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퍽퍽. 빠르고 세게 승규가 나를 치받았다. 흐읏. 새된 신음을 내뱉은 나는 부엌의 조리대를 꽉 붙잡았다. 크읍. 아래에 힘을 주어 조여 물자 귓가에서 승규가 끓는 듯한 신음을 냈다. 사정의 순간을 예감한 나는 그대로 승규가 내 안에서 퍼지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승규는 내 안에서 토정하지 않았다. 쑥, 하고 한창 팽팽하게 부풀어 오른 성기를 승규가 내게서 뽑아냈다. 어리둥절해진 나는 눈을 깜빡였다. 승규는 그대로 내 어깨를 잡아 돌리고 나를 부엌 바닥에 주저앉게 했다.
힘이 풀린 다리가 바닥에서 하느작거렸다. 아직 채 닫히지 않은 구멍이 뻐끔거리며 쫙 오므라들었다. 손바닥으로 바닥을 짚고 겨우 고개를 들었을 때, 내 입가에 승규의 성기가 닿아 있었다. 승규는 열이 채 가라앉지 않아 일렁이는 눈으로 나를 내려다봤다.
“뭐해.”
그 눈빛과는 어울리지 않을 만큼의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나를 종용했다. 나는 말끄러미 승규를 올려다보았다.
“빨아.”
그대로 승규의 성기가 내 볼에 비벼졌다. 내 얼굴에 뜨겁게 닿아오는 승규의 성기에서는 젤과 체액이 흥건하게 젖어 흘러내리고 있었다. 코끝에 음란한 향취가 훅 풍겨왔다. 나는 눈을 꼭 감았다. 열여덟의 우리는 서로의 몸을 처음으로 알고 흠뻑 빠져 함께 갈 수 있는 거의 모든 곳을 깊이 탐닉했지만, 승규가 지금까지 내게 이런 식의 행위를 요구한 적은 없었다.
“…….”
승규와 몸을 섞다 보면 이렇게 예기치 못한 곳들에서 승규가 예전과 많이 달라져 있음을 느끼게 된다. 와중에도 승규에게 이런 새로운 습관을 만들었을 누군가에 대한 질투심이 드는 스스로가 조금 비참했다. 속눈썹을 깜빡이고 눈을 올려 뜬 나는 숨을 작게 들이쉬었다.
어차피 지금의 나에게 선택권이란 없었다. 우두둑 핏줄이 돋아선 승규의 성기를 바라보았다. 툭, 툭. 뺨 위로 성기가 퉁겨졌다. 얼굴을 움직인 나는 입술 사이로 조심스럽게 귀두를 물었다. 조금 짭조름한 맛이 났다. 살짝 치밀려는 역함을 꾹 삼켜내고 기둥을 서서히 입안으로 집어넣었다.
“욱, 우읏, 후으…….”
막상 승규가 입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하자 저 거대한 것을 도무지 끝까지 집어삼킬 용기가 나지 않았다. 승규의 성기를 반쯤 베어 문 나는 그대로 입안의 점막으로 기둥을 감쌌다. 입을 계속 오므리려고 노력하면서 쭉쭉 빨아 삼켰다. 펠라 자체를 처음 해보는 건 아니었지만 아무래도 익숙하지는 않아 자신이 없었다.
“야. 윤희수.”
“우으…….”
“제대로 해.”
그런 나의 미진한 노력이 승규는 불만족스러운 모양이었다. 승규는 거만한 지배자처럼 나를 내려다봤다. 미어터져라 성기를 물고 있는 내 뺨을 톡톡 건드렸다.
나는 숨을 흡 들이키고 다시 입을 벌렸다. 기둥이 점점 더 안으로 밀려들어 왔다. 목구멍이 건드려져 더 이상은 안 되겠다 싶을 때야 진입이 멈췄다. 이렇게 큰 걸 입에 물어본 것은 처음이었다. 얼얼하게 벌어진 입으로 나는 뭘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랐다.
어느새 내 입가에서는 타액이 질질 흘러내리고 있었다. 성기를 입에 물고 어버버하고 있는 나를 보며 승규가 쯧 짧게 혀를 찼다. 승규가 내 머리채에 손가락을 끼워 넣었다. 그대로 바짝 잡아당긴 승규가 내 입에 성기를 처박기 시작했다.
“컥, 으커억.”
승규가 골반을 움직일 때마다 귀두가 목구멍 깊은 곳을 쿡쿡 찔렀다. 입안은 마비라도 된 것처럼 감각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겨우 눈을 뜨면 한계까지 벌어진 입술로 쑥쑥 드나드는 검붉은 성기가 보였다. 지금 이 상황에서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오히려 승규에게 삽입당할 때보다도 더욱 무력해진 기분이었다.
“하아.”
승규가 나지막이 내뱉는 신음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승규의 얼굴이 아까보다 확연히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반쯤 감겨 아래로 내리깔린 시선이 나른했다. 승규가 내 머리를 한 번 세게 꽉 움켜쥐었다. 원하는 대로 나를 움직일 수 있게 된 승규는 눈에 띄게 흥분하고 있었다.
