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화 (2/24)

01 시련은 잇따라 찾아온다.

내 이름은 유진. 있을 유(有), 보배 진(珍). 어머니는 태어난 나를 보며 세상에서 가장 반짝이는 눈을 가졌다는 의미에서 이런 이름을 지어줬다. 어머니뿐만 아니라, 친구들이며 선생님까지 내게 반짝인다는 표현을 많이 써주곤 했다. 그래서 난 내가 빛나는 사람인 줄만 알았다.

엄마가 병으로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는.

“진아. 미국으로 가, 거기에 네 아빠 있어.”

“아빠라고? 분명히 내가 태어나기 전에 돌아가셨다고 했잖아.”

“꼭 가야 해, 진아. 알았지? 할머니도 안 계시는데 이제 너한테 아빠밖에 없어. 그 집에서 받아주신대.”

“엄마, 무슨 말이야, 왜 자꾸 떠날 것처럼 얘기해.”

“형도 있다고 했어.”

어머니는 눈을 감기 직전 믿을 수 없는 얘기를 털어놓았다. 내게 또 다른 가족이 있다는 다소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분명,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셨다고 했는데. 아버지 같은 건 잊고 살라 했는데.

수많은 질문이 입안에 뱅뱅 맴돌았지만, 엄마는 이미 눈을 감아버렸다. 늘 반짝반짝하다고 했던 말과 다르게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한 어린애라는 걸 깨달았다. 이게 바로 스무 살, 내가 겪은 첫 번째 시련이었다.

“유진 씨?”

“누구세요?”

“유진 씨를 본가로 모셔 오라는 웨스틴 씨의 부탁을 받고 왔습니다.”

평소처럼 학교에서 돌아왔더니 생판 처음 보는 외국인이 우리 집 앞에서 낯선 이름을 말했다. 웨스틴이든 본가든 전혀 알 수 없었다. 어리둥절한 눈으로 쳐다보자, 남자는 냉랭한 표정으로 제 할 말만 했다.

“유진 씨의 아버지께서 보내셨다, 이 말입니다. 영어 못하세요?”

“아뇨,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어요.”

내 전공은 미술이었지만, 어머니는 항상 영어를 배우라고 권유했었다. 그 탓에 대학에 진학해도 영어 공부를 놓을 수 없었다. 어머니는 이런 일이 있을 줄 알고 미리 준비를 시켰던 모양이었다.

집 앞에 서 있던 외국인과 대화를 나눴다. 나를 데려오라고 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였고 뉴욕에서 사업을 한다고 했다. 갑자기 생긴 가족은 당황스럽기만 했다.

하지만 등록금이며 월세며 온갖 명분을 가진 돈이라는 악마가 내 등에서 떨어지질 않았다. 잘 시간까지 쪼개가면서 아르바이트를 뛰어도 감당할 수 없었다.

결국, 내겐 선택할 여유 같은 게 없었다. 생활비에 쫓기듯 수행원이라는 남자를 따라 낯선 땅으로 가게 되었다. 이게 바로 내 두 번째 시련인지도 모르고.

* * *

공항에서 나와 미리 준비된 리무진을 타고 본가라는 곳에 들어갔다. 해가 저물어 캄캄했지만 눈앞에 나타난 저택은 밤이라는 걸 잊을 만큼 번쩍거렸다. 그야말로 입이 떡 벌어지는, 어마어마한 규모였다. 호텔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화려하고 거대했다. 이 커다란 저택은 내 어깨를 금방이라도 짓누르는 것만 같았다. 부리부리한 눈으로 나를 지켜보는 고용인들도 마찬가지다. 모든 게 나를 눈치 보게 했다. 입을 꾹 깨물고 남자를 따라 ‘아버지’가 있다는 서재로 들어갔다.

똑똑―.

나를 안내한 비서가 가볍게 노크를 하고 문을 열었다. 중첩 맞물리는 소리 하나 나지 않고 문이 열렸다. 그러자 방 안에는 희끗희끗한 머리를 가진 남자가 앉아 있었다.

남자는 나와 전혀 닮지 않았다. 번들거리는 회색 눈도, 날카로운 콧대나 윗입술이 매우 얇은 것도 그렇고 전형적인 백인의 외모였다. 내게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특징이었다. 그러니 남자가 아버지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들어 와.”

다소 차가운 음성에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긴장하지 말자, 겁먹지 말자. 스스로 그렇게 되뇌어봤지만, 도움 되는 건 하나 없었다. 남자를 멀뚱멀뚱 쳐다보다가 비서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쿵, 문이 닫히자 보이지 않는 돌덩이가 어깨 위를 짓누르는 것만 같았다.

“네가 정말 그 사람 아들, 유진이 맞니?”

한참 나를 쳐다보던 남자가 입을 열었다. ‘그 사람’은 어머니를 말하는 듯했다. 남자의 눈에선 반가움 하나 찾아볼 수 없었다. 꼭 골칫덩어리를 보는 눈빛이라 나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못 알아듣는 건가.”

남자는 자기가 누구인지 말하지 않고 용건만 내뱉을 뿐이다. 오히려 내가 묻고 싶은 말이었다. 정말 당신이 내 아버지가 맞냐고.

“유진 씨에게 정말 그분의 아드님이 맞는지 얘기하고 계십…….”

“그 정도는 알아요. 영어 공부는 질리도록 했으니까요. 그리고 제가 유진 맞, 아요.”

뜨문뜨문 대답을 하자 남자, 아니, 아버지는 감흥 없이 읽던 서류로 시선을 돌렸다.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먼저 말을 걸어야 할까. 내가 여기서 지내도 되는지, 뭘 해야 하는지, 그런 것들을 물어보려 입술을 달싹였다. 하지만 제일 먼저 말을 꺼낸 건 아버지였다.

“미술을 전공했고 아르바이트하며 지냈다는 것 외에 내가 또 알아야 할 건?”

“네?”

아버지가 들고 있던 서류를 내 쪽으로 올려 보였다. 서류 속에는 내 사진이 선명히 틀어박혀 있다. 어느 정도 뒷조사를 했을 거라 예상했지만, 이런 식으로 직접 보여줄 거라곤 생각 못 했다. 소름이 돋을 정도로 두려워 그저 고개만 저었다.

“한국 생활은 다 정리하고 온 거겠지. 학교는 여기서 보내주마. 하고 싶은 거 있으면 비서 통해서 얘기하고. 카드도 따로 줄 테니 생활비는 그 안에서 해결하거라.”

“……네.”

자비를 베푸는 사람치고는 꽤나 차가운 어투다. 어찌나 차가운지 감사하다는 말도 나오지 않았다. 이때, 옆에 있던 비서가 나가자는 듯이 내게 눈빛을 보냈다. 몰랐던 아버지를 만났다기엔 너무나 짧은 시간이다.

아쉬운 건지, 아니면 그려지지 않는 막막한 미래 때문에 그런 건지 발걸음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젠 나가야만 한다. 여기서 계속 머물다간 좋은 소리를 듣지 않을 것 같다.

