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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50/50)

에필로그

불은 귀하다. 일련의 전쟁을 겪으며 그것은 더욱 존귀해졌다. 밤에, 방 안의 어둠을 밝힐 수 있는 이는 왕국에서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리고 지금, 칼리번은 양초를 쓸데없이 낭비하고 있었다.

“…….”

밤새도록 국정을 돌봐야 하는 입장도 아니었고, 횃불을 들고 경비를 서는 병사도 아니다. 마물 혼혈이라 시력도 좋은 편이었다. 아직 새벽이라 주변에 어둠이 깔렸다고는 하나 굳이 불을 켜야 할 이유는 없었다. 무엇보다도 칼리번 자신이 이런 사실들을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약간의 변명을 해 보자면, 그는 에레즈 프리드웬이라는 권력 옆에서 사치를 부리고자 함이 아니었다. 지하 생활의 후유증으로 어둠을 두려워해서도 아니었다. 단지… 마지막을 정리하기 위한 불이 필요했을 뿐이다. 망설임이 긴 탓에 밤을 새운 것이 잘못이라면 잘못이었다.

그러나 더는 지체할 수 없다. 한참이나 일렁이는 어른거리는 불길과 눈싸움을 하던 칼리번은 손을 펼쳤다. 살아 있는 불길만큼은 아니나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반짝이는 실뭉치가 그의 손안에 있었다. 그는 그것을 작은 불길에 태웠다. 백금을 녹인 것처럼 가느다란 실 자락은 불길에 금세 스러지고 말았다. 작은 불길이 순간적으로 화르르 크기를 키웠다가, 먹이가 흩어지자 배가 불렀는지 금세 잠잠해졌다.

칼리번이 지닌 백금사는 너무 적고 가는지라, 다 태우고 나서도 한 줌 재조차 남지 않았다. 칼리번은 굳은살이 박인 손으로 촛불을 비벼 껐다. 그러고는 주섬주섬 자리에서 일어섰다.

막사 밖은 새벽이었다. 어둠 속을 표류하던 달은 세상 저편으로 잠긴 지 오래였다. 해도 없고 달도 없으니 어찌 보면 아침 중 가장 어두운 시기였다. 그래도 조금만 더 인내하면 곧 찬란한 빛을 맞이할 것이다.

칼리번은 모두가 잠들어 텅 빈 왕성을 걸었다. 차가운 새벽 공기에 내내 흐릿했던 정신이 맑아졌다. 그가 도착한 곳은 동쪽 성문 앞이었다. 그곳에는 이른 시간에도 몇몇 사람들이 보였다. 왕성의 보호막을 담당하는 성녀들과 경비를 서는 병사들은 밤을 새웠는지 다가올 교대를 고대하고 있었다. 그리고….

젠이 성녀들과 함께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다. 때 이른 채비에 짐을 실은 말은 졸린 지 푸르르, 하얀 콧김을 뱉어 냈다. 젠을 제외하면 총인원은 다섯 명이었는데, 특이한 점은 한 명이 소녀라는 점이었다. 칼리번은 어째서인지 유독 그 소녀가 눈에 들어왔다. 까만 시선이 느껴졌는지 소녀와 시선이 마주쳤다.

‘저 아이는….’

칼리번이 에어리얼의 몸이었을 당시 검은 숲에서 본 소녀였다. 젠과 같은 기사가 되고 싶다며 조잘거리던 그 소녀…. 마물 혼혈의 습격을 피해 시체 속에 숨어 있었는데 무사히 구출된 모양이었다. 그사이 자라 있어 알아보는 데 시간이 걸렸다. 발랄했던 이전과 달리 차가워진 표정도 한몫했다.

역시나 소녀는 칼리번을 알아보지 못했다. 아이는 홱 시선을 돌리고는 짐을 정리하는 데 집중했다. 칼리번도 고개를 돌렸다. 다른 성녀들과 한창 대화 중인 젠이 칼리번을 발견하고 다가오고 있었다.

“지나치게 이르다.”

칼리번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그것은 시간적 의미이기도 했고, 시기적 의미이기도 했다. 새벽이라고는 하나 밤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이래서야 영광을 안고 떠나는 것이 아니라 몰래 도망치는 것 같지 않은가? 최소한의 사람들에게만 알린 후, 홀연히 떠나려는 태도도 못내 아쉬웠다.

“그야 당연하지! 왕실 직속 호위 기사이자, 왕실 재건 기사단 내 13 기사단의 단장인 데다, 연합 부대의 지휘관을 겸했고, 한때는 용병대 검고 썩은 어금니의 부대장이었던 바로 이 몸께서 자유가 됐다는 소문이 널리 퍼지면 다들 놔주지 않을 테니까! 그전에 얼른 도망쳐야지.”

“…….”

