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화 (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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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양손으로 벽을 붙잡고 서게 한 승규가 깊숙한 안까지 성기를 꾹 밀어 넣었다. 까슬까슬한 음모가 엉덩이에서 비벼졌다. 성기가 배 끝까지 차오르는 느낌에 나는 허억 숨을 내뱉었다. 나도 모르게 발가락이 오므라들었다. 하지만 끝까지 중심을 박아 넣은 승규는 좀처럼 그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요즘 승규는 효율적으로 나를 괴롭히는 방법을 터득했다. 때로는 지나치리만큼 몰아붙이는 것보다, 이렇게 원하는 것을 제때 주지 않는 것이 더욱 악독하고 효과적이었다. 숨을 느리게 몰아쉰 승규가 성기를 살짝 뒤로 빼고 둥그렇게 돌렸다. 느끼는 부분에 닿을 듯 말 듯 한 움직임이 나를 애태웠다.

“아, 흐윽, 제발.”

등에서 땀이 비 오듯 주룩주룩 흘렀다. 계속하게 감질나도록 맴돌기만 하는 성기의 움직임에 눈앞이 흐릿해질 지경이었다. 안쪽에 귀두가 느릿하고 둥그렇게 문질러질 때마다 몸이 민감하게 달아올랐다. 말캉말캉해진 내벽이 제멋대로 움직이며 기둥에 달라붙었다. 하지만 명백하게 조르는 듯한 나의 움직임에도 승규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지친 나의 온몸이 아래로 줄줄 무너지려고 하면, 승규가 나의 무릎 뒤를 툭툭 걷어차며 내가 자세를 유지하도록 종용했다. 나의 다리 사이엔 성기가 이미 꼿꼿이 솟아 있었다. 조금만 더 하면 절정에 도달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아무리 졸라도 승규가 들어주지 않을 것 같아 눈물이 찔끔 새어 나왔다. 반쯤 포기하며 눈을 내리감았을 때 승규가 기습적으로 안을 퍽 치고 들어왔다.

“하읏!”

동시에 손을 내 가슴팍으로 가져가 왼쪽 유두를 비틀어 잡고 꼬집었다. 가쁜 숨을 토해낸 나는 그대로 사정했다. 조금도 직접적인 자극을 받지 않은 성기는 벽지에다 대고 걸쭉한 정액을 뚝뚝 흘렸다. 뜨끈해진 눈가로 애써 참았던 눈물이 한 방울 또르륵 흘러내렸다. 여전히 내 안에 차 있는 승규의 성기는 뜨겁고 단단했다.

참을성 없이 싸질러버린 나를 두고 혀끝을 가볍게 찬 승규가 귀를 아프게 깨물었다. 그대로 손을 내 가랑이로 들이밀더니 남은 정액을 쥐어짜는 것처럼 잔뜩 예민해진 나의 성기를 꽉 움켜쥐었다. 그러면서 뒤로는 거센 몸짓으로 남근을 내 안으로 박아 넣었다.

나는 차마 신음도 제대로 내지 못하고 입만 커다랗게 벌린 채 하얗게 질려 벌벌 떨었다. 고통과 동시에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쾌감이 뒷골을 쨍하게 쳐올렸다.

요즘 승규와의 섹스는 늘 나를 극한까지 몰아붙였다. 그렇게 한바탕 진하게 섹스하고 나면 몸이 잔뜩 노곤하게 풀어졌다. 탁한 욕정의 바다에 흠뻑 잠겼다가 건져진 기분이었다. 그러다 보면 아무려면 뭐든 좋을 것 같다는 충동적인 감정에 휩싸이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온전히 나를 놓을 수는 없었다. 힘없이 늘어지려다가도, 문득 지금의 우리가 향하고 있는 방향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처음의 섹스는 분명 쾌락이 목적이 아니었다. 나를 냉정하게 외면하다가도 결국은 매섭게 쏘아보고 마는 승규는 나를 향해 분노했다. 승규에게는 분명 나를 탓하고 원망하는 마음이 있었고, 나는 그런 승규의 파괴욕을 자극했다.

내 몸을 담보로 내걸어, 승규가 섹스를 통해 나를 향한 감정을 토해내도록 유도했다. 나는 그렇게라도 승규의 옆에 머무를 수 있기를 원했다. 적극적으로 내 속내를 보이며 유혹하는 대신 함부로 망가뜨려지길 원한 것은 어쩌면 알량한 죄책감을 조금이라도 피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나는 범선의 키를 억지로 승규에게 떠넘기면서 책임으로부터 도피했다.

나는 그렇게 달게 벌을 받겠다는 아주 감상적인 생각을 했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섹스의 목적은 불분명해졌다. 나는 승규와의 가학적인 섹스에서 뚜렷한 쾌락을 느끼고 있었다. 정말 승규라면 뭐든 다 좋은 것인지, 거칠고 무자비한 손길에도 몸은 당황스러울 정도로 예민하게 반응했다. 승규랑 자면 항상 투명한 물에 물감을 탄 것처럼 번져나가는 쾌감으로 온몸이 저릿해졌다.

사실 처음의 관계에 비교해서 승규의 태도가 훨씬 누그러진 것도 있었다. 나를 정말로 성기를 박아 넣기 위한 구멍 취급을 하는 것 같던 승규의 태도는 갈수록 모호해졌다. 분명히 조금 거칠고 일방적인 구석은 있었지만, 우리의 관계는 일반적인 궤도의 섹스로 수렴하고 있었다. 분노도, 복수도, 보상 심리도 모두 희미해졌다. 결국은 섹스를 할 때는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사실만이 남았다.

솔직히 섹스하면 당장 좋은 것과는 별개로 힘이 든다. 남자의 몸으로 남자를 받아들이는 건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난 원래 아픈 걸 좋아하지 않고, 연인을 위해 내 한 몸 기꺼이 희생할 만큼 헌신적이지도 않다. 간지러운 쾌감을 안기는 가벼운 페팅 정도라면 몰라도 삽입 섹스를 그렇게 선호하는 편은 아니다.

승규와의 섹스는 달랐다. 승규를 다시 만나며 나는 아주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감각을 깨우쳤다. 처음으로 승규와 몸을 섞을 때 알게 되었던 감격이 내 안에서 깨어났다. 나를 열망에 가득 찬 눈으로 바라보던 그 애와 몸을 겹칠 때 내가 어떤 기분이었는지가 생각났다. 성기를 삽입하는 행위 그 자체를 넘어서 몸이 닿는 순간 서로를 원했던 마음이 또렷해졌다.

단순히 승규와 이어져 있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신체적인 고통은 전혀 중요하지 않게 되고 정신적인 충만감만이 가득해졌다. 승규를 내 몸으로 품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벅차올랐다.

전신을 타고 흐르는 전율은 현재 진행형이었다. 어쩌면 그건 과거에 대한 향수, 혹은 금기를 어기는 배덕인지도 몰랐다. 이유가 뭐가 되었든, 승규와의 섹스가 지배하는 관능은 지독하리만큼 강렬했다.

처음에는 승규의 원룸에서 시작했지만, 이제는 승규가 내 오피스텔까지 오는 일도 종종 있었다. 어쨌든 내 오피스텔은 승규의 원룸보다 넓었고, 장소의 선택지가 넓어지면 둘이서 시간을 맞추기도 더욱 수월했다. 격렬하게 몸을 섞은 후 승규와 나는 나의 침대 위에 쓰러지듯 몸을 눕혔다.

쾌락에 흠뻑 젖어 잔뜩 풀린 눈을 하고 승규를 껴안으면 승규는 차갑게 나를 내치지 못했다. 나는 땀으로 미끌미끌해진 승규의 단단한 몸을 감싸 안았다. 승규를 내게로 가깝게 당겨 피부에 코를 묻고 숨을 들이마셨다. 승규 특유의 체취를 맡고 있으면 사정해서 축 늘어진 성기에도 다시금 힘이 들어가고는 했다.

나는 승규의 가슴에 코끝을 비볐다. 자신의 품에 안겨드는 나를 바라보며 승규는 난감한 표정을 했다. 사실 섹스 그 자체보다 더 좋은 것이 섹스하고 나면 나에게 조금은 더 물렁해지는 승규의 태도였다. 나는 결코 나에게 완전히 매몰차지 못하는 승규가 못 견디게 좋았다. 이렇게 승규가 조금이라도 틈을 보일 때면, 나는 절대 그를 놓치지 않고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승규야, 가지 마.”

나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려는 승규를 붙잡았다. 쾌감의 여운에 젖어 있는 뜨거운 눈동자가, 어느새 차가운 현실에 스며들어 쓸쓸하도록 가라앉을 때까지 가만히 승규를 바라보았다. 승규의 눈가에 조심스럽게 입 맞췄다.

“조금만.”

“…….”

“조금만 안고 있으면 안 돼?”

승규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하지만 침대를 떠나지는 않았다. 포기하고 완전히 몸을 눕힌 승규를 꽉 끌어안았다. 가슴이 딱 달라붙었다. 함께 맞닿아서 뛰는 심장의 박동이 좋았다. 불규칙하게 뛰는 두 개의 심장 소리가 하나로 겹쳐졌다. 그대로 승규라는 사람 자체가 그대로 내게 밀려들어 오는 것만 같았다. 그건 무척이나 오묘하고 조심스러운 감각이었다.

길을 잃고 허공을 헤매다 결국에는 체념한 듯 허리께에 닿는 승규의 손이 좋았다. 차를 정비하는 승규의 손바닥은 험한 일을 해서인지 딱딱하고 거칠었다. 나의 골반 언저리를 승규의 손바닥이 슬며시 쓸어내렸다. 평소와 다르게 유난히 까끌까끌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팔을 뻗어 승규의 손을 겹쳐 잡았다. 손을 뒤집어 손바닥을 확인해보자 길쭉한 상처가 보였다. 나도 모르게 눈썹이 아래로 축 처졌다.

“손 다쳤어?”

“아니, ……어.”

“어쩌다가 그랬어?”

나는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승규에게 물었다. 혹시라도 아플까 봐 상처를 만지지는 못하고 손을 내 쪽으로 끌어올려 자세히 들여다봤다. 대충 아물긴 했지만, 살이 상당히 깊이 파인 흔적으로 보아 꽤 아팠을 것 같았다.

“그냥, 일하다 보면 그래.”

“…….”

“…….”

“그래도, 속상하게.”

상처를 가만히 들여다보다 나도 모르게 혀를 내어 핥았다. 승규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나는 솔직히 인상을 확 찌푸리는 승규가 나에게 호되게 화를 낼 줄 알았다. 그대로 손을 빼내고 내 얼굴을 후려치듯 밀어낼 줄 알았다.

그러나 승규는 뜻밖에도 나를 가만히 내버려 뒀다. 그래서 나는 조금 기뻤던 것 같다. 혀끝에 날카롭게 와 닿는 상처를 쓸어 올리면서 축축하게 적셨다. 눌어붙은 딱지 위로 쪽쪽 뽀뽀하기도 했다. 급기야 나는 상처가 깊이 새겨진 승규의 손바닥에 뺨을 대고 문질렀다. 승규가 푹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렸다. 내 얼굴에 승규의 손길이 가볍게 닿아왔다.

“윤희수.”

“…….”

“너 진짜 어쩌려고 이러냐.”

말을 마친 승규가 손을 나의 이마로 옮겼다. 승규는 그렇게 가만히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내 흐트러진 앞머리를 가지런히 정리하기 시작했다. 꼼꼼하게 앞머리를 쓸어 넘기고, 이마를 조심스럽게 매만지는 손길은 예전과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언젠가의 과거에 대해서 느끼던 아련한 그리움이 현재의 승규를 향해 느끼는 생생한 감정으로 살아 돌아왔다.

