대는 그런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까지 대충 감이 잡히는 듯했다. 미희가 꽤 재미있어하는 기색으로 잠시간 생각에 잠겨 있다가, 이내 차분히 응답했다.
“세헌인 원래 상벌의 논리로 사람을 유혹해. 도 변한테 줄 만하니까 줬을 거야. 그러니 자료 아깝지 않게 잘 써먹어 봐. 내친김에 그걸 어떻게 쓰고 싶은지도 보고 싶은 모양이네. 걔 의심 엄청 많거든.”
“역시 그렇겠죠? 쓰라고 주신 거겠죠? 안 쓰면 혼나겠죠? 그런데 너무 규모가 커요. 이름만 중소기업이지 우리나라 사람들 중에 브랜드 이름 모르는 사람이 없는 중견 기업체예요.”
“그걸 적당하게 비율 맞춰 골라 사용하는 것도 자기 능력이지.”
그제야 이 모든 판을 설계한 세헌의 의도가 손에 잡히는 듯했다.
“이쪽이 진짜 테스트였군요. 제가 손 더럽힐 준비가 됐는지를 보시려는 거예요.”
그녀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어깨만 으쓱했다.
“뭐, 아무튼 이경 씨 부탁대로 살아남는 법을 가르치기엔 강 변이 아주 좋은 스승이긴 해. 세헌이 밑에서 딱 2년만 버티고, 유학 다녀와.”
거기까지 들은 윤신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 유학 가나요? 혹시 누나한테 다른 생각이 있는 건가 해서요.”
“그건 아니고. 주니어 5년 차 떼면 보통 다녀오니까 꺼낸 말이야. 왜, 여기가 좋아? 자기 누나 말론 몇 년 버티다가 본인이 나가겠다고 할 거라던데?”
물론 처음 입사할 때부터 그런 생각을 품고 있던 건 맞았다. 몇 년 동안 누나의 부탁을 들어주고 나면 그녀도 자신이 할 만큼 했다는 걸 알아주리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걸 훤히 예상하고 있었다는 게 난처했다. 제 판단보다 누나는 훨씬 동생을 잘 꿰뚫어 보고 있었다.
펌 대표의 딸이자 자신을 전격 스카우트한 사람 앞에서 그 말을 긍정할 순 없었던 터라, 윤신이 입술을 감쳐물었다. 그가 곤혹스러워하는 걸 아는 건지 미희가 말을 돌렸다.
“남매가 교수님 참 많이 닮았어. 보고 싶겠다, 참 좋은 분이셨는데……. 나는 물론이고, 세헌이도 아닌 척하지만 도 교수님 존경했어요. 매사 공정하셨고, 사려 깊으셨으니까.”
누군가를 존경하는 강세헌이라.
선뜻 머리에 그림이 그려지지 않았다. 어찌어찌 밑그림을 그려 놓아도, 채색이 불가능했다. 윤신이 픽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자 영문을 모르는 미희가 샌드위치를 뒤늦게 한 입 맛보면서 고개를 갸웃했다. 그는 그 시선을 받은 뒤라야 자신이 웃었다는 걸 깨달았다. 누나가 제 속을 투명하게 들여다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보다 더욱 당혹스러웠다.
기분을 들키지 않기 위해 가능한 한 여유로운 태도로 말을 받아쳤다.
“종종 그립긴 한데. 저한텐 누나가 있어서 괜찮아요. 조카들도 귀엽고. 매형도 세간에서 입방아 찧는 것처럼 나쁘기만 한 분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누나가 선택했으니까요.”
“저번부터 느꼈어. 남매가 사이가 엄청 좋은가 봐.”
“제가 지켜 줘야 할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누나도 절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거고요.”
“강 수석은 그걸 약점이라고 불러. 지켜야 할 것들. 그런 게 있으면 안 된다고 생각해.”
마치 미등을 켜듯, 눈을 깜빡깜빡하는 윤신의 눈가에 의문이 서렸다. 제 생각은 전혀 달랐다. 지켜야 할 게 존재해야, 사람은 강해진다고 믿었다. 동공에 비친 의심을 읽은 건지 미희가 설명을 이어 나가려는 양 말을 보충했다.
“그러니까 걔 밑에서 잘 버티고 싶으면 너무 많이 노출하진 말라고. 만에 하나 도 변을 공격하거나 혹은 통제해야 할 일이 생기면 그거부터 건드릴 거거든. 그렇게 나가떨어진 애들 한둘이 아니야.”
“새겨들을게요.”