“하하, 특히나 로위나는 볼만할걸? 내가 없으면 일이 세 배는 늘 테니 말이야. 에레즈 녀석도 고생 좀 할 거다. 이런 인재를 귀하게 대우해 주지는 못할망정 마구 굴린 복수다 이거야.”

이 늙고 불쌍한 알파를 떠나보내고 후회하는 모습을 보지 못하는 건 좀 아쉽긴 하지만. 젠은 씩 웃으며 농담을 덧붙였다.

“맞다. 왕께서 여태까지 버틸 수 있었던 건 전부 네 덕분이다, 젠.”

“엥?”

“지난 8년간 고생이 많았다.”

칼리번은 젠의 허세를 여과 없이 그대로 수긍했다.

“…아, 이것 참. 여전히 재미없는 녀석이라니까. 일부러 뻐길 때는 적당히 깎아내려 줘야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떠받들어 주니까 아무리 나라도 민망하잖냐.”

젠은 칼리번의 어깨를 주먹으로 꾹, 꾹 힘을 주어 밀었다. 그러나 칼리번은 물러날 기세가 없었다.

“네가 갑자기 꼬맹이를 던져 준 탓에 몇 년을 낭비한 줄 알아?”

“…젠.”

“그러니까 이제부터는 네가 보살펴라. 순 울보에 생각보다 음흉한 구석이 있는 놈이지만. 그래도 내가 쥐어 패 가며 키워 놨으니까 그럭저럭 쓸 만은 할 거야.”

칼리번은 제 어깨에 장난을 치는 젠의 주먹을 가볍게 감싸 쥐었다.

“…전하께는 오히려 내가 도움을 받고 있다.”

“그래?”

칼리번은 젠을 손을 내렸다. 본의 아니게 악수를 하는 모습처럼 보였다. 젠은 칼리번과 낯간지러운 짓만은 절대 하지 않겠다는 듯, 장난스럽게 그의 손을 쳐 냈다.

“젠.”

“왜?”

“떠나지 마라. 전하에게는 아직 네가 필요하다.”

그러나 칼리번은 젠을 잡은 채 놓지 않았다.

“이제 와서 무슨 소리야? 짐까지 다 쌌는데. 거기다 에레즈와는 이미 논의가 끝난 일이야.”

“그분은… 차마 널 잡지 못하는 거다.”

칼리번은 결국 해서는 안 될 말을 하고 말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에레즈가 젠에게 의지하고 있다는 것은 누구라도 알 것이다. 아직 왕성은 불안정했다. 이럴 때 그녀가 떠난다면….

“그래서.”

“…음?”

“이 이상 나한테 뭘 어쩌라는 거냐! 남아서 애새끼 뒤처리를 더 해 주라고? 금화 주머니 하나 찔러 주지 않으면서, 고작 몇 마디 말로 날 붙잡을 수 있을 것 같아?”

“보수를 원한다면….”

“됐어. 이젠 질렸다!”

칼리번이 슬쩍 대가를 언급하자, 젠은 단박에 잘라냈다.

“난 네 대신밖에 안 돼. 진짜가 왔으니 임시직은 물러나 줘야지.”

“…!”

젠의 말에 칼리번은 두 눈을 크게 떴다.

“그렇지 않다, 젠…!”

“에레즈는 널 살리기 위해 성검을 포기했어. 이제 그 녀석의 검은 너야, 칼리번!”

젠은 더는 칼리번의 말을 듣지 않겠다는 듯 그의 오른팔을 툭 쳤다.

“그러니까 앞으로는 네가 지켜라.”

칼리번이 지하에 있었던 세월 동안 에레즈의 곁을 지킨 것은 젠이었다. 그런 그녀가 스스로 자신은 대신일 뿐이라고 선언했다. 칼리번은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한 적도 없고, 입 밖으로 꺼낸 적도 없었다. 그러나 막상 젠의 입에서 그 말이 나오니, 칼리번은 자신의 내면 깊은 곳에 그러한 어둡고 진득한 감정이 고여 있음을 깨달았다.

“…….”

그렇기에 칼리번은 더욱… 그녀를 보내기가 버거워졌다.

“하하, 아예 돌아오지 않겠다는 것도 아니고… 평생 안 그러던 녀석이 갑자기 왜 이런대?”

보다 못한 젠이 그의 팔을 툭 쳤다.

“…….”

그녀의 말대로다. 칼리번은 그답지 않게 망설이고 주저했다. 이별을 앞두고 그녀는 되도록 좋은 모습만 보이려는 것인지, 매 순간 가벼운 태도로 일관했다. 그러나 칼리번은 바다에 던져진 바위처럼 끝없이 가라앉을 뿐이었다.

“…나한테도 네가 필요하다.”

“뭐…?”