“…….”

“…….”

나는 눈을 감고 말없이 승규를 끌어안았다. 허리를 꼬옥, 더 잡아당겼다. 놓아줘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그렇게 나는 지금의 위태로운 포근함을 포기할 수가 없어서.

승규의 단단한 가슴에 얼굴을 기대면 쿵쿵 심장이 뛰어오르는 소리가 들렸다. 나지막이 울려 퍼지는 불규칙하고 솔직한 심장소리를 들으며 이게 사랑이 아니면 대체 뭘까, 생각했다. 그러다 황급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두려워졌다. 결코, 사랑이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

드디어 중간고사가 끝났다. 나는 시험 기간만 되면 유난히 몸이 아팠다. 근육통이 온몸에 욱신거리고 두통이 지끈하게 일었는데, 통증은 나를 집요하게 괴롭히다가도 시험 기간만 끝나면 거짓말처럼 허탈하게 사라지고는 했다. 여러 병원에 다녀 보았지만 어떤 의사도 뾰족한 원인을 찾지 못했다. 막연하게 스트레스로 인한 증상이라고만 설명하고 진통제를 처방할 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늘 시험 기간이 남들보다 고생스러웠다. 이번에도 우지끈거리는 몸을 이끌고 겨우 중간고사를 치러냈다. 그래도 시험이 끝나고 내가 앉아 있는 책상 앞으로 와 싱긋 미소를 짓는 승규를 보자 온몸이 사르르 녹는 것만 같았다. 시험이 시작하기 전 승규와 나는 자그마한 약속을 하나 했었다.

우리는 함께 바다를 보러 가기로 했다. 공부하느라 답답한 마음에 탁 트인 바다가 보고 싶다는 말을 무심코 흘렸는데, 승규가 내게 시험이 끝나면 함께 바다에 가자고 말했다. 솔직히 어른이 없이 그게 가능할까 싶었다. 그런데 승규는 지하철을 타고도 바다를 보러 갈 수 있다고 했다.

승규는 나와의 약속을 위해 시험 마지막 날 아르바이트를 미리 빼뒀다고 했다. 학교를 마친 우리는 화장실에서 교복을 갈아입고 지하철로 향했다. 승규와 만난 지도 이제 백일이 넘었지만, 동네 주변을 벗어나는 데이트는 사실 처음이라 새삼스럽게 마음이 설렜다.

지하철만 타면 된다고 해서 쉽게 생각했는데 오이도는 생각보다 멀었다. 두 번이나 지하철을 갈아타야 했고, 역에 내려서도 바다를 보려면 버스를 한 번 더 타야 한다고 했다. 평일 오후라 지하철 안에 사람이 크게 붐비지 않고 틈틈이 자리가 나는 것이 다행이었다.

승규는 내가 좌석에 앉도록 하고 그 앞을 지키고 서서 나를 내려다보았다. 가볍게 드리우는 승규의 그림자가 내게 안정감을 안겼다.

솔직히 아직도 팔다리가 저릿저릿 욱신거렸다. 보통은 시험이 끝나면 통증도 함께 사라졌는데, 꼭 시험을 생각만큼 잘 치르지 않은 날에는 몸이 계속해서 아프고는 했다. 사실 승규가 오래 기다릴까 봐 서둘러 마무리 지었던 가채점 결과도 그다지 좋지 않았다. 나는 다만 모두가 입을 모아 이번 시험이 어려웠다고 했다는 사실에 억지로 기댈 뿐이었다.

불길한 예감을 떨쳐내려고 고개를 억지로 털어냈다. 그래도, 평소에 하던 만큼은 했겠지. 그렇게 어쩌면 안일한 생각을 했다. 어차피 인제 와서 걱정한다고 해서 해결될 일도 아니었다. 승규와 나는 함께 이날이 다가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걱정에 매몰되는 대신, 지금 승규와 보내는 시간에 집중하는 것이 맞았다.

‘와아.’

마침내 도착한 바다를 바라보는 승규의 입에서 탄성이 작게 터졌다. 감탄하는 승규의 얼굴을 보자 아픈 몸으로 한참 동안 지하철을 타고 버스를 타느라 쌓였던 피로가 단박에 사라지는 것 같았다. 그런 승규를 바라보며 희미하게 웃음 지은 나도 다시금 바다를 바라보았다.

‘…….’

‘…….’

솔직히 기대했던 것처럼 낭만적인 풍경은 아니었다. 공단과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한 바다는 청량하고 시원하기보다는 어딘가 탁하고 조잡스러운 분위기를 풍겼다. 사실 승규에게 처음 이야기를 꺼냈을 때 내가 보고 싶었던 바다는 지난겨울 가족과 해외여행을 갔을 때 방문한 리조트에 달려 있었던 프라이빗 비치에 더 가까웠던 것 같다.

‘나 바다 본 지 진짜 오래됐어.’

‘나두.’

하지만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설레하는 승규를 보자 이것으로 모든 게 다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승규가 내 옆에 있었다. 단지 그 사실만으로, 나는 눈앞에 보이는 대단하지 않은 일상의 풍경이 고스란히 특별해지는 기적을 느꼈다.

‘이쁘다. 그치?’

‘응.’

그래서 나는 승규의 질문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할 수 있었다.

해가 저물기 시작하자 생각보다 바람이 세게 불었다. 승규는 입고 있던 점퍼를 벗어 내 어깨에 걸쳐 주었다. 얇은 스웨터 안에서 오늘따라 이상하게 말라 보이는 승규의 몸이 신경 쓰여 여러 번 거절했는데도 승규는 고집을 부렸다. 한숨을 작게 쉬고 몸에 얹어진 승규의 점퍼를 여며 닫았다.

우리는 해안을 따라 산책로를 걸었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가끔 손을 잡기도 했다. 살갗이 닿을 때마다 짜릿짜릿한 기분이 스쳐 갔다. 그러다 눈이 마주치면 승규가 장난스럽게 입꼬리를 끌어올려 씩 웃었다. 하늘이 차차 어두운색으로 가라앉는 와중에 승규의 눈동자만이 태양처럼 찬란하게 빛났다. 내 앞에서 완연히 부드럽게 누그러진 승규는 따뜻한 빛을 뿜었다.

바다에서 함께 보냈던 시간이 좋았던 만큼,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고단했다. 눈꺼풀이 천근만근 무거웠다. 사람이 듬성듬성 비어 있는 지하철 의자에 앉은 나는 꾸벅꾸벅 졸았다. 겨우 깨었을 때는 내 옆에 앉은 승규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있었다. 잠이 덜 깨 눈을 어설프게 껌뻑이자 승규가 작게 웃으며 내 볼을 꼬집었다.

집에서 가까운 지하철역에 내렸을 때 시간은 이미 열 시가 훌쩍 넘어 있었다. 생각보다 귀가가 훨씬 늦어질 것 같았다. 승규와 헤어지고 핸드폰을 확인해보니 잠든 사이에 엄마에게서 부재중 통화가 몇 통 찍혀 있었다. 그제야 아차 싶었다.

하지만 지금 전화로 변명하는 것보다 차라리 집에 빨리 들어가서 얼굴을 비치는 게 더 나을 것 같았다. 나는 엄마에게 전화를 하는 대신 걸음을 서둘렀다. 어쨌든 시험 당일은 엄마도 친구와 어울리는 데 비교적 관대한 태도를 보이는 편이었다.

‘왜 이렇게 늦게 왔니.’

소리를 내지 않으려 조심하며 집으로 들어갔다. 거실에서 TV를 보고 있던 엄마가 힐금 나에게 시선을 던졌다. 엄마는 평소보다 훨씬 예민한 기색이었다. 나를 향하는 눈초리가 날카로웠다. 나는 엄마의 앞에서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조심스럽게 눈을 내리깔며 침을 꿀꺽 삼켰다.

‘시험 끝나서 친구랑 좀 놀았어요.’

‘전화는 왜 안 받고.’

‘걸어오느라 못 봤어요. 죄송해요.’

하아. 엄마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딘가 형형한 분위기에 절로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뭔가 잘못한 듯한 기분이었다.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승규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돌아오는 길에는 내가 정말로 무언가 잘못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결코 완벽하게 떳떳할 수 없었다.

‘친구 누구?’

그리고 엄마는 마치 그런 나의 나약함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것처럼 마음 한편의 불편한 구석을 스윽 파고들었다. 나는 나무처럼 뻣뻣하게 선 채 발등을 서로 문질렀다.

‘그냥… 엄마 어차피 제 친구들 다 아시잖아요.’

나는 자신 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혹시 내가 전화를 안 받는 동안 엄마가 친구들에게 이미 연락을 해본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상상만으로 등골이 오싹했다. 아무런 생각 없이 승규와 바다에 다녀왔는데, 상황이 필요 이상으로 꼬여 들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엄마는 아무 말 없이 TV를 껐다. 이제 너른 거실 안에는 조금의 불필요한 소음도 없었다. 자리에서 일어선 엄마가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심장이 오그라들었다.

‘희수야. 너 엄마한테 속이는 거 없지?’

‘엄마…….’

엄마의 커다란 눈이 겁먹은 나의 얼굴을 비쳤다. 엄마는 마치 감정이 메마른 엄격한 눈으로 나를 가늠했다. 가느다란 팔이 뻗어와 내 어깨를 가볍게 탁탁 두드렸다.

‘지금이 너한테 얼마나 중요한 시기인지 잘 알고 있지?’

‘…….’

‘너 앞으로 잘 될 애잖아. 똑바로 하자.’

‘……네.’

혹시 엄마가 이미 모든 것을 알고 묻는 건 아닐까 두려웠다. 낯이 뜨겁게 달아올라서, 엄마의 얼굴을 차마 볼 수가 없었다. 어쩐지 목이 메는 듯해 꽉 눌린 목소리로 겨우 엄마에게 대답을 내놓았다. 들어가 쉬어라. 엄마는 이내 나를 놓아주었고, 나는 도망치듯 방으로 돌아갔다. 그날 밤은 좀처럼 잠에 쉽게 들 수 없었다.

***

일주일쯤이 지나고 중간고사 결과가 나왔다. 나는 뜻밖의 재앙을 허망하게 받아들였다. 믿을 수가 없어서 눈을 여러 번 껌뻑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받아들이기 싫은 사실이 변화하지는 않았다. 평소와 다름없이 옥시글거리는 교실에서 나 혼자만 성적표를 들고 얼떨떨하게 굳어 있었다.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전교 30등 밖으로 밀린 적은 처음이었다. 아니, 30등이 문제가 아니었다. 원래는 전교 등수가 두 자릿수가 나오는 일도 드물었다. 생전 처음 받아보는 충격적인 성적표를 보자 머리가 찡하게 울렸다.

처음에는 채점이 잘못된 줄 알았다. 과목별 성적을 하나하나 확인하고 가채점 결과와 대조했다. 밀려 쓴 것도 아니었다. 꼼꼼히 뜯어보았지만, 어느 과목에서 큰 문제가 생긴 것도 아니었다. 시험을 보다 보면 당연히 어려운 문제, 헷갈리는 문제를 한두 개 틀릴 수는 있다. 평소라면 거의 하지 않았을 실수를 과목 대부분에서 골고루 범한 것이 떨어진 성적의 원인인 듯싶었다.

과목별 성적은 모난 곳을 한군데 잡아 꼬집을 데도 없이 균등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걸 보고 이건 더 이상 실수라고 칭할 수도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답이 헷갈리는 문제가 그만큼 많았다는 건, 단순히 내가 시험에 충분히 준비되어 있지 않음을 의미했다. 사실 이 지경이 되도록 눈치를 채지 못한 게 이상할 정도였다. 나는 가랑비에 옷이 젖는 것처럼 추락하고 있었다.

