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화 (6/51)

05. 

창밖이 어둑어둑했다. 새벽녘이 되어서야 퇴근한 윤신은 아늑한 제집이 아니라, 아파트 건물 1층에 있는 24시간 카페로 무거운 몸을 이끌었다.

그는 정신이 번쩍 들 만큼 쓴 아메리카노 한 잔과 구색을 맞추기 위해 주문한 도넛 몇 개를 앞에 두고 세헌이 직접 제게 건네주었던 프로 보노 사건에 대해서 공부했다. 이틀 내내 이 사건을 해석하는 데만 매달려 있었다. 그런데도 서류를 읽을수록 윤신의 눈가에는 점점 더 어둠이 서렸다.

사건은 중견 기업 사장과 대리 사이의 갈등에서 촉발됐다. 기혼 여성 대리가 남자 사장이 본인을 성추행을 했다는 명목으로 고소를 했는데, 증거가 워낙 불충분해 불기소 처리로 끝났다. 제출한 모든 자료들이 미흡했다. 피해자의 증언을 제외하면 말이다. 상황이 어설프게 종료되자, 이번엔 사장 쪽에서 무고죄로 해당 대리를 역고소했다.

‘의도가 있을 텐데. 왜 이 사건을 나한테 준 거지.’

분명 강세헌은 제게 네 식대로 일을 하라고, 할 수 있는 일만 주겠다고 말했다. 단순히 숙제를 내 주었던 게 아니고 앞으로 자신이 취해야 할 전체적인 업무 기조에 대해서 충고했던 거였으니 그 말은 그의 본심일 터다.

한데 이 사건의 수사 기록들을 계속 들여다보고 있자니, 제 논리대로 문제를 풀면 절대로 답을 찾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자료들을 모두 훑어보고, 또 돌려 봤지만 마찬가지였다. 여자에게 고소당한 남자에겐 처벌을 받을 만한 죄가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무고죄는 증명하기가 꽤 까다로운 영역인데 사장 쪽에서 굳이 역고소를 걸었다. 여자의 고소 행위가 ‘고의적’이었으며 ‘허위 사실’임을 입증할 만한 확실한 증거가 있는 것이다. 자칫 잘못했다가 의뢰인은 수세에 몰려 더 큰 상처를 입게 될지도 모른다.

“CCTV, 문자, 동료 증언, 메신저 대화…… 어떻게 하나도 안 걸리지.”

물론 성범죄의 경우 다른 범죄와 달리 실질적인 증거가 없더라도 피해자 진술이 일관적이고 구체적일 경우 처벌받는 경우가 존재했다. 하지만 이 사건은 조금 달랐다. 피해자 외 모든 사람의 진술 또한 일관적이었다. 특히 가해자로 지목된 사람과 증인들의 증언이 같았다.

이쯤 되니 윤신도 여자 쪽에서 죄 없는 사장을 고소한 건 아닌가 하는 의심마저 들었다. 그러나 자신은 이 사람의 말을 믿어 주어야 하는 사람이라서, 애써 그런 생각을 털었다. 하나 거기까지였다. 증거가 불충분한데 어떻게 의뢰인의 주장이 사실임을 증명해야 하나. 여전히 돌파구가 안 보였다.

이럴 때 강세헌이라면 어떻게 할까.

당신이라면 어떤 방법으로 의뢰인을 구해 줄 거지?

그런 생각에 미치자 윤신의 머릿속에 한 가지 아주 유력한 가설이 떠올랐다.

“이거 2차 테스트인가?”

도국에 들어와 어떤 식으로 일하는지를 지켜보겠다는 심산이라면, 얼추 퍼즐은 맞았다. 종이에 얼굴을 거의 박듯이 기울이고 밑줄을 긋던 윤신이 탁, 소리가 나게 펜을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심란한 표정으로 정면을 살폈다.

윤신이 앉은 자리는 카페의 가장 구석 자리이자, 외부로 통유리가 커다랗게 난 바형 테이블이었다. 별생각 없이 창문 밖을 내다보던 그의 둔부가 일순 스툴 위에서 들썩였다.

눈앞에서 익숙한 외양의 누군가가 지나가는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어……. 강 변호사님?”

세헌이었다.

창밖의 그는 평상복 차림이었다. 탄탄한 상체를 감싼 검은 맨투맨과 길게 쭉 뻗은 두 다리의 직선이 잘 드러나는 청바지가 생각보다 매우 잘 어울렸다. 거기에 받쳐 신은 하얀 스니커즈까지. 모든 것이 그의 취향을 드러내 주듯 깔끔했다. 슈트 입은 뱀이 잠시 탈피를 한 모양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죽어도 우연히 만나지지 않더니 타이밍이 어떻게 맞아떨어진 건지 이번엔 그가 제때 등장해서 신기할 노릇이었다.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 윤신이 창문을 두드렸다.

인기척을 느낀 건지 뚜벅뚜벅 걷던 그가 멈춰 서서 힐끗 제 쪽을 보았다. 물끄러미 응시하기에 나오라고 하거나, 혹은 본인이 들어오거나, 그게 아니더라도 창가 쪽으로 다가와 줄 줄 알았는데 기대가 너무 컸던 모양이다.

“벼, 변호사님?”

세헌은 무덤덤한 시선만 보내더니 이내 처음부터 윤신의 털끝 하나 보지 못했다는 듯 도로 제 갈 길을 가기 시작했다. 윤신이 다시 똑똑 창을 두드려 봤지만 이번엔 멈춰 서서 돌아봐 주는 기미조차 없었다.

“저, 재수탱이 저거. 인간이 진짜 귀여운 구석이 없다니까.”

빠르게 자료를 챙긴 윤신은 트레이에 컵과 접시 따위들을 놓은 뒤, 픽업대에 가져다 두었다. 그러고는 세헌을 놓칠세라 최선을 다해 뛰었다. 그가 향한 방향으로 얼마쯤 달려가자 다행히 어두운 길목을 홀로 걸어가고 있는 그의 뒷모습이 보였다.

숨을 헐떡거리면서 걸음을 늦춘 윤신이 세헌의 옆에서 나란히 걸었다.

“허억, 헉, 수석님. 날씨 좋, 좋네요. 하…….”