“지난 세월 동안의 일은 당연하고, 다시 살아난 후에도… 네가 중간에서 도움을 주지 않았다면 그분께 다가가지 못했을 거다. …갈피를 잡지 못했겠지.”

칼리번은 더듬더듬 말했다. 장난스럽게 이죽거리던 젠은 그녀답지 않게 진지하게 들어 주었다.

“젠, 너에게는 항상 도움만 받았다. 그러니 이제는 내가 너를 도와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전하의 곁을 떠날 수 없다.”

칼리번의 표정은 화살을 맞은 것처럼 쓰라렸다.

“뭔 소리를 하나 했더니, 이 돌대가리가… 누가 억지로 따라와 달래?”

“하지만 우리는 같은 용병대의….”

“정신 차려, 검은 어금니는 8년 전에 끝장났어!”

젠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일갈했다.

“…….”

더없이 진지했던 칼리번은 입을 다물었다.

“왕성을 복구하고 정비하는 일도 중요하지. 에레즈를 등에 업고 어깨에 힘을 주는 것도 재밌긴 해. 하지만 난 태생이 떠돌이야. 어쩔 수 없이 발을 붙이고는 있었지만….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한곳에 너무 오래 머물러 있었다. 지금이 아니면 떠나지 못할 것 같아서 그래. 나한테도 해야 할 일도 있고, 하고 싶은 일도 있으니까.”

젠은 이런 설명까지 해야겠냐는 듯 두 팔을 펼쳐 시원하게 기지개를 켰다.

“…무엇보다도 너랑 에레즈가 지내는 모습을 보니까, 이제는 마음 놓고 자리를 비워도 될 것 같거든. 내가 떠나기 전까지 너희 둘이 데면데면할까 봐 얼마나 고민한 줄 아냐?”

젠은 이제 하품까지 했다.

“참나, 갑자기 사라져서 걱정까지 했는데…. 기껏 챙겨 줬더니만 에레즈랑 둘이서 열흘 동안 연락도 없이 사라져? 감히 은혜를 원수로 갚아?”

“그건…… 미안하게 됐다.”

칼리번은 고개를 푹 숙였다.

“에레즈 녀석이 갑자기 아파서 쉬는 척하느라 죽을 뻔했거든? 성녀님들은 전염병이 다시 발생한 줄 알고 에레즈의 처소 앞에서 막무가내로 들어오려고 하는데, 그거 말리느라 제법 간담이 서늘했지….”

“…….”

칼리번은 머리가 돌덩어리가 될 듯 도저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그래도 뭐, 그 후에는 숙소도 둘이서 같이 쓰는 것 같기도 하고…. 나한테 귀찮은 일이 없으니까 결과적으로는 잘된 거겠지…. 아, 맞다. 귀찮지는 않지만, 짜증 나는 거 한 가지.”

“음?”

주절주절 말하던 젠의 표정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그 뒤로 대놓고 그 녀석 냄새를 풍기고 다니는 건, 나한테 너무 가혹한 거 아니냐?”

“……아.”

“오메가의 체취를 새로운 방식으로 숨겨 보겠다면 말릴 수는 없다만…. 너희 둘 다 아는 내 입장에서는 좀 힘들더라.”

“…진즉에 말하지 그랬나.”

까만 눈을 끔벅 거리만 하던 칼리번은 뒤늦게 제 팔에 코를 묻었다. 젠은 웃음을 터뜨렸다.

“얼마 전에 왕성으로 온 피난민에 대해서는 너도 알겠지? …사실은 피난민이 아니라 원조를 요청하러 온 전령이라는 걸.”

시원하게 웃고 난 후, 젠이 슬쩍 운을 뗐다. 칼리번은 고개를 끄덕였다. 에레즈의 가까이에 있다 보니 본의 아니게 벽돌을 나를 때는 몰랐던 일들을 보고, 듣게 되었다.

“너도 알다시피 몇몇 거대 영지는 왕성처럼 성녀의 힘으로 작은 보호막을 작동시킬 수 있어. 물론 지난 8년 동안 알테르 프리드웬이 차례차례 파괴했지만 말이야. 그런데 최근에 누군가 보호막을 작동시켰는지 젠틀린 영지로 사람들이 좀 모인 모양이야.”

“…….”

“그곳에는 인간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괴력을 발휘하는 여자가 있다 하더군. 그 덕에 버틸 수 있었다고…. 성녀인지 알파인지 아리송해서 한번 직접 가 보려고 해. 에레즈의 허락을 받은 대가로 성녀님들과 돌아다니며 구호 활동도 좀 하고 말이야.”

젠은 자신의 계획과 포부를 밝혔다.

“네가 있는 이상 왕성이 마물에게 공격받을 일은 없을 테니까. 믿고 도전해 보는 거지.”