“그래요. 이런. 내가 너무 방해했나? 얼른 먹자. 맛있네, 이거.”
윤신은 본격적으로 식사를 시작하는 미희와 박자를 맞췄다. 입 안에서 신선한 채소를 씹으면서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곱씹었다.
오래 알아 온 사이답게, 송 변호사는 세헌에 관해 아는 게 아주 많아 보였다. 그 덕분에 자신은 이곳에 들어와 세헌과 나눈 심도 있게 나눈 대화가 거의 없다시피 한데도 그에 대해 꽤 많은 걸 속성으로 알아 가는 느낌이 들었다. 여러 가지 힌트를 준 탁 비서의 공도 무시할 수는 없었다.
확실히 세헌은 생각한 걸 반드시 실행하는 사람 같았다. 지킬 게 존재해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만들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강공 일변도로 사나.’
자신이 봐 온 그는 ‘똑똑하지만 나쁜 놈’의 스테레오 타입이면서도, 꽤나 모순적이었다. 잔혹하고, 강하고, 무자비한 면들이 방어 기제인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일까. 윤신은 세헌이 자꾸 신경 쓰였다. 자신도 모르게 눈이 가고, 그의 내면이 어떨지 관심을 쏟게 됐다.
그런데 이게 단순히 자신이 모셔야 할 사수를 향한 긴장에서 비롯된 걱정인지, 본질적으로 성향이 맞지 않는 사람을 대할 때의 우려인 건지, 혹은 자신이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다른 감각인지 전혀 모르겠다.
그저 줄곧, 목구멍에 낀 가시처럼 이 껄끄러운 독설가가 거슬렸다.
* * *
오늘도 늦은 시간까지 펌 사옥에서 서류에 파묻혀 있던 윤신은 자정이 거의 다 되어 집으로 돌아왔다. 졸음운전을 하게 될 것 같아 택시를 타고 아파트 건물 입구 앞에 내리는데, 마침 전화가 걸려 와 걸음을 멈췄다. 워낙 야심한 시각이었던 터라 발신인은 뻔했다.
역시나, 화면을 보니 누나였다.
그는 전화를 받으며 주변에 보이는 벤치에 걸터앉았다.
꽤 쌀쌀해진 밤공기가 얼굴을 스치고 갔다. 조금 날카롭고 아픈 듯도 했는데, 그런 만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 상쾌한 느낌이 좋아 계속 자리를 지켰다.
“누나? 한동안 연락 없더니 이 시간에 어쩐 일이야. 애들은 잘 지내? 매형은 여전하시고?”
푹 잠긴 듯한 그녀의 음성이 이어졌다.
- 다들 잘 지내지. 너희 집 냉장고에 반찬 좀 들여놨어. 사람 쓰라니까 왜 안 써. 집이 아주 엉망이더라. 환기도 좀 자주 하고 그래.
“남자 혼자 사는 집에 무슨 도우미씩이나……. 나 요즘 집에 들어가서 딱 잠만 자, 잠만. 그런데 언제 다녀갔어? 연락을 하고 오지. 그럼 좀 일찍 퇴근했을 거 아니야.”
- 이제 돌아가는 길이야. 막 주차장 내려왔어. 할 얘기 있어서 온 건데, 네가 생각보다 너무 퇴근이 늦다. 다음에 다시 올게.
거기까지 들은 윤신이 괜히 까딱거리던 한 손의 움직임을 뚝 멈췄다.
“뭐? 그럼 아직 주차장에 있는 거야?”
- 응. 넌 아직 펌에 있는 거 아냐? 차가 서브 카 한 대밖에 없던데.
“아냐, 나 지금…… 잠깐 있어 봐.”
기다란 두 다리를 느긋하게 앞으로 뻗고 있던 그는 벌떡 일어섰다. 그러고는 그대로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아치로 연결된 기둥들 위에 아티카를 씌운 개선문 모양 출입구를 지나자 마침 안쪽 모퉁이에서부터 검은색 세단이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차 번호가 익숙했다. 반가운 마음에 두 손을 마구 흔들자, 차량이 멈춰 섰다.
지잉. 공원 옆에 세운 차량의 뒷좌석 창문이 내려갔다.
“누나!”
통화를 종료한 윤신은 안에 있는 제 누나를 들여다봤다. 벙거지 모양으로 된 어두운 색 모자를 푹 눌러쓰고, 목에는 스카프를 둘둘 맨 데다, 얼굴 위에도 검은 마스크까지 걸친 상태라 살갗이 거의 안 보였다.