“정리 제대로 하고 왔어? 생각보다 튀어나온 시간이 빠른데.”

“가능한 한 재빠르게 움직였습니다.”

“품위 유지 잘해. 외부에서 펌 이미지 망치면 연봉 깎는다.”

그 부분은 걱정 안 하셔도 된다는 듯 윤신이 가볍게 웃자, 그제야 앞만 보던 세헌이 고개를 돌렸다. 순진하게 미소 짓는 낯을 힐끗 보더니 뭔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미간을 구겼다. 그러는 사이 어느 정도 호흡이 정리된 윤신이 그의 평소 같지 않은 옷차림을 두루 살피며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그런데 이 새벽에 차도 없이 걸어서 어디 가세요?”

“산책.”

“걸으면서 생각하는 타입이신가 봐요. 저돈데. 하지만 단지 내 공원은 이쪽이 아니라 저쪽이에요.”

우측의 둘레 길을 가리키자, 세헌은 눈썹을 슬쩍 들어 올렸다.

“그건 훨씬 예전부터 이 동네 살던 내가 더 잘 알지 않을까?”

그는 대답 끝에 여봐란듯이 더 왼쪽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그쪽엔 초등학교를 끼고 있는 도로변이 있는데, 아이들이 늦은 시간에 길가에 있을 리가 없는 데다 상점도 전부 문을 닫아서 묘하게 고즈넉한 기운이 흘렀다. 밤에 특히 으슥해져 상대적으로 사람이 없는 이 길을 더 좋아하는 모양이다.

노곤한 분위기 때문이었을까. 나란히 걷는 두 사람은 잠시간 말이 없었다. 무거운 침묵이 흐르는 게 불편해진 윤신이 입을 다시 열려는데, 의외로 세헌이 말을 이어 갔다.

“왜 따라 나와. 용건만 얘기하고 가. 생각하는 데 방해돼.”

“조금만 같이 걸을게요. 일단. 저 고해성사할 게 한 가지 있어요.”

“나 굉장히 실력 있는 변호사야. 그거 고려하고 얘기해라.”

“어제 수석님 책장에 있는 소설책을 꺼내 봤습니다. 좀 걸리는 게 있어서요.”

“네가 미쳤구나. 사형.”

앞뒤 상황을 듣지도 않고 판결부터 내리는 그 때문에 놀란 윤신이 세헌의 옷소매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다 닿기 전에 반사적으로 손을 거두고는 황망한 마음을 음성으로 대신했다.

“뭐였는지 물어보지도 않으십니까?”

“내 방에서 뭘 봤든 너랑 아무 상관도 없어. 다신 그딴 짓 하지 마.”

“그렇지만 그 책요.”

“없다고. 무슨 뜻인지 몰라?”

“이 얘기 이만 닥치라고요?”

“뇌는 달고 있네.”

하지만 윤신의 심증은 이미 굳어 가고 있는 상태였다. 최소한 세헌은 자신 때문에 〈위대한 유산〉을 새로이 펼쳐 봤다.

하필이면 자신이 공판장에서 인용했던 부분에 책갈피가 꽂혀 있었던 바람에,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필연적인 결과였다. 윤신은 거기까지 얘기를 할까, 말까 짧게 고민했다. 그러나 이미 그 방에서 소설책을 봤다던 이야기 하나만으로 세헌은 대충 맥락을 짐작하고 있는 듯해 말을 아꼈다.

머뭇거리던 윤신은 적당한 화제를 찾아내 말을 돌렸다.

“여자 친구는 있으세요?”

그는 몹시 어이없다는 듯 짜증스럽게 대꾸했다.

“너랑 상관있어?”

“없죠. 그래도 최소한 그 정도 사생활은 공유해야 일할 때 서로 배려를…… 아, 전 없어요.”

“잘됐네. 난 남이 쓸데없이 행복한 거 싫어하거든.”

그럴 줄 알았다는 양 윤신이 속으로 픽 웃었다. 내면의 생각을 읽은 것도 아닐 텐데 세헌이 덧붙이는 말은 매우 의미심장했다.

“네가 행복한 건 그중에서 제일, 거슬려.”

“왜요? 저 잘 모르시잖아요.”

“그러니까. 나도 이유를 알고 싶어. 왜 내가 너한테만 예민하게 반응하는지.”

“어쨌든 제가 도와 드릴 수 있는 부분이 있어서 다행이네요.”

일순 느닷없이 걸음을 멈춘 세헌이 비스듬한 위치에 있는 윤신의 눈을 빤히 내려다봤다. 여태까지 경험들이 그래 왔듯 화가 나거나 한 기색은 아니었다. 비난하는 기미도 없었다. 다만, 어느 정도의 정체 모를 호기심이 느껴져서 조금 당황했다.

“왜 그렇게 보세요?”

“아쉬울 거 없는 도련님이라서 그런 거야, 아니면 원래 그렇게 간이 비대한 거야? 너 나 안 무서워? 왜 이렇게 치대. 너 같은 새끼는 처음이라 진짜 궁금해서 그래.”

“둘 다 답은 아닌 것 같은데 굳이 꼽자면 전자일 거예요. 전자의 영향이 후자의 절 만들었겠죠.”

어릴 때부터 윤신은 모자란 게 없었다. 어머니가 자신을 낳은 지 얼마 안 돼 돌아가셔서 그 부분에 부재를 가끔 느끼긴 했지만, 그건 제 삶의 극히 일부일 뿐이었다. 도리어 누나가 살뜰하게 키워 준 덕분에 외로움은 겪지 않았다. 아울러 명망 있는 아버지를 늘 존경할 수 있었고, 어머니가 남기고 간 유산이 좀 있었던지라 경제적으로도 궁핍해 본 일이 없었다.

게다가 사려 깊은 성격과 열등감 없는 기질로 인해 주변에 늘 사람이 많았다. 괜찮은 유전자를 받은 모양인지 명석했고, 외모도 준수했다. 세헌과는 비슷하고도 다른 의미로, 패배감 같은 걸 잘 몰랐다. 그래서 남 눈치 같은 건 보지 않으며 살아왔다. 윤신이 약자를 돌보고, 정의를 좇을 수 있는 이유도 그 연장선상이었다.