“저기…… 궁금한 거 하나 있는데요.”

조심스레 얘기하는데도 잘못한 기분이 들었다. 아버지는 미간을 좁히고 시선 한 번 주지 않았다. 말해도 되나 싶었지만, 옆에 있던 비서가 고개를 끄덕이길래 눈치 보며 말을 이어 나갔다.

“형이 있다고 들었어요.”

빌어먹을 호기심을 통제하기도 전에 입이 먼저 움직이고 말았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변명하기엔 아버지와 비서의 눈빛이 심상치 않다. 두 사람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지만, 감히 네까짓 게 먼저 질문을 하냐는 표정이다. 오히려 아버지는 얼른 내보내라는 듯이 비서에게 눈짓을 했다. 비서가 얼른 따라오라는 듯이 문을 열었다. 끼이이익, 기분 나쁜 소리가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그 길로 곧장 비서를 따라 걸어갔다. 복도를 지나면서 화려한 조각상 같은 것도 보고 진열장에 가득 전시된 와인 컬렉션을 발견했다. 나도 모르게 와인 진열장 앞에 멈춰 섰다. 비행기에서 봤던 프랑스 영화 때문인지 와인을 마시고 싶었다.

“유진.”

“아, 네.”

비서가 어서 오라는 듯이 눈치를 줘서 시선을 떼고 얼른 쫓아갔다. 아무리 봐도 이 집에는 값비싼 물건밖에 없는 것 같았다.

“여기서 지내시면 됩니다. 필요한 거 있으면 고용인들 부르셔도 됩니다.”

비서가 안내해준 방은 내가 한국에서 지냈던 집보다 훨씬 넓었다. 방 안에 욕실까지 딸려 있어 딱히 나갈 필요도 없어 보였다. 침대며, 컴퓨터며, TV까지 최신형으로 놓여 있었다. 입이 떡 벌어질 만큼 번쩍거렸다.

“저…….”

“웨스틴 씨는 특별한 일이 아닌 이상 유진 씨를 부르는 일은 없을 거예요. 또 궁금한 건요?”

“바깥에 있는 와인 마셔도 돼요? 잠이 오질 않아서…….”

“네, 대신 소란 피우는 일 없도록 하세요.”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기도 전에 비서는 밖으로 나가버렸다. 괜히 멋쩍은 마음에 목덜미만 긁적이며 방을 둘러봤다. 화려하지만, 어딘가 두려운 방. 내 방에 있는 것조차도 눈치 보일 지경이다.

“하아…….”

술이라도 마시면 좀 괜찮을까 싶어, 고민 끝에 조심스럽게 복도로 나갔다. 늦은 밤이라 그런지 고용인 하나 보이지 않았다. 넓은 집에 혼자 덩그러니 남겨지니 어딘가 스산했다. 꼭 귀신이라도 나올 것 같은 으스스한 기분이 들었다. 괜히 그렇게 느끼는 거야, 괜히. 괜찮다고 스스로 다독였지만, 왠지 모르게 눈치 보이면서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어, 찾았다!”

복도 한가운데로 나가니, 아까 지나친 와인 진열장이 보였다. 옆에는 글라스 잔 여러 개가 어서 가져가 달라는 듯이 반짝이고 있었다. 누가 볼 새라 잔과 와인병을 냉큼 집어 근처 테이블로 가져갔다. 한 잔만 마실 거라 방에 가져가기엔 번거로웠다.

딱 한 잔만 마시면 모를 거야. 딱 한 잔이면 괜찮겠지. 뽁, 경쾌한 소리와 함께 코르크 마개가 빠지고 달달한 와인 향이 코끝을 찔렀다. 향이 달아날까 얼른 잔을 채워 들이켰다.

“와, 이거 진짜 맛있는데?”

한 잔만 마시긴 너무 아까운 맛이다. 꽃향기가 나면서도 달달한 과일 맛이 나는 게 신기할 지경이다. 한 잔만 더 마시자, 딱 한 잔만 더. 하지만 한 잔은 두 잔이 되었고 순식간에 와인 한 병을 탈탈 비워내고 말았다.

“흐…….”

와인 한 병에 취해버린 내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히끅거리며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다리를 억지로 움직여 비틀거렸다. 잔은 방으로 가져가서 내일 치워야지. 잔과 빈 와인 병을 끌어안고 내가 있던 방으로 들어갔다.

끼이이익―!

기분 나쁜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괜히 그렇게 느낀 탓인지 아까와는 다른 방처럼 느껴졌다. 조용한 걸 보면 다른 사람 방은 아니겠지. 설레 고개를 젓고 남은 와인을 병째로 들이켰다. 콸콸 쏟아지는 와인이 입가를 타고 흘렀다. 미처 마시지 못한 액체가 목선을 타고 흘러내려 옷을 흠뻑 적셨다.

“……으으, 차가워.”

와인으로 티셔츠가 엉망이 되자, 괜히 울컥했다. 아무래도 술기운 탓이다. 얼른 씻고 자야지. 점점 몸이 무거워졌다. 대충 샤워만이라도 하고 자야겠다는 일념으로 옷가지를 벗어 던지며 욕실 안으로 들어갔다.

“흐…….”

달칵―

조명을 켜고 욕조 안으로 들어갔다. 힘없는 손으로 겨우 물을 적시고 비누칠을 했지만, 힘이 완전히 빠져버린 나머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욕조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으응, 추워…….”

이대로 잘 수 없는 노릇이지만, 잠은 계속 오고 손엔 힘이 없어 어쩌지도 못했다. 그저 욕조에 기댄 채 살결을 매만지며 비누 거품을 내기만 했다. 답 없이 계속 앉아 있는데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도와줄까?”

부드럽지만, 낯선 음성이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들었다. 어지러워 제대로 보이지 않으나 남자가 하얀 얼굴에 밝은 금발을 하고 있다는 건 확연히 알 수 있다.

“아, 아니, 괘, 괜찮아요. 죄송해요, 금방 나갈게요.”

“죄송하면 가만히 있을래?”

“아, 아니, 정말 괜찮은, 죄송합니다.”

남자는 소매를 걷고 내 앞으로 저벅저벅 다가오더니 샤워기를 들어 비누 거품을 하나하나 씻겨주었다. 비눗물을 씻어 내리는 따뜻한 물이 기분 좋게 느껴졌다. 오늘 하루 느꼈던 긴장감이 한 번에 풀리는 순간이다. 작게 숨을 뱉으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그런데, 그때. 등 뒤에서 쿡쿡대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재밌는 게 들어왔네.”

“흐, 자, 잠깐만요!”

낯선 남자의 손이 허벅지 안쪽을 살살 쓸어올리면서 내 성기를 움켜쥐었다. 술기운이 한 번에 달아나는 순간이었다.

“처음이라는 말은 없었는데. 처음이야? 아니면 그런 척을 하는 건가.”