“얼굴 안 보여 줘? 요새 왜 이렇게 비싸?”
그제야 그녀는 슬그머니 모자의 챙을 조금 올려 눈을 마주쳐 주었다. 어두워서 선명하게는 확인할 수 없었으나 눈매가 확실히 많이 피곤해 보였다. 예상대로 최근 좀 바쁜 모양이었다. 이어지는 그녀의 음성도 여느 때와 달리 끝이 쩍쩍 갈라졌다. 통화할 때는 조금 잠겨 있는 듯 느꼈던 게, 실제로 들으니 훨씬 심했다.
“윤신아. 얼굴 못 보고 가는 줄 알았는데 다행이다. 일은 할 만해?”
조용히 그 목소리를 듣고 있던 윤신이 창틀 위를 세게 붙들었다.
“어째 목소리가 좀 이상하다 싶더라. 감기 걸렸어?”
“응, 심한 건 아니니까 걱정 안 해도 돼.”
“아픈데 왜 왔어. 이거 창문 다시 올려. 찬 바람 들어가. 그냥 내가 탈게.”
“아니, 거기서 들어. 얘기 금방 끝내고 갈 거야.”
손을 척 뻗은 이경이 윤신의 두 팔을 창밖으로 뿌리쳤다. 졸지에 쫓겨나는 것처럼 상체가 뒤로 슬그머니 밀린 그의 눈에 혼란이 서렸다.
언제나의 그녀와 달랐다. 이경은 자신이 가까이 다가가는 걸 저지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한데 오늘은 분명히 동생이 지척에 접근하는 걸 꺼려 하고 있었다. 밀어낸 뒤, 시선마저 피하는 모양새가 그걸 증명했다. 어찌 보면 단편적인 행동이었으나 여태 없었던 일이기에 그 차이가 바로 느껴졌다.
솔직히 그는 몹시 섭섭했다. 자신은 입에 맞지 않는 음식이든, 몸에 어울리지 않는 옷이든 그녀의 말이라면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는데, 오랜만에 만나 놓고도 가까이 가는 것조차 불편해하는 건 퍽 아쉬운 일이었다.
남매간에 흐르던 불편한 공기를 정통으로 맞고 있던 윤신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매형이랑 무슨 일 있어?”
“일은. 그런 거 없어.”
“또 허락 없이 밖에 나오지 말래? 저번에 그걸로 싸웠잖아. 아니면 애들 문제? 혹시 내가 도와줄 일이 있다면…….”
그녀는 바로 그의 말을 잘라 냈다.
“네가 신경 쓸 일 아니야. 그건 그렇고. 저기, 윤신아.”
점점 더 서운함이 쌓여 간 윤신이 보란 듯이 다시 차 안으로 손을 넣었다. 그러고는 자신을 좀 쳐다보고 얘기해 달라는 듯 부드럽게 그녀의 어깨를 그러쥐었다. 종종 투정을 부릴 때 하던 스킨십이었다. 그런데 누나는 오늘따라 이 여상한 접촉을 매우 민감하게 받아들여 신경질적으로 팔을 걷어 냈다.
‘탁!’ 하는 소리와 함께 서로의 살갗이 부딪쳤다. 그 과정에서 윤신의 손에 걸린 질 좋은 스카프가 사락, 밑으로 떨어져 나갔다. 그러자 누나가 허둥지둥 바로 목을 감추는 모양새가 매우, 아주 대단히 수상쩍었다.
“누나?”
수년간 여러 사건의 이해관계 당사자들을 상담하며 윤신이 배운 게 한 가지 있었다. 이런 경우 제 직감은 거의 9할은 들어맞았다. 피해를 입거나, 손해를 본 사람은 가장 아끼는 사람에게 가능한 한 그걸 감추고자 한다는 것이다. 걱정 끼치는 게 싫어서였다. 지금 누나의 행동이 좋은 예시였다.
안 좋은 예감이 든 윤신은 힐끗 운전석의 비서실장을 살폈다. 남자는 뒤쪽의 작은 소란을 알면서도 꼿꼿하게 앞만 보고 있었다.
완고한 인상의 실장은 아버지가 매우 신뢰했던 대학 후배 중 한 사람으로, 10년 전 누나가 결혼할 때 함께 그 집으로 데려갔던 이였다. 지난번 통화할 때 뭔가 제게 감추는 듯한 기미가 있다 싶더니, 누나에 관한 일이 맞았던 모양이다.
심적 확신이 생긴 윤신은 그녀가 스카프를 줍는 사이 그대로 마스크까지 벗겨 던져 버렸다.