그리고 세헌이 그런 자신을 겉멋 든 투사로 인식하고 별로 탐탁잖아한다는 건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넌 볼 때마다 주제 파악을 이상하게 잘해. 기분 나쁘게.”

“그래도 변호사님 눈치는 봐요. 어떤 분인지 궁금해요. 친해지고 싶고요.”

“친해져? 타인과 친해지기 위해 넌 이런 걸 하나? 산책 방해? 잡담 유도?”

생각하지 못했던 질문이어서, 윤신은 더욱 신중하게 궁리해 답했다.

“그렇다기보단 어느 학교를 나왔는지, 어디 사는지, 부모님이 뭐 하시는지 정도를 묻는 걸로 대화를 시작하겠죠.”

말문을 닫은 윤신이 세헌의 대답을 기다리며 그를 힐끗 살폈다. 한데 순순히 제 말에 응답해 주던 그가 차분히 입을 다문 채로 침묵했다.

혹시 뭔가 실수한 게 있나 조금 전 했던 이야기들을 하나씩 돌이켜 보던 윤신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어릴 때부터 세헌에겐 부모님이 안 계셨다는 사실이 뒤늦게 떠올라 난감해졌다.

“아…… 저기. 제 말은요. 그러니까.”

퍽 당혹스러워하는 제 모습을 본 세헌은 행간을 충실히 읽은 것 같았다. 자신이 그의 유년 시절에 대해 아주 대충은 알고 있다는 간접 정보까지도 말이다.

“이래서 우리가 친해질 수가 없는 거야. 일이나 똑바로 해.”

사실 조금 전 여자 친구의 유무로 먼저 사적인 대화를 시도해 봤는데 실패했다. 그래서 찾은 차선책이었다. 그가 자신과 같은 학교를 나왔고, 지금은 같은 건물에 살고 있고, 또 아버지와 인연이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제 대답을 들은 자연스럽게 세헌이 은사의 이름을 꺼내고, 그것이 좀 더 심도 있는 대화로 이어지리라고 기대했다.

한데 관점에 따라 실수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윤신이 바로 수긍했다.

“실례했습니다. 그냥, 아버지가 우리 사이의 몇 안 되는 공통 화두니까. 수석님이랑 좀 더 얘길 나눠 보고 싶어서 그런 거예요.”

신경질적으로 보폭을 넓혀 가던 그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당연히 윤신도 멈칫했다.

두 사람이 선 자리는 꽤 으슥한 골목 구석쯤이었다. 가로등 하나 없었다.

세헌은 물리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상대방을 코너로 모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았다. 그는 손끝 하나 대지 않고 그저 걸음을 옮기는 것만으로도 윤신을 딱딱한 담벼락 쪽으로 몰아붙였다. 조바심을 느껴 스스로 뒷걸음질 친 마른 몸이 ‘탁.’ 하는 소리를 내며 벽에 부딪쳤다. 그 순간, 그가 그 앞에 그림자처럼 우뚝 섰다.

이윽고 그는 언젠가 그랬던 것처럼 윤신의 턱을 단단히 쥐고 제 고개를 슬며시 기울였다. 어두운 가운데 상대방을 어떻게든 관찰하겠다는 듯 집요한 시선으로 매끈한 얼굴 위를 두루 훑었다. 곤란해진 윤신의 목울대가 들썩거렸다.

이윽고 세헌의 붉은 입술이 슬그머니 벌어지는 모양새가 꽤, 야릇했다.

“그러니까, 네가 지금 우리의 공통분모를 하나 찾아서 나한테 집적거리고 있단 소리네?”

영 틀린 소린 아니지만 썩 맞지도 않았다.

“다른 완곡한 표현은 없을까요? 남들이 들으면 좀 이상하게 들을 것 같아서요.”

대답하던 윤신은 자신도 모르게 요사이 계속 속으로 되새기고 있던 의문점을 뇌리에 떠올렸다. 그가 특별히 어떤 사인을 준 건 아니었는데, 왜인지 자꾸 그런 식으로 사고 흐름이 이어졌던 터라 한 번쯤 짚고 넘어가고 싶긴 했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그의 앞에서 이런 취지의 물음을 던지게 될 줄은 까맣게 몰랐던 윤신이 미약하게 발그레해진 뺨을 손등으로 훔치며 입을 열었다.

“수석님 혹시 저한테 관심 있으세요?”

그러자 기막혀진 세헌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가는 사람 붙잡고 추근거린 건 너야.”

고개를 갸웃한 윤신은 그의 말에 허점이 없다는 걸 겸허히 받아들였다. 모르는 척하고 가 버리는 세헌을 붙잡는 것으로도 모자라 사적인 시간을 방해해 가며 따르고 있는 건 자신이었다. 그가 썩 마음에 드는 건 아닌데, 이상하게 자꾸 쫓게 된다.

“하지만 이 각도를 만드신 건 수석님이신데요. 제가 이런 자세는 영화에서만 봐서요.”

“이 각도로 선 게 내가 너한테 관심 있다는 영장 실질 심사라도 되나 보지? 난 빚지는 건 딱 질색이야. 너 건드렸다가 수한그룹한테 무슨 거대 청구서를 받으려고. 관심 없어.”

“자꾸 얼굴 붙잡고 이목구비 뜯어보는 건 왜 그러시는 건데요.”

“그냥 널 보면 여기저기 관찰하고 싶은 기분이 들어. 그게 다야.”

바로 그게 이상하다는 얘기다. 서로에게 그다지 호의적이지는 않은 두 사람 사이에 때때로 다소 낯 뜨거운 온도의 분위기가 흐르는 건 정말로 기묘한 일이었다.

그런데 정작 세헌 본인도 정확한 이유는 찾지 못한 것 같아서, 윤신도 캐묻기를 관뒀다. 새벽 공기가 조금 데워지는 듯한 느낌이라, 대충 매조지는 게 최선이었다.

“알겠어요, 오해 안 해요. 혹시나 싶어 여쭤본 겁니다.”

무표정하게 안면을 굳힌 그가 윤신의 말간 얼굴을 빤히 주시했다. 델 듯한 시선이 계속 제 위에 닿아 있자, 애써 마음을 가라앉히려던 윤신도 다시 긴장됐다.

