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화 (49/50)

07

비는 그쳤으나 일주일이 넘도록 내린 탓인지 하늘에는 아직 먹구름이 잔뜩 끼어 있었다. 구름 사이로 드러나는 태양은 평소보다 더욱 눈부시게 느껴졌다. 갑작스러운 폭우에 숲은 놀란 모양이었다. 평소에는 길이었던 곳으로 물이 콸콸 흘러내렸고, 토사가 무너진 곳도 있었다. 고개가 꺾인 풀들도 상당했다.

“이 정도의 폭우였다니… 왕성에도 여파가 갔을 것 같군요.”

절벽 아래를 내려다보던 칼리번이 걱정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왕성에는 지하 수로가 있으니 큰 피해는 없었을 거야.”

에레즈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표정이 썩 좋지 않았다. 왕국에는 매년 우기가 찾아왔고, 그에 대한 대책으로 빗물을 저장하는 시설을 지하에 갖추었다. 전쟁 중에도 땅속에 숨겨진 통로들만은 무사했다.

“…어서 가 봐야겠어.”

“네.”

그래도 오랫동안 자리를 비운 것이 걱정이 되는지 에레즈는 걸음을 빨리했다. 칼리번과 에레즈는 서로를 받쳐 주고, 비틀거리며 산에서 내려왔다. 의지와 육체는 별개의 문제였다. 에레즈는 기력이 다 빠져 버렸고 칼리번은 아무래도 걷는 것이 버거웠다.

더구나 두 사람의 꼬락서니는 우습기 그지없었다. 에레즈의 옷은 너덜너덜하기는 했어도 그나마 의복의 형태를 갖추고 있기는 했다. 그러나 칼리번은 옷이랄 것이 아예 없었다. 알몸으로 성에 들어갈 수 없기에 부득이하게 에레즈의 망토를 몸에 둘렀다. 사실 이들 중 한 명은 왕이며, 다른 한 명은 오메가라고 하면 누가 믿을까 싶을 정도였다.

“아…!”

어찌 저찌 걸음을 옮기던 그때, 에레즈의 몸이 휘청였다.

“에레즈 님!”

칼리번은 에레즈를 제 몸으로 받쳐 주었다. 다행히 넘어지지는 않았지만 두 사람은 끌어안다시피 했다.

“…….”

몸이 가까워지자 에레즈의 얼굴이 붉어졌다. 칼리번도 아무 말도 못 하고 바라보기만 했다.

“가시죠.”

“응.”

한참 후에야 두 사람은 엉거주춤 떨어져 다시 걷기 시작했다. 땅은 진흙이 되어 질퍽했다. 발 딛는 곳이 무너져 내려 그대로 굴러떨어질 뻔도 했다. 비에 젖은 새들이 두 사람의 기척에 놀라 날아오를 때면 나뭇잎 끝에 매달린 물방울이 이마 위로 우수수 떨어졌다. 흙색으로 변한 숲의 전경에 칼리번의 얼굴이 점점 어두워졌다.

“죄송합니다, 에레즈 님. 저 때문에… 시간이 많이 지체되고 말았습니다.”

칼리번이 뒤늦게 말했다.

“그건 당신이 사과할 일이 아니야.”

“하지만….”

“스승님이나 어머니께서 고생하셨겠지만…. 그건 내가 멋대로 자리를 비운 탓이지 당신 잘못은 아니니까.”

에레즈는 확실하게 선을 그었다. 그러나 칼리번은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하고 넘어갈 수 없었다.

“…앞으로도 이런 일은 계속 발생할 겁니다.”

나아가는 걸음마다 낙인과도 같은 발자국을 찍으며, 칼리번이 말했다.

“제가 발정으로 고통받는 사이에 마물이나… 데릴만의 의지를 잇는 알파들이 왕국을 공격할지도 모릅니다. 혹은, 제가 저 자신을 감당하지 못하게 된다면….”

칼리번은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다행히도 이번에는 에레즈의 도움으로 무사히 넘어갔다. 하지만 이런 일이 반복되다 보면 결국 정신이 무너지고 말 것이다. 그는 위험한 괴물이었다. 조금이라도 힘의 방향이 틀어지면 그 여파는 눈덩이처럼 불어날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에어리얼처럼 미쳐 버릴지도 모른다….

“…왕에게는 이끌어야 하는 백성들이 있습니다. 사람들 사이에 섞여 일하면서, 전하께서 펼치신 기적을 믿고 따르는 모습을 자주 보아 왔습니다.”

“…….”

“모두를 위한 힘을 저 한 사람에게 낭비하셔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칼리번에게 가장 두려운 미래는 앞서 언급한 최악의 가정들이 아니었다. 어쩌면 미쳐 버린 자신이 에레즈를 조종하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붉은 오메가에게 겪었던 것과 같은 일을 당하게 할 수는 없다.

“어쩌면 여기서 헤어지는 것이 나을지도 모릅니다.”

에레즈의 손을 잡은 채로, 칼리번은 오랫동안 마음에 품었으나 실행하지 못한 결심을 고백했다. 칼리번의 광기는 세상을 파괴하고자 했던 붉은 오메가와 달리, 에레즈 프리드웬이라는 알파를 잡아먹고 싶다는 그릇된 욕망에서 발현될 수도 있다. 칼리번은 에레즈가 피를 흘리고 지쳐 가는데도 그를 삼키는 일을 멈출 수가 없었던 발정기를 떠올렸다.