“도윤신! 뭐 하는 짓이야!”
그녀의 힐난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그가 휴대폰 플래시를 켰다. 확, 밝은 빛이 그녀의 얼굴을 정통으로 비췄다. 누나의 상태를 제대로 본 윤신의 얼굴이 아연해졌다. 목에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로 묶여 있던 자국이 선연했다.
“목에 그게 다 뭐야? 집에 강도라도 들었어? 병원은 다녀온 거야? 일단 이 문부터 열어. 열어!”
그가 잠겨 있는 뒷문 문고리를 잡아당기는 사이, 누나는 창문을 거의 끝까지 올렸다. 선뜻 문을 열어 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황망해진 윤신은 조금 전 자신이 목격한 게 대체 뭔가, 한참을 고민했다. 한데 아무리 생각해도 물리적 학대의 흔적이란 결론밖에 안 나왔다.
보안 철저한 대저택에 솜씨 좋은 강도가 든 게 아니라면, 저만한 상해를 입힐 사람은 매형뿐이었다. 원래 손버릇이 좋지 않아서 종종 구설수에 오르곤 했으나, 그래도 가족을 건드렸던 적은 없었다. 그런데 이제부터는 아닐지도 모르겠다.
거기까지 논리가 연결된 윤신이 거의 끝까지 닫혀 있는 창문을 두드렸다.
“누나! 누나! 문 좀 열어 보라고.”
“목소리 안 낮춰? 누가 듣겠어! 정말 아무것도 아니야. 일단 이거부터 받아.”
좁은 빈틈을 비집고 하얀 서류 봉투가 나왔다. 그걸 받는 대신 쳐다보고만 있으니. 안 되겠다 싶어진 이경 쪽에서 결국 문을 열고 차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정면에 선 누나를 마주 본 순간, 윤신의 얼굴이 무너져 내렸다.
“매형이야?”
“윤신아.”
“매형 짓이냐고.”
“일단 이거부터 받아. 할 얘기 있다고 했지.”
덜덜 떨리고 있는 그의 손에, 봉투를 억지로 쥐여 준 그녀가 옷깃을 추스르며 덧붙였다.
“괜찮은 집안 딸이야. 그 안에 정리 잘돼 있어. 한번 만나 봐.”
“선 보라고? 이 마당에? 장난해?”
“매형한테 필요한가 봐. 당장 결혼하라는 거 아냐. 일단 한번 만나 보라고. 그래도 액션 정돈 취해야지 나도 할 말이 생기니까.”
“그 꼴을 해서 나타나 놓고, 매형이 원하니까 선봐라? 무슨 일이 어떻게 진행되는 거야!”
“진정하고 들어. 이건 기회야. 네 매형한테 필요한 집안이야. 역으로 말하면 이 집안이랑 엮이면 무슨 일이 생겨도 최소한 넌 안전하단 뜻이야. 다행히 저쪽에선 너 아주 마음에 드는 눈치야. 먼저 연락 올 테니 마음에 들면 사귀어 보고, 아니면 어깃장 놓을 땐 놓더라도 약속 장소엔 나가 봐.”
그가 뭔가 반론을 제기하려 하자, 바로 잘라 낸 누나가 덧붙였다.
“그리고 매번 와인 거래하던 데에 미리 말해 놨어. 전화 오면 너희 펌 직원더러 은밀히 받아다 달라고 해. 강 변호사 한 병, 송 변호사 한 병. 대표님께는 내가 직접 챙겨서 댁으로 이미 보냈어. 이거 아주 귀한 술이니까…….”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는 그저 혼란스러웠다. 한꺼번에 너무 많은 지식 정보를 주입하게 된 사람처럼 머리가 지끈거리고 터질 것 같았다. 끝내 누나의 말허리를 불쑥 잘라먹은 윤신이 발끈했다.
“누나, 나 이해가 하나도 안 돼!”
“증거 차곡차곡 모으는 중이야!”
계속 차분하게 말을 잇던 그녀 쪽에서도 결국 언성을 조금 높였다. 그러고도 누가 들었을까 눈치가 보이는지 주변을 둘러보는 모양새가 짠했다. 하는 수 없이 윤신은 제 목소리의 주파수를 낮춰야만 했다. 그 바람에 목구멍이 바들바들 떨리는 느낌이었다.
“증거를 모을 만큼 매형이 험한 짓 하는 거야? 그러면서 나한테는 그런 인간이 원하는 혼처랑 선을 보라고 해? 도대체 어느 정도길래 나라도 안전해야 하는데? 설명해 봐.”