바로 이런 순간들 때문이다. 주변 인물들에게 별 관심 없어 보이는 그가 제게는 자꾸 이러기 때문에 계속 혼돈이 오는 것이다. 펌에서 두 달이 되도록 그를 조용히 지켜봤지만 세헌은 누구에게도 이러지 않는다. 그래서 더 긴장되고, 또 의식됐다. 모두 그의 탓이었다.

유독 제게 예민하게 반응하는 건 맞는다고 인정하면서도, 딱히 관심이 있는 건 아니라고 하니 그렇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아닌 편이 제게도 나았다.

“저기, 강 변호사님.”

그는 답하지 않았다. 대신 윤신의 앞에서 그림자를 걷어 내듯 느긋하게 뒷걸음질 치더니 다시 잘 뻗은 두 다리를 움직였다. 겨우 긴장이 풀린 윤신도 다시 그를 쫓았다. 그들은 조금 전보다 아주 미세하게 더 벌어진 사이를 두고 어두운 골목을 나란히 걸었다.

“저기, 오늘 주신 수임 건 말인데요. 이거 2차 테스트죠?”

“비슷한 거야. 너 성범죄 사건 수임해 본 적 없지.”

“네, 처음입니다.”

“널 정식으로 내 팀에 받아 주는 건 받아 주는 거고, 써먹기 전에 어느 부분을 최적화해서 활용할 수 있을지, 어디에 주둔을 시켜야 할지 나도 알아는 봐야지. 네가 하고 싶은 방식으로 해결해. 뭘 가장 꼼꼼하게 챙기는지, 의뢰인 면담은 어떤 식으로 하는지, 작전은 어떻게 세우는지. 가장 기본을 보려는 거니까.”

“그래서 말인데. 상담 좀 해도 될까요? 무엇보다 저도 수석님 일하시는 방식을 알고 싶기도 하고요.”

그는 이런 말을 하는 윤신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불쾌해하는 시선을 흘렸다.

“내가 면담 10분당 자문료를 얼마 받는 줄은 아나? 결제부터 하고 물어봐.”

‘성질도 더러운 게 치사하기까지.’

가늘게 뜬 눈으로 세헌을 조용히 흘기던 윤신이 눈길을 끌어 내렸다. 미끈하게 떨어지는 콧날과 그 아래 입술을 가만히 보고 있자니, 그가 정말 이 대화가 싫었다면 이미 자신을 돌려보냈으리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그는 제게 그럴 수 있는 위치에 존재하는 사람이니까.

용기를 얻은 윤신은 넌지시 질문했다.

“사건 자료 보니까요. 증거는 확실히 불충분해요. 게다가 주변인들 증언들도 딱딱 맞아요. 성범죄로 고소당할 시에는 증거와 증인이 그 어떤 것보다 중요하다고 배웠어요. 피의자는 그 법칙을 충실히 따라 방어한 것처럼 보입니다.”

“맞아. 다수가 일관되고 정확하게 같은 말을 하고, 네 의뢰인 한 사람만 다른 말을 했지.”

“네. 모든 게 우리 의뢰인한테 철저하게 불리해요. 기소는커녕 돈 벌자고 고소장 써 준 변호사가 양아치처럼 보일 만큼요. 솔직히 저도 이게 되는 건인가 싶기도 하고요. 이제라도 합의를 보는 편이 그나마 위험 부담이 적지 않나 싶기도 해요.”

불기소 처분이 나왔다는 건 검사가 공소를 제기할 이유를 못 찾았다는 뜻이다. 추행당했다는 사실을 수사 기관이 전혀 증명하지 못한 거였다. 하지만 일이 이 지경이 됐는데도 제 의뢰인은 아직도 억울하다는 주장을 반복하고 있었다.

“신뢰할 만한 증거는, 하나라도 있긴 있어?”

“음, 일단 대리 쪽에서 성추행이 맞는다고 아주 일관되게 주장하고 있어요. 그리고 함께 출장에 다녀왔을 때마다 정신과에 들러 상담받은 기록이 존재해요. 본인이 의료 기록도 제공했고요. 하지만 이건 그냥 상담한 내용이라서 역으로 고의성을 입증하는 데 쓰일 수가 있습니다. 사장에 대한 크고 작은 원한을 갚기 위해 일부러 허위 상담을 했다고요.”

세헌은 동의하듯 나직하게 숨을 뱉었다.

“이러니까 수사 기관은 물론이고 그 여자를 대리했던 변호사도 제 의뢰인을 못 믿었겠지.”

“피해자 혼자만 다른 말을 하는데, 그걸 입증할 뚜렷한 증거가 없으니까요. 아무것도요.”

“넌 공문서는 다 믿어? 네 의뢰인의 주장보다, 행정 조직에서 내린 결론을 더 신뢰하는군.”

“하지만 이미 수사를 했고…… 이게 틀렸다고 생각하면 변호사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어요. 아시잖아요.”

“아니. 가끔 변호사는 검경보다 더 많은 일을 할 수도 있어.”

걸음을 멈춘 윤신이 세헌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놀랍게도 그가 함께 멈춰 서 주었다. 어느 건물의 담벼락에 몸을 기댄 세헌은 비딱하게 선 채로 윤신의 뒷말을 기다렸다. 서로의 눈가에는 프로다운 진지함이 깃들어 있었다. 윤신은 이제야 대충 이 건이 왜 제 손에 들어온 건지 감이 왔다. 단순히 무고죄만 방어하길 바라는 게 아니다.

“혹시 제가 이 판을 뒤집길 바라시는 거예요? 누가 봐도 불리한데요.”

“그러니 이기는 모습을 보여 주면 앞으로 너의 펌 생활이 0.1퍼센트 정도는 순탄해지겠다.”

“저도 제 의뢰인 믿어 드리고 싶은 마음 굴뚝같지만 법정이 증거로만 말하는 곳인 걸 어떡해요. 누가 봐도 애먼 사람 잡고 늘어지고 있어요. 저야말로 뭐라도 찾고 싶다고요.”

사회엔 암묵적인 규칙이나 도의적인 예외라는 게 존재하지만 법에 관한 한 모든 건 증거다. 그녀는 주장만 하고 있을 뿐 아무것도 명확히 증명하지 못했다. 반면 무고죄라는 역공을 건 사장 쪽은 최소한 그 대리 쪽이 앙심을 품었다거나 하는 등의 증거를 확보하고 있을 터다.