입이 아팠다. 목구멍이 쓰라렸다. 하지만 저릿한 흥분에 물들어 나에게, 혹은 적어도 나와의 행위에 몰두하는 승규의 얼굴을 가까이 마주하자 심장이 간지러워졌다. 나는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던 다리를 모으고 발가락을 꼼질거렸다. 어떻게든 승규의 성기를 다시 핥아 보려 노력했다.
“후읏.”
별안간 승규가 내 목덜미를 세게 쥐었다. 그 순간 승규의 성기에서 정액이 터졌다. 목구멍에 밀려들어 오려는 끈적한 액체에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나려고 했는데, 나를 꽉 붙잡은 승규는 좀처럼 나를 놓아줄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승규의 의도를 감지한 나는 체념하듯 눈을 감았다.
꿀꺽, 꿀꺽. 나는 승규가 토해낸 액체를 목구멍으로 삼켰다. 정액의 맛은 비릿하고 텁텁했다. 눈가에 눈물이 고인 채 나는 승규를 올려다봤다. 내 입안에 사정한 승규의 얼굴에 쾌락의 파도가 스쳐 갔다.
“하아…….”
흐물흐물해진 성기를 내 입에서 뽑아낸 승규는 나를 어딘가 애처로운 얼굴로 내려다봤다. 목덜미를 거세게 잡아채던 손바닥이 턱 부근으로 옮겨와 내 뺨을 살며시 감쌌다. 나는 눈을 깜빡였다. 순간이나마 느껴지는 다정한 손길이 과거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켜서 마음이 아릿하게 애틋해졌다.
“끝났으니까 가.”
하지만 그 순간은 정말로 짧았다. 잠깐이나마 느꼈던 그 손길이 처음부터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승규는 내게서 단호하게 돌아섰다. 나를 부엌에 내버려 둔 채 큰 걸음으로 저벅저벅 나아가 소파에 푹 주저앉았다. 비뚤게 앉아 있는 승규가 여전히 조금도 움직이지 못한 채인 나를 흘긋 쳐다봤다.
“…….”
예전의 승규는 삽입 섹스를 한 번 하고 난 후에는 내 몸 상태를 걱정하느라 안달복달이었다. 조금도 내가 움직이게 내버려 두지 않은 채, 섹스의 뒤처리부터 시작해 나를 씻기고 안정을 취하게 하는 모든 과정을 제가 도맡았다.
감히 지금의 내가 예전의 승규를 그리워할 처지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마음이 씁쓸했다. 전라의 나는 허리를 짚고 몸을 일으켰다. 입으로 다 삼켰으니 항문에서 정액을 뺄 일이 없는 건 차라리 다행이구나 싶었다.
“뭐 해.”
“나 샤워만 하구.”
하지만 승규가 말하는 대로 집에서 나서는 대신 나는 승규의 앞을 알짱거렸다. 득달같이 달려드는 승규의 질문에 내가 내놓을 수 있는 답이란 뻔했다. 집에 가면 뜨거운 물이 콸콸 흘러넘치는 욕조가 달린 쾌적한 욕실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승규와 섹스를 한 후에 뜨거운 물이 나오려면 한참을 기다려야 하는, 승규의 낡은 욕실에서 샤워하기를 고집했다.
어차피 집에 가서 다시 샤워할 생각이라 대충 물만 끼얹었다. 간단하게 몸을 씻어내고 집어 든 수건에는 승규의 냄새가 연하게 배어 있었다. 보란 듯이 알몸으로 욕실 앞에 버티고 선 나는 수건으로 몸을 닦아냈다. 승규는 그런 나를 억지로 외면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
나는 승규를 빤히 내려다보며 몸을 말렸다. 보송한 수건이 젖은 몸을 지나갈 때면 슥슥 무시할 수 없는 소리가 났다. 흘금 내게 시선을 던지는 승규와 정면으로 눈이 마주쳤다. 나는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승규를 보고 웃었다.
마저 옷을 갈아입고 소파를 향해 걸어갔다. 승규의 옆에 앉았다. 소파는 두 사람이 사용하기엔 사실 그리 넓지 않았다. 내가 앉자, 승규가 대신 일어났다. 나는 모른 척 다리를 달랑거리며 승규의 집안을 슥 훑어보았다.
승규와 섹스를 하면서 승규의 집에도 자연스럽게 자주 드나들게 됐다. 남자 혼자 사는 집에 대한 선입견을 그대로 형상화하면 승규 집이 되지 않을까 싶었다. 마찬가지로 혼자 살지만, 도우미 아줌마와 엄마의 꼼꼼한 손길로 언제나 깔끔하게 정돈된 나의 오피스텔과는 다르게, 승규의 원룸은 꼭 승규의 손처럼 투박했다.
비좁고 볕이 잘 들지 않는 공간적인 한계도 있었지만, 승규의 원룸은 기본적으로 정리도 잘 되어 있지 않고 사람 손이 탄 흔적이 거의 없었다. 그냥 잠만 자는 공간으로 방치하는 것 같았다. 내가 사는 집이 아닌데도 그런 승규의 집을 보고 있으면 한숨이 났다. 마음이 쓰이는 건 나도 어쩔 수가 없었다.
“씹질 해줬잖아. 좀 가라고.”