“지금 자료 모으는 중이라고 했잖아. 나 그냥 당한 거 아냐. 알고도 당해 준 거지. 원래 사랑에 목매는 사람인데 다른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대. 그 사람이 회사 시끄러워지고 승계에 영향 줄까 봐 협의 이혼을 원하는데, 내가 그렇게 깨끗하게 헤어져 주고 싶지가 않거든. 이혼할 땐 하더라도 방식은 소송일 거야. 그래서 때를 기다리는 중이라고.”
이혼?
소송?
누나는 윤신보다 훨씬 영민하고 똑똑한 사람이었다. 아버지는 늘 그녀를 칭찬했다. 누나에게 그냥 하는 행동 같은 건 없었다. 그래서 매형과 결혼하겠다고 했을 때, 부자는 그녀의 선택을 전적으로 믿고 지지했다. 대외적으로 비치는 너저분한 이미지와 달리, 매형에게 보이지 않는 다른 것이 있어 누나를 사로잡았을 거라고 믿었다.
실제로도 매형은 누나를 정말로 사랑하고 아꼈다. 부부의 결혼은 나름대로 순항했다. 약간의 부침도 삐걱거림도 있긴 했지만 그건 어느 부부에게나 있는 수준이었다.
그런데 뭔가 변화가 생긴 모양이다.
“상대는 재벌이야. 누나 그 사람들한테 상대도 안 돼. 그냥 헤어져 준다고 할 때 도망쳐.”
“알아. 긴 싸움일 거고, 이거보다 더 많이 다치겠지. 웬만한 대형 로펌에선 수임해 주지도 않을 거야. 수한으로부터 일거리가 끊기는 건 물론이고 온갖 방법으로 그쪽에서 물어뜯을 테니까. 그래서 더 길게 보려는 거야. 무조건 난 증거 쥐고 버텨야 돼. 아이들이 있잖아.”
“아이들은 안 주겠대?”
“승계나 상속 때문에라도 친권·양육권은 포기 안 하려고 할 거야. 받아 오려면 싸워야지.”
목에 단단히 묶였던 자국을 달고서도 누나의 눈빛은 또렷했다. 태도도 매우 확고했다. 신중한 그녀의 성격에 이미 여러 차례 고민하고, 시뮬레이션을 돌려 본 결과일 터다. 윤신은 그녀가 한 결정을 그저 따라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마음속에선 당장 그 집에서 꺼내 와야 한다고 여러 번 반발해도, 자신이 끝내 그러지 못할 것 또한 느끼고 있었다.
“난 괜찮아. 맷집도 세고, 강해. 윤신이 네가 걱정이야. 너한테 불똥 튈까 염려돼.”
“지금 내 걱정 할 때야?”
“그래도 도국 정도면. 도국 좋은 펌이야. 업계 평판 훌륭하고, 내실 있고, 파트너들도 실력 있어. 실세들이 아버지 제자들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수한이 펌에 맡기는 일이 꽤 많아서 선뜻 실력 행사는 못 할 거야. 자기들 약점도 많이 노출돼 있거든. 제일 괜찮겠다 싶었어.”
자연히 윤신의 뇌리에 요 몇 달 사이 제게 일어난 모든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작금의 누나가 처한 상황과 제 입장을 연결시키자 크고 작은 물음표로 남아 있던 모든 의문점들이 해결되는 듯했다.
남의 살을 빼앗아 오려면 제 뼈를 내어 줄 각오를 해야 한다. 누나가 그걸 모를 리 없었다. 게다가 화살을 겨냥한 상대는 국내 10대 그룹 안에 드는 대기업의 둘째 아들이었다. 그녀는 본격적인 힘겨루기를 시작하기 전에 제게 안전지대를 마련해 주려던 거였다.
“그래서 내 방패막이 만들어 주려고 도국으로 보냈던 거야? 아버지 이름 팔아서?”
“너 재야에서 무료 변론이나 하고 있으면, 그 사람은 너부터 건드릴 거야. 내가 널 애틋해하는 걸 아니까. 그러니 날 위한다면 몇 년 동안 죽었다고 생각하고 잘 자리 잡아. 그리고 유학 가. 그게 나랑 네가 살길이야. 강 변한테 잘 배우고, 뜯어낼 거 있으면 뜯어내고. 그 사람 머릿속이 돈으로도 못 살 보물섬이야. 수한 치부도 그 누구보다 많이 알 테지.”