시험 결과를 접한 엄마는 아무 말 없이 내게서 핸드폰을 빼앗았다. 그 외에는 별다른 추궁도 문책도 없었다. 그래서 더욱 죄책감이 들었다. 나를 직접 궁지로 몰아붙이지 않은 엄마의 선택은 탁월했다. 나는 엄마가 나를 돌아보지조차 않을 정도로 강력하게 나에게 실망했다고 느꼈다. 엄마가 나를 혼내지 않는 대신, 나는 나 자신을 호되게 질책했다.

꾸준히 좋은 성적을 거두고 훌륭한 대학에 진학하는 것은 열여덟 나의 세계를 받드는 기둥이었다. 지금까지 쌓아 온 모든 것이 붕괴하는 듯한 기분에 휩싸여 나는 자책의 구덩이로 빨려 들어갔다. 그곳에서 바라본 나의 모습은 참 한심했다.

비로소 이루어진 자기 객관화는 통렬했다. 나는 비참한 기분에 잠겼다. 용케도 지금까지 아슬아슬하게 버텨오고 있었구나 싶었다. 나는 분명히 공부에 예전처럼 집중하지 못하고 있었다. 물론 이번처럼 등수가 폭락한 건 처음이었지만, 사실 격발의 시점은 훨씬 이전이었다. 인정하기 싫다고 해도, 승규를 만난 이후 내 성적은 계속해서 하향곡선이었다.

무엇도 핑계가 될 수는 없었다. 내가 저지른 잘못이고, 내가 감당해야 할 책임이었다. 다시 돌아오지 않을 지금을 어떻게 보내느냐는 철저히 나의 선택에 달려 있다. 지금의 내가 무엇을 하느냐가 앞으로의 내 평생을 결정지을 수 있는데, 승규에게 푹 빠져 있느라 그동안 너무 느슨해져 있었던 건 아닌가 싶었다.

‘어제 왜 전화 안 받았어?’

‘…….’

‘걱정했어.’

승규가 나의 표정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나는 정말로 승규와 얘기를 할 기분은 아니었다. 하지만 하루 중 점심시간을 함께 보내는 것은 승규와 내가 특별한 사이가 된 뒤로 어겨본 적이 없는 일상이었다.

‘…….’

‘…….’

나는 승규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사실 승규도 아르바이트를 하느라 바쁘고, 나도 야자를 하고 학원을 가느라 바빠서 실질적으로 우리가 함께 있는 시간의 양은 그렇게 많지는 않았다. 그 시간에 영어 단어를 외워봤자 얼마나 외우겠으며, 수학 문제를 풀어봤자 얼마나 풀겠는가.

그렇지만 나의 정신이 항상 최우선 목표인 공부가 아닌 다른 곳에 팔려 있다는 게 문제였다. 승규와 떨어져 있을 때도 나는 언제나 승규에 대해서 생각했다. 언제나 들떠 오른 기분으로 나를 향해 쏟아지는 승규의 사랑에 흠뻑 잠겨 있었다.

대답이 없이 생각에 잠긴 나를 보며 승규가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나는 무언가 말하려다가 꾹 삼켜내고 아랫입술을 슥 핥았다. 승규가 얼굴을 뚫어져라 보는 것이 갑자기 좀 불편하게 느껴져 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손바닥에다 대고 입술을 웅얼거렸다.

‘나 핸드폰 뺏겼어.’

손가락 사이로 내다본 승규는 놀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런 승규를 이해시키기 위해 설명을 구질구질하게 늘어놓아야 할 생각을 하니까 벌써 짜증이 치솟았다. 조금은 수치스럽기도 했다.

‘왜?’

‘성적 떨어져서.’

눈가를 쓸어내고 손바닥을 허공에 휙 내던졌다. 나는 조금 뾰족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도 모르게 승규에게 날카로운 시선을 던졌다. 우리 사이에는 전에 겪은 적 없었던 미묘한 기류가 맴돌았다. 나를 걱정스레 바라보는 승규의 오른쪽 눈썹이 아래로 축 처졌다.

‘기분 많이 안 좋아?’

‘아, 만지지 마.’

자연스럽게 내 어깨를 감싸오는 승규의 팔을 툭 쳐냈다. 공기가 위태롭게 당겨졌다. 당황한 승규가 움찔 몸을 떨었다. 나는 말없이 승규를 바라보았다.

자책감에 푹 잠겨 있는 동안 스스로에게 수없이 되뇌었다. 이건 전부 내 문제야, 내가 잘못 한 거야. 하지만 막상 승규의 얼굴을 보자 서러움이 치미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내게 드리워진 책임과 죄책감의 무게는 결코 혼자서 감당하기엔 어려웠다. 사실은 내 잘못이 아니라고, 상대가 누가 되었든 모른 척 전가해 버리고도 싶었다. 그렇게 승규 때문이 아니라는 걸 잘 알면서도, 나는 승규한테 짜증을 냈다.

‘아니 그게 아니라.’

‘…….’

‘그, 사람들이 연애하면 성적 떨어진다고 하잖아.’

나는 그렇게 머릿속에서 계속 빙빙 맴돌고 있던 말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 그건 일종의 자기방어였다. 모든 것이 온전히 내 잘못은 아니었으면 하는 마음. 승규에게 그런 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성적이 떨어진 충격에 휩싸인 나는 나의 고통 이상으로 다른 사람의 사정을 살필 만큼 마음에 여유가 있지 않았다.

‘…….’

승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눈을 둥그렇게 떴다. 나를 바라보는 승규가 눈에 띄게 상처받은 얼굴을 해서 나는 곧바로 아무렇게나 말을 뱉은 것을 후회했다.

‘아니, 그니까. 니 잘못은 당연히 아닌데.’

‘응.’

‘이제 곧 고3인데 내가 자기관리도 너무 못한 것 같아서…….’

‘…….’

고개만 살짝 끄덕인 승규는 여전히 별다른 말이 없었다. 나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후회가 된다고 해서 한 번 내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갑자기 시야가 시뻘겋게 물들 정도로 속이 답답했다. 뭐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모르겠는데, 급격하게 어두워지는 승규의 표정이 나 때문이라고 생각하면 그건 또 싫었다.

‘승규야 미안해.’

‘…….’

‘그니까 나는 너랑 연애하는 게 싫다고 말하려던 게 아니라…….’

나는 말을 마치지 못하고 그대로 승규에게 와락 안겨들었다. 너르게 벌어진 승규의 가슴은 단단했다. 무작정 고개를 파묻은 나를 승규는 부드럽게 안아주었다. 승규의 커다란 손이 내 등을 토닥토닥 두드렸다. 그렇게 나는 괜찮아야 하는데, 완전히 괜찮지는 못한 기분이었다.

‘괜찮아, 희수야.’

‘…….’

‘그냥, 나도 뭔지 알 것 같아.’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속이 시원하지는 않았다. 승규는 정말 내 마음을 이해할 수 있는 걸까. 아니 승규가 이해할 수 있다고 해서, 지금의 내 상황이 실질적으로 달라질 수 있는 걸까. 예비종이 울리고 옥상에서 다시 교실로 내려갈 때까지 승규와 나는 전에 없이 데면데면하게 굴었다.

그렇게 나는 언젠가 어렴풋이 인지한 뒤로 계속해서 피해오던 문제에 다시 한번 부딪혔다. 우리 정말 계속해서 만날 수 있을까. 한번 정체를 드러낸 질문은 계속해서 눈덩이처럼 그 덩치를 불려 나갔다. 이렇게 서로를 만나는 게 사실은 너와 나 모두에게 도움이 되기는커녕 해악만 끼치는 건 아닐까.

사실 지금까지 승규를 만날 때는 뭐든 계산해 본 적이 없었다. 그냥 나는 승규가 무작정 좋아서 달려들었다. 내가 느끼는 감정을 솔직하게 모두 표현하며 부딪혔다. 승규를 만남으로서 나의 삶에 생겨날 여파나 변화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던 와중에 실질적인 타격이 처음으로 쿵 하고 다가오자 피가 싸늘하게 식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인식의 변화가 생겨났다. 승규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 승규를 만나지 않았다면 성적이 떨어지지 않았을 텐데, 하는 비겁한 마음도 들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금세 떨구어냈지만 한번 퍼지기 시작하는 독의 여파는 강력했다.

그때의 나는 나에게 정말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분별해낼 능력이 없었다. 그냥 떼를 쓰듯 둘 다 놓을 수 없다고만 생각했다. 어떤 것이 덜 소중하고 더 소중한지를 가려내야만 한다는 개념을 받아들이기가 참 힘들었다. 하지만 아무리 발버둥 쳐봐도 소용없었다. 누구든 원하는 것 모두를 가질 수는 없다는 자명한 현실을 영원히 거부할 수는 없었다.

***

논문 초고를 들고 갔다가 교수님에게 대판 깨졌다. 가설은 그럴듯한데 여전히 그를 뒷받침하는 데이터가 지나치게 허술하다는 얘기였다. 문헌 조사도 꼼꼼했고, 논지도 충분히 흥미로운데 언제나 논문을 실질적으로 뒷받침하는 데이터가 문제였다.

R과 엑셀을 미친 듯이 돌려도 데이터가 타이디하게 뽑히지 않았다. 솔직히 이쯤 되니 그냥 프로그래밍 전문적으로 하는 애들 시켜서 그깟 데이터 다 돈으로 메꿀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답답했다. 처음 학교에 입학할 때만 해도 좋은 논문을 써서 미국으로 박사 가겠다는 마음이 있었는데, 지운이 형을 만나면서 뭔가 그 결심도 흐지부지돼 버렸다. 그런데 그나마 지운이 형과의 관계도 얼마 전 승규를 만나면서 흐지부지돼 버렸다. 문득 나는 그냥 객관적으로 내 지금 내 인생이 이도 저도 아니고 굉장히 흐지부지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렸을 때의 난, 기어코 승규를 밀어냈을 때의 난 적어도 지금의 내가 이것보다는 훨씬 더 근사한 삶을 살고 있을 줄로 알았다. 애초에 문제는 당장 그때부터 근사한 삶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맹목적으로 쫓기만 했다는 사실이었다.

어른들이 시키는 대로 반항하지 않고 얌전히 주어진 길을 따라왔는데, 막상 도착한 목적지는 텅 비어 있었다. 또다시 수없이 많은 화살표만이 뻗어 있었다. 내가 진짜로 원하는 걸 모르면서 원한다고 생각되는 것들에 대해서만 주입당했다. 처음부터 목적이 불분명했던 게 후에 이르러 나를 거세게 후려쳤다.

그런 와중에 단 하나 확실한 게 있다면 결국은 승규였다. 열을 씩씩 뿜어내는 랩탑을 덮어 두고 연구실 책상에 엎드린 나는 하염없이 승규에 대해서 생각했다. 승규가 나를 바라보던 눈빛을 되새겼다. 예전과 꼭 같은 것도 같으면서도, 사실은 부쩍 달라져 있는 가라앉은 눈동자. 그곳에는 나를 열망하는 마음과 경멸하는 마음이 공존했다.

나는 요즘 승규 생각을 많이 했다. 내가 매달리는 현재의 승규에 대해서도, 내가 떠나온 과거의 승규에 대해서도. 최초의 만남과 헤어짐 이후 우리 사이에는 기다란 세월이 흘러갔다. 그 와중 승규에게 생겨난 모든 변화가 나 때문이라고 한다면 그건 결국 자의식 과잉일 것이다. 하지만 변화의 일부가 내게서 기인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승규가 안쓰럽고 애틋했다. 하지만 내 잘못으로 과거의 그가 가진 일부를 파괴했을지라도, 어쩔 수 없이 나는 그래도 승규를 만나는 게 좋았다. 눈을 감고 승규를 그려 보았다. 날렵하게 잘 뻗은 얼굴, 매섭고 날카롭게 빛나는 눈매, 근육이 단단히 잡혀 두꺼운 목, 너르게 떡 벌어진 어깨, 나를 만지던 거칠고 단단한 손길.