승규가 험한 말을 내뱉자 입이 삐죽 나왔다. 승규는 무언가를 굉장히 애써서 참아 누르고 있는 것 같았다. 여기서 더 버티면 정말로 다음이 없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나는 이쯤 해서 승규의 말을 순순히 듣는 편이 더 낫겠다고 판단했다.
“이것만 하고.”
어느새 창밖이 어두웠다. 정말로 이제는 집에 돌아가야 할 시간이기도 했다. 나는 서둘러서 가방을 뒤적거렸다. 승규의 집에 오는 길에 학교에서 챙겨온 달력을 꺼냈다.
“너 뭐 하냐.”
“승규 너 작년 달력 아직 벽에 걸려 있는 거 알았어?”
나는 먼지가 보얗게 가라앉은 겨울의 달력을 벽에서 떼어냈다. 돌돌 말려 있는 달력에서는 새 종이 냄새가 났다. 어설픈 동작으로 커다란 달력을 끌어안고 비어 있는 벽에 대 보았다. 올해 달력에서도 절반 이상을 떼어내야 했지만, 그래도 뿌듯했다.
“지금이 팔월인데 너도 진짜 너다.”
내가 흘겨보자 승규는 황당하다는 얼굴을 했다. 역시 모르고 있을 줄 알았다. 이런 일상적이고 사소한 일로 승규를 타박할 수 있는 게, 이유는 모르겠지만 묘하게 기분이 좋았다. 나는 기꺼운 마음으로 달력을 갈기 시작했다. 새로 걸린 벽걸이 달력에는 내가 다니는 학교의 로고가 박혀 있었다.
“그걸 네가 왜 가는데?”
팔짱을 단단히 낀 승규가 비뚜름하게 물었다.
“왜긴 왜야, 그냥 눈에 들어왔으니까.”
“하.”
“조승규, 내가 너한테 고맙다는 말을 기대하지는 않았어도.”
“왜 상관하냐고, 내 인생에.”
그때였다. 승규는 별안간 내게 소리를 질렀다. 예기치 못한 승규의 공격적인 태도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갑자기 물벼락이라도 맞은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왜 갑자기 소리를 지르고 그래?”
“이딴 거 누가 필요하댔어?”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승규는 씩씩 숨을 내뱉었다. 내게로 다가온 승규가 벽에 얌전히 걸려 있는 내 달력을 뜯어냈다. 그대로 바닥에 내팽개쳤다. 펄럭거리는 종이가 바닥을 기어 다녔다. 그 꼴을 바라보는 내 안에서도 뜨거운 무언가가 확 치미는 것 같았다.
“야, 이게 이렇게까지 과민 반응할 일이야?”
“윤희수 넌 왜 시키지도 않은 행동을 해?”
“이런 걸 꼭 시켜야만 해? 그냥 나는.”
“너 이러는 거 나 싫다고!”
승규가 다시 한번 소리를 질렀다. 눈물이 핑 돌았다. 잘못하면 그대로 또르르 굴러 내릴 것도 같았다. 하지만 내게도 자존심이란 게 있었다. 절대 이따위 일로 우는 모습을 승규 앞에서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번엔 가만히 있다가 봉변을 맞은 건 내 쪽이었다. 짜증이 치밀어서 승규에게서 확 돌아섰다.
“몰라.”
입술을 꽉 물고 가방을 챙겼다. 자꾸만 내 마음처럼 아무렇게나 내팽개쳐진 달력으로 시선이 갔다. 나는 승규를 돌아보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이제 네 거니까 버리든 가지든 네 맘대로 해!”
나도 질 수 없다는 듯 승규에게 빽 소리를 질렀다. 그 말을 끝으로 승규의 집에서 빠져나왔다. 차에 올라탄 후에도 흥분이 쉽사리 가라앉지 않아 운전석에 앉아 숨을 씨근씨근 내쉬었다. 순수한 호의에서 비롯한 행동인데 왜 이렇게까지 싸우게 됐는지 모르겠다. 나는 달력 하나에 예민하게 구는 승규의 태도를 이해할 수 없었다.
진짜, 별. 어처구니가 없어서. 보자 보자 하니까. 듣는 이도 없는 차 안에서 나는 혼자서 괜히 입만 삐죽거렸다. 하지만 더 이상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을 수는 없었다. 이제는 정말로 서울로 출발해야 할 때였다.
막 운전대를 잡으려고 할 때, 핸드폰 벨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나는 짜증을 내며 핸드폰을 들어 올렸다. 그대로 액정을 슬라이드해 통화를 거부하려고 했는데,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심장이 쿵쿵 뛰어올랐다. 지운이 형이었다.
[어, 희수야.]
잡아 든 핸드폰에서는 지운이 형의 목소리가 들렸다. 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도 괜스레 움츠러들었다. 나는 고개를 핸드폰을 대고 있는 오른쪽으로 살짝 기울였다. 뛰어오르는 심장을 가라앉히려 노력했다. 긴장으로 바싹 말라오는 입술을 핥아냈다.
“응. 형. 웬일이야?”
다행스럽게도 막상 입 밖으로 나온 내 목소리는 생각보다 차분했던 것 같다. 여전히 쿵쿵 뛰고 있는 심장만이 원망스러울 뿐이었다.
[애인한테 무슨 일이 있어야 전화하나?]
“아니, 그런 게 아니고.”
[막 병원 나오는 길에 너 생각나서.]