“그래서 강세헌 수석이었어?”
“그걸 떠나서 너 지키기에 강세헌만 한 인간이 없어.”
그런 이유였다면, 그는 더욱 이 행보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 사람이 날 왜 지켜! 우리가 아무 사이도 아닌데 그럴 리가 없잖아.”
“널 적극적으로 보호해 주지야 않겠지! 그런데 윤신아, 그건 누구도 안 해. 그래도 강세헌은 최소한 외부 의견에 흔들려서 널 이유 없이 면직시키지도, 불이익을 주지도 않을 거야. 본인 주관 따라 행동할 거라고. 내 판단엔 그걸 해 줄 수 있는 업계 유일한 사람이야. 너 일 잘하잖아. 쓸모만 증명해. 아니, 너도 날 지키기 위해서 꼭 해 줬으면 좋겠어.”
그녀의 말에 반박할 계제가 없었다. 세헌에 대한 제 판단과 정확히 일치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을 지키지 않을 것이다. 그럴 이유가 없었다. 다만 승부욕이 강렬하고,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확고해서 도리어 외부의 강요성 압박이 시작된다면 거기에 어깃장을 놓을 만한 유일한 사람처럼 보였다. 윤신은 떨리는 음성으로 애원하듯 말했다.
“누나, 내가 도와줄게. 나 변호사야. 협의가 안 되면 조정으로, 상대가 유책 배우자면 논의해서 많이 받아 낼 수도 있어. 꼭 소송까지 해야 하는 것도 아냐. 나 열심히 준비할게.”
“상대는 수한이야. 법무 팀 직원만 몇 명인 줄 알아? 죄다 판·검사 재조 출신에, 경력도 다들 십수 년이야. 심지어 모든 기수가 있어. 어떤 판사가 나와도 동기가 있다고. 그 사람들 상대로 뭘 할 수 있는데. 너 같은 햇병아리 변호사 짓밟는 거 수한한테는 일도 아냐. 내가 수한 사람으로 10년 살아서 누구보다 잘 안단 말이야. 누나 마음 정말 모르겠어?”
“그럼 누난 어떡해!”
“이건 내 일이야. 난 결혼했고, 내 가정의 일인 거야. 네가 낄 군번이 아냐. 알겠니?”
선을 긋는 누나에게 더 할 말이 없어 괴로웠다. 이를 아는 건지 그녀가 덧붙였다.
“너는 그냥 네 인생 살아. 그러다 교육자 같은 거 하면서 말년 편하게 지내. 이혼할 때 위자료 조건으로 나중에 네 모교 로스쿨 교수 자리도 부탁해 둘 생각이야.”
“난 그런 거 필요 없어! 누나만 안전하면 돼. 폭력은 점점 더 심해져. 이건 내 추측이 아니라 통계야. 협의하자고 할 때 하루라도 빨리 끝내야 돼. 응? 제발.”
그의 애원에도 누나는 단호했다.
“내가 필요해.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 일에 끼어들지 마. 경고 아니야, 통보야. 쓸데없는 짓 해서 방해하면 너 안 봐. 난 지금 나와 내 아이들을 지켜야 하는데, 너까지 보호해야 하면 일이 너무 고달파져. 부디 날 너무 힘들게 하지 말아 줘.”
“하지만!”
“어디 가서 입도 뻥끗하지 말라고. 알아듣니? 윤신아, 넌 내가 뭘 하든 전혀 모르는 거야. 이건 내 일일 뿐이고, 넌 관련 없어. 누나 말 들어야지. 그래 줄 거지? 제발, 부탁이야.”
어째서 진작 모두 말하지 않았는지는 물어볼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그 다정한 마음이 윤신을 더 상처 입혔다.
어쩌면 세헌의 논법이 맞았다. 지킬 게 많아지니까 전쟁터에선 불리했다. 지금 누나처럼 말이다. 그녀는 자신과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하지 않아도 될 일을 하면서 여러 가지 경우의 수를 더불어 생각하고, 또 갈 길을 결정해야 했을 것이다.
혼란과 불신의 감정으로 가득 물든 윤신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가슴 아파 하는 표정을 지으며 그 모습을 고스란히 지켜보던 그의 누나가 마른 몸을 끌어안았다. 그들은 서로의 불안한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따뜻한 체온을 교환하고, 잠시 시간을 흘려보냈다.
침묵 끝에 먼저 입을 연 건 그의 누나였다.
“너무 걱정하지 마. 나 우리 아버지 딸이야. 내가 이길 거야. 시간이 좀 걸릴 뿐이야.”