길을 잃고 생각에 잠긴 윤신이 입술을 감쳐물었다.

그때였다.

생각에 잠겨 있던 그가 갑자기 한 걸음 앞으로 다가왔다. 그러다 순간 다리를 접질린 것처럼 슬쩍 비틀거렸다. 그 바람에 균형을 잡으려는 듯 기다란 팔을 아래로 뻗었다. 겨우 몸을 곧추세우던 그는 위치를 잘못 설정한 건지 돌연 윤신의 바지 앞섶으로 곧은 손을 내밀어 옷 위로 성기를 확, 잡아챘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짓이기듯 힘껏 쥐었다.

“헉, 괜찮으, 뭐 하시는, 윽! 미쳤어요!”

깜짝 놀란 윤신이 본능적으로 움찔했다. ‘탁.’ 소리를 내며 손에 쥐고 있던 서류 가방이 떨어졌다. 두 손이 자유로워진 윤신은 그를 밀어내기 위해 탄탄한 어깨를 붙들었다. 한데 손바닥에 힘을 준 순간, 성기를 쥐고 있던 세헌이 더 분명하게 형태를 잡아 윤곽을 그리듯 만지면서 바지 위를 더듬어 가는 바람에 힘의 균형이 무너졌다.

얼굴이 벌게진 윤신이 숨을 헐떡였다.

“잠, 잠시, 아, 읏! 수석님!”

세헌은 상대측이 얼마나 당황하든 말든, 개의치 않았다. 혼란이 가득한 윤신의 눈동자가 세헌을 계속 직시했으나, 빤히 마주친 그의 동공에는 죄책감이 없었다.

어쩔 줄 몰라 하던 윤신이 휘청거렸다. 그러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그의 어깻죽지를 그러쥐듯 붙들었다. 맨투맨 옷자락이 구겨지면서 부드러운 천이 손바닥을 간지럽혔다.

“이거 놓, 아! 아흑!”

타악! 젖 먹던 힘까지 이끌어 내 그의 어깨를 때리자, 그제야 세헌이 동요 없이 손을 떼어 냈다. 윤신은 땅에 풀썩 무너졌다. 하아, 하아. 힘겹게 숨을 몰아쉬는 내내 입술 사이에서 뜨거운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이런 일을 당한 게 처음이었던 터라, 어찌해야 할 바를 몰랐다. 그저 당황스럽기만 해서 그대로 한참을 주저앉아 있었다. 이윽고 정신이 겨우 들어 제 앞에 서 있는 늘씬한 두 다리를 가만히 응시했다. 천천히 시선을 끌어 올리자, 세헌의 뻔뻔한 얼굴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서류 가방의 손잡이를 움켜쥔 윤신은 겨우 몸을 일으켜 그와 눈높이를 얼추 맞췄다.

“지금 뭐 하신 거예요? 제정신 아니신 거죠?”

“4년 차.”

“전 사과부터 듣고 싶은데요!”

“잘 들어. 너 지금 나한테 추행당했어. 여기서 문제.”

“문…… 뭐라고요?”

어이없어하는 윤신과 달리 세헌은 매우 초연했다.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이어 말했다.

“내가 지금 네 성기를 동의 없이 잡았어. 난 발이 여기에 걸려서 넘어질 뻔하다 균형을 잡기 위해 손을 앞으로 뻗었고 너를 붙잡았을 뿐이라고, 실수였다고 일관되게 주장을 할 거야. 근거? 봐, 여긴 공간이 좁고. 이 밑에 돌부리가 있어. 판사는 내 증언을 신뢰할걸.”

돌부리?

그의 곧은 손가락이 가리킨 자리에 시선을 던진 윤신은 있었는지도 몰랐던 큼지막한 돌멩이가 세헌의 발치에 있는 걸 보고 아연해졌다. 조금 전 그가 뜬금없이 비틀거리나 싶었던 장면이 머릿속에서 재생됐다.

“실수로 그러신 거예요?”

“아니, 난 실수 안 해.”

“그런데……!”

“하지만 그렇게 주장을 할 거라고. 그럼 넌 뭘 할 수 있지?”

머리를 식힌 윤신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곳은 아주 으슥한 길이었다. 이 동네에 이런 조용한 길목이 있었나, 싶을 만큼 사방이 잠잠했다. 가로등도 없었다. 주차된 차량도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CCTV나 블랙박스 따위의 증거를 수거하기가 요원해 보였다. 본인 말마따나 이 동네에 훨씬 더 먼저 거주하던 세헌은 이곳이 그런 위치라는 것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증거가 없네요. 그럼 추행의 간접 사실을 증명해야겠죠.”

“어떻게.”

“조금 전 저 저쪽 골목에서 저를 벽으로 몰아붙이셨죠. 일전에 펌 화장실에서도 그러셨고요. 가끔 지나치게 빤히 보시기도 하고, 또, 수석님 방에서도 제 입술에…….”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가 불쑥 끼어들었다.

“입술에 뭐. 키스라도 했어?”

“네? 아뇨.”

“네 쇄골 아래 중 어딜 더듬기라도 했나? 셔츠 단추라도 풀었어?”

“그것도, 아뇨.”

“평소 추근거렸나? 은근슬쩍 꼬시는 듯한 수신호라도 보냈어? 혹은 성적 농담을 던졌든가.”

“아뇨. 전부 다…… 그러신 적 없는데요. 도리어 눈길도 안 주셨죠.”

정답이라는 듯 세헌이 ‘딱.’ 하고 핑거 스냅을 쳤다.

“펌 직원들도 같은 증언을 할 거야. 눈길도 안 주셨다. 너만 다른 말을 할 거고. 게다가 넌 할 수 있는 게 없어. 사각지대에서 추행이 이루어졌으니까.”

신중하게 뒷말을 골라 봤지만. 제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더 제시할 근거가 없었다. 그걸 아는지 세헌이 넌지시 물어 왔다.

“억울해?”

윤신은 득달같이 대꾸했다.

“네.”

“지금 네 의뢰인도 그럴 거야.”