“그렇구나.”
내게 가볍게 말을 거는 지운이 형의 목소리는 지극히 일상적이고 평소와 조금도 다를 게 없어서 지금 내가 처해 있는 상황이 오히려 비현실적인 것처럼 느껴졌다. 혼란의 와중 평온을 가장하는 것은 생각보다 큰 에너지를 소모했다. 나는 그대로 운전대 위로 푹 쓰러져버리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넌 어디야? 학교? 집?]
“아니 그냥. 잠깐 밖에 나왔어.”
[밖에 어디?]
이윽고 지운이 형은 나의 행방을 물었다. 차를 세워 둔 곳에서는 멀찍한 곳에 승규가 일하는 정비소가 보였다.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냥, 교수님이 심부름시키셔서.”
[응.]
“좀 멀리 나왔네.”
나는 말끝을 얼버무렸다. 별일 아니라고 애써 되뇌어 보았지만,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고여 들었다. 지운이 형은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흠……. 무언가를 가늠하는 것만 같은 한숨 소리가 낮게 울려 퍼졌다. 혹시라도 내 말 어딘가에 수상하게 들리는 구석이 있었을까 심장이 벌렁거렸다.
“형은 퇴근했어?”
결국, 침묵을 견디지 못한 것은 나였다. 나는 평소보다 한 톤 높인 발랄한 목소리로 형의 안부를 물었다. 대화 주제를 전환하지 않으면 이대로 나는 그 자리에서 바사삭 타들어 가버릴지도 몰랐다.
[지금 나오는 길이라니까.]
“아, 맞다. 그랬지.”
[…….]
“깜빡했어.”
나는 어설픈 소리를 내며 웃었다. 하여튼 윤희수……. 지운이 형이 조금 까칠한 목소리로 타박했다. 연애 초에도 지운이 형과 통화를 하면서 이렇게까지 긴장이 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지금의 나는 사소한 실수에도 신경이 곤두설 수밖에 없었다. 내가 하는 한마디 한마디가, 지운이 형이 내비치는 조그마한 태도의 변화가 무척이나 신경이 쓰였다. 땀에 촉촉이 젖어 든 손바닥으로 핸드폰을 꽉 움켜쥐었다.
[저녁 같이 먹을까?]
지운이 형이 물었다. 학사 일정은 사실은 그렇게 빡빡하지만은 않았지만, 학교 일이 바쁘다는 핑계를 대고 지운이 형과는 대부분 주말에 만났다. 그래도 가끔은 평일에도 저녁 식사를 함께하고는 했다. 그렇지만 오늘은.
아. 형의 제안을 듣자 내 입술에서 작은 탄성이 터져 나왔다. 방금까지 승규의 성기를 실컷 빨아 댔던 입안이 잔뜩 얼얼했다.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역시 오늘은 아니었다.
“오늘은 컨디션이 너무 안 좋은데.”
[그래?]
“응. 우리 주말에 보기로 했으니까.”
[흐음. 아쉽네.]
형의 말끝이 길게 늘어졌다. 잠시 멍하게 멈춰 있던 나는 서둘러 형에게 말을 덧붙였다. 나도 당연히 아쉽지, 미안해. 지운이 형은 그런 나를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나를 꿰뚫어 보는 듯한 형의 날카로운 눈이 당장 코앞에 있는 것처럼 느껴져 오싹했다.
[그래. 그럼 오늘은 푹 쉬고.]
“으응.”
[이따 밤에 또 통화하자.]
마침내 통화가 끝을 보이기 시작하자 그제야 마음이 좀 놓였다. 나는 들릴락 말락 한 한숨을 폭 내쉬었다.
[사랑해.]
“…어, 나도.”
망설이듯 내놓은 대답을 끝으로 통화가 마무리됐다. 나는 핸드폰을 아무렇게나 주머니에 쑤셔 박았다. 하.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오 분 남짓한 전화 한 통이었는데, 다섯 시간은 섹스로 붙어먹은 것처럼 온몸에 힘이 빠졌다.
그대로 운전석에 등을 쭉 기댔다. 아직 고르지 못한 숨결에 가슴팍이 거칠게 오르내렸다. 땀이 슬슬 배어나는 이마를 손등으로 주욱 닦아냈다. 눈을 느릿하게 깜빡였다. 머릿속 역시 따라서 깜빡였다. 이제는 정말 집으로 돌아가야 해.
내비게이션을 켜고 운전을 하는 동안 지운이 형과의 통화를 복기했다. 형한테 전화가 오리라는 생각을 차마 못 해서, 통화 초반에 형의 말에 집중하지 못한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딱히 승규가 아니더라도 다른 일에 정신이 팔리면 그런 경우는 종종 발생하곤 했으니까.
저녁을 먹자는 제안을 거절한 것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승규와의 섹스가 아니라,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읽어야 할 페이퍼 때문에 피곤할 수도 있었다.
오래 사귄 만큼 지운이 형이 연인의 동선을 지나치리만큼 잘 파악하고 있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형이 퇴근할 만한 저녁 시간에 내가 집이나 학교 두 장소가 아닌 다른 곳에 있는 경우는 드물었다.