젠틀린 영지가 폐허라면 바로 돌아오겠지만, 전령의 말대로 사람들이 버티고 있다면…. 아마도 젠은 그곳에 몇 년은 머무르게 될 것이다. 에레즈를 대신할 지휘관으로서.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 그녀는 에레즈의 의지를 충실히 따르고 있었다.

“어쩌다 보니 보모 역할에서 벗어나지는 못했지만 말이야. 젠틀린 영지 출신이 하필이면 저 녀석 하나뿐이라니.”

에휴, 어쩌다 또 어린애랑 얽혀 버려서는…. 내 신세야. 젠이 보지도 않고 고개를 까딱였다. 그러자 그녀의 등 뒤에 있던 소녀가 그 움직임을 읽고 손을 흔들었다. 계속 이쪽을, 정확히는 젠을 주시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렇군….”

어느새 다른 아이를 챙기고 있었던 것일까? 칼리번은 젠과 삶의 일부분을 공유했을 뿐, 전부를 알지 못한다는 사실이 깨달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녀에게는 그녀의 이야기가, 그리고 칼리번에게는 그 자신의 이야기가 있을 테니….

“하지만 젠 혼자서 저들을 이끄는 건 위험하다. 차라리 전하에게 부탁해서 병사를 좀 더 지원받는 편이 나을 거다.”

“인간은 걸리적거리고, 용병들은 어떻게 믿겠어?”

“…….”

“걱정하지 마. 황금 비 때문에 마물들이 약화된 상태니까. 오히려 지금이 제격이야. 아니면 네 말대로 아예 부대를 꾸려서 움직여야 할 테니 말이야.”

젠의 등 뒤로 사람들이 부르는 소리가 종종 들려왔다. 이제는 정말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만약 젠틀린 영지에 있는 여자가 성녀가 아니라 정말 알파라면… 저들은 너와 같은 길을 가지 않을 거다.”

칼리번은 어쩐지 다급해져서, 저도 모르게 말하고 말았다.

“알아. 정반대 길이지.”

젠은 의외로 태연했다. 그녀가 찾는 것은 동류다. 하지만 성녀단은 또 다른 여성 알파가 생겨나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그때는 뭐 성녀님들은 때려눕히고 그 녀석만 데리고 도망쳐야지, 뭐. 어쩌겠어?”

젠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나 칼리번은 막상 그러한 상황이 와도, 그녀가 그런 선택을 하지는 않을 것을 안다. …자신과 달리.

“…….”

이제는 붙잡을 대화거리마저 떨어졌다. 짐은 거의 정리가 다 되었는지 일행들은 성벽을 지키는 성녀들과 마지막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젠만 마무리를 지으면 떠날 것이 분명했다.

“그…….”

칼리번은 그답지 못하게 안절부절못했다. 커다란 덩치가 절절매니 젠으로서는 우스울 따름이었다. 그녀가 자꾸 큭큭거렸다.

“…….”

젠이 말한 대로 이것이 영원한 이별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그리고 그녀와는 여러 가지 사건으로 인해 헤어진 일도 잦았다. 이번이 처음도 아니고, 마지막도 아니라는 뜻이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칼리번은….

“그…동안 미안했다.”

사과가 하고 싶어졌다.

“뭐야, 갑자기! 어울리지 않게…. 전처럼 갑자기 애새끼를 맡긴 것도 아니고, 터무니없는 부탁을 강요한 것도 아니잖아.”

“……나도 모르겠다. 뭐가 미안한지….”

“세상 오래 살고 볼 일이네.”

젠은 커다란 미소를 지었다.

“그러니까 평소에 좀 잘하지 그랬냐! 너랑 지내고 나서 조용한 꼴통만큼 끔찍한 게 또 없다는 것도 알게 되었지. 넌 좀 미안해해도 싸.”

밤색 눈이 웃음으로 반쯤 접혔다.

“…….”

칼리번은 눈이 아픈 사람처럼 질끈 감고는 인상을 썼다. 말로는 버리겠다, 죽이겠다 했지만, 젠은 항상 칼리번을 도와주었다. 그러나 칼리번은 아니었다. 언제나 첫 번째 순위는 다른 사람이었다. 그래서….

간신히 눈꺼풀을 밀어 올렸을 때, 칼리번의 눈시울은 붉어져 있었다.

“그때도 느꼈지만… 정말 변했구나. 칼리번.”

그런 칼리번을 올려다보며 젠이 말했다. 그녀는 뒤늦게서야 에어리얼과 칼리번의 몸이 뒤바뀌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진실을 판가름하기 위해 왕성의 성녀들을 이끌고 자진해서 칼리번에게 붙잡혔다. 그때 마주했던 칼리번은 에레즈를 구하고자 마지막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에어리얼의 껍질을 쓰고 있는 탓에 몇 번이나 죽을 뻔했고, 다시 마주하면 죽을 것이 분명한데도.