“…….”
“간다.”
“누나, 가지 마.”
어깨를 밀어내는 그녀의 손을 붙잡아 봤지만, 거기까지였다. 누나는 윤신의 팔을 토닥여 주곤 다시 차에 올라탔다. 조용히 다시 주행을 시작한 차량이 느릿하게 그의 시야에서 빠져나갔다. 남겨진 윤신은 우두커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녀가 서 있던 자리와, 자신이 선 위치를 번갈아 보다가 아주 깊고 무거운 한숨을 토해 냈다.
놀란 나머지 꾸역꾸역 차오르고 있는지도 몰랐던 울컥한 기운들이, 그제야 선연했다. 목구멍이 싸한 느낌이 들면서 벅차더니, 금세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저 아연하던 하얀 얼굴이 정말이지 끔찍하다는 듯 서서히 일그러졌다.
“이게 대체 뭐지.”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라는 말은 대체 누가 처음 쓰기 시작한 걸까.
지금 제 마음이 꼭 그랬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도 윤신은 이렇게까지 허무하지 않았다. 세상에 태어나 가장 슬프긴 했지만, 이토록 무기력했던 건 아니었다. 부친은 인생의 반쯤을 장외에서 투쟁하는 사람들을 도우며 살았다. 밖에서 의로운 형태의 죽음을 맞는 게 당연해 보였다. 하지만 누나는 아니다. 행복해야 하는 사람이 나락에 떨어졌는데 자신은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증거를 모은다는 건 아까 봤던 학대의 흔적 같은 것들을 수집한다는 것이다. 혹은 외도거나, 혹은 또 다른 악한 행동들일 터다. 이미 이혼 이야기가 매형의 입에서 나온 거라면 사랑은 다 식었다고 봐야 했다. 갈등의 시작이 언제부터였는지까지는 모르지만, 장고 끝에 모든 일을 결정하는 누나의 성향으로 미루어 하루 이틀 이전에 일어난 일은 아닐 듯했다.
두어 달에 한 번씩은 누나의 얼굴을 봐 왔다. 그런데, 여태까지 자신은 전혀 그런 일이 있을 거라고 생각지 못했다. 육안으로 보이는 상처들이 없었으니까. 한데 오늘은 생겼다.
이는 십중팔구 매형의 폭력성이 점점 심해지고 있다는 뜻이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보이는 곳으로. 그리고 누나는 그것들을 감수하겠다고 말했다. 그 각오가 가늠도 안 갔다.
‘도대체 언제부터 그랬던 거야.’
겨우 버티던 윤신의 눈가에서 눈물이 뚝 떨어졌다. 한번 소리 없이 흐르기 시작한 물기들은 점점 더 불어나 그의 말간 뺨을 흥건하게 적셨다. 안타까움과 열패감으로 두 다리가 후들거렸다.
필연적으로 풀썩, 땅에 무너진 윤신이 쪼그려 앉아 무릎에 이마를 기댔다.
날카롭지만 상쾌하다고 느껴졌던 밤바람이 갑자기 비수처럼 아팠다.
“모르는 척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손발을 묶어 버리면 나더러 어떡하라고…….”
윤신은 모퉁이 쪽 인도 옆에서 고개를 묻고 한참 눈물을 삼켰다. 싸늘한 공기가 오갈 데 없이 쓸쓸하게 그의 주변을 맴돌다가, 조금씩 다른 곳으로 옮겨 갔다.
그리고 그가 그러는 동안, 몇 미터 뒤편에는 밤을 닮은 새카만 색 고급 세단 한 대가 머물러 있었다.
차 안의 남자는 핸들에 두 팔을 걸치고, 그 위에 매끈한 턱을 괸 채로 윤신의 서러운 뒷모습을 오래도록 지켜봤다. 모양 좋은 입술을 가르고 새어 나온 목소리가 아득한 해저처럼 낮았다.
“흥미로운 그림이네.”
서류 봉투를 건넨 뒤 안아 주고 가는 여자, 그리고 우는 남자라.
짙고 깊은 눈동자를 외부에 고정하고 있는 차 안의 남자는, 마침 퇴근하던 세헌이었다.
그는 건물 출입구 안쪽으로 들어오는 길에 좁은 길에서 티격태격하는 남녀를 발견했다. 처음엔 그냥 지나치려 했으나, 남자 쪽이 매우 눈에 익어 적당한 자리에 차를 세우고 동태를 지켜봤다. 이윽고 여자는 먼저 떠났고, 남자만이 남겨졌다.