형이 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지가 걱정이 됐다. 하지만 내가 차가 있다는 이유로 교수님이 종종 자신과 관련된 잔심부름을 시키는 것을 형도 알고 있었다. 평소와 확연히 다르긴 하지만, 의심을 불러일으킬 만큼은 아니었을 거다.
“하…….”
그러다가 이렇게까지 절박하게 머리를 굴리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좀 비굴하게 느껴져서 자조적인 웃음이 터졌다. 이 정도로 승규를 들키고 싶지 않은 것은, 결국 나는 지운이 형과의 관계를 계속해서 이어 나가고 싶다는 뜻인 걸까.
솔직히 요즘의 나는 승규에게 정신이 온통 팔렸다. 그건 명백한 사실이었다.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기로 한 지운이 형과의 주말 데이트 약속보다, 아직도 작년 11월에 머물러 있는 승규 집의 달력이 훨씬 더 신경 쓰였다. 승규로 온통 번잡한 마음속에는 지운이 형이 차지하는 자리가 거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승규와 막 섹스하고 나오는 길에 지운이 형의 전화를 받는 건 솔직히 뭐랄까, 좀 찝찝한 일이었다. 목 끝까지 차올라 울렁거리는 감정의 정체는 죄책감일까.
지운이 형이 내 조건을 보고 만나는 건 아닌가 그의 마음을 의심하면서도, 사실은 나 역시 지운이 형을 진실한 마음으로 사랑하지 않았다. 결국 내가 지운이 형과의 관계를 포기할 수 없는 이유도 결국 지운이 형 자체보다는 지운이 형이 내게 제공하는 조건 때문이었다.
냉정하게 얘기해서 게이인 데다 이 정도의 조건을 갖추고 있고, 이 정도로 나와 잘 맞는 사람을 다시 만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걸 잘 알고 있다. 물질적인 풍요와 현실적인 안정. 지운이 형은 내가 지금까지 누려온, 앞으로도 누릴 삶을 상징하는 사람이었다.
승규가 없이 살아온 날들이 공허했던 것은 분명 사실이다. 승규에게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았던 그때 이후로, 누구를 만나든 내가 가진 순수한 애정에 대한 갈망은 쉬이 채워지지 않았다. 나는 만성적인 불만족에 시달렸다. 하지만 그건 단순히 나와 승규가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내가 지금 느끼는 감정은 어그러지고 말았던 첫사랑에 대한 아련한 향수일 터였다.
만약 오늘만 바라보고 삶을 산다면 나 역시 승규를 만나는 게 좋았다. 하지만 고등학교 때도 그랬고, 지금에 이르러서도 나에게 승규를 만나는 행위는 일탈적인 성격을 띠었다. 그와 나는 언제나 떳떳하지 못한 관계였다. 나는 누군가 우리를 알아채고 비난할까 전전긍긍했다. 그래서 늘 불안했다.
그러면서도 나는 승규와 다시 만나게 된 게 좋았다. 승규를 향한 마음이 또 한 번 내 안에서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심지어 승규가 내게 모질게 대하고 내 몸을 함부로 굴려도, 승규의 시선을 받고 승규의 손길을 받는 것이 좋았다.
승규를 만나면 온몸의 세포가 생생하게 깨어나 반응했다. 설령 그것이 단순히 미련이 남아서라고 할지라도, 나는 조금만 더 지금을 유예하고 싶었다. 견딜 수 없을 듯 타들어 가는 갈증이 해소될 때까지만, 타다 못한 불꽃이 까맣게 점멸할 때까지만, 그때까지만 그렇게 승규를 만나면 되지 않을까.
막연한 그리움으로 촉발된 관계는 결코 오래도록 지속할 수는 없을 것이다. 승규와 나의 관계는 사상누각이었다. 나는 승규와 그때 헤어지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상상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금을 모두 버리고 예전의 관계로 돌아가고 싶다는 얘기는 아니다.
현실적인 조건이 맞지 않았을 때, 불타오르는 사랑이 꺼져버린 자리에 남아 있는 잔해는 한때 그 자리에 있었던 순수한 감정마저 잿빛으로 물들일 정도로 너무 초라할 것만 같다.
열여덟의 나는 승규를 잃고 안정적인 인생을 얻었다. 그 후로 안락은 나의 삶에 깊숙이 스며들었다. 이미 지금의 삶에 지나치리만큼 익숙해져 버렸는데, 단 한 사람만을 위해 모든 것을 깨트린 후에도 다시 아무렇지 않은 듯 잘 살아갈 수 있을까?
어쩌면 나는 지금도 승규를 사랑하고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봤을 때 중요한 것은 순간의 열정보다는 지속적인 안정감이다. 승규와의 만남은 궤도로 돌아가기 전의 잠깐의 외도였다. 다시 지펴진 마음이 부디 얌전히 사그라질 때까지만, 그렇게 이어질.
생각에 푹 잠겨 있다 보니 어느새 오피스텔의 주차장이었다. 차의 시동을 끄면서 정리하자 그냥 지금까지 내가 했던 모든 생각이 불현듯 우습게 느껴졌다.
승규와의 관계. 승규와의 사랑. 승규와의 미래. 솔직히 이런 건 지금에 와서 아무런 의미 없는 가정이었다. 단순히 달력을 가는 것에조차 예민하게 반응하며 나를 자신의 삶에 들이기를 거부하는 승규가, 예전처럼 있는 그대로의 날 완전히 받아줄 것 같지도 않았다. 결국 위태로운 지금만이 우리의 균형이었다.