“널 검은 어금니의 대장으로 삼은 건, 슬슬 에어리얼을 잊고 싶어서였어.”

젠은 변한 칼리번을 보게 되었으니 자신도 용병답게 대가를 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녀는 한 번도 꺼내지 않았던 본심을 털어놓았다.

“그런데 다른 사람도 아닌 네가 오메가가 되어서 솔직히 좀 놀랐다. 혹시 내가 널 대장으로 삼아서 에어리얼 녀석이 저주를 내린 거 아닌가, 하는 말도 안 되는 생각도 들었지.”

“…….”

“널 끝까지 도와준 건, 에어리얼을 중간에 포기했던 과거에 대한 죄책감 때문일지도 몰라.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 몸이 대단하기는 하지만, 너나 에레즈나 징징 울며 매달릴 정도로 대단한 놈은 아니라 이거야.”

아, 이러다 몇 달 뒤에 돌아올지도 모르는데…. 젠은 민망한지 뒤통수를 벅벅 긁었다.

“너도 알다시피 나는 인간도, 알파도 아니다 보니 살면서 짜증 나는 일이 한두 개가 아니었거든? 그런데 살다 보니까 머리는 텅텅 비었는데 겉모습은 멀쩡한 알파가 생기더군. 덕분에 일하기가 좀 편해졌지.”

젠은 자신의 눈도 붉게 물들어 있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일부러 웃음을 섞어서 말했다.

“네가 나 대신 앞에 서 줘서, 그리고 싸울 때는 등 뒤를 지켜 줘서…. 나야말로 고마웠다.”

젠은 항상 두 번째 자리에 섰었다. 그것은 죽었다고 여겼던 에어리얼과의 약속 때문이기도 했고, 그녀 자신이 버티기 힘든 탓도 있었다.

“잘 있어라, 동생아.”

뭐, 우리 같은 마물 혼혈한테 형제 같은 게 있을 리는 없지만 말이야. 그녀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떠났다.

칼리번은 젠 일행이 성문 밖으로 나가고 성문이 닫힐 때까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연인보다도 편한 사이였지만, 결국에는 헤어져야만 한다. 칼리번을 변하게 한 것은 그녀가 아니었고, 그녀가 찾는 것도 칼리번이 아니었으므로.

한참 후, 칼리번은 무거운 발걸음을 돌렸다.

“……!”

그리고 조금 떨어진 곳에 한 사내가 서 있었다. 칼리번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만큼이나 한 자리에 오래 머물렀을 사내는 낡은 옷을 입고, 후드도 얼굴의 절반 이상을 가린 채였다. 어둠이 채 지워지지 않은 새벽이었다. 그런데도 칼리번은 누군지 알아볼 수 있었다.

“…에레즈 님.”

추억에 붙잡혀 있었던 칼리번의 걸음이 빨라졌다. 그런 그를 반기듯 에레즈가 살짝 후드를 내렸다. 후드 속에 가려졌던 찬란한 금발이 드러났다. 그는 조금씩 밝아 오는 동녘만큼이나 옅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기뻐서가 아니라 칼리번을 맞이하기 위한 미소였다.

“왜 이곳에 계셨습니까? 저나 젠을 부르셨다면 떠나기 전에 인사를 나눌 수 있었을 텐데….”

칼리번이 묻자 에레즈는 고개를 저었다.

“…나는 전날 밤에 이미 대화를 나눴으니 괜찮아. 마지막은 당신과 보내는 것이 맞는 것 같아서.”

“그럼 어째서 여기까지….”

“당신을 데리러 온 거야.”

에레즈는 칼리번에게 손을 내밀었다.

“…….”

설마 젠과 함께 떠날 것으로 생각한 것일까?

<당신이 내 본모습을 보고 도망쳤을까 봐…. 계속 지켜보고 있었어.>

러트를 보낸 칼리번이 묵묵히 비를 맞고 있을 때, 동굴 입구에 숨어 몰래 지켜보았을 에레즈를 떠올렸다. 젠에게는 미련도, 미안함도 많았지만, 그녀를 따라 떠날 가능성은… 애석하게도 없었다. 에레즈 프리드웬이 여기 있었으므로.

“…감사합니다.”

칼리번은 기꺼이 에레즈의 손을 잡았다. 이른 시각이라고 하나 사람들의 눈에 띌 수도 있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두 사람은 본성으로 향했다. 포장이 여기저기 벗겨지고 흙이 드러난 길을 천천히 걸었다. 복구가 한창 진행 중인 길목이다 보니 작업 시간 외에는 오가는 이가 없었다. 텅 빈 거리를 걸으니 마치 세상에 단둘만 남은 것 같다.