그는 크게 미동하지도 못하고 울고 있는 윤신의 모습을 물끄러미 관찰하고 있다가 이내 허리를 곧추세워 앉았다. 뒤이어 재킷 안에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화면의 시간이 자정을 지나는 참이었다. 그가 탁 비서에게 전화를 걸자, 늦은 시간임에도 상대가 바로 응답했다.
- 네, 변호사님. 미팅 잘 끝나셨습니까?
“탁 비, 메시지 보내 둘게. 차량 조회 좀 해 줘야겠어.”
- 차량요? 지금요? 급한 겁니까?
“시간 내로만 알려 줘. 대충 감은 오는데 모자를 눌러쓰고 있어서 누군지 확실히 해 두는 게 낫겠다 싶네.”
- 수임한 사건 관련이죠? 혹시 모르니 따로 기록해 둘게요. 어떤 케이스…….
“아니, 그럴 거 없어. 이건 사적인 호기심이야.”
이 말에 상대가 잠시 답이 없었다. 그러나 이내 목소리를 이어 갔다.
- 사적 호기심? 웬일로요?
“뭐가 궁금한 건데?”
- 이런 명령 처음 같은데 생각보다 충격적이라서요. 여자예요?
“나한테 관심 갖지 마. 분명히 얘기했지. 너 내 스타일 아니라고.”
- 전 게이 아니라고 말씀드렸잖아요. 방어적으로 나오시면 더 이상한 거 아시죠?
“내일 오전 출근 전까지.”
- 그러죠. 전화드릴게요. 좋은 꿈 꾸세요.
대충 대답한 그가 성의 없이 통화를 끊어 버렸다. 그러고는 여전히 길 구석에 처박혀 있는 윤신의 모습을 주시했다.
한 손에 서류 봉투를 꽉 쥔 채 동그랗게 몸을 말듯이 구겨진 모양새가 애처로웠다. 여느 때의 자신감 넘치고 밝은 모습 같은 건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필연적으로 꽤 해묵은 어느 날의 기억이 이 순간과 오버랩됐다.
세헌은 꽤 오래전, 스무 살 남짓의 윤신이 꼭 저렇게 우는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 은사였던 도 교수의 장례식장에서였다.
그때 윤신은 복도 구석에 처박혀 울고 있었다. 그러다 그날까진 일면식조차 없었던 제 옷자락을 느닷없이 덥석 붙잡았다. 분향을 마치고 돌아가던 세헌이 뿌리치려고 하니 손등에 뼈가 다 드러날 정도로 세게 재킷을 움켜쥐면서 흔들리는 목소리로 겨우 몇 마디를 뱉어 냈다.
〈정말 죄송한데 잠깐만 같이 있어 주세요. 혼자 못 있겠어서요.〉
누군가의 옆에서 양껏 울고는 싶은데, 또 그걸 아는 사람이 보는 건 안 내켜 하는 것 같았다.
왜였는지는 아직까지도 모르겠다.
해 보지 않은 모든 일에 능숙하게 대처할 수 있다고 믿어 왔으나, 그땐 이상하게 그러지 못했다. 제게 내미는 누군가의 손을 거부할 수가 없었다.
고민 끝에 벽에 등을 기댄 그는 몇 분의 짧은 시간 동안 윤신의 옆을 지켰다. 아무런 대화는 없었다. 이윽고 눈물을 털고 일어난 윤신이 감사하다며 정중하게 인사하고 분향소 옆 식당으로 들어가 버렸다. 새하얗게 뜬 얼굴로 겨우 웃으면서 손님들을 맞이하고, 혼자 온 노인들의 말동무가 되어 주었다. 처연함 속에 자리한 강인함을 잠시 지켜보던 그는 돌아섰다.
몇 년이 흐를 때까지 이름조차 몰랐다. 도 교수의 아들이라는 것 정도는 짐작했으니 알아보려고 하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었겠지만, 세헌은 그러지 않았다. 자신답지 않게 낯선 누군가의 옆을 지켰던 일이 두고두고 생각날 것 같아서였다.
흔히 첫정이 가장 무섭다던데. 그 논리가 이런 일에도 적용이 되는 건가 싶었다.
그리고 세헌은 자신이 누굴 신경 쓰는 기분이 매우, 매우, 매우 불쾌하고 싫었다.
“또 혼자 우는군.”
쯧, 혀를 차면서도 윤신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그의 차가운 눈매가 맹금류처럼 사납고 신경질적으로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