승규는 관능적이다. 그런 승규를 떠올려 보는 것만으로도 손끝 발끝이 간질거렸다. 막상 생각하니까 마음이 더욱 빠듯하게 차오르는 것 같았다. 보고 싶다. 듣는 이 없는 말을 작게 중얼거리다가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승규의 카톡은 사진이 텅 비어 있는 기본 프로필이었다. 멋없기는. 사진을 볼 수 없어 아쉬운 마음에 괜히 한번 그를 타박했다. 흔한 메신저에서조차 무엇도 함부로 추정할 수 없도록, 승규는 그저 그렇게 메마르게 존재했다.

승규와 나누었던 대화 목록을 확인했다. 언제 시간 돼? 오늘 가도 돼? 집 비었어? 주로 만남을 주선하기 위한 간결한 대화뿐이었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가벼운 날씨 얘기나 사소한 안부를 묻는 메시지조차도 전무했다. 그 삭막하기 짝이 없는 채팅창에다가 대고 나는 보고 싶어, 네 글자를 가만히 써봤다.

그대로 보내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지만 차마 그럴 수는 없었다. 승규는 내가 질리도록 뻔뻔하다고 비난했지만, 사실은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적어도, 승규와 내가 이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보낼 수 있는 사이는 아니라는 것 정도는 나도 알고 있었다.

그냥 그대로 핸드폰을 쥐고 톡톡 액정 중앙을 두드려보며 승규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지 떠올려봤다. 기름내가 묻어나는 낡은 정비복을 입고 차를 꼼꼼한 손길로 매만지고 있을 승규를. 그렇게 하염없이 정신을 빼고 있다가 실수로 전송 버튼을 눌러버린 것을 뒤늦게 알아챘다. 나는 이미 보내진 메시지를 두고 경악했다.

일하는 중인지 승규는 메시지를 바로 확인하지는 않았다. 자괴감이 들었다. 카톡에는 왜 전송 취소 기능이 없는 거야. 차라리 승규가 내가 잘못 보낸 거로 생각해 준다면 훨씬 맘이 편할 것 같았다. 여전히 1이 사라지지 않는 메시지를 두고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그냥 핸드폰을 덮고 다시 빌어먹을 데이터에 집중하려고 했다.

그렇게 삼십 분쯤 지났을까. 승규에게서 전화가 왔다. 깜짝 놀란 나는 얼굴을 붉혔다. 그대로 조심스럽게 핸드폰을 잡아 들고, 복도로 나가 승규와 짧은 통화를 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우리는 보고 싶다느니 하는 간지러운 얘기는 처음부터 아예 없었던 것처럼 입에 올리지도 않았다. 다만 승규는 내게 오늘은 여섯 시 반쯤 퇴근할 것 같다고 전했다. 지금 경기도로 출발하면 대충 시간이 맞을 것 같았다. 나는 망설이지도 않고 한참 작업 중이던 랩탑을 덮었다.

승규와 나는 섹스만 하는 사이고, 사실 그래야만 계속 만날 수 있는 사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게는 승규랑 하고 싶은 게 아니라 단순히 승규가 보고 싶은 날이 있었다. 바로 오늘이 그랬다.

내가 어떤 마음인지 스스로 너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승규에게 보고 싶다는 카톡을 보내기가 망설여지기도 했었다. 그냥 나는 그랬다. 승규를 만나면 그냥 몸을 한가득 껴안고, 가볍게 얼굴에 쪽쪽 뽀뽀하고, 서로의 일상에 관해서 묻고, 그렇게 연인처럼 자연스러운 일들을 함께하고 싶었다.

하지만 승규의 원룸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승규는 다짜고짜 내 목덜미를 끌어당기고 거칠게 키스를 퍼부었다. 얼굴이 벌게진 채 달떠 있는 승규는 평소보다 조금 더 흥분한 것 같았다. 만나면 결국 섹스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건가 싶다가도, 내 몸을 오르내리는 스킨십이 진해지면 나 역시 뜨겁게 달아올랐다. 나는 승규의 난폭하고 감미로운 키스에 그대로 말려들었다.

내가 입고 있는 반듯한 옥스퍼드 셔츠를 풀어 내린 승규는 진득하게 나를 애무했다. 충동적이었던 생일날의 섹스 이후 몸을 섞을 때면 승규는 나를 손바닥으로 나를 급하게 쓸어내리거나 살점을 아프도록 꼬집거나 하기는 했지만, 입술을 자주 쓰지는 않았다.

오늘은 달랐다. 목덜미와 쇄골을 간지럽히듯 타고 내리는 입술에 목이 한계까지 뒤로 젖혀졌다. 승규의 입술은 스쳐 갈 때엔 까슬까슬했고, 힘을 주어 누를 때엔 폭신했다. 승규는 기어코 나의 유두를 입술로 물었다. 윗니와 아랫니 사이에 돌기를 끼운 뒤 빨아 물 듯 쭉 잡아당기자 참아왔던 신음이 절로 터졌다. 승규는 흡족한 표정으로 갈빗대를 타고 입술을 쪽쪽 찍어 내렸다.

입술로 온몸을 누비며 내 정신을 쏙 빼놓았던 승규의 손이 바지 안으로 불쑥 들어왔다. 땀으로 매끈해진 회음부를 승규의 손바닥이 거칠게 더듬었다. 젤로 적시지 않았는데도 흥분에 달아오른 아래는 미끈미끈했다. 굵게 뻗은 승규의 손가락이 엉덩이 사이의 골을 슥 쓸어내렸다.

“아. 승규야.”

나는 승규의 어깨를 갑작스럽게 붙잡았다. 승규가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들어 올렸다. 승규의 눈동자는 열기에 담뿍 젖어 있었다.

“그…….”

“…….”

“오늘은 안에 넣지 마.”

내일은 지운이 형을 만나는 주말이었다. 물론 지운이 형과 나는 만날 때마다 섹스를 하는 사이는 아니었고, 승규를 만나면서 형과의 섹스는 최대한 피하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섹스를 미뤄 온 지도 너무 오래됐고, 그래도 분위기라는 걸 타다 보면 사람 일이 어떻게 흘러갈지 모르는 거니까.

까놓고 말해 내가 지운이 형을 두고 승규와 바람을 피우고 있는 건 사실이지만, 하루 간격으로 다른 남자의 성기가 항문에 들락거린다고 생각하니 아무리 나라지만 그건 좀 기분이 찝찝했다.

“하…….”

승규와 다시 만나고 섹스하기 시작하면서 내가 먼저 삽입을 거부한 적은 없었다. 애초에 승규가 원하는 대로 마음껏 휘두르라고 선택권을 떠넘기듯 쥐여 준 섹스였다. 섹스까지는 보통 물 흐르듯 매끄럽게 흘러갔다. 지금에 와서 내가 삽입을 꺼린다면 이유는 단 하나일 수밖에 없었다. 승규는 그를 기민하게 눈치챘다. 승규의 얼굴이 단박에 일그러졌다.

“너 나한테 박히고 싶어서 연락한 거 아니었냐?”

“승규야.”

“스스로 와서 다리 벌려놓고 이래라 저래라야.”

승규의 난폭한 어투에 온몸에 소름이 돋아 올랐다. 승규는 원래 저따위로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승규에게 제발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말라고 부탁하고 싶었다. 수치심으로 얼굴이 뜨거워졌다. 다른 사람도 아닌 승규가 그렇게 말하니까 내 안의 소중한 어딘가가 뚝뚝 꺾여 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내가 승규에게 그렇게 말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다. 현재의 연인인 지운이 형에 대한 배반, 과거의 연인인 승규에 대한 부정 모두를 겸하는 수치스러운 행동을 저지르고 있는 건 애초에 나 자신이었다.

“승규야, 제발.”

“지랄하네.”

승규는 그런 내가 우습다는 듯 마구잡이로 손가락 세 개를 내 안에 쑤셔 넣었다. 이미 땀으로 촉촉해져 매끄러워졌다고 생각했는데, 우악스러운 손길로 두꺼운 손가락이 침입하자 역시 뻑뻑하고 버거웠다. 승규는 거칠게 피스톤질을 하며 내 안을 마구잡이로 쑤셨다. 나는 이를 악물고 신음을 참았다.

하지만 아무렇게나 제 꼴리는 대로 움직이는 것 같았던 손가락이 조금 더 교묘하게 나의 스팟을 노리기 시작하면서부터는 나도 버티기가 힘들어졌다. 승규의 살짝 휘어진 중지가 손톱으로 내벽을 살살 긁어내렸다. 그러다가 손가락 끝으로 힘을 주어 짓누르고 손목을 빠르게 진동시키면서 압박을 가하기도 했다.

젤도 쓰지 않았는데 어느새 안쪽이 질척질척하게 젖어 들어 있었다. 따끈하게 달아오른 내벽은 마치 그 이상을 부추기듯 말랑하게 승규의 손가락에 달라붙었다. 싫다고 거부했던 것이 무색하게 잔뜩 달뜬 반응이었다. 그런 나를 비웃는 것처럼 승규는 전립선을 집요하게 공략했다. 아무렇게나 벌어진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기 시작했다.

“하, 아아아, 앙!”

푹푹 쑤시다가 부드럽게 짓눌렀을 때, 결국 나는 사정하고 말았다. 이미 나는 뒤에 가해지는 자극만으로도 절정에 도달할 수 있는 몸이 되어 있었다. 승규는 갑작스레 정액을 토해내고 축 수그러든 나의 성기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승규의 눈이 음험하게 번들거렸다. 비틀어지는 입가가 어딘가 위험했다. 차마 승규를 말릴 수도 없는 나는 불안으로 가득 조마조마해졌다.

하지만 승규는 내게 자신의 성기를 들이밀지는 않았다. 불분명한 액체에 젖어 든 손가락을 허공에 툭툭 털어낸 뒤, 다시 기계적으로 나의 항문에 삽입했다. 또 한 번 손으로 내 안을 쑤시기 시작한 승규가 나를 집요하게 공략했다. 이럴 때는 몸이 결코 학습 능력이 좋은 것 같지 않았다. 나는 비슷한 패턴으로 승규의 손에 의해 몇 번이고 사정했다.

쾌감은 차라리 비참했다. 나를 내려다보며 이를 악문 승규는 또 한 번 나를 지독하게 경멸하는 얼굴을 하고 있었고, 그 아래에 깔린 나는 거친 손길이 불러일으키는 쾌락에 무방비하게 휩싸여 신음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성기로는 정액이라고 하기도 민망한 흐릿하고 묽은 액이 토해졌다. 나는 기진맥진한 채 현관 바닥으로 쓰러졌다. 승규는 내게로 몸을 숙였다. 아직 조금 벌어진 채 빠끔거리는 구멍을 툭툭 건드렸다.

“손으로 쑤셔만 줘도 자지러지면서.”

“하… 아읏.”

“넌 여기로 뭐가 들어오든 좋아하겠지. 안 그래?”

그리고 나를 내버려 둔 채 돌아섰다. 눈물이 나오려는 것을 꾹 참았다. 나는 스스로 벗겨지다 만 옷을 다시 입고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승규의 원룸에서 샤워할 기분도 들지 않았다. 오물이 얇은 막으로 퍼져 피부 위를 덮고 있는 것처럼 찝찝하고 불쾌했다. 신경이 곤두서 있는 건 비단 나뿐만이 아니었다. 식탁 근처에 기대선 승규가 턱을 괴고 집안에서 움직이는 나를 무척이나 아니꼬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뒤틀린 입가에서는 비릿한 맛이 묻어날 것만 같았다.