그녀도 법이 자신을 구제해 줄 거라고 믿고 탄원했으나, 자꾸만 의도와 달리 여의치 않은 상황이 만들어졌을지도 몰랐다. 정말로 자신이 당한 피해를 입증해 줄 만한 제대로 된 증거도, 증인도 나오지 않는 상황이라는 것도 존재했으니까. 지금처럼 말이다.

“잘 들어, 4년 차. 성범죄 케이스는 간단해 보이지만 사실은 아주 까다로운 영역이야. 네가 맡아 온 노동 사건들처럼 눈에 보이는 피해로만 입증하려고 하면 안 돼. 넌 그 순간에 흘렀던 미묘한 공기를 몰라. 그건 피해자만 알지. 이건 증명할 수도 없어. 내가 널 지나치게 빤히 봤다고? ‘지나치게’가 어느 정돈데. 그리고 증거 있어? 판사는 증거를 좋아해.”

그의 시선을 의식하고 있었다는 걸 괜히 말했다 싶어져 수치심이 일었다. 그 덕분에 윤신의 얼굴이 하얗게 식었다.

“지금의 넌 입만 살았어. 여태까진 정말 확실하게 억울한 사람들만 대리해 왔거든. 앞으론 달라. 네 기준에 미심쩍어도, ‘이거 진짜 되나? 이러다 나까지 좆 되겠네.’ 싶을 때도 펌 입장 따라 수임해야 할 때가 있어. 같이 좆 될 수도 있기 때문에 반드시 이겨야 하는 거야.”

부당하게 해고 통보를 받거나, 수당을 미지급받고 노동력만 착취를 당하거나, 산업 재해로 부상을 입거나 하는 등의 사건들은 모두 눈에 보이는 선명한 증거가 남는다. 여태 대리해 온 그런 사건들과는 본질적으로 다르게 접근해야 한다는 충고 같았다.

그의 차분하지만 단단한 기에 눌린 윤신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세헌이 나지막하게 이어 말했다.

“의뢰인이 애먼 사람 잡았나 의심할 시간 있으면 이 사장이란 새끼가 어떻게 증인들 입을 똑같이 맞췄을까, 도대체 수사 팀은 증거를 왜 못 찾았을까 그 역학 조사를 해 보길 권해. 자, 그럼 원점이야. 넌 그 사람이 성폭력을 가했다는 걸 어떻게 증명할래.”

“다른 피해자를 찾아볼까요? 성범죄는 재범률이 가장 높은 범죄군이고. 직원 명부를 뽑아서 혹시 고발 못 한 직원이 있는지. 눈먼 큰돈이 들어간 흔적은 없는지부터 뒤진다면요?”

“그걸 나는 시간 낭비라고 불러. 기껏 찾아내도 그쪽에서 용기를 내지 못하면 끝이야. IT 업계는 좁아. 넌 밥줄 끊어질 위험 감수하고 매 순간 아름답게 살지 모르지만 대다수 사람들은 못 그래. 그 사람들 생계 다 책임질 자신 있어? 그럼 가능성은 25퍼센트쯤 높아지고.”

“이기는가 지는가의 싸움이니 실제론 50퍼센트 확률이죠.”

“변호사가 멍청하니 아무래도 15퍼센트로 하향 조정하는 편이 낫겠어.”

윤신은 입술을 꽉 감쳐물곤 잠시 숨을 골랐다.

사각지대.

세헌이 조금 전 준 힌트를 곰곰이 곱씹다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의뢰인이 총 세 차례 추행당했다고 했어요. 그게 사실이라면 세 번이나 행위가 이어졌는데 요즘 같은 시대에 증거 하나 없는 건 이상해요. 가해자는 그 장소가 사각지대라는 걸 미리 알았을 거예요. 지금 수석님처럼요.”

그는 어이없다는 양 픽 웃었다. 그러나 굳이 부정하진 않았다.

“그래서. 넌 뭘 할 수 있지?”

“피의자는 기업의 대표예요. 혼자 움직이지 않아요. 그리고 외부에서 많은 곳을 다니죠. 어디가 사각지대인지를 알려 준 사람이 있었을지도 몰라요. 그 연관 관계를 조사해 볼까요?”

“이미 서류 준 지 이틀이나 지났는데 그걸 아직도 안 했단 말이야?”

대꾸와 동시에 그가 왼손을 척 앞으로 뻗었다. 또 제게 닿는 줄 알고 움찔한 윤신이 한 팔을 내밀어 방어적으로 나서니 매우 불쾌해하면서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했다. 멋쩍어진 윤신이 시선을 피했다.

“아, 또 건드리시는 줄 알고.”

“네 초기 접근은 나쁘지 않아. 수사 기록이 너무 깨끗해. 알다시피 똑같은 사건을 보고도 주변 증언이 모두 일치하는 경우는 거의 없잖아. 하지만 살인도 아니고, 강도도 아니고, 경찰 입장에선 작은 사건에 속하니 거기까지 세세하게 파지 않았을 거야. 넌 수사에 허점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도 고려해야 돼.”

도리어 귀찮아했을 공산이 컸다. 윤신도 제 사건은 아니었지만, 건너 건너 그런 경우들을 봐 왔으니까. 그리고 세헌의 앞에선 말하지 않을 셈이지만, 그와 같은 변호사가 중간에 껴서 검찰 측과 거래를 했을 가능성도 존재했다.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네. 자세히 파 보면 뭐가 나올 것 같아요. 우선 비서들부터 만나 볼게요. 매일 모시는 수행원들 쪽으로요.”

“전문 경호 업체를 고용했어. 직속 수행 비서들이랑은 유대 관계가 있을 테니까 그 사람들 말고 그 업체 소속 수행원들부터 파.”

“역시 자금 흐름부터 보는 게 낫겠죠?”

“다 가르쳤다. 하산해야겠네. 이참에 사표 써 주면 참 고맙겠는데.”

친절하게 조언을 해 주나 싶더니, 결국은 도돌이표였다.

“아직 다 오르지도 못했습니다.”

“마저 오르고 싶으면 일단 뭐라도 찾아내. 그래서 협상이든 협박이든 해. 네게 압박을 받아서 피의자가 네 의뢰인에게 건 고소를 취하하게 만들어. 기왕이면 돈도 좀 쥐여 주게 하고, 사과도 받게 하고. 마지막에 멋있게 찾아가서 아름답게 위로해 줘. 좋아하잖아, 영웅놀이.”