***
승규는 아르바이트를 한다고 바빠졌다. 학교가 끝나면 고깃집에서 숯불을 나르고, 새벽이 밝아 오면 편의점에서 카운터를 지켰다. 당연하게도 정작 학교에 와서는 늘 녹초였다. 수업시간이 되면 꾸벅꾸벅 졸더니, 급기야는 책상에 엎드려 자기도 했다. 그렇다고 해서 선생님 중 누구도 그런 승규를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처음에는 평소보다 무척 지쳐 보이는 승규의 모습이 마냥 걱정스러웠다. 집에서 아버지가 마시는 건강 음료를 몇 개씩 빼돌려다가 승규에게 건네면 승규는 부스스 웃곤 했다. 그 웃음에는 어딘가 마음을 저릿하게 하는 구석이 있었다. 겨우 열여덟밖에 안 된 나이인데도 삶의 고단함을 고스란히 비추고 있는 승규의 얼굴을 보면 마음 한구석이 찡하고 안쓰러웠다.
승규의 아르바이트가 늘어나면서 변화하는 것은 비단 학교생활뿐만이 아니었다. 부쩍 바빠진 승규의 하루하루는 나와의 연애에도 슬며시 균열을 만들어 냈다. 심지어 나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순간에도 승규는 항상 어딘가 피로에 젖어 있었다.
늘 수면 부족에 시달리는 승규는 예전보다 어딘가 멍했다. 내가 무슨 말을 건넬 때도 나른한 얼굴로 정신을 놓고 있는 경우가 허다했다. 섹스 자체에 엄청난 의미를 부여하고 싶지는 않지만, 자연스럽게 우리 사이에서 오가는 스킨십도 훨씬 뜸해지고 그 농도가 옅어졌다.
걱정도 하루 이틀이었다. 계속해서 반복되는 승규의 지친 모습에 나는 승규에게 좀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나는 승규와 관련해서는 언제나 예민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나에게 쏟아부어 주던 승규가, 이유가 뭐가 되었던 나에게 예전처럼 몰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빠르게 알아차렸다. 승규가 일부러 한눈을 파는 것이 아니라는 건 알았지만, 그래도 무언가에 승규를 뺏기는 것 같았다.
‘요즘 너무 무리하는 거 아냐?’
나는 승규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응?’
승규가 부드럽게 대답했다. 나는 한숨을 폭 내쉬고 승규의 볼을 손바닥으로 감싸 안았다. 언제 이렇게 살이 쪽 내렸어.
‘너 너무 피곤해 보여.’
승규가 조금 멋쩍게 머리를 긁적였다. 별거 아니라는 듯 나를 바라보며 웃는 얼굴이 여러 가지 의미로 속상했다.
‘우리 아직 고등학생인데 그렇게까지 알바 무리해서 할 필요가 있나?’
하지만 그래도 하고 싶은 말은 다 해야겠다. 나는 지독한 피로에 시달리는 승규를 바라보며 언제나 품고 있었던 의문을 슬며시 제기했다. 나는 좀처럼 답이 없는 승규를 빤히 바라보았다. 조금 답답한 기분이 들려고 할 때, 내 머리통을 감싸서 자신에게로 당긴 승규가 이마에 입을 맞췄다.
‘희수야. 나 솔직히 마음이 급해.’
‘…….’
‘앞으로 돈 많이 벌고 싶어.’
나는 승규의 말에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랐다. 일단 내게 돈을 버는 행위는 성인의 영역이었다. 항상 어른들은 학생 때에는 돈 걱정하지 말고 공부하는 데 열중하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승규는 달랐다. 미래형을 붙이긴 했지만, 승규가 내뱉는 바람은 우리가 살아가는 지금의 현실로 바짝 당겨져 있었다.
‘우리 앞으로 같이 있으려면 내가 노력해야지.’
문득 내가 병원에서 승규에게 앞으로 그와 같이 있겠다고 말했던 때가 떠올랐다. 나와 같이 있기 위해 노력한다는 승규의 말은 굉장히 헌신적이고 그래서 애틋했지만, 내가 지금껏 생각지 못했던 부분을 건드렸던 것 같다. 우리는 어쩌면 애써 노력해야만 함께 있을 수 있는 사이라는 것.
아르바이트하러 간 승규가 한 시간 동안 일을 하고 받는 금액에 대해 처음 듣고는 깜짝 놀랐다. 뭐라고 반응해야 할지 모르고 당황에 휩싸인 내게 승규는 고등학생이라서 최저시급을 맞춰주는 알바 자리를 찾기도 어렵다고 무덤덤하게 말했다.
솔직히 그 돈 받으려고 그렇게까지 해야 해? 하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내게는 승규가 버는 적은 양의 돈보다 승규와 함께 보내는 즐거운 시간이 훨씬 더 가치 있게 느껴졌다.