처음이라니? 설마. 무언가 단단히 오해한 것 같다. 빨리 해명해야만 했다. 그래야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테니까. 부드러운 목소리와 나른한 손길에 위화감이 느껴져 조심스레 남자를 올려다봤다.

“저, 저기요. 뭔가 오, 오해가 있으신 것 같, 윽!”

하지만 그러기도 전에 우악스러운 손아귀가 내 목덜미를 움켜잡아 엎드리게 했다. 그 손길은 무척 강압적으로 다가왔다. 어찌나 아프던지 내게 분풀이라도 하려는 것 같았다.

“아, 아파. 이거 놔! 놓으라고, 이 미친, 아악!”

입에 나오는 대로 욕설을 내뱉자 곧바로 응징이 돌아왔다. 남자가 내 등을 짓밟은 채, 벨트를 풀더니 등이며 엉덩이며 잡히는 대로 여러 번 내리쳤다. 짜악, 짝! 날카로운 소리에 맞춰 통증도 따라 들어왔다. 온몸이 칼로 쑤셔진 것 같은 고통에 숨 한 번 제대로 들이키지 못하고 욕조 위로 털썩 엎어졌다.

“아, 흐. 아, 아프…….”

“설정을 잡으려면 제대로 잡았어야지. 처음이어도 상관없지만, 시끄러운 개새끼는 좋아하지 않는 편이라.”

“윽! 아, 아파! 나, 나한테 왜, 왜 이러는, 우윽!”

“아, 시끄러워. 왜 이런 게 온 거지?”

남자의 얼굴을 보려고 했지만, 그러기도 전에 머리채가 잡혀 욕실 바닥으로 질질 끌려나갔다. 두피가 뜯어질 것처럼 아파서 비명을 질렀다. 콰당! 둔탁한 소리와 함께 보기 좋게 넘어졌다. 대체 뭐 하는 짓이냐고 소리를 지르려 했지만, 기다란 천을 쥔 남자의 손이 제일 먼저 시야 안으로 들어왔다.

“자, 잠깐만요, 잠…….”

이게 뭔가 싶어 흠칫거리는 순간, 그 천은 내 눈꺼풀을 뒤덮어버렸다. 낯선 땅을 밟자마자 이 무슨 날벼락이란 말인가. 파르르 떨어대며 남자를 밀치려고 상체를 들어 올렸다.

“난 개새끼 길들이는 건 좋아하지 않는데.”

“으윽!”

“직접 해서 먹는 것보다 남이 해준 게 더 맛있지 않아?”

그러자 남자는 한 손으로 내 손목을 움켜쥐더니 천으로 칭칭 감아서 어디엔가 단단히 묶었다. 수건걸이였던가. 아니면 수도꼭지던가. 앞이 보이질 않아 알 수 없지만, 지독한 구덩이에 빠진 것만은 분명했다.

“하지 마. 하지 말라고 했잖아! 경찰에 신…….”

짜악! 또 한 번 벨트가 날아 들어왔다. 한 대, 두 대, 세 대쯤 맞았을 때 온몸이 너덜거려 제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그제야 깨달았다. 남자에게 반항을 해봤자 돌아오는 건 고통뿐이라고. 덜덜 떨며 다리를 오므렸지만, 남자의 무자비한 손아귀에 숨김없이 화악 벌려졌다.

“걷어차거나 밀어내면 평생 한 발로 걸어야 할 거야.”

“흐, 흐으. 하, 하지, 읏…!”

“지금 너한테 선의를 베푸는 중이잖아?”

남자의 손이 내 성기를 움켜쥐며 위아래로 흔들었다. 맨살에 닿는 감각에 등줄기를 타고 찌릿한 감각이 올라왔다. 방금까지 얻어터졌던 터라 쾌락 같은 건 느껴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흐, 으…….”

“원래 개새끼한테 이런 거 해주지 않아. 특히 너처럼 멍청하고 시끄러운 개새끼한테는.”

엄지로 뭉근히 귀두 끝을 문지르고 기둥을 쓸어올리는 손길에 머릿속이 하얗게 지워졌다. 다리를 오므리며 뒤로 내빼려고 했지만, 남자가 무릎을 짓누른 탓에 쉽게 움직일 수 없었다. 기둥을 쥐고 흔드는 손이 점차 빨라졌다. 성기를 쥐던 손에 힘을 주고 빼길 반복하며 부드럽게 주무르기까지 하니 더 미칠 지경이었다.

“하, 으……. 자, 잠깐, 잠깐만……. 흐읏!”

“진짜 시끄럽군. 입 좀 닥치고 있어.”

“우읍!”

남자는 내 성기를 쥐고 흔들면서 다른 한 손으로 입을 벌리게 하고는 무언가를 쑤셔 넣었다. 까슬한 감촉이 입천장을 헤집는 걸 보면 샤워할 때 쓰는 거품망인 듯했다. 그만하라고, 이제 놓아달라 소리 내는 것도 입이 막혀 뜻대로 할 수 없다. 나는 그저 남자의 손길에 맞춰 허리를 들썩이고 바르르 떠는 것만 해야 했다.

“우, 으….”

“이제 좀 봐줄 만하네. 적당히 소리 내고, 적당히 우니까 얼마나 보기 좋아?”

성기에서 흘러나오는 액 때문인지 남자가 기둥을 쥐고 위아래로 흔들수록 탁탁거리는 수치스러운 소리가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안 돼, 제발. 이젠 그만해. 발버둥 치며 뒤로 내빼려고 했지만, 의지와는 다르게 사정감이 차올랐다.

“흐, 으으….”

처음 보는 남자, 아니, 얼굴도 못 본 남자의 손에 쾌락을 느꼈다는 사실이 수치스러웠다. 남자는 멋대로 내 성기를 휘어잡고는 빠르게 흔들어대며 회음부까지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하지 마, 제발, 하지, 하지 마…….”

눈물을 줄줄 흘리며 남자에게 애원하듯 고개를 저어봤지만, 몸의 반응이 우선이었다. 아래에 피가 몰리는 쾌감에 발끝이 절로 오므려졌다. 내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는 반응을 보였다. 성기에서 말간 액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을 때, 남자의 낮은 웃음소리가 내려앉았다. 수치스러웠다. 기억을 도려낼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질척이는 액과 손바닥이 맞물리면서 탁탁거리는 소리는 점차 선명해졌다.

“하으, 아, 안, 안 돼, 하, 하지 마!”

결국, 사정하고 말았다. 그것도 남자의 손에.

“싸라고 한 적은 없는데 감히 어디에 싸버린 거지?”

“우, 우윽……!”

남자가 내 머리채를 움켜쥐고는 어디론가 끌어당겼다. 강압적인 힘에 상체가 덜렁 흔들렸고 그러기도 전에 입에 물고 있던 거품망이 툭 떨어졌다. 남자가 내 입에 거칠게 손을 넣어 빼버렸다.

“이 세우면 다 뽑아버릴 거야. 잘 생각해.”