두 사람 사이의 침묵은 무거웠다. 칼리번은 평소와 같은 무표정이었다. 그래서 아무렇지 않아 보였으나 에레즈는 무척 초조해했다. 왜냐면 칼리번이 묵묵히 땅만을 보고 걷기 때문이었다. 그가 한결같이 시선을 던지는데도 말이다.

무엇이라도 좋으니 기쁘게 해 주고 싶은데…. 에레즈는 타박, 타박 걸으며 심각하게 고심했다.

“…아.”

그러다 에레즈가 작게 탄식을 내뱉었다. 아무래도 가닥을 잡은 모양이다.

“칼리번, 미처 말하지 못한 이야기가 있어.”

“…네?”

한번 깨닫자 안달이 나는지 에레즈가 급히 말했다. 갑작스럽게 분위기가 전환되자 칼리번이 드디어 고개를 들었다.

“그게 말이지, 사실은 당신이 깨어나면 바로 전하려 했거든…. 그런데 그동안 굉장히 많은 일들이 있었잖아?”

“확실히… 그랬었죠.”

칼리번은 고개를 끄덕였다. 에레즈가 몸이 열 개라도 모자를 정도로 바쁘기도 했다.

“생각해 보면 밤마다 대화를 나눴으니 기회가 많았는데 이제야 알려 주게 되다니…. 미안해.”

“저는 괜찮습니다.”

에레즈가 하려는 이야기가 도대체 무엇인지는 도통 모르겠으나, 저토록 난감해하는 모습을 보니 칼리번은 무엇이든 용서할 수 있었다. 심지어 에레즈의 저 찬란한 금발이 사실은 염색한 머리카락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음…. 그러니까 8년 전, 우리가 헤어졌을 때의 일이야.”

칼리번의 관심이 쏠리자 에레즈는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그때 당신이 말한 대로 스승님과 나는 북부로 가서… 당신의 누이에게 몸을 의탁했었어.”

“알리샤… 말입니까?”

전혀 예상치 못한 존재가 에레즈의 입에 오르자 칼리번의 목소리가 휘었다. 아주 잠시, 에레즈의 기억에 침투한 적이 있어 두 사람이 북부까지 간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런데 설마 진짜로 도움을 받았었다니….

“응.”

칼리번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흔들리자 에레즈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북부는 황량한 땅이다. 거주하는 사람도 적으며 그래서 마물의 침범도 비교적 드문 편이었다. 젠이 에어리얼을 보호하던 당시 그쪽으로 도망을 쳤던 것도 그래서였다.

“칼리번, 당신이 부탁해서 여기까지 왔다고 하니까 자리를 잡을 때까지 의식주를 전부 부담해 줬어.”

젠도 그렇지만, 에레즈는 겉모습만으로도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들이 변장하고 자리를 잡을 때까지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준 것은… 푸줏간을 하는 젊은 부부였다.

“그렇다면 알리샤는… 왕성으로 이주한 겁니까?”

그 말을 내뱉는 칼리번의 목소리는 붕 떠 있었다. 에레즈는 애석하게도 고개를 저었다.

“아니, 북부에 남겠다고 했어. 은인들에게 함께 싸우자 권유하는 것도 그래서….”

“그렇군요.”

칼리번은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알리샤의 선택이 충분히 이해가 갔다. 마물의 습격을 받아 부모를 잃고, 마을이 폐허가 된 후에도 버텼던 아이였으니 애향심이 남달랐을 것이다. 그리고 만약 에레즈와 함께 전쟁에 참여했다면 왕성에 도착하기도 전에 죽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대신 당신을 다시 만나게 되면 말을 전해 달라고 했어.”

“전언입니까?”

“응….”

칼리번은 에레즈의 손을 채근하듯 꽉 쥐었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에레즈는 잠시 머뭇거렸다.

“그러니까… 몇 년 전에 들었던 말이라 어감이 조금 다를 수도 있지만….”

에레즈는 흠, 흠, 헛기침을 내뱉으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그리고 걸음을 멈췄다.

“…그때 했던 말은 아직도 변함없으니 언제든 돌아와.”

푸른 보석안이 칼리번을 똑바로 응시하고는 말했다.

<내 말 잊지 마, 우리는 계속 이곳에 남아 있을 테니까! 더는 갈 곳이 없으면 언제든지 돌아와도 돼!>

그 순간, 10년은 훌쩍 지난 목소리가 귓가에 다시금 울려 퍼졌다. 고통스러운 기억들에 묻혀 잊어버렸다고 생각했는데, 마치 어제 들은 것처럼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렇게… 로우엔 부인이 전해 달라고 했어.”