“넌 애인한테 미안하지도 않냐?”

승규가 내게 물었다. 무미건조한 듯했지만, 분명히 날 서 있는 목소리였다.

“…….”

“…….”

승규는 내가 애써 외면하고 있던 감정을 자극했다. 하지만 지운이 형에게 미안한 일을 하는 건 우리 두 사람 모두잖아. 다른 누구라면 몰라도, 외도의 상대인 승규가 내게 건넬 말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내 애인이지 네 애인이야?”

무리하게 몰아붙여진 덕에 아직도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고 있었다. 엑스자로 어깨를 감싸 쥔 나는 승규에게 방어적으로 반응했다. 승규는 조금의 타격도 입지 않은 듯 나른한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그래서 네 잘난 애인은 뭐 하는 사람인데?”

“그런 건 왜 물어봐.”

승규와 함께 지운이 형에 관한 얘기를 하는 게 불편했다. 솔직한 마음으로는, 조금도 견딜 수 없었다. 하지만 승규는 이야기의 주제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은 모양인지, 내게 계속해서 캐물었다. 나는 초조해졌고, 동시에 짜증스러워졌다.

“왜. 그런 것도 못 물어봐?”

“…….”

“구멍 동선데.”

이윽고 승규의 입에서 나온 천박한 말에 입이 동그랗게 벌어졌다. 승규가 내게 이렇게까지 굴 수 있다니. 나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깜빡이며 승규를 쳐다봤지만, 승규는 뭐 별다른 일이 있었냐는 듯 여전히 나를 그 집요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그냥.”

승규는 물러날 기색이 없는 것 같았다. 내 마음 어딘가도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인제 와서 거짓말하는 것도 웃기고, 정 궁금하다면 그래 말해줘야지 싶었다.

“의사야.”

내 말이 끝나자마자 승규가 코웃음 치는 소리가 들렸다. 승규가 턱을 매만지던 손을 들어냈다. 그대로 크게 기지개를 켰다. 나는 승규의 아주 자그마한 움직임에도 무척이나 신경이 예민해진 상태였다. 아주 조심스럽게 승규를 살폈다. 승규는 그런 나를 알고 있는 것처럼 일부러 느릿하게 움직이며 나를 멀찍하니 바라보았다.

“네가 못 헤어질 만도 하네.”

명백하게 빈정거리는 목소리가 내게 모멸감을 안겼다. 그런 게 아니라고 부정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다는 사실이 나를 몹시 치욕스럽게 했다.

“됐다.”

“…….”

“계속 너 만나는 내가 병신이지.”

그리고 제발 좀 가라는 듯, 승규가 내게 손등을 펄럭거렸다. 지금까지의 승규와는 괴리감이 드는 모습이었다. 그런 승규를 두고 승규의 집에서 돌아 나오며 나는 스스로가 무척 초라하다고 느껴졌다. 승규에게 낱낱이 들켜버린 속물적인 욕구가 창피했다. 그런데도 그것을 완전히 손에서 놓지 못하는 나의 모습이 부끄러웠다.

***

이제는 승규를 만날 때도 예전만큼 마냥 행복하거나 마음이 편안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승규와 헤어지는 것 역시 상상할 수 없었다. 때로는 무언가를 억지로 붙들어 두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손에 쥔 것을 모두 놓치지 않기 위해 나는 악을 쓰고 버텼다.

우리는 겨울의 문턱에 들어섰다. 이제는 마이 위로 조금 이르게 코트를 입고 다니는 친구들도 종종 보였다. 칼바람이 몰아치는 와중에도 점심시간마다 옥상에 들락거려서인지 나는 감기에 걸렸다. 캘룩거리는 나를 보고 승규는 안쓰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 상태로 옥상에 올라가는 건 무리수였다. 그렇다고 해서 하루 중 겨우 같이 있을 여유가 나는 점심시간을 이대로 날려버리기도 아쉬웠다. 점심시간은 이제 승규와 나의 관계가 지키고 있는 마지막 보루에 가까웠다. 잠시 고민하던 우리는 여름방학에 함께 차지했던 음악실을 찾았다.

내가 먼저 음악실에 다가가 문을 슬쩍 열어보았다. 안에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공기는 조금 차가웠지만, 야외인 옥상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괜찮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승규가 음악실 쪽으로 걸어왔다. 하긴 누가 됐든 굳이 점심시간에 음악실을 사용할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우리는 음악실 가장 뒤쪽 의자에 나란히 앉았다. 으슬으슬한 기운이 들어서 승규와 바짝 몸을 붙였다. 뜨끈거리는 머리를 승규의 어깨에 기댔다. 승규가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렸다. 승규의 커다란 손이 내 머리를 감싸 안고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아파서 어떡해.’

‘그냥 감긴데 뭐.’

‘다시 교실로 갈래?’

‘아냐, 너랑 있고 싶어.’

캘룩, 말을 마치자마자 기침이 터졌다. 승규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영 거두지 못했다. 내가 대신 아팠으면 좋겠다, 하고 승규가 중얼거리자 나도 모르게 작게 웃음이 터졌다. 팔을 뻗어 승규의 손을 꽉 잡았다. 승규의 단단한 체온이 느껴졌다. 스르륵 손깍지를 끼워 봤다.

승규와 눈이 마주치자 슬쩍 눈을 접고 웃어 보였다. 손을 간지럽히며 승규와 장난을 치자 조금 긴장이 풀리는 것 같았다. 승규도 표정이 퍽 누그러졌다. 내 손을 꽉 쥐었다가, 다시 살며시 놓아줬다가, 또 손등 위를 살살 쓸어주기도 했다. 그러다 기습적으로 겹쳐진 손을 들어 입가에 가져가 쪽 뽀뽀하기도 했다.

끼이익.

그때였다. 음악실의 낡은 문이 삐걱거리는 소리에 승규와 나는 동시에 얼어붙었다. 평생 놓아주지 않을 것처럼 꼭 잡고 있던 손을 단번에 떼어냈다. 음악실에는 일부러 불을 켜두고 있지 않았다. 밖에서 부채꼴 모양으로 새어 들어오는 빛이 어두운 실내를 비추었다. 긴장으로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문틈에서 스며들던 빛은 이내 사라졌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닫히고 다시금 음악실에는 완연한 어둠이 찾아왔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분명 누군가가 방금 음악실을 다녀갔다.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심장이 미친 듯 벌렁거렸다.

‘봤을까?’

승규에게 묻는 나의 목소리는 불안정하게 덜덜 떨리고 있었던 것 같다.

‘저 각도에서 안 보여.’

잠시 아무런 말이 없던 승규가 나를 안심시키려는 듯 얘기했다. 하지만 여전히 내 심장은 엉망으로 쿵쾅거렸다. 내 얼굴은 불안감으로 보기 싫게 일그러졌다. 어깨동무를 해오려는 승규의 팔을 밀어냈다.

‘봤어도, 우리 그냥 같이 있었을 뿐이잖아.’

승규가 조심스럽게 말했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었다. 우리 손 꼭 잡고 장난치고 있었잖아. 그건 평범한 친구들이 서로에게 하는 행동이 아니었다. 문득 승규가 내 손등을 가져가 간지럽게 뽀뽀했던 게 떠올랐다. 그건 사실 음악실이 문이 열리기 조금 전의 일이었지만, 혹시나 그 순간이 누군가에게 들켰을까 봐 나는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희수야, 너무 불안해하지 마.’

나는 시선을 한데 맞추지 못했다. 눈동자가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승규는 그런 나를 진정시키려 애썼다.

‘내가 있잖아. 난 다 괜찮아.’

사실 승규 자체는 충분히 믿음직스러웠다. 가끔 승규를 보면 혼자서도 단단하고 완전하게 있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로 승규는 정말로 모든 게 괜찮았을 거라는 생각도 든다. 문제는 내가 그런 종류의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나는 승규를 전적으로 믿고 기댈 수 없었다. 설령 승규가 내 옆에 있더라도, 모든 것이 괜찮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

음악실에서의 사건이 있고 나는 무척 불안해했다. 승규와 나의 사이는 급격하게 서먹서먹해졌다. 핸드폰도 뺏기고, 점심시간에도 자주 만나지 않았으니 사실 말만 사귀는 사이였지 일반적인 친구들보다도 교류가 적었다. 그대로 승규와 헤어지거나, 혹은 멀어지겠다는 결심을 한 건 아니었다. 나는 여전히 승규가 좋았다. 다만 나에게는 혼자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불길한 예감은 꼭 현실로 돌아왔다. 나는 최근 반 친구들이 나를 보며 묘하게 수군거린다는 인상을 받았다. 이야기에 한창 열을 올리고 있다가 내가 등장하면 분위기가 싸늘하게 식는 일도 종종 생겼다. 대놓고 나를 흘긋거리며 비릿한 웃음을 흘리는 일도 있었다.

분명한 불편감에도 콕 집어 무엇 하나가 문제라고 말할 수는 없는 상황이 지속했다. 그러던 어느 날 진호가 나를 따로 불러냈다. 어딘가 조심스럽고 비밀스러운 태도를 띠고 있는 진호를 보고 나는 눈을 끔뻑였다. 그대로 그를 따라 학교 뒤뜰로 갔다.

막상 나를 불러놓은 진호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고, 진호는 조금 혼란스러운 얼굴로 나를 응시했다.

‘너 혹시 뭐, 게이 그런 거야?’

진호가 차마 나를 쳐다보지 못하고 내던진 질문에 나는 벼락에라도 맞은 것처럼 몸을 곧추세웠다. 얼굴 근육이 순식간에 얼얼하게 마비되어 제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눈이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듯 둥그레지고 입이 턱 하고 벌어졌다. 뭐라고 답도 하지 못하고 얼떨떨한 표정만 지었다.

‘역시, 아니지?’

‘…….’

‘그럴 줄 알았어.’

그런 나의 반응을 자의적으로 해석한 진호는 한층 안심된다는 표정을 했다. 나는 뻣뻣하게 굳은 얼굴을 애써 움직여 입꼬리를 힘겹게 끌어올렸다.

‘뜬금없이 그게 무슨 소리야.’

겉으로는 분명 웃고 있었지만, 속에서는 심장이 금방이라도 터져버릴 것처럼 쉴 새 없이 내달리고 있었다.

‘아니. 요즘 이상한 소문이 돌아서 그래. 하여튼 씹새끼들.’

‘소문?’

‘어. 너랑 조승규랑 호모라고. 직접 본 애도 있다고.’

나는 표정 관리를 하려고 애쓰며 침을 꿀꺽 삼켰다. 조금 쌀쌀한 것 외에는 화창했던 날씨가 단박에 천둥과 번개라도 치는 것처럼 아득하게 어두워지는 것 같았다. 그냥 정말로 눈앞이 깜깜했다. 그때 분명히 누가 봤던 게 틀림없어. 승규는 괜찮다고 했는데. 하지만 난 일이 이렇게 되어버릴 걸 알고 있었어.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

‘내가 걔랑 친한 것도 아닌데.’

사실 언제나 나는 승규와의 관계에 대해서 완벽하게 떳떳하지 못했지만, 이렇게 적극적으로 부정하고 은폐하길 시도한 것은 처음이었다. 우리가 지금까지 소중하게 지켜오던 것들을 무참하게 깨트리는 것 같아 승규에게 죄책감이 들었다. 하지만 지금의 나에겐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그러게.’

‘…….’

‘나도 이상하다고 생각했어. 네가 다른 애도 아니고 조승규랑…….’