투욱, 단단한 살덩이가 내 뺨을 가볍게 내리쳤다. 남자의 성기다. 촉감으로만 느껴도 어찌나 크고 단단한지 한입에 넣기도 힘들 것 같았다. 파르르 떨며 보이지 않는 남자를 향해 고개를 올렸다. 남자가 왜 내 입을 열게 해줬는지 알고 있으나, 움직이지 못했다.

대체 내가 잘못한 게 뭘까. 이 집에 들어온 거? 머리가 핑 돌며 눈물이 툭 튀어나왔다.

“흐, 흐윽, 이, 이건 못 하겠…… 윽!”

짜악! 이번엔 등이 아닌 뺨에서 얼얼한 통증이 느껴졌다. 남자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없어 어떤 표정으로 바라보는지 알진 못하지만, 꽤나 두려운 존재라는 건 인식 되었다. 부드러운 음성으로 내게 명령을 내린 남자는 목덜미를 툭툭 어루만져 주었다. 어서 시작하라는 뜻이다.

“우, 우윽!”

“하나하나 도와줘야 하지, 이 개새끼는.”

마냥 멍청하게 덜덜 떨고 있을 때, 남자가 머리채를 잡아당겨 내 입안으로 성기를 밀어 넣었다. 이를 세우면 몽땅 뽑아버리겠다는 살벌한 경고가 머리에서 떠나가질 않았다. 컥컥거리며 미약하게나마 반응했지만, 남자가 내 머리채를 잡아 앞뒤로 흔드는 바람에 저절로 입이 벌어지게 되었다.

“우읍….”

목구멍 안쪽으로 푹 밀려 들어오는 성기가 내 호흡을 일제히 통제했다. 남자의 손길에 머리가 앞뒤로 흔들리면서 숨구멍이 조였다 풀리기를 반복했다. 힘이 빠질 대로 빠진 터라 퍼덕거리며 혀 한 번 제대로 쓰지 못하고 캑캑 고통스러운 기침만 내뱉었다. 하지만 남자는 봐주지 않았다. 거부 의사를 내비치는 움직임에서도 자극을 받았는지 욕망을 채우기에 여념이 없다.

“우, 으윽….”

“정말 처음 맞네, 이 개새끼.”

나른하고도 다정한 목소리가 몽롱하게 귓가를 파고들었다. 목구멍을 퍽퍽 찔러대는 페니스 탓에 숨이 막혀왔다. 정말 숨 한 번 제대로 쉬지 못할 것 같아 뚝뚝 눈물과 타액만 흘려댔다. 남자는 그게 좋은 모양이다. 내 머리채를 잡던 손길이 점차 부드러워졌다.

머리를 몇 번이나 쥐어 잡고 흔들던 손은 남자가 사정하고 나서야 멈추게 되었고 그제야 숨통이 트였다. 비릿한 정액과 갑작스레 들어온 공기에 가슴이 답답해지면서 마른기침이 연신 터져 나왔다.

“커헉…….”

등을 숙이며 울음 섞인 기침과 함께 헛구역질을 해댔다. 역겨워, 역겨워. 어떻게 이런 일을 겪을 수가 있지? 평생 겪을 일이라고 생각도 못 했다. 낯선 남자에게 알몸을 보이고 수치스러운 일을 당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헐떡거리며 밀려오는 치욕을 감당하지 못하고 펑펑 눈물을 터트렸다. 이러려고 여기까지 온 게 아닌데.

“왜 울어?”

“나한테 왜, 왜 이러는, 나, 난 그런 사람이 아니……란 말, 흐으…….”

“알아, 너 사람 아닌 거. 개새끼잖아.”

어째서일까. 남자는 왜 웃는 걸까. 두려웠다. 그 뒤에 어떤 일이 들이닥칠지. 이보다 더 수치스러운 일이 일어날 수 있을 거라는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 남자는 부드러운 손길로 등허리를 따라 쓸어 만져주었다. 차가운 손이 살갗 위로 와닿자 파르르 몸이 떨려왔다.

“근데 개새끼는 그런 말 안 들어 봤어? 우니까 더 재밌다는 거.”

“흐, 흐으… 노, 놓아줘. 제, 제발…….”

“보내줄까?”

빙글 웃는 목소리에 어깨가 흠칫 떨려왔다. 보내주겠다고? 정말? 하지만 어딘가 찜찜하다. 지금까지 했던 행동으로 봐선 남자는 나를 쉽게 보내줄 사람이 아니다.

“보, 보내주세요…….”

“그럼 내가 시키는 대로 말할 수 있어?”

시키는 대로? 어리둥절하며 남자의 말이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올렸다. 큭큭대는 낮은 웃음소리에 소름이 돋아났지만, 더 이상은 이곳에 있고 싶지 않았다. 선택권도 없다. 멍청히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남자는 고개 숙여 나른한 목소리로 내게 속삭였다. 정말 믿을 수 없는, 말도 안 되는 문장이 귓속으로 파고 들어왔다.

“왜? 못하겠어?”

“하, 하지만….”

“그럼 계속 여기 있어야겠네. 나랑 같이.”

“하, 할게요! 할 테니까 제, 제발….”

다급하게 몸을 움직이며 남자를 불렀다. 쿡쿡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릴수록 불안함은 커져 갔다. 파르르 떨리는 입술을 겨우 달싹이며 남자가 지시했던 문장을 조금씩 흘려보냈다.

“바, 박아 주, 세요…. 제 뒤, 뒷구, 멍에…….”

“큭큭, 시키니까 진짜 하네?”

마지막 말만 아니었어도 그리 수치스럽지 않았을 것이다. 적어도 불안함과 공포심에 휩싸여 덜덜 떨어댔겠지만, 지금처럼 가슴이 무너질 것 같은 수치심은 느끼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파르르 떨며 남자의 심판을 기다렸다. 차가운 손이 내 어깨 위에 올려졌다. 그리고 남자의 심판이 내려졌다.

“원하는 대로.”

“무, 무슨… 아아아악!!”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이해하기도 전에 몸이 뒤집혔고 무언가가 쑤시듯이 들어왔다. 남자의 성기가 서서히 내 안으로 침범했다. 살갗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에 온몸 가득 힘이 바싹 들어갔다. 고개를 흔들며 비명을 질러봤지만, 남자는 내 골반을 움켜쥐며 성기를 밀어 넣을 뿐이다.

“힘 빼야 얼른 네 구멍에 잔뜩 박아 줄 수 있어. 아직 다 들어가지도 않았어. 힘 빼.”

“아, 아악!”

화르륵 타오르는 불길이 온몸을 뒤덮는 것만 같다. 칼로 쑤셔져도 이것보단 덜 아프겠거니 싶었다. 움찔거리며 남자를 밀어내려고 안간힘 썼다. 하지만 남자가 엉덩이를 내려치는 바람에 도망칠 수 없었다. 둔부에서 홧홧한 통증을 느끼며 남자의 성기를 받아들였다.

“흐으으, 아윽!”