차라리 아르바이트할 시간에 공부하는 편이 더 낫지 않겠냐는 말도 목 끝까지 치밀었다. 미래를 위한 투자를 위시한 어른들의 격언은 내게 깊숙이 체화되어 있었지만, 그 말을 승규에게 적용하기에는 어딘가 알맞지 않은 구석이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승규는 정말로, 지금 자신의 최선을 다하고 있었으니까. 그런 승규는 무척 절박해 보였다. 그래서 나는 승규가 하는 ‘노력’을 폄하하고 싶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내가 함부로 그런 말을 내뱉었을 때 승규에게 생겨날 여파를 책임지는 것이 조금은 두렵기도 했다.
‘요즘 내가 많이 피곤해서 미안해.’
아스라한 목소리로 말하는 승규가 나를 보고 힘없이 웃었다.
‘아니야, 승규 네가 왜 미안해.’
‘내가 더 열심히 할게.’
승규가 내 볼을 살살 쓸어내렸다. 승규에게 소중하게 다뤄지며 나는 눈을 내리감았다. 책임. 순간 머릿속을 스쳐 가는 단어는 무거웠다. 책임에 대해서 처음으로 생각하자, 순간 우리가 사는 세계가 너무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승규가 그렇게 좁히려고 애쓰던 현실의 벽이 점차 내게도 다가오기 시작했다.
막상 승규에게 같이하겠다는 약속을 꺼냈던 건 나이면서도, 나는 승규와 함께하는 미래가 잘 그려지지 않았다. 지금 이렇게 승규와 가까운데도, 앞을 내다보면 어딘가 서먹서먹한 기분이 들었다.
지금 나와 보내는 시간을 좋아하는 만큼이나, 앞으로의 우리가 보낼 시간에 대해서도 미리 걱정하는 승규의 마음을 알 것 같기도 하고 모를 것 같기도 했다. 아니, 아마 나는 결코 승규를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나는 나를 갑갑하게 조여 오는 모든 것들에 대해서 외면하려 애썼다. 그래도 나는 지금 승규가 좋으니까, 승규와 함께 있을 때는 승규가 나의 전부처럼 느껴지니까.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
승규는 주말에도 알바를 했고, 나는 주말에도 학원을 갔다. 학원이 끝나면 늘 엄마가 차를 가지고 직접 데리러 오기 때문에 엄마의 시야에서 벗어난 일을 하는 일이 불가능했다. 그러던 어느 날, 모임에 참석하게 된 엄마가 나를 데리러 올 수 없다고 말했다. 그 소식을 듣고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사람을 따로 보내겠다는 엄마를 굳이 뿌리쳤다.
마음이 설렜다. 나는 학원을 마치고 승규가 일하는 편의점을 찾을 생각이었다. 주말에는 얼굴을 볼 수 없어서 아쉽다고 말하던 승규가 떠올랐다. 승규 안 그래도 일하느라 많이 힘들 텐데, 찾아가서 깜짝 놀라게 해 주면 기뻐하며 나를 반길 것 같았다.
정확한 위치를 몰라서 근처에 다 와서 조금 헤맸다. 하지만 곧 승규를 볼 수 있다는 생각에 조금도 짜증이 나지 않았다. 마침내 승규가 일하는 편의점을 발견한 나는 유리문을 열었다. 주머니가 달린 조끼 유니폼을 입고 카운터에 서 있는 승규가 보였다.
그러나 승규에게 인사를 하는 대신 나는 그대로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카운터에는 우리와 나이가 비슷해 보이는 여자애가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앞머리를 일자로 내린 여자애는 살랑살랑 부드러운 눈웃음으로 승규를 올려다보며 조잘거리고 있었다. 마주 보고 대화하는 분위기가 무척 말랑거렸다. 둘이 나누는 대화에 귀를 기울여 보니 저 여자애의 정체는 승규와 교대로 일하는 편의점 알바인 모양이었다.
‘어! 희수야!’
‘…….’
‘여기는 웬일이야?’
그때 나를 발견한 승규가 환하게 웃었다. 하지만 나는 표정 관리가 되지 않아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슬쩍 숙였다. 승규가 근처 학교 여자애에게 고백을 종종 받기도 했다는 말은 풍문으로 들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 학교는 남학교이기 때문에 정작 승규와 여자가 함께 있는 모습은 지금까지만 나의 상상으로만 남았다.
그리고 막상 현실로 이루어진 상상은 내가 막연하게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기분 나빴다. 나는 단순히 승규와 여자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어서 화가 난 게 아니었다. 승규의 곁에 있는 여자라는 존재에서 시작해 순식간에 뻗어 나가 머릿속을 점령하는 무수한 가능성이 마치 촘촘한 그물처럼 나를 꽉 옭아매었다.
‘희수야, 이리 와.’
얼굴이 급격하게 어두워진 내가 문가에서 쭈뼛거리는 사이, 여자애가 승규에게 인사를 하고 나를 스쳐 지나갔다. 그다지 크지 않은 편의점 점포에는 승규와 나 둘만 남았다. 얼굴이 혼자 붉으락푸르락하는 나를 승규가 난처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나는 심장이 땅끝까지 떨어진 기분으로 승규에게 걸어갔다.
‘쟤 너 좋아하나 보다.’
‘어?’
나는 별안간 툭 하고 말을 던졌다. 승규가 당황한 듯 되물었다. 나는 눈을 슬쩍 내리깔았다. 그냥, 승규를 바라보는 그 여자애의 눈을 보고 직감적으로 느꼈다. 나 역시 승규를 열렬하게 좋아하고 있으니까.