와중에도 진호가 나의 말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믿는 것 같아 안심됐다. 나는 뜨끈뜨끈하게 달아오르는 눈가를 꾹꾹 눌렀다. 진짜 어이없네. 나는 괜한 말을 덧붙이며 운동화 끝으로 흙바닥을 툭툭 찼다. 진호가 그런 나를 가만 바라보더니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어차피 헛소문이면 금방 지나갈 거야.’

‘……어.’

‘애들이 심하게 굴면 내가 말릴게.’

‘고맙다, 진호야.’

진호와 짧은 대화를 마친 나는 교실로 돌아왔다. 이미 사람들이 나와 승규의 사이를 눈치채고 있다는 사실에 제대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진호는 신뢰감 있는 얼굴로 헛소문은 지나가게 돼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게 헛소문이 아니라면? 내가 승규와 정말로 사귀는 사이라면 앞으로는 어떻게 되는 거지?

이제는 꼼짝없이 들키게 되는 건가 싶었다. 이미 의심의 눈초리가 붙기 시작했는데, 이대로 승규와 만나는 건 너무 위험했다. 지금이야 소문에 불과하지만, 실체가 있는 이상 사람들 사이에서 오고 가는 말들은 결국 눈덩이처럼 그 크기를 불릴 것이었다. 두려웠다. 승규와 헤어지고 싶지는 않았지만, 차라리 모든 일이 헛소문이 되게 하는 게 이 상황을 해결하는 최고의 방법인가 싶기도 했다.

승규를 좋아하는 마음 자체가 잘못됐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내가 남자를 좋아하는 마음에 대해서는 완전히 당당할 수 없었다. 그건 사람 대부분에게 더럽고, 부자연스럽고, 이상한 일이었다.

학교에서 승규와의 관계가 발각되었을 때 나를 손가락질하고 조롱할 친구들이 두려웠다. 보수적인 선생님들이 학생기록부에 동성애자라는 말을 써놓는 건 아닌가 두려움이 치밀었다. 부모님께 그 사실이 알려진다면 이번엔 결코 핸드폰을 뺏는 정도로 일이 끝나진 않을 것이었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나는 뭐든 아쉬웠던 적이 없었다. 나는 집도 잘살았고, 공부도 항상 잘했고, 얼굴도 눈에 띄게 빼어났고, 주변에 사람도 잘 따랐다. 언제나 사람들의 기대를 한가득 그러모았고, 눈부신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게이라는 낙인이 찍히게 되면 나는 내가 당연하게 여겨왔던 주류의 삶을 살아갈 수 없을 것이다.

어쩌면 성적이 떨어지는 것은 고작 시작에 불과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 당연하게 누려왔던 모든 것들도, 앞으로 내가 가지기를 기대했던 모든 것들도 사실은 마찬가지였다. 승규와 같이 있고 싶다는 것은 결국은 무엇이 되었든 내가 포기하기 시작해야 한다는 사실을 의미했다.

상대적으로 내가 잃을 게 너무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불행해지고 싶지 않았다. 망가지고 싶지 않았다.

사실 승규가 풍기는 쓸쓸하고 어두운 느낌은 내게 무척 매력적이었다. 처음엔 나와 달라 보이는 승규의 모습이 일단 시선을 집어 끌었다. 어른스럽고 고독해 보이는 승규가 멋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승규의 불행에 나 역시 물들고 싶다는 얘기는 아니었다. 나는 지금 내가 누리는 삶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

승규와 그렇게 헤어지고 집에 돌아와서 나는 엉엉 울었다. 아무리 쏟아내도 계속해서 울컥울컥 차오르는 눈물에 머릿속이 띵하게 울렸다.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채 씩씩 가쁜 숨을 뱉어냈다. 정말 빌어먹을 정도로, 감정 조절이 전혀 되지 않았다.

승규는 사람을 항상 이런 식으로 극단적으로 몰아갔다. 승규는 마치 내 자아를 온통 쥐고 마구잡이로 흔드는 것 같았다. 우습게도 정작 일 년 반을 만난 지운이 형에 관련한 일로는 울어 본 적이 전혀 없었다. 나는 늘 조승규가 얽힐 때만 이런 식으로 통제가 전혀 안 됐다.

이런 데서도 두 사람의 차이는 극명했다. 지운이 형은 항상 내가 지금 있는 적당한 자리에 머무를 수 있게 해줬다. 승규는 반대로 내가 그 자리에 있지 못하도록 이제까지의 나를 완전히 뿌리 뽑는 것만 같았다. 승규 앞에서 내가 지금까지 익숙한 규칙은 통하지 않았다. 전부가 뒤흔들리고, 내가 당연하게 여겨왔던 것들에 의지할 수 없게 된다.

조금 가라앉으려다가도 뭘 넣어주든 좋아할 거니, 구멍 동서가 어떠니 내게 운운했던 승규를 떠올리면 또 마음이 울컥했다. 그 옛날 승규는 나를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처럼 대해줬다. 그랬던 승규가 내게 공격적인 태도를 보이는 건 좀처럼 적응이 되지 않았다. 속이 상하고 머리가 어질하도록 서러웠다.

그렇게 억울하고 화가 나다가도 나는 갑자기 승규에게 하염없이 미안해졌다. 승규가 그런 말을 아무런 맥락도 없이 내게 폭력처럼 행사한 것은 사실 아니었다. 애초에 내가 승규에게 예의를 지키지 않은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승규에게 빌미를 제공한 것은 나였다.

그냥 오늘 승규를 만나서는 안 됐었다. 애초에 내일 지운이 형을 만날 걸 알면서 무리해서 승규를 찾아간 게 잘못이었다. 내가 승규라도 그 상황에서는 충분히 화가 났을 것 같다. 하지만 나라고 해서 승규를 일부러 엿 먹이고 싶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냥 나는 그때 승규가 너무 보고 싶었을 뿐이었다. 처음부터 섹스를 하려는 생각도…… 아, 정말 그러려던 건 아니었는데.

나는 승규를 분명히 상처 입혔다. 솔직히 상스러운 말로 나를 모욕하는 승규에게 욱해서 보란 듯이 애인이 의사라고 말했던 것도 있었다. 하지만 막상 그 말을 듣고 그렇게까지 자조적인 태도를 취하는 승규를 보자 마음이 아릿했다. 새삼 나 자신이 참 철없게 느껴져 자책하게 됐다.

막상 그렇게까지 험한 말을 하고 을러댔으면서, 승규는 결국은 나에게 삽입하지 않았다. 그게 또 속이 상했다. 왜 거기서 내 말을 들어주는 건데. 거친 척 휘두르면서도 승규는 내게 결코 완벽하게 모질지 못했다. 그래서 더 마음이 아팠다.

울다 지쳐 침대에서 그대로 잠들었다. 서서히 울음이 잦아들 즈음에는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승규가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

아침에 일어나자 눈이 퉁퉁 부어 있었다. 깜짝 놀라 급한 대로 얼음주머니를 눈에 대고 꾹꾹 눌렀다. 점심 약속이 있는데 얼굴이 이렇게 엉망으로 부어서 큰일이었다. 냉수로 세안하고 마사지를 하니 겨우 좀 부기가 빠지는 것 같기도 했지만, 어제의 흔적이 완전히 가시지는 않았다.

얼굴은 포기하고 옷이라도 지운이 형의 취향대로 맞춰 입었다. 나는 사실 무채색으로 모던하게 입는 걸 좋아했는데, 지운이 형은 내가 산뜻하고 어린 대학생 느낌 나게 옷을 입을 때 가장 반응이 좋았다.

형은 삼십 대 초반밖에 안 됐으면서 은근히 아저씨처럼 굴 때가 있었다. 그거 맞춰주는 게 크게 어려운 일도 아니어서, 나는 옷장을 뒤져 연초록색의 옥스퍼드 셔츠를 입었다. 색이 적당히 빠진 슬림한 청바지를 입고 로우탑을 신었다.

“희수야, 여기!”

약속 시각보다 오 분 정도 일찍 밖으로 나갔는데 지운이 형의 볼보가 이미 오피스텔 근처에 주차돼 있었다. 나를 슥 훑어보고는 ‘옷 너무 예쁘다’, 부은 얼굴을 슬쩍 바라보고는 ‘오늘 좀 피곤해?’ 조금은 우스꽝스럽게 느껴질 정도로, 지운이 형은 내가 예상했던 반응을 정확히 내놓았다. 나는 별다른 대답 없이 형에게 생긋 웃어 보였다.

청담동에 있는 스테이크하우스에서 점심을 먹었다. 고풍스러운 분위기의 식당은 테이블 간 간격이 넓어 식사에 충분한 프라이버시를 부여했다. 미슐랭 가이드에 나온 곳이라더니, 스테이크의 맛도 퍽 괜찮은 편이었다.

솔직히 나는 아직도 승규와 어제 있었던 일로 마음이 푹 가라앉아 있는 상태였다. 그래도 밖에 나오니까 기분이 조금은 나아지는 것도 같았다. 지운이 형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려 노력하며 신경 써서 리액션을 했다.

기왕 이쪽까지 나온 김에 쇼핑을 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는데, 지운이 형이 식사를 마치면 자신의 집으로 가자는 식으로 얘기했다. 얼마 전에 주문한 영화 DVD가 있는데 딱 희수 취향일 것 같다고 말하며 근사하게 웃었다.

굳이 집에 가잔 소리를 하는 거 보니까 형이 스킨십을 하고 싶구나 싶었다. 하긴, 이 핑계 저 핑계 대며 섹스를 피해온 지도 생각해보니 꽤 오래되긴 했다.

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까지 도망할 수만 있는 것도 아니고, 형의 집에 설치된 홈시어터는 사실 성능이 꽤 훌륭했다. 그곳에서 나를 위해 준비한 취향에 맞는 영화를 보여주겠다는데, 딱히 거절할 명분도 없었다. 지운이 형은 늘 세련된 방식으로 나를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었다.

“너 우디 앨런 좋아하지?”

“어. 그치.”

근데 형은 싫어하잖아. 덧붙이려던 말을 꿀꺽 삼켰다. 지운이 형의 아파트에 도착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영화가 재생됐다. 왜 하필이면 이런 영화를 골랐나 싶었다. 내 취향에 맞는 영화인 건 사실이지만, 이런 날 매치 포인트처럼 칙칙하고 비열하고 죄책감 자극하는 영화를 보니까 또 나는 자연스럽게 승규를 떠올리게 됐다.

런던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의 미장센은 도시의 이미지와 걸맞도록 우중충했다. 영화가 추적추적 진행되는 동안 나는 어지럽게 뒤섞인 감정이 들끓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던 승규를 생각했다.

스스로에 대한 감상에 푹 잠겨 든 채, 빗속에서 격렬하게 뒹구는 한 쌍의 연인을 무감하게 바라봤다. 스크린에서 벌어지는 섹스를 보며 살짝 끓는 듯한 숨을 내뱉는 내 옆의 남자를 돌아봤다. 순간 소름 끼치리만큼 지운이 형이 낯설게 느껴졌다.

침을 꿀꺽 삼켰다. 형이랑 이대로 헤어지는 게 맞잖아. 마음 어딘가에서 냉정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래, 지금의 감정만을 바라보면 그렇게 하는 게 맞았다. 난 더 이상 지운이 형을 만나도 좋지가 않으니까. 계속 다른 생각만 하게 되고, 가끔은 그의 존재가 거추장스럽게도 느껴졌다.

하지만 찰나의 감정이 흔들릴지라도 형과 나는 장기적으로는 괜찮은 짝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조건은 이를테면 감정을 피워내는 토양 같은 거였다. 부실한 땅에서는 어쩌다가 드물게 새싹이 피어나도 가혹한 환경에 휘둘려 꺾여버리고 만다. 그러나 비옥하고 기름진 땅에서는 예기치 못한 불운으로 인해 한 해 농사를 망치더라도 꾹 참고 기다리면 다음 해에는 잎사귀가 무성하게 돋아날 것이다.