에레즈가 부드럽게 덧붙였다. 알리샤와 칼리번을 잠시나마 묶어 주었던 웰미턴이라는 성씨는 더는 없었다. 마을을 떠났을 때는 아무렇지도 않았던 사실이 이제 와 왜 이렇게도 안타까운 것일까? 칼리번은 눈을 감았다.

<누가 널 기억하겠어? 너는 손해 보는 짓을 한 거야.>

에어리얼은 늘 그런 말로 칼리번의 정신을 망가뜨리고는 했다. 그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마물조차 꺼리는 밑바닥에서 끌어 올려 줄 이는 아무도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진심은 뒤늦게나마 전해졌다. 칼리번에게는 알리샤가 있었고 젠이 있었다. 에레즈 프리드웬이 있었다.

…에어리얼과는 달랐다.

그 차이를 이제는 알기에 칼리번은 온전히 기뻐할 수 없었다.

“아직은 북부까지 길을 트지 못했지만…. 칼리번, 당신의 실력이라면 혼자서도 충분히 갈 수 있겠지.”

칼리번이 눈을 뜨자 그곳에는 자신만큼이나 순수하게 기뻐할 수 없는 불안정한 존재가 있었다. 그제야 칼리번은 에레즈가 알리샤의 전언을 꺼내기 어려워했는지 알 것 같았다.

“…북부에 가게 된다면, 그때는 에레즈 님과 함께 갈 겁니다.”

칼리번은 고개를 숙였다. 말과 달리 에레즈의 손은 여전히 자신을 놓지 못했다.

“제가 명령 없이 에레즈 님의 곁을 떠날 일은 없을 겁니다.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칼리번은 몸을 숙여 에레즈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기사는 아니었지만, 조금이라도 이 의지가 전해지길 바라며.

“……!”

예상치 못한 맹세에 에레즈의 뺨이 놀라운 속도로 붉어졌다. 하얀 손이 칼리번의 얼굴 아래에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촉수처럼 꿈틀거리던 손가락이 쏙 빠져나갔다.

“내 곁을 떠나라는… 그런 명령을 할 리가 없잖아.”

흥, 어딘지 익숙한 소리가 들렸다. 칼리번이 고개를 들었다. 에레즈는 귀까지 새빨개져 있었다. 원체 하얀 탓인지 조금만 흥분해도 변화가 잘 드러나곤 했다. 칼리번은 새삼 그가 사람들 앞에서 표정 관리를 하는 것이 피부색이 짙은 자신보다 어려울 것 같다는, 이런 상황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생각을 했다.

칼리번의 시선을 눈치챘는지 에레즈는 등을 돌리고는 척척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물론 칼리번의 손을 낚아채는 것도 잊지 않았다.

“에레즈 님….”

에레즈의 걸음은 전보다 훨씬 빨라졌다. 그 탓에 칼리번의 살짝 뒤처지고 말았다. 8년 전, 숲을 헤맬 때는 언제나 칼리번이 앞장서서 그를 이끌고, 만약의 적을 대비해 보호하는 역할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의 등을 보며 걷고 있다.

칼리번은 차가운 새벽녘의 공기를 깊이 들이마셨다. 걷기만 하던 에레즈가 걸음을 멈추더니 칼리번을 돌아보았다. 그리고는 두 손으로 칼리번의 양손을 쥐었다.

“에레즈 님?”

본의 아니게 길 한 가운데서 두 손을 쥔 채로 마주 보는 자세가 되었다.

“음…. 가장 중요한 이야기를 깜박했어.”

흥분이 가라앉으니 그제야 다시 떠오른 게 있는 모양이었다. 에레즈가 달콤하게 속삭였다. 모두가 잠든 탓일까, 작은 목소리도 평소보다 잘 들렸다.

“림번 영지에 있을 무렵에, 당신의 누이는 아이를 낳았어.”

칼리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인간과 살아가야 할 누이에게 폐가 되지 않도록 용병대에 입대한 후 아예 그쪽과 인연을 끊어 버렸다. 알리샤가 결혼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떠났으니, 아이가 있을 법도 했다. 그러나 막상 에레즈를 통해 그 소식을 들으니 칼리번은 생전 처음 겪는 감정을 표현할 도리가 없어 그저 눈을 끔벅거리기만 했다.

“…그 아이의 이름은 ‘칼’이야.”

마치 제 소식을 전하듯 에레즈의 손이 강하게 칼리번을 움켜쥐었다.

“칼…?”

칼리번은 저도 모르게 되물었다. 젠으로 인해 붉어진 눈이 벌써 몇 번째 커지는지 모르겠다.

“응. 칼….”

에레즈의 얼굴에도 살포시 미소가 고였다.

“…줄여서 칼이라고 부르기는 하지만, 이름 자체가 칼리번은 아니야. 검의 이름을 붙이면 또 떠날 것 같다고, 칼리번이라고 짓지는 않겠다 하더라고.”