‘……그.’
‘…….’
‘고백받은 적이 있기는 있는데.’
난감하다는 듯 승규는 머리를 긁적였다. 설마 했더니. 나는 눈을 뾰족하게 뜨고 승규를 올려다봤다.
‘왜 그런 말 안 했어?’
‘그냥. 거절했으니까.’
나는 황당한 얼굴을 했다. 이게 이렇게 넘어갈 일은 도저히 아닌 것 같았다. 그럼 거절했다면서 왜 그렇게 다정하게 바라보면서 웃어주는데? 너는 거절했다지만 그 여자애는 마음 접은 것 같지 않던데? 다다다 쏘아붙이고 싶은 말이 한가득 차올라 목 끝에서 들끓었지만 정작 한마디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희수야, 삐졌어?’
‘…….’
‘나 너 얼마나 보고 싶었는데.’
아무런 말도 없이 입술을 꾹 다물고 있는 나를 보며 승규가 안절부절못했다. 나 삐진 건가. 승규의 질문에 헛웃음이 나왔다. 이런 마음 상태를 단순히 삐졌다고 표현하기엔 단어의 무게감이 좀 떨어지는 것 같았다.
아니, 사실 이건 명확히 표현하자면 승규의 잘못은 아니었다. 승규가 그 여자애를 보고 웃었든, 그 여자애가 승규를 좋아하든, 승규는 나를 좋아하고 있다. 다만 이건 불현듯 나를 방문한 아주 불길한 가능성에 관한 이야기였다. 승규는 나를 좋아하고 있지만, 사실은 나를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다.
왜냐면 승규에게는 더 편한 길이 있으니까.
‘왜 그래 희수야?’
결국은 카운터 밖으로 빠져나온 승규가 내 어깨를 꽉 잡았다. 고개를 푹 기울여 새빨갛게 달아오른 나의 얼굴을 살폈다. 승규는 너무 다정하고 다감했다. 그래서 나는 더욱 견딜 수가 없어졌다. 결국 나는 참지 못하고 빽 소리를 질렀다.
‘넌 여자도 좋아할 수 있으니까!’
승규는 잔뜩 흥분한 나를 두고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냥, 희수야.’
‘…….’
‘……그건 남자니까 당연하잖아.’
조심스럽게 내뱉은 승규의 대답이 오히려 내 마음 한쪽을 더욱 와르르 무너지게 했다. 승규에게는 너무나 당연하고, 나에게는 결코 당연할 수 없는 것. 눈물이 핑 고이려는 것을 꾹 참았다. 나는 뜨끈하게 달아오르는 눈가를 문질렀다.
‘난 너랑 달라.’
‘그게 무슨 말이야.’
‘난 애초에 여자가 좋지 않다고.’
나는 승규에게 커밍아웃했다. 이미 승규와 사귄다는 데서 내가 남자를 좋아한다는 건 어쩌면 당연한 얘기였지만, 정체성의 문제에 대해서 확실한 방점을 찍은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당시 나에게 남자를 좋아할 수밖에 없다는 ‘문제’는 사실 자아에 굉장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 요소였다.
여자를 좋아할 수도 있는, 내가 아니라면 어쩌면 남자를 만날 일이 없었을 승규에게는 그렇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내가 굳이 학교를 끝나고 아르바이트를 몇 개씩 해야 하는 승규를 결코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승규는 게이이냐 아니냐의 문제를 두고 고민하고 의심하고 괴로워해야 하는 나를 결코 완전히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희수야. 너한텐 그게 그렇게 중요해?’
‘…….’
‘어차피 나는 너만 좋아하잖아.’
그때 불쑥 손님이 편의점 안으로 들어왔다. 카운터를 다시 내린 승규는 계산을 마친 뒤 손님에게 정중하게 인사했다. 그러는 중에도 승규의 시선은 계속해서 점포 한구석에 처박혀 있는 나에게 힐끔힐끔 닿아 왔다. 불안에 젖어 화를 내는 와중에도 결코 편의점을 떠나지는 못하는 나는 승규가 나를 더 거세게 잡아주길 바랐다.
‘희수야.’
‘승규 너는 언제든 나 대신 여자 만날 수도 있잖아.’
다시 편의점에는 우리 둘만 남겨졌다. 승규는 여전히 어깨가 축 처져 있는 나를 두고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는 것 같았다. 다시 카운터 근처로 걸어간 나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토해냈다.
‘그게 무슨 말이야.’
‘…….’
‘내가 널 두고 어떻게 그래, 희수야.’
승규는 팔을 뻗어 나의 손을 꽉 잡았다. 승규의 손은 아주 커다랗고 안온했다.
‘나는 처음부터 너밖에 없어.’
승규는 그렇게 나를 놓아주지 않을 것처럼 꽉 쥐었다. 단단한 눈빛으로 말하는 승규는 확신으로 가득했다. 나는 가쁜 숨을 토해냈다. 그렇게 승규가 나를 떠나갈지도 모른다는 공포는 일시적으로 가라앉았지만, 사실 우리 사이를 가르는 근원적인 차이에 대한 고민은 날이 갈수록 깊어만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