협박이나 압박 같은 방법론은 써 본 적 없는 방식이긴 했지만, 결과만 두고 봤을 땐 세헌의 조언이 최선이긴 할 터다. 의뢰인이 피해 입었다는 증거를 찾아낸다손 치더라도, 초범인 데다 워낙 성범죄 형량이 죄질에 비해 가벼운 편이어서 엄청난 타격을 주진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든 실질적으로 의뢰인에게 돌아오는 이익이 있는 편이 좋았다.

윤신이 제 서류 가방을 꽉 붙든 채로 사죄인지, 감사인지 스스로도 명확히는 알 수 없는 복잡한 감정으로 고개를 꾸벅 숙였다. 세헌은 인사하는 윤신의 목덜미를 가만히 응시하나 싶더니, 이내 고개를 확 돌려 버렸다. 그러고는 별 설명 없이 다시 앞서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윤신의 표정이 묘했다. 세헌이 생각보다 사건에 대해서 환히 꿰고 있는 게 의아했던 탓이다.

‘프로 보노 관심 없는 거 아니었나.’

맹목적으로 승리에 매달리는 세헌 쪽이 눈에 보이는 증거들에만 매달려 갈팡질팡하던 자신보다는 훨씬 더 의뢰인에게 도움이 되는 변호사였다. 솔직히 그에게 도덕적 우월감을 내심 느끼고 있던 윤신은 그게 좀 충격이었다. 그 바람에 머릿속에서 한 곡의 음악들이 매우 여러 가지로 한꺼번에 변주되는 불편한 감각을 느꼈다.

“같이 가요, 수석님!”

고민하던 윤신은 점점 작아지는 그의 늘씬한 뒷모습을 관찰하다가, 뒤늦게 그를 따랐다.

* * *

일찍부터 나와 서류를 들여다보고 있던 윤신은 펜대를 길쭉한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둥그렇게 돌렸다. 밤새 세헌이 했던 말이 목구멍 안쪽을 괴롭히는 바람에 잠을 제대로 못 잤다.

〈좋아하잖아, 영웅놀이.〉

“어떻게 한마디를 해도 다각도로 재수 없을 수가 있지. 재주다, 그것도.”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정곡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는 착잡한 기분을 느끼면서 자료들을 다시 검토하기 시작했다. 지난밤 제 직속 상사가 해 준 조언의 줄기를 따르려고 하니 신기하게도 이곳저곳에 정답으로 가는 해법이 보였다.

“의뢰인이 가해자와 함께 방문했던 식당이랑 술집 리스트 확보……. 이 대표가 고용한 경호 업체와 식당 등 업소 간의 교차 지점 확인……. 경호 업체에서 차출된 경호원들 계좌 추적도 가능한가?”

누군가의 계좌를 추적하려면 사실 조회로 진행해야 했다. 수사 기관에서 영장을 발부해 주어야 가능한 일인 것이다. 하지만 윤신은 이 일을 은밀하게 진행하길 원했다. 상대편이 법적 문제에 꽤 철두철미하게 대비하는 스타일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대형 로펌이라면 암암리에 두는 전문 조사 팀을 통해 이런 일도 가능하지 않을까 싶었다. 그는 탁 비서에게 물어볼까 궁리하며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런데 창 너머로 탁 비서뿐만 아니라, 세헌이 출근하며 오늘 일정에 대한 브리핑을 듣는 모습이 함께 눈에 들어왔다. 언제나 그렇듯 잘 정돈된 슈트 차림이었다. 어느 때에 그를 봐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그리고 늘 바빴다.

‘저 사디스트는 진짜 잠자는 시간 빼면 늘 일하고 있네. 숨도 안 차나.’

괜히 마음이 어수선해져 턱을 괴고 세헌의 수려한 옆얼굴을 그림 감상하듯 관찰하는데, 앞만 보고 걷던 그가 별안간 제 집무실 방향으로 고개를 틀었다.

그를 몰래 지켜보고 있었던 바람에 지레 찔린 윤신이 시선을 돌리며 일에 집중하는 척했다. 동시에 그가 ‘탁탁.’ 소리가 나도록 창문을 손등으로 두드렸다. 난감해진 윤신이 겨우 얼굴을 들어 조심스럽게 묵례했다. 다만 세헌이 원했던 건 공손한 아침 인사가 아니었던 것 같았다. 그는 여전히 문밖에 서 있었다.

‘아침부터 왜 저래 또. 좀 몰래 볼 수도 있지. 저는 대놓고 훑어보면서.’

속으로 궁싯댄 윤신이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왔다. 그러자 그가 따라오라는 양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탁 비서와 눈을 맞추며 혹시 이유를 아시냐는 듯 눈빛으로 물으니, 상대는 영문을 아는 게 분명한데도 일단 따라가 보시라는 듯 손짓해 보일 따름이었다.

하는 수 없이 세헌을 쫓아 집무실에 들어간 윤신은 방 안에 들어가자마자 제 품에 턱, 던지듯이 안긴 누런 서류 봉투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윽, 이게 뭡니까?”

재킷을 벗어 옷걸이에 건 세헌이 책상 위에 뭉텅이로 놓여 있는 서류들을 하나씩 눈에 담으며 무성의하게 대꾸했다.

“네가 직접 열어 봐.”

“제 사건 관련 자료인가요?”

“비슷한 거. 협상에 도움이 될 거야. 출처는 묻지 말고.”

“출처가 어딘지도 모르는 걸 막 열어 봐도 괜찮을까요?”

제공받은 자료의 신뢰도를 미심쩍어하는 반응이 탐탁잖았던 모양인지 세헌이 시니컬한 어투로 반문했다.

“위험한 자료는 은밀한 방식으로 아주 조용히 쓰면 돼. 이런 것도 가르쳐야 돼?”

“출처도 없는데, 위…… 험하기까지 한 자료군요.”

나름대로 알아듣게 설명을 했는데도 윤신 쪽에서 썩 마땅찮아하는 기색이자, 그가 결국 미간을 찌푸렸다.

“4년 차. 내 말은 뭐라고?”

“어쏘시에이트의 법입니다.”

“알아들었으면 나가 봐.”