그러니까 이건 차라리 확률 싸움에 더 가까웠다. 그리고 나는 조금이라도 더 안전한 길을 택하고 싶었다. 지금 지운이 형과의 감정이 한풀 꺾인 건 사실이지만, 언제든 계기가 마련되면 우리는 다시 불타오를 수도 있을 것이다. 다른 모든 게 완전하게 마련되어 있으므로. 이런 일은 순간의 감정으로 결론지을 게 아니라, 장기적으로 바라보고 판단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꼭 죽을 것처럼 사랑해야지 사귀는 건 아니잖아. 무릎을 바짝 잡아당겨 양팔로 껴안은 나는 애써 스스로를 다독였다. 내가 지금 사랑하고 있는 남자의 얼굴을 떠올려 보았다가, 고개를 가로저어 애써 지워냈다.

만약 지운이 형과 헤어진다고 해도, 그 이유가 절대 승규여서는 안 될 것 같았다. 그러다 나중에 승규와도 틀어지게 되면, 그때 내 순간의 감정을 통제하지 못해 지운이 형 정도의 남자를 놓쳤다는 사실이 이후의 나에게 굉장한 자괴감을 불러일으킬 것 같았다. 

“사람은 역시, 분수대로 살아야 해. 그치?”

문득 지운이 형이 내게 그렇게 말했다. 나는 가만히 고개를 돌려 지운이 형을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다시금 스크린을 향했다. 계층 상승의 욕구를 품고 파멸을 향해 달려가는 인물을 멀거니 응시했다. 사실 나는 이미 한 번 본 적이 있는 영화였다.

“응. 그렇지 뭐.”

고개를 끄덕이는 내 옆으로 형이 바짝 붙었다. 팔을 길게 뻗어 내 어깨에 두르더니, 입고 있는 셔츠 위로 은근하게 살을 주무르기 시작했다. 으음. 나는 작은 소리를 내며 몸을 살짝 뒤틀었다. 형은 아랑곳하지 않고 나를 만졌다. 그대로 긴 소파에 나를 눕히려 들었다. 나도 모르게 작게 인상을 썼다.

“희수는 요새 내가 시들한가 봐?”

“응?”

형이 그런 나를 가만히 내려다보며 입가를 뒤틀었다. 나는 조금 놀랐지만, 티를 내지 않으려 대체 무슨 말이냐는 듯 태연하게 되물었다. 

“그렇잖아. 우리 섹스도 예전만큼 안 하고.”

형이 나를 완전히 아래로 눕혔다. 나의 목줄기에 닿을 듯 다가온 손이 셔츠의 단추를 위에서부터 하나씩 톡톡 풀어냈다. 드러난 목덜미를 느긋하게 주무르는 손길에 소름이 오싹하게 돋았다. 마네킹처럼 뻣뻣하게 몸이 굳었다.

“뭐야. 형은 나랑 그거 하려고 만나?”

“그런 건 물론 아니지만.”

내 목덜미로 그대로 입술을 가져가려던 형이 동작을 멈췄다. 대신 손을 들어 내 앞머리를 스르륵 쓸어 넘겼다. 말끔하게 드러난 이마를 형의 너른 손바닥이 톡톡 두드렸다.

“일종의 직무 유기다, 윤희수?”

“뭐? 내가 섹스를 안 해서?”

“아니. 그거 말고.”

지운이 형은 이미 나를 아래에 깔고 앉아 있었다. 자세에서부터 이미 승패가 갈려 있는 구조였다. 형은 나를 고압적으로 내려 보았다. 갑자기 하반신에 묵직하게 느껴지는 듯한 압박감에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럼.”

“너 요즘 나 방치하잖아.”

지운이 형이 아무렇지 않은 듯 툭 던졌다. 형이 어딘가 집요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자 순간 나는 심장 아래편이 선득해졌다. 써늘한 느낌이 머릿골을 슁 하고 스쳐 갔다.

나는 뭐라고 말을 하려다가 입술만 오물거리고 그대로 입을 꽉 다물었다. 형은 언제나처럼 날카롭게 현상을 파악했다. 지금 내가 궁금한 것은 과연 형이 지금 형에게 보이는 것 너머의 일들도 짐작하고 있느냐였다. 만약 그렇다면…….

“겁을 먹고 그러냐. 그냥 한 말에?”

“어? 내가 언제…….”

“희수야. 나 좀 예뻐해 달라고.”

분명 팽팽하게 당겨졌던 분위기가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형은 무해하게 눈을 접고 웃었다. 드러난 내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고 커다란 개처럼 얼굴을 비비적거렸다. 나는 어정쩡한 손길로 형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윽고 나의 옷을 벗겨낸 형은 본격적으로 내 몸을 만지기 시작했다. 나는 결코 형을 밀어낼 수 없었다. 지운이 형과 결국 섹스했다. 쾌락을 가장하는 신음을 흘리면서 나는 지독한 두려움에 휩싸였다. 배 속에 차오르는 거북한 성기를 그대로 토해낼 수도 있을 것만 같았다.

***

더 이상 승규와 함께 보낼 수 없는 점심시간은 씁쓸하고 쓸쓸했다. 밥을 최대한 빨리 먹고 책상에 앉은 나는 새롭게 시작한 수학 과외 선생님이 정리해준 문제 풀이를 확인했다. 모의고사가 어느덧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다. 지난번에 내신에서 미끄러졌던 만큼, 이번 모의고사 수학 성적이 정말로 잘 나와줘야 했다.

마음이 맞는 이들끼리 삼삼오오 모여들어 낄낄거리는 교실은 적당히 소란스러웠다. 겨울에 접어든 날씨는 이제 섬찟할 만큼 추웠지만, 창문 밖으로 비치는 운동장의 풍경은 여름과 다름없이 평화로웠다. 솔직히 여전히 공부에 집중이 잘은 안 되었다. 창밖에 무신경한 시선을 힐끔 던진 나는 기지개를 쭉 켰다.

그때였다. 덜커덕거리는 소리와 함께 교실 앞문이 거칠게 열렸다. 헐떡헐떡 숨을 몰아쉬며 달려온 옆 반 학생이 무례하게 교실에 침입했다. 순식간에 모두의 시선이 그 남자애에게 몰려들었다. 그는 눈을 희번덕거리며 우리 교실을 훑어보았다. 그 애는 뜬금없이 나를 확 쳐다봤다. 그렇게 눈이 딱 마주쳤다. 나는 눈살을 가늘게 찌푸렸다. 흥분인지 흥미인지 모를 고조된 감정이 그의 얼굴에서 울렁거리고 있었다.

‘야, 너네 진짜 대박.’

‘…….’

‘지금 뒤뜰에서 조승규가 권재준 죽이려 그래!’

그 남자애가 내뱉은 말에 교실이 삽시간에 울렁거렸다. 절반이 넘는 학생들이 교실을 뛰쳐나갔다. 나 역시 무작정 뒤뜰로 달려가는 무리의 일부가 되었다. 이게 대체 무슨 소리인가 싶었다. 눈앞에 아무것도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뒤뜰 근처에 이를 때부터 비릿한 쇠 냄새가 코끝을 찌를 듯 진하게 풍겼다. 이미 바글바글한 구경꾼 무리가 현장을 둥글게 에워싸고 있었다. 내가 도착했을 땐 이미 상황은 정리되어 있었다. 승규가 재준이를 죽이려 들었다는 옆 반 남자애의 말은 결코 과장만은 아닌 것 같았다.

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거품을 물고 있는 재준이를 등지고 승규는 숨을 거칠게 몰아쉬고 있었다. 나는 점차 드러나는 끔찍한 광경에 눈살을 찌푸렸다. 어버버거리며 제대로 말도 하지 못하는 재준이는 그야말로 피떡이 되어 있었다. 피범벅이 되어 있는 승규의 주먹만으로도 상황의 폭력성을 쉬이 짐작할 수 있었다. 

승규의 눈은 분노라기보다는 차라리 광기에 비슷한 것으로 위험하게 번뜩이고 있었다. 나는 다른 모든 친구들과 같이 숨을 죽이고 갓 사냥을 끝낸 맹수 같은 승규를 지켜보았다. 퉤. 바닥에 침을 뱉어낸 승규가 여전히 바닥에 드러누워 손가락만 겨우 꿈틀거리는 재준이를 내버려 둔 채 저벅저벅 걷기 시작했다. 

부드러운 승규의 모습을 잘 알고 있는 나마저 두려움에 휩싸일 정도로, 승규는 형형한 살기를 내뿜고 있었다. 교복 바지 한쪽에 손을 찌르고 커다란 걸음을 걷는 승규와 눈이 마주쳤다. 나를 발견한 승규의 눈동자가 크게 일렁였다. 나는 승규를 아는 척도 하지 못하고 경악으로 입만 동그랗게 벌렸다.

승규야……. 나는 입 모양으로 승규의 이름을 달싹였다. 승규가 우뚝 그 자리에서 멈춰 섰다. 승규를 둘러싸고 있던 흉흉한 분위기가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승규는 조금 당황한 얼굴로 길 잃은 아이 같은 얼굴을 했다.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눈앞의 광경에 심장이 아프도록 빠르게 뛰었다.

씨발. 욕설을 읊조린 승규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분위기가 움찔 얼어붙는 것이 느껴졌다. 승규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승규가 걸어가는 방향으로 둘러싸인 사람들이 홍해처럼 길을 열어주었다. 승규가 나를 가깝게 스쳐 지나가자 나는 모아두었던 숨을 겨우 뱉었다.

승규가 그렇게 자리를 뜨는 동안, 사람들은 하나둘 재준이에게 달려들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승규가 이유 없이 사람을 저렇게까지 팰 애는 아니라고 믿었지만, 그래도 엉망으로 짓뭉개진 재준이의 얼굴이 충격적인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이미 늦었지만, 나라도 승규를 쫓아가야 하나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씨발 호모 새끼들, 드러워서 진짜.’

뒤뜰에서 완전히 승규가 사라졌을 때, 누군가 크게 소리쳤다. 사람들이 멀뚱멀뚱 나를 바라보기 시작할 때에야 나는 그것이 나를 겨냥한 말인 줄 뒤늦게 깨달았다. 대체 무슨……. 상스러운 비난에 나는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를 시작으로 모두가 봇물 터지듯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뭐야, 그 소문이 진짜였어?’ ‘그런가 봐.’ ‘그럼 진짜 둘이 붙어먹었나 보네.’ ‘아 씨발 존나 토 나와.’ 탄환처럼 날쌔게 쏟아지는 말들 속에서 나는 무력하게 눈을 껌뻑였다. 여전히 상황 파악은 덜 되었지만, 승규가 재준이를 팬 이유가 최근 교내에서 돌고 있는 우리의 소문과 관련되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었다. 

친구들이, 그러니까 내가 친구라고 믿었던 사람들이 나를 따가운 눈으로 쳐다봤다. 경멸하는 시선이 나를 훑어 내리자 온몸에 벌레가 기어 다니는 것처럼 징그럽고 수치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도저히 혼자서 그 자리에서 버티고 있을 자신이 없었다.

나는 갑작스레 무거워진 몸을 억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내가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나에게 지저분한 말이 후두둑 쏟아졌다. 전에 본 적 없이 적대적인 태도의 사람들은 금방이라도 내게 침을 뱉어도 이상하지 않을 것만 같았다.