퍼억, 퍽. 쾌락은 전혀 느낄 수 없는, 고통만이 가득한 행위다. 거대한 살덩이가 내벽 안으로 콱 밀고 들어오자 시야가 하얀빛으로 번쩍 점멸했다. 눈이 가려져 앞이 보이질 않는데도 세상이 온통 하얗게 내려앉았다. 이 끊임 없는 고통에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지경이다.

“제, 제발, 흐으……. 아, 아프, 아악!”

“나중엔 나한테 고마워하게 될 거야. 이렇게 길들여놓으면 다음번엔 너도 즐길 수 있을 테니까.”

남자에게 붙잡힌 골반은 어서 놓아달라고 짐승처럼 울부짖었고 성기를 받아들인 접합부에선 갈기갈기 찢어질 듯한 통증만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남자는 내 애원을 무시했다. 엉덩이를 내리면 당장 매질이 돌아왔고 귀두 끝까지 성기를 빼다가, 퍽 소리 나게 박아 대며 허리를 쳐올렸다. 퍽, 퍽, 퍽. 살과 살이 겹치면서 질척이는 소리가 욕실을 가득 메웠다. 남자의 움직임이 점차 빨라졌고 겨우 간신히 붙들던 이성도 조금씩 내려놓았다.

“다른 주인한테도 사랑받을 거야.”

남자가 내 목덜미를 물어뜯듯이 잘근거리며 속삭였다. 멍해진 머리 탓에 어떠한 저항도 하지 못하고 남자의 움직임대로 몸을 움직였다. 잠시 후, 강하게 허릴 쳐대던 남자는 내 허릴 끌어안은 채 사정했다.

“너 같은 개새끼는 우는 게 재밌거든.”

* * *

“으윽!”

하반신이 찢어 발겨지는 고통과 함께 눈을 떴다. 번쩍 눈을 뜨고 허릴 일으켜 세우자 엄청난 고통이 아래를 뒤덮였다. 정신 차리고 보니, 내 눈과 손을 결박하던 천은 없다. 옷도 입혀졌다. 어젯밤 일은 꿈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여긴…….”

다만, 여기가 어디인지는 알 수 없다. 어제 안내받았던 방도, 욕실도 아니다. 주변을 둘러봤다. 평범한 침실처럼 보였으나 어디선가 남자가 튀어나올 것 같아 겁이 났다. 이를 악물고 후들거리는 다리에 억지로 힘을 주어 밖으로 뛰쳐나갔다.

문을 열자, 어제 내가 봤던 복도가 눈앞에 펼쳐졌다. 내가 살 집에서 그런 짓을 당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이곳에 남아 있고 싶지 않다. 어젯밤 기억이 되살아나듯 쭈뼛 소름이 돋아나 손발이 벌벌 떨렸다. 도망쳐야 해, 당장. 당장 도망쳐야 해. 휘청거리며 앞만 보고 걸어갔다.

“사, 살려, 살려주세… 흐읍…….”

도와줄 사람이 없다는 거 알았지만, 본능적으로 구원을 요청하며 눈물을 줄줄 흘려댔다. 아직도 선명하게 느껴졌다. 무자비하게 나를 집어삼키던 남자의 손길이. 그런 소름 끼치는 상상을 해서 그런 걸까. 어깨 위로 툭 하고 올려지는 손에 기겁하며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아, 아악! 사, 살려주세요, 제, 제발, 하지 마세…….”

“유진?”

내가 들었던 목소리와 확연히 달랐다. 어젯밤 나를 이곳으로 데려왔던 비서다. 그 모습에 안심이 되진 않았지만, 울음이 멈췄다. 그 남자가 아니라는 것만으로도 다행스러울 정도다.

“뭐 하는 겁니까?”

“저, 저기… 그, 그러니까…….”

형식적인 호의 같은 건 기대하지 않았지만, 얼른 일어나라는 듯이 미간 좁히는 비서의 모습에 가슴이 내려앉았다. 골칫거리처럼 쳐다보는 것 같았으니까.

“아침에 깨우러 갔더니 방에 안 계시더군요. 어디 계셨어요?”

“겨, 경찰에 신고…….”

“네? 뭐라는 거야. 똑바로 말하세요. 잘 안 들려요.”

비서의 옷깃을 꽉 붙잡았다. 차갑긴 하지만 나를 도와줄 수 있지 않을까. 웨스틴이라는 사람이 내 아버지니까, 이 사람의 상사니까. 내게 수치심과 공포를 안겨주던 그 남자를 어떻게든 찾아낼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에 파르르 떨며 비서를 붙들었다. 하지만 비서는 쯧 혀를 차며 한심하다는 시선으로 쳐다볼 뿐이다.

“잠 덜 깼어요? 하고 싶은 말 있으면 제대로 얘기해요.”

“그러니까…….”

“놓으시죠.”

“……죄송합니다.”

전혀 관심 없다는 냉랭한 시선에 고개를 푹 숙였다. 이곳에는 나를 도와줄 사람도, 무슨 일이냐고 물어봐 주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식사나 하러 가세요. 노엘이 기다리고 있어요. 원래 본가에 잘 안 들어오는 분인데 식구가 왔다고 하니 잠깐 들리셨더군요.”

“그게 누군데요?”

“노엘 웨스틴. 유진의 형이에요. 가족 이름 정도는 외우시죠. 아, 아버지는 로널드 웨스틴. 로널드 씨는 웨스틴이라고 부르세요.”

“아…….”

“걸음은 또 왜 그럽니까? 어디에서 구르기라도 했어요?”

“아, 아니에요.”

날카롭게 쳐다보는 시선에 어기적거리며 걷던 다리에 힘을 주었다. 무슨 소리를 들을지 몰라, 시선도 마주치지 않았다. 어젯밤 괴한에게 몹쓸 짓을 당했다고 하다간 오히려 내 잘못이라는 말을 들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오르는 눈물을 꾹꾹 누르며 비서를 따라갔다.

수많은 방을 스치고 나니, 기다란 공간과 함께 넓은 테이블이 나타났는데 누군가 앉아 있는 게 보였다. 멀리서 봐도 허여멀건 한 피부에 밝은 금발이 꽤 눈에 들어왔다.

남자는 우아한 귀공자 같았지만, 어딘가 날카로운 인상이었다. 어제 봤던 아버지라는 사람과 꼭 닮았다. 괜히 겁이 나 흠칫거리며 뒷걸음질 쳤다.

“유진?”

“……아, 아니에요, 아무것도.”

“저기 앉아 있는 저 남자가 노엘이에요.”

멀리서 희미하게 보이는 인영에 어깨를 움츠렸다. 어젯밤 내게 고통을 줬던 남자 역시 하얀 피부에 금발을 가지고 있었다. 이곳 특성상, 그런 사람이 많다 할지라도 선명한 기억을 떨쳐낼 수는 없다. 움찔거리며 멀리 앉아 있는 노엘에게 다가가지 못하고 서성거리기만 했다. 그러자 노엘이 먼저 움직였다. 저벅거리는 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단정한 걸음걸이다.