“알리샤가….”

칼리번은 동생의 이름을 입 안에서 굴렸다. 그 이름을 참 오랜만에 불러 보았다. 품에 안아 키웠던 알리샤가 아이를 낳다니. 그 아이가 ‘칼’이라고 불리다니. 젠과 전하와 서로 아는 사이라니. 그리고 오메가인 자신이 살아남아서, 지상에 두 발로 서서, 이 모든 이야기를 듣고 있다니….

이 모든 것들이 과도하게 행복해서, 한순간의 꿈처럼 터무니없지 않은가?

“……하하.”

그래서 칼리번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한 번도 소리 내 웃어 본 적 없기에, 스치듯 지나가는 반짝 웃음인 줄로만 알았다.

“하하하….”

그러나 한번 터진 웃음은 쉽게 끊어지지 않았다. 칼리번은 실없이 웃기만 했다. 손으로 입을 벌려 억지로 지은 웃음과는 달랐다. 죽음을 앞두고 남을 위해 지은 웃음과도 또 달랐다. 그저 태어났다는 죄목만으로 존재 이상의 고통과 책임을 어깨에 짊어지다가, 마침내 삶의 시름을 거둬 낸 칼리번은… 무서워 보일 정도로 무뚝뚝한 인상은 어디 가고 더없이 순해 보였다.

여동생이 들꽃을 땋아 화관을 만들 때면 나무 그늘에서 구름의 개수를 셀 것 같은, 풀냄새가 나는 청년에 불과했다.

“칼….”

칼리번을 웃음을 담은 푸른 보석안은 햇빛을 반사하는 물처럼 순수하게 반짝였다. 칼리번은 그저 웃었을 뿐인데 에레즈의 눈가에는 점점 물이 고여 갔다.

“…에레즈 님?”

놀란 칼리번이 웃음을 그치자, 에레즈가 성큼 다가가 그를 끌어안았다.

“왜 그러십니까. 혹시 제가 실수라도….”

칼리번은 말을 끝맺지 못했다. 에레즈는 평소와 달리 으스러질 듯 그를 끌어안은 탓에 숨을 쉬기가 버거울 정도였다. 하지만 그 때문만은 아니었다.

“아니, 아무것도….”

칼리번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에레즈가 속삭였다.

“당신은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어. 그저 나 혼자….”

어째서인지 그 목소리에는 경탄과 울음이 섞여 있었다. 칼리번은 그의 팔을 쓰다듬고는 마찬가지로 에레즈를 두 팔로 감싸 안았다. 두 사람은 그 자리에 서 있기만 했다. 뺨에 부는 숨과 가슴에 닿는 박동을 느끼며, 오래도록. 에레즈는 한참 후에서야 칼리번을 놔주었다.

“항상 당신의 웃음이… 보고 싶었어,”

눈물로 젖은 눈이 시리도록 반짝였다. 에레즈가 눈을 깜박이자 뺨 위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드디어….”

그는 울먹거리면서도 웃었다. 그 모습에서 칼리번은 도통 이길 수 없는 강렬한 욕망을 느꼈다. 이제는 칼리번도 알고 있다. 오메가에게서 웃음을 찾는 것은, 인간의 피로 더럽혀진 알파의 본능에 불과하다는 것을. 감정에 둔감한 오메가가 성숙했다는 신호이므로….

하지만 그것과 이것은, 본성과 이성은, 마물과 인간은 다르다고 변명하려 든다. 이것만은 서로를 위하는 진정한 사랑이라고….

그렇게 속이는 것이다. 사랑하는 것이다. 살아가는 것이다.

“…….”

에레즈가 입을 맞춰 오자 칼리번은 기꺼이 받아들였다. 동굴에 들어가기 전보다 상대의 입술에 익숙해진 터였다.

어느덧 에레즈의 어깨 너머로 해가 뜨고 있었다. 칼리번은 에레즈의 품에 안긴 채로 몇 번이고 반복되었을 세상의 탄생을 보았다. 태양은 잘 익은 황금빛 과실처럼 보였다. 그 빛이 눈 부신 나머지 칼리번은 눈을 감았다.

그들 위로 이제 막 고개를 든 햇살이 드리워졌다. 깜깜한 눈꺼풀 위로 방금까지도 주시했던 태양의 흔적이 동그랗게 그려졌다. 태양을 피하지 않고 노려보다 눈이 멀지도, 태양에 다가가기 위해 날아오르다 추락하지도 않을 것이다. 진실은 윤곽만으로 충분하다. 행복은 죽었거나 혹은 외면한, 눈 감은 자에게 주어지는 과실이었으므로.

더 이상 에어리얼의 망령을 보는 일은 없었다.

칼리번은 행복했다.

나의 오딜 외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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