승규는 5교시를 무단으로 결석했다. 화장실에 가겠다는 핑계로 자리에서 일어선 나도 교실로 다시 돌아가지 않았다. 나는 절박하게 승규를 찾았다. 짐작했던 대로 승규는 옥상의 창고에 틀어박혀 있었다.

솔직히 나는 사람들이 나를 향해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적개심을 혼자서 감당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승규를 만나면 다짜고짜 왜 그랬느냐고 따져 묻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그런데도 피딱지가 묻어 있는 승규의 얼굴을 보자, 다른 무엇보다 걱정으로 마음이 왈칵 무너져 내렸다.

‘승규야.’

‘……희수야.’

서둘러 승규에게 다가간 나는 승규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매만졌다. 긁힌 자국이 난 광대뼈에 손가락이 닿자 승규가 인상을 찌푸렸다. 나는 한숨을 내쉬고 상처 입은 한 마리의 짐승 같은 승규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눈물이 갑자기 핑 돌았다. 일그러지는 나의 표정을 보며 승규가 아직 핏물이 묻어 있는 주먹을 교복에 벅벅 닦아냈다. 그렇게 하고도 차마 평소처럼 나의 얼굴을 만지지는 못했다.

‘웬만하면 가만히 있으려고 했는데.’

‘…….’

‘권재준 그 새끼가 너보고…… 씨발.’

승규가 내뱉은 욕설에 나는 몸을 움찔 떨었다. 진호가 나에게 넌지시 건넨 말로도 승규와 나의 관계에 대한 소문에 저열한 억측이 덕지덕지 붙어 있음을 짐작하고 있었다. 그 나잇대 남자애들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얘기란 게 사실 뻔했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대충 그림이 그려졌다. 아마도 재준이가 나를 두고 성적인 모욕을 했을 거고, 승규는 결코 그걸 가만히 둘 수 없었을 거다. 기분이 씁쓸하게 가라앉았다. 물론 나를 지키고 싶었을 승규의 마음도 충분히 이해가 갔다. 그렇지만…….

‘근데 애들이 이제 다 아는 것 같애…….’

재준이에게 폭력을 행사함으로써 승규는 추측으로만 떠돌던 우리 관계에 대한 소문에 명확한 실체를 제공했다. 그건 곧 내가 가장 두려워하던 일이었다. 내 말에 담긴 뜻을 알아챈 승규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미안해, 희수야.’

솔직히 나부터도 무척 혼란스러웠다. 감정을 하나로 정의내릴 수 없었다. 다만 그렁그렁해진 눈으로 승규를 올려다보았다. 나를 덥석 끌어안은 승규가 내게 사과했다. 미안하다고 반복해서 속삭이는 목소리가 귓가에 나지막이 울렸다. 승규에게서는 평소와 다르게 피 냄새가 훅 끼쳤다. 순간 내가 징그럽다는 듯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떠올라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내가 더 참았어야 했는데.’

‘아니야,’

‘…….’

‘나 위해서 그런 거잖아.’

나는 승규의 등을 어설프게 토닥거렸다. 승규를 걱정했지만, 한편으로는 원망스러운 마음도 들었다. 승규의 마음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었다. 그래도 그냥 승규가 거기서 조금만 더 참았더라면……. 한숨이 절로 나왔지만 이미 벌어진 일을 뒤집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괜찮아, 괜찮아. 나는 주문처럼 괜찮다는 말만 외우며 결코 괜찮아지지 않을 일들을 막연하게 예감했다.

승규는 나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재준이를 때렸을 것이다. 나는 그런 승규의 선의를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재준이의 도발에 대한 승규의 과민한 반응은 내가 두려워했던 대로 소문에 불을 지피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나와 승규는 학교에서 더러운 호모 새끼로 찍혔다. 몇몇 학생들 사이에서나 알음알음 퍼지던 소문이, 재준이가 죽기 직전까지 맞았다는 목격담과 함께 산불처럼 화르륵 전교에 번져 나갔다.

구체적으로 어떤 말들이 퍼졌는지 당사자인 나는 사실 정확히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나를 대하는 사람들의 싸늘한 태도로 보아 그것이 아주 저질스럽고 고역스러운 것임은 짐작할 수 있었다.

내가 학교에 가면 가장 친하게 지내던 진호를 포함해 누구도 나에게 아는 척을 하지 않았다. 대신 혐오스럽다는 시선을 던지며 등 뒤에서 손가락질했다. 소문은 학생 수준에서 머무르지 않은 것 같았다. 교무실에 들어가면 선생님들마저도 나를 수상쩍은 시선으로 바라봤다.

사람들의 호의 속에서 크게 어려운 일 모르고 자란 나에겐 모든 것이 처음 겪는 시련이었다. 하지만 그런 소문조차 차라리 별일 아니게 느껴질 정도로, 급우에게 학교폭력을 행사한 승규의 행동에 실질적인 처벌이 뒤따르기 시작했다.

승규는 정학을 당했다. 몸이 아프신 승규네 할머니가 학교에 오셔서 재준이의 부모님에게 이번 한 번만 용서해 달라고 싹싹 빌었다는 말이 들렸다. 병원비니 합의금이니 하는 소리가 나올 때마다 나는 우리를 위해 돈을 모으겠다고 힘들게 아르바이트했던 승규를 떠올렸다.

재준이의 어머니는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전치 6주라고 했던가. 물론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떡이 되게 얻어맞아 갑작스럽게 입원까지 하게 됐으니 그녀로서는 분노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재준이의 어머니는 승규에게 가해진 처벌에서 만족하지 않고 학교에 진상 규명을 요구했다. 아들이 별안간 학교에서 친구에게 얻어맞아야 할 이유를 납득할 수 없다고 매일같이 학교를 찾아 선생님들을 들볶았다.

재준이는 승규가 나 때문에 자신을 때렸다고 공언했다. 결국 명확한 진상 파악을 위해 우리 엄마 역시 학교로 불려왔다. 엄마는 지금까지 결코 불미스러운 일로 학교를 찾을 이유가 없었던 우아한 여자였다. 나는 엄마가 교무실에 들어갔다는 소리를 듣고 크게 긴장해 끙끙 앓았다. 엄마와 선생님들 사이에서 어떤 얘기가 오가고 있을지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학교를 방문한 엄마는 내게 전혀 얼굴을 내비치지 않고 그렇게 집으로 돌아갔다. 남아 있는 수업을 듣는 일이 가시방석 위에 앉은 것처럼 불편했다. 여전히 나를 두고 입방아를 찧는 사람들의 사이에서 또 한 번의 하루를 버텨내는 것이 버거웠다.

엄마가 대체 무슨 말을 들었고,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를 떠올려 보면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냥 이대로 땅 밑으로 푹 꺼져 영영 사라지고 싶었다.

마침내 내가 집에 들어왔을 때 엄마는 거실의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테이블에는 낮은 조도의 등이 켜져 있었다. 테이블에 팔을 괴고 이마를 쓸어 올리는 엄마의 얼굴이 초췌했다. 나를 발견한 엄마는 인사도 하지 않고 빤히 나를 바라봤다. 나는 백 번 죄인이 된 마음으로 엄마에게 걸어갔다.

‘엄마, 그게 그러니까요.’

‘희수야.’

단박에 나의 말을 잘라낸 엄마가 냉엄한 얼굴로 나를 응시했다.

‘엄마는 오늘 들은 말을 도무지 믿을 수가 없구나.’

‘…….’

‘넌 그냥 휘말린 거지?’

나를 거세게 몰아붙이기 전, 엄마는 내가 도망갈 구석을 마련해 주었다. 그건 나를 위한 일이기도 했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사실 그녀를 위한 일이기도 했다.

‘희수 네 입으로 한번 말해 봐.’

그리고 금방이라도 익사할 듯 거센 물살에 푹 잠겨 어푸거리던 나에게 그녀가 건넨 지푸라기는 지독하게 유혹적이었다. 나는 학교에 다니는 게 너무 힘들었다. 그냥 이제는 모든 게 제발 멎었으면 했다. 엄마가 하는 말처럼 차라리 그냥 재수 없게 사건에 얽혀 든 것이었으면…….

‘…….’

‘…….’

나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나를 보고 눈을 휘며 웃어주던 승규의 얼굴을 떠올렸다. 나를 안을 때 느껴지던 승규의 따스한 체온과 규칙적인 심박을 떠올렸다. 한동안 말이 없는 나를 엄마는 매서운 눈으로 가늠했다. 나는 결국 눈을 질끈 감았다.

‘……엄마 말이 맞아요.’

‘…….’

‘저는 그냥, ……저도 왜 그런 소문이 났는지 모르겠어요.’

나는 굴종했다. 우리가 함께 저지른 일로부터 혼자서 도피했다. 엄마는 아무 말 하지 않고 커피잔을 홀짝 들이켰다.

‘희수야. 인생에 도움이 되는 사람을 골라서 곁에 둬야지.’

‘…….’

‘이번 실수를 통해 너도 배우는 게 많았을 거로 생각한다.’

이윽고 입술을 뗀 엄마는 ‘실수’라는 단어로 번잡하게 펼쳐져 있는 모든 상황을 깔끔하게 정의했다. 바싹 말라가는 입술을 핥은 나는 꿀꺽 침을 삼켰다.

‘뭐가 됐든 일주일 내로 다 정리하고 와.’

‘…….’

‘엄마가 너에게 주는 마지막 기회야.’

나는 물에 젖어 손에서 부스러지는 지푸라기를 멍하게 내려 보았다. 이걸 잡는 게 맞는 답인지도 사실은 잘 모르겠지만, 마음은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

‘엄마, 잘못했어요.’

나는 엄마에게 매달렸다.

‘그런 말 듣자고 한 얘기 아니다.’

엄마는 나와 더 이상 하고 싶은 말이 없는 것 같았다. 혼자서 방으로 돌아간 나는 침대 위에 드러누웠다. 속이 미칠 듯이 울렁거렸다. 나는 승규를 생각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랑하는 승규를.

하지만 나는 이미 너무 나약해져 있었다. 몸도 마음도 너덜너덜했다. 지금 승규를 사랑하는 일이 내게는 지나치게 버거웠다. 처음에는 게이도 아닌 승규를 만나는 게 불안했고, 다음에는 성적이 떨어질 때마다 숨이 막혔고, 이제는 아웃팅의 공포에 하루하루가 견딜 수 없이 괴로웠다.

승규에게라도 기대고 싶었지만, 승규가 이 상황에서 실질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본의는 아니었지만, 승규는 오히려 재준이를 때려 상황이 악화하도록 부추겼다. 정학을 당하고 합의금을 물어야 한다는 승규는 나를 보살피기는커녕 제 한 몸을 가누는 일조차 어려워 보였다.

더할 것도 뺄 것도 없이, 승규와의 연애에 정신이 팔려서 성적이 떨어지고 학교에서의 평판도 엉망이 된 게 지금의 나였다. 나의 가장 큰 목표였던 명문대 진학이 위태로워졌다. 막다른 곳까지 밀리자 지금까지 무엇을 위해 그렇게 앞뒤 보이지 않는 것처럼 달려들었는지 허탈해졌다. 그냥 모든 것이 갑자기 초라했다.

승규가 나를 헌신적으로 사랑해 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냉정하게 말해서 승규가 나를 평생이고 책임져 줄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승규가 말하는 것처럼 아르바이트를 열심히 해서 우리의 행복한 미래가 보장된다면, 그건 차라리 동화에 가까웠다.

지금 나는 승규를 사랑한다. 하지만 나중이 되면 승규가 아니더라도 또 사랑하는 사람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엄마의 말처럼, 다음번에는 나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으로.

선택의 순간이 점점 드리웠다. 지금은 다른 누가 아닌 나를 위한 결정을 해야 할 때였다. 나는 과연 모든 걸 버리고 승규를 택할 수 있는가. 결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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