이제부터 저 사람을 형이라고 받아들여야 하는구나. 가까이 다가온 노엘은 영화 속에 튀어나온 것 같은 훤칠하고 빼어난 외모를 가졌다. 반짝반짝하다는 말은 이 사람에게 어울리겠구나, 싶을 정도다.

하지만 한동안은 어젯밤 남자가 잊혀지지 않아 얼굴 보긴 껄끄러울 것 같다. 노엘이 이 집에 잘 안 들어오는 편이라는 비서의 말이 그나마 위안이 되었다. 작게 한숨 뱉으며 고개 숙이던 찰나, 내 앞으로 다가온 노엘이 입꼬리를 올리며 어깨 위로 손을 올렸다.

“아직도 안 갔어? 식사라도 같이할 셈인가?”

그런데,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나를 보며 웃는 노엘의 입에서, 가족이라고 받아들여야 하는 형의 입에서 어젯밤 그 남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떻게 데려온 거죠? 뭐, 어쨌든. 이렇게 된 이상 같이 식사나 하지. 어제 못 한 것도 있으니까.”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덜덜 떨며 뒷걸음질 쳤다. 그러자 노엘이 빙그레 웃고는 나를 제 앞으로 콱 끌어당겼다. 도망치고 싶다. 두 다리가 꽁꽁 얼어붙어 움직일 수도 없다. 누가 나 좀, 나 좀 살려줘. 빳빳한 고개를 겨우 돌려 비서를 바라봤다. 그러자 비서는 한숨 푹 쉬며 노엘을 바라봤다.

“어제라뇨? 두 분 미리 만나셨나요?”

“미리?”

빙글 웃던 노엘이 비서 쪽을 바라봤다. 여전히 내 어깨 위엔 단단한 손이 얹어져 있다.

“노엘, 여기 이분이 유진입니다. 지난번에 말씀드렸던, 한국에 있던 동생이요.”

“……뭐?”

“유진이라고요, 김유진. 한국에서 데려온 동생이라고 말했습니다.”

아닐 거야, 아니어야만 해. 비서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방 안에는 무거운 침묵이 맴돌았다. 노엘의 시선을 마주칠 수 없어 고개를 푹 숙였다. 하지만 계속 이어지는 침묵은 내 어깨를 짓눌렀다.

“노엘? 유진? 두 사람 초면인가요? 어제 못 한 게 있다 해서 인사를 한 줄 알았는데. 아닌가요?”

꽈악, 어깨 위에 올라간 손에 힘이 들어갔다. 금방이라도 으스러뜨릴 기세다. 어젯밤 나를 공포에 몰아넣었던 그 느낌이 다시 한번 생생하게 돌아왔다. 두려웠다. 얼굴도 보고 싶지 않다. 아니, 볼 수 없다. 헉, 숨을 몰아쉬며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유진? 하, 진짜…….”

“따뜻한 물 좀 가져다줄래요?”

정중한 요청에 비서는 한숨 푹 쉬며 반대편으로 걸어 나갔다. 이제 둘만 남게 되었다. 차라리 내가 없어졌으면 싶을 만큼 불안함에 온몸이 덜덜 떨려왔다.

안 돼, 나를 혼자 두지 마. 제발. 다급한 마음에 비서를 따라가겠다는 듯 엉거주춤 일어났지만, 하얗고 단단한 손에 붙잡혀 그대로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콰당! 그대로 딱딱한 바닥 위로 넘어졌다. 무릎이 얼얼했지만, 그것보다 무서운 건….

“고개 들어.”

“읏....”

“개새끼라고 불렸던 내 동생아, 날 보라고.”

상냥하고도 살벌한 노엘의 목소리였다. 파르르 떨며 고개를 들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예쁜 미소를 지었던 노엘은 세상에서 가장 역겨운 것을 봤다는 듯한 표정으로 시선을 마주치고 있었다.

상냥하고 나른한 목소리는 고막으로 파고들어 가, 하나하나 빠짐없이 의미를 되새겨 주었다. 개새끼라고 불렸던 내 동생. 노엘 역시 어젯밤의 일을 기억하고 있다. 차라리 말이 통하지 않았다면 이렇게까지 두렵지 않았을 텐데. 쳐다보라는 명령에도 고개만 설레설레 저으며 뒷걸음질 쳤다. 그러자 어깨를 움켜잡은 손에 더더욱 힘이 들어갔다.

“무, 무슨 말인지 자, 잘 모르겠, 흐윽…!”

짜악! 영어를 모른다는 핑계를 대기도 전에 왼뺨이 돌아갔다. 얼얼한 통증에 온몸이 덜덜 떨리며 다리에 힘이 풀렸다. 비틀대며 노엘에게서 멀어지려 했으나, 또 한 번 손바닥이 날아 들어왔다. 이번에는 오른뺨이다. 홧홧한 열이 뺨에서 피어났고 귀가 멍해지면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정식으로 소개하려는데 왜 겁을 먹는 건지 모르겠네. 고개 들어, 유진.”

“싫, 흐윽…….”

고개를 가로젓자, 노엘은 내 머리카락을 헤집듯 움켜잡더니 거칠게 뒤로 꺾어 시선을 마주치게 했다. 새파란 두 눈이 내려다보고 있다. 보기만 해도 시린 눈동자에 심장이 내려앉을 것만 같다. 제발 누가 나 좀 꺼내 달라고, 살려달라고. 속으로 빌고 또 빌었다. 그러면서도 소리 낼 만한 용기는 없다.

노엘의 손을 물어뜯고 도망치자는 생각도 해봤지만, 나를 응시하는 시퍼런 눈동자에 생각이 억눌리고 말았다. 내 몸으로, 내 머릿속으로 느낄 수 있는 모든 감각과 사고력이 두려움에 져버리는 순간이다.

“정말 못 알아듣겠다면, 싫다고 대답하지 말았어야지.”

“흐, 흐으…….”

“내 이름은 노엘 웨스틴.”

싸늘한 음성이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틀림없이 어젯밤 나를 강제로 범했던 그 남자의 목소리였다. 두려움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입술만 파르르 떨어댔다. 하지만, 남자는 기다리지 않고 내 목덜미를 콱 움켜쥐며 으르렁거렸다.

“상대방이 소개하면 호응해주는 게 예의라고 안 배웠어? 생각보다 더 멍청하네. 네 이름은?”

“흐, 유, 유진이요….”

“여기 오기 전엔 뭘 했지?”

“그, 그냥. 하, 학교 다니고. 수, 순수 미술 학과…아, 아르바이트도 해, 했어요…….”

지금 이 상황에서 완전한 문장을 뱉는 건 무리다. 울컥거리는 눈물을 겨우 삼키고 노엘의 질문에 대답했다. 초등학생 때 한 번쯤 해봤던 영어로 자기 소개하기 시간이 떠올랐다. 마냥 들떠서 친구들과 재잘거리던 그 어린 시절. 얼마나 내 처지가 엿 같으면 사소한 순간마저 소중하게 느껴지는 걸까.