“네에. 감사합니다. 저는 이게 뭔지도 모르고, 출처도 명확하지 않지만. 요긴하고 위험하게 잘 써 보겠습니다.”

꾸벅. 허리 숙여 인사한 윤신이 돌아섰다. 한번 붙잡아 달라는 의미의 감사 인사였는데, 그걸 눈치채지 못했을 리가 없는 세헌은 별 반응이 없었다.

등 뒤에서 빠르게 종이를 넘겨 보는 소리들이 이어졌다. 느릿하게 한 걸음을 내디디던 윤신이 다시 그를 향해 몸을 틀었다. 뚜벅뚜벅 다가가 책상 앞에 우뚝 서자, 슬쩍 올려다보는 눈빛이 강세헌답게 퍽 오만했다.

“또 뭐. 나 지금 의견서 봐야 할 게 산더미라 머리 터지게 바빠. 빨리 질문해.”

역시. 알면서도 안 붙잡은 것이다.

이 싸가지.

“수석님도 성범죄 케이스 맡으신 적 있어요? 처음부터 섭외 파트만 하셨나요?”

“난 입사 때부터 회사법 팀이었어.”

“없으셨단 뜻이에요?”

“그렇겐 말 안 했고. 5년 차 찍고 유학 가기 전까지 프로 보노로 몇 건 한 적 있어.”

“어떻게 일하셨는지 말씀해 주시면 안 돼요? 작전 짤 때 참고하게요.”

윤신은 자신이 모르는 강세헌의 과거가 몹시 궁금했다. 최근 몇 년 사이 제일 크게 호기심을 자극하는 화두였다. 매우 입맛이 돋는 이야기라, 그는 답해 주겠다고 하지도 않았는데 미리 눈을 반짝거리게 됐다. 흥미로워하는 제 모습을 본 세헌은 자신이 낭비할 시간이 얼마큼 있는지를 가늠하듯 손목시계를 힐끗 확인하곤 마지못해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난 웬만하면 소송까지 안 가고 합의금을 가능한 한 많이 뜯어내는 식으로 일했어.”

“아…… 합의금을.”

“소송까지 가 봤자 피해자들은 남는 게 없어. 성폭력 피해자라는 낙인만 남지. 게다가 그 과정이 워낙 고통스럽기도 하고. 가해자가 형이라도 많이 받으면 좋겠지만 죄명이 웬만하게 잔혹하지 않고서야 실형 사는 일이 별로 없는 건 너도 알 거야.”

“하지만 피해자가 몇 푼 돈보단 강력한 처벌을 원한다면요.”

“4년 차. 형량 아닌 돈이 정의의 척도일 때도 있어. 넌 궁극적으로 의뢰인이 이기는 걸 생각해야 해. 의뢰인이 잘못 판단하고 있다면 맞는 길로 가도록 설득하는 것도 네 역할이야.”

차분히 뱉어 내는 세헌의 조언을 곱씹던 윤신의 뇌리에 한 가지 궁금증이 떠올랐다. 그것은 풍선에 바람을 넣듯 부풀어 올라 금세 ‘뻥.’ 하고 터질 듯 커졌다. 지금 그의 모습으로는 선뜻 상상이 가지 않지만, 어쩐지 예전의 그라면 그랬을 것도 같아서였다.

“혹시 프로 보노 하실 때요. 피해자들한테 진심 어린 위로도 해 주고 그러셨나요? 이런 종류는 그런 게 다른 어떤 분야 사건보다 필요한 일이잖아요.”

문장에 온점이 찍히자마자, 무슨 말도 안 되는 질문을 하느냐는 양, 그가 미간을 구겼다.

“난 그런 거 안 해. 상담 끝. 꺼져.”

“잠깐만요. 저 아직 질문 안 끝났…….”

“너 1분 뒤에도 여기 서 있으면 업무 방해로 경찰에 신고할 거야. 어떡할래.”

계속 버티면 기어코 경고한 대로 해 버릴 세헌이라는 걸 모르지 않았다. 윤신은 내선 인터폰 수화기를 들고 천연덕스러운 시선을 보내는 그를 흘기듯이 지켜보다가, 마지못해 서류 봉투가 세헌이라도 된다는 양 손아귀에 꽉 쥐며 돌아 나왔다.

비서실을 거쳐 제 방으로 들어온 윤신은 자리에 똑바로 앉았다. 그러고는 책상 위에 누런 봉투를 올려 둔 채 잠시 깊은 생각에 잠겼다.

‘협상에 도움이 될 출처 불명의 위험한 자료라.’

이건 마치 판도라의 상자 같았다. 한 번 열면, 돌이킬 수 없을 듯한 느낌이다.

하지만 이 안에 뭐가 들어 있든 세헌의 지름길이야말로 정말 의뢰인들이 원하던 목적지로 향하는 문일 수도 있을 듯했다. 윤신은 조금씩 그와 타협하는 중이었다. 생각한 것보다는 그렇게 어렵지도, 찝찝하지도 않았다.

모든 인간은 다면적인 성격을 지닌다.

어쩌면, 아주 어쩌면 자신이 보고 있는 건 그야말로 아주 일부에 불과할지도 모르겠다. 어젯밤 산책을 방해받아 귀찮았을 텐데도 세헌은 아주 충실하게 제 이야기를 들어 주고, 갈피를 잡아 주고, 없는 길까지 만들어 내어 주었다.

그 과정에서 이상할 정도로 그가 움직여 준다면 어떤 싸움에서든 이길 수 있을 것 같은 믿음이 갔다. 그는 그야말로 완벽하게 의뢰인의 편이었다.

세헌이 원하는 게 그저 제 일신상의 영광이라는 걸 알지만 모로 가도 서울로만 가면 된다는 말이 있듯, 자신이 의뢰인이라면 얼마나 비싸든 바로 그를 수임했을 것이다.

〈지금 네 의뢰인도 그럴 거야.〉

‘이기기 위해 뭐든 하는 사람이고, 얼굴은 한 천 개쯤 되는 것 같은데…… 그중엔 피해자에 공감하는 강세헌도 있으려나.’

툭. 긴 손가락 끝을 서류 봉투 위에 올린 윤신이 그 위에 세모를 그렸다.

그러고는 작심한 듯, 이윽고 입구를 열어 안에 든 메모리 카드를 꺼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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