“거봐. 말 잘 들으니까 서로 편하잖아. 서운한 일도 없고.”

노엘이 만족스럽다는 듯이 입꼬리를 올리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내 뺨을 후려친 사람이라고 하기엔 믿기 어려울 만큼 섬세하다. 이 다정한 손길에도 덜덜 떨 수밖에 없다. 금방이라도 수틀리면 내 뺨을 후려칠 것 같아 눈치만 보며 입을 다물었다.

“난 이유 없이 때리지 않아, 유진. 네가 잘못해놓고 눈물 보이는 건 너무 뻔뻔한데.”

지금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는 걸까. 노엘은 내 잘못이라고 했다. 내가 잘못했다고 했다. 못 알아들었다고 하기엔 꽤 선명한 목소리다. 무엇을 잘못했길래 이토록 모질게 구는 걸까. 죄인이 누구인지 따져보자면 내가 아닌, 노엘이다. 노엘은 이 집에 조용히 틀어박혀 살겠다는 내 머리채를 잡아 나락으로 밀어뜨렸다.

하지만 생각이 두려움을 이기지 못한 지금은 내가 정말 잘못한 사람처럼 느껴졌다.

“제, 제가… 뭘 잘못, 했는데요?”

“뭐?”

“아, 아니…그게, 요, 저, 정말 모, 모르겠어요…….”

따지려는 의도는 없었다. 무너질 대로 무너진 마당에 지킬 자존심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다. 다만 궁금했을 뿐이다. 대체 내가 뭘 잘못했는지, 무슨 짓을 했기에 이와 같은 시련을 맞이해야 하는지 도무지 납득 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곧 이 질문을 하지 말아야 했음을 깨달았다. 노엘의 입꼬리는 매끄럽게 올라갔지만, 눈빛은 가라앉았다.

“아, 아니에요…저, 서, 설명 아, 안 들어도 돼, 돼요. 가, 가볼, 흣…!”

“입 닥쳐, 가라는 말도 안 했는데 어딜 가.”

쾅! 단단한 손이 내 멱살을 움켜쥐어 벽으로 밀쳐냈다. 단단하고 차가운 벽에 제대로 맞았는지 등허리가 얼얼해졌다. 벗어나려고 헐떡거리며 어깨너머 복도를 응시했다. 달아나야 해, 여기서 그만둬야 해. 입술을 꾹 짓이기며 노엘을 밀쳐내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나를 담고 있는 노엘의 눈엔 짙은 분노가 사무쳤다.

“정말 몰라서 물어? 네가 뒷구멍 박아달라고 졸라대는 바람에 나를, 씨발, 감히 날…동생한테 좆질해 버린 발정 난 새끼로 만들어버렸잖아.”

이해 안 간다고 하기엔 너무나 또렷이 들렸다. 다만, 머리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내가 언제 그런 말을 했다는 건지 이해되지 않았다. 덜덜 떨며 뒷걸음질 치려 하자, 노엘이 내 목덜미를 움켜잡고 가까이 끌어당겼다. 어느샌가 매끄러운 입가는 잔뜩 비틀렸다.

“없긴 왜 없어. 기억 안 나? 뒷구멍, 박아달라고 했잖아. 네 입으로 직접.”

“그건 시켜서, 어쩔 수 없이 한, 거잖아요…!”

“어쩔 수 없이?”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라도 하면 놓아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서늘한 미소는 흔들림 없이 나를 향했고 목덜미를 움켜쥔 손엔 힘 한 번 빠지지 않았다.

“내가 말하지 않으면 이를 뽑아버린다고 했어?”

“……아뇨.”

“유진, 난 강요한 적 없어.”

“…윽!”

턱을 움켜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억센 손아귀에 입이 점차 벌어졌다. 벌어진 턱은 닫는 법을 모르는 듯이 멍청히 타액만 줄줄 흘려보냈다.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정하고자 고개를 저어봤지만, 턱이 흉하게 벌어지고 노엘의 심기만 거슬리게 했다. 감당할 수 없다. 이 두려움을 이겨내기란 불가능하다. 눈물과 타액 범벅인 얼굴을 그대로 들어 노엘의 시선을 마주쳤다.

시선이 얽혔다. 나는 그를 두려움과 공포심으로 올려봤고 그는 나를 알 수 없는 눈빛으로 내려봤다. 노엘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무슨 감정을 품고 있는지 헤아리긴 어려웠다. 다만, 조금만 잘못해도 어젯밤의 지옥 같은 장면이 또다시 재현될 것 같아 두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그런데, 그때 노엘의 입술이 달싹이며 벌어졌다.

“씨발, ……도 모르겠잖아.”

노엘의 입에서 어떤 문장이 새어 나왔다. 뭘 모르겠다는 건지 명확히 들리지 않아 알 수 없다. 다만, 이 문장을 뱉고 나선 턱을 움켜쥔 손에 힘이 풀어졌다는 게 느껴졌다. 풀려나는 건가. 이젠 괜찮은 걸까? 쿵쿵 뛰어대는 심장을 간신히 억눌러댔다. 하지만 그 기대가 헛된 기대였다는 걸 깨닫게 됐다.

“우윽…!”

다시 내 턱을 옭아매던 손에 힘이 들어가면서 부드러운 입술이 포개어졌다. 입술의 말캉한 감촉을 느끼기도 잠시, 우악스러운 손아귀에 입이 벌어졌고 체액으로 미끈하게 젖은 살덩이가 유영하듯 입안으로 파고 들어왔다. 스르르 들어오는 혓줄기가 단단하게 혀를 옭아매고 빨아들였다.

“읏….”

어제와 같은 악몽이 되풀이되는 걸까. 끔찍했다. 상상만으로도 괴롭다. 발버둥 치면 칠수록 턱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고 물고 빨아당기던 억센 혀는 내 입안을 헤집다 못해 비릿한 피 내음까지 나게 했다.

더는 노엘을, 내 형을 거부할 힘이 나질 않았다. 스르륵 힘이 빠져 그대로 주저앉으려던 찰나 노엘이 내 가슴팍을 퍽 밀쳐 바닥으로 내동댕이쳤다.

“개 같은 새끼.”

“으윽…….”

“박아달라고 애원하던 개새끼가 내 동생이라고? 씨발, 엿같은 것도 정도껏 해야지.”

“나, 나는… 흑!”

“이딴 모욕 처음이야, 씨발. 내가 좆같은 만큼 너도 똑같이 느껴야 공평하지 않겠어?”

검은 구두가 내 허벅지를 걷어차자, 자동으로 상체를 숙이며 고꾸라질 수밖에 없었다. 치욕스러운 대우에도 아무런 말을 할 수 없다. 더는 고통 받고 싶지 않았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최대한 몸을 웅크리는 게 전부였다. 이때, 멀리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노엘, 유진. 식사 준비됐습니다. 따뜻한 물도 가져왔고요.”

비서가 돌아왔다. 어떡하지? 울고 맞은 흔적이 보이면 분명 무슨 일이 일어난 줄 알 텐데. 노엘의 폭력적인 행위를 알릴 생각보단 내 상처를 들킬 것 같은 불안함이 우선이었다.

일어나지 못하고 몸을 웅크렸다.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가려지지 않았다. 내 모습을 발견한 비서는 탄식을 터트리며 가까이 다가왔다.

“유진? 뭐예요. 어디 아픈 거예요? 상태 좀 봅시다.”

“아, 아니, 그게요….”

“어지럽다고 하네요. 속도 매스껍고 시차 적응 안 되어서 잠도 못 잤다고 하고. 그럴 만하죠. 한국에서 뉴욕까지 급하게 날아왔으니.”

노엘은 내 말을 가로막고 아무렇지 않게 빙글 웃으며 비서를 바라봤다. 비서는 골 아프다는 듯 관자놀이를 꾸욱 눌렀다.

방으로 들어가고 싶다. 아니, 굳이 방이 아니어도 좋다. 노엘이 없는 곳이라면, 그 어디든 상관없다. 이런 내 마음을 알았던 걸까. 노엘이 빙긋 웃으며 내 어깨를 감싸듯 끌어당겼다.

“식사는 아무래도 힘들 것 같네요. 유진이 피곤하다는데 억지로 자릴 만들 순 없죠. 다음번에 자릴 만들어요. 아버지와 함께할 수 있도록.”

“알겠습니다.”

“유진, 이제 그만 쉬러 갈까? 방까지 데려다줄게.”

방금 내게 손찌검을 하고 강압적인 키스를 하던 사람이라곤 믿기지 않았다. 어느샌가 노엘은 가면을 썼다. 한없이 다정하고 친절한 형의 가면을. 덜덜 떨며 억지로 고개를 끄덕였다. 거부하다간 뒷일이 어떻게 될지 몰랐으니까.

나는 그렇게 노엘의 부축을 받으며 천천히 발걸음을 움직였다. 흘끗 고개를 돌려 비서를 쳐다보려고 했다. 하지만 들려오는 노엘의 말에 아무런 행동도 할 수 없었다.

“유진, 필요한 게 있어?”

고개 기울여 미소 짓는 노엘의 모습에 시야마저 완전히 차단되고 말았다. 비서는 어떤 모습으로 우릴 바라보고 있는 걸까. 어머니가 다르지만, 우애 좋은 형제라고? 아니면 노엘이 한없이 착하다고? 무엇이든 내게 도움 되지 않는 것만은 분명했다.

“아, 필립. 서부 쪽에 예술 학교 좀 알아 봐주시겠어요? 가능한 오픈 어드미션으로 입학할 수 있는 학교면 더 좋겠네요.”

“시험 없이 들어갈 수 있는 학교를 말하는 거죠?”

“네, 유진이 한국에서 순수 미술을 전공했다고 하네요. 포트폴리오는 있을 것 같은데. 그치?”

노엘이 목소리처럼 부드러운 손길로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깨를 움찔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나를 멀리 보낼 계획인가보다. 뉴욕에서 멀리 떨어진 서부 쪽을 언급하는 거 보면.

그래, 이렇게라도 쫓겨나니 다행이지. 차라리 다행이야. 지금 이 시간만 지나면 노엘에게서 벗어날 수 있다는 안도감에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 순간, 새파란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유진, 괜찮지?”

노엘은 빙긋 웃고 있다. 다만, 방금 비서에게 보인 형식적인 미소와는 달랐다. 무언가 재밌는 놀잇감을 보는 것 같은 다소 불안한 느낌이 서려 있는, 그런 웃음이었다.

“……어렵겠지만 찾아보겠습니다. 여의치 않으면 컬리지에 들어가서 편입하는 방법도 생각하셔야 할 것 같아요.”

“부탁드릴게요. 유진 방은 어디 있죠?”

“2층 오른쪽 복도에서 네 번째 방이요.”

“아하. 내 방이랑 반대였네.”

비서와 대화를 나누던 노엘이 내 쪽으로 힐끗 시선을 던졌다. 이것마저 내 탓을 하는 것 같아 고개 숙일 수밖에 없었다. 그때, 머리통 위로 조곤조곤 얘기하는 비서의 목소리가 스쳐 지나갔다.

“노엘, 어젯밤 어떤 남자가 정문에서 방문을 거절당하고 돌아갔다고 합니다. 손님인가요? 일이 바빠서 이제 말씀드리네요.”

“…그래요? 사무실 직원인가 봐요. 얼마 전에 새로 뽑아서 우리 집 규칙을 몰랐던 것 같네요. 그럼, 이만 유진 데려다주러 가볼게요.”

어젯밤 그 남자라면, ‘개새끼’ 역할을 해야 했던 남자겠지. 노엘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흐트러짐 하나 없다. 비서가 노엘을 좀 더 붙잡았으면 싶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한 걸음, 두 걸음 점차 비서에게서 멀어지고 길게 드리워진 복도 끝을 향해 걸어갔다.

계단을 올라가는 동안 노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개새끼라는 욕설조차 내뱉지 않았다. 침묵을 일관하는 그의 모습이 두려웠지만, 잠자코 입을 다물었다. 먼저 말을 걸다간 어떤 모욕이 날아들지 몰랐으니까.

2층 복도 두 갈래 길. 노엘은 여전히 조심스러운 손길로 나를 부축하며 오른쪽 복도로 들어갔다. 하나, 둘, 셋. 문 세 개를 스치고 나서 도착한 방. 방문은 굳게 닫혀 있다. 어젯밤 왜 길을 헷갈렸냐고 꾸짖기라도 하듯이. 철컥, 문고리가 돌아갔다. 내 손이 아닌, 노엘의 손이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불현듯 잠잠했던 불안함이 온몸을 뒤덮었다.

“유진.”

단둘만 있어도 여전히 다정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나는 이 다정함이 무섭다. 미치도록 두렵다. 덜덜 떨며 고개도 돌아보지 않고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그때, 노엘이 내 앞으로 가까이 다가오더니 나지막이 귓가에 속삭여 주었다.

“벌써 설레잖아, 널 어떻게 망가뜨릴지 상상하니까.”

나를 멀리 내쫓는다는 사람의 말투라고 하기엔 너무 묘했다. 무슨 말이냐고 묻기도 전에 허연 손이 나를 방 안으로 밀어내는 탓에 물어볼 수 없었다.

쾅! 소리와 함께 문이 닫혔다. 사태 파악을 하기도 전에 허겁지겁 잠금장치에 손을 댔다. 그 순간, 벌컥 문이 열리면서 문틈 사이로 서늘한 눈동자가 나타났다.

“아, 한 가지 더.”

“무, 무슨….”

“내 허락 없이 문 잠그지 마.”

쾅! 또다시 문이 닫혔다. 절망이 찾아오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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