“맹세컨대 왕국에 피해를 끼치지는 않겠습니다. …죽지도 않겠습니다. 젠에게 부탁하면 함께 떠나 줄 겁니다. 그녀에게는 경험이 있으니까요. 오랜 동료였으니 제 부탁을 무시하지는 않을 겁니다.”

몇 날 며칠을 함께 보냈음에도 칼리번은 동굴에 들어가기 전과 비슷한 소리를 했다. 마음이 닿지 않아서 변하지 않은 것일까? 아니다. 하나가 될 정도로 너무 많이 닿아 버린 탓이다.

그간 칼리번은 남에게 피해를 주지도, 받지도 않고 홀로 우뚝 서 있었다. 그렇기에 부족한 자신을 깨닫고 남에게 도움을 받는 것이 괴로웠다. 그래서 에레즈의 손길을 거부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상대를 너무 깊이 생각하기에 뒷걸음질을 치게 되는 것이다.

“알고 있어. 나 따위로는 당신에게 아무런 도움이 못 된다는 거….”

역시나 에레즈는 낙심했다.

“그런 의미로 한 말이 아닙니다.”

칼리번이 부족한 말솜씨로 좀 더 설명해 보려던 때였다.

“…거기다 이번에는 8년 만이라 그, 그 부분이… 부족하기도 했고.”

에레즈는 자신의 부족함을 수용하는지 더없이 쓰라린 표정을 지었다.

“네?”

예상치 못한 발언에 칼리번은 저도 모르게 되물었다.

“스승님이 종종 알려 주고는 해서, 이제 나도 세상이 돌아가는 방식을 그럭저럭 알고 있어.”

“도대체 젠이 에레즈 님께 무슨 말을….”

“그렇지만… 당신과 헤어진 후,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어서…. 미숙한 점이 있다는 것은 인정할게.”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칼리번은 고개를 저었다. 대화의 방향이 평소와는 조금 다르게 흘러갔다.

“칼리번.”

이야기의 방향이 살짝 틀어지기는 했지만, 에레즈는 빠져나가려 하는 칼리번의 손을 더욱 단단히 쥐었다.

“당신은 8년을 지하에서 보냈잖아. 하지만 단 한 번도 나에게 그 시간을 보상하라고 하지 않았어.”

에레즈가 뜻밖의 주제로 정신을 쏙 빼놓은 탓에 칼리번은 도망칠 수 없게 되었다.

“그 대가로 전하께서 왕국을 포기하길 원치 않기 때문입니다.”

칼리번은 다시 마음을 다잡고 대화에 임했다.

“…포기한다고 말한 적은 없는데.”

“그렇다면…?”

“나는 당신도, 왕국도 포기하지 않아.”

에레즈는 미소를 지었다.

“그것은… 제 입으로 말씀드리기 그렇지만, 불가능한 일입니다.”

어느 한쪽도 포기하지 않는다면 결국 둘 다 잃고 말 것이다. 그것은 멍청한 칼리번이라도 훤히 보이는 미래였다.

“아마도 그렇겠지. 오늘처럼 선택의 기로에 놓일 때마다 나는 당신을 우선시할 거야. …그로 인해 왕국은 피해를 입고 백성들은 나를 저주하며 죽게 되겠지.”

에레즈는 왕으로서 해서는 안 될 말을 아무렇지 않게 꺼냈다.

“하지만 당신이 곁에 없다면 나는 아무도 지키고 싶지 않아. 왜냐면….”

“…….”

“당신은 내 영혼의 주인이니까.”

먹구름 속에 갇힌 태양이 그 틈새로 빛을 흘러내렸다. 우연인지, 운명인지 그 빛은 에레즈를 비췄다.

“당신에게 밤새도록 설명해도 아직 다 말하지 못한 많은 일들이 왕의 자리에 오르기 전까지 있었어. 알테르 프리드웬의 폭정으로 저항 자체에 회의감을 품은 진영을 포섭해야 할 때….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는 수의 마물을 상대해야 할 때…. 혹은 죽어 가는 사람들을 밟고 나아가야만 할 때. 평생 탑에 갇혀 있었던 괴물은 할 줄 아는 게 없으니까…. 대신 당신이라면 이렇게 할 거라고, 이렇게 이겨 낼 거라고 생각하면서 왔어.”

에레즈는 서툴지만, 진심을 꾹꾹 눌러 담아 말했다.

“내가 얼마나 쉽게 붉은 오메가에게 무너져 버리는지, 조종당하고 마는지… 보았잖아. 당신이 떠난다 해도 나는 결국 다른 무언가에게 흔들리고 지배되고 말 거야.”

“…….”

“그러니 나와 함께해 줘.”

칼리번은 여전히 그늘 속에 있었다. 그는 에레즈가 빛 가운데 그렇게 서 있기를 바랐다. 설령 함께 있을 수 없게 될지라도. 그러나 에레즈는 눈 부신 빛으로부터 벗어나 칼리번이 있는 곳까지 성큼 다가왔다.

“후대에 암군이라는 소리를 들어도 어쩔 수 없겠지. 하지만 이건 내가 감당해야 할 죄고, 모순이니까…. 후회하지 않아.”

당신이 세상 모두를 버리고 나를 선택했던 것처럼. 에레즈는 기울어진 달처럼 쓸쓸히 덧붙였다. 그러고는 이제는 정말로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웃었다. 칼리번이 가장 쉽게 함락당하는, 무력해지고 마는… 그런 미소를 지었다.

“당신을 사랑해, 칼리번.”

에레즈는 꽃밭에서도, 동굴에서 몸을 나누면서도 차마 하지 못한 그 한마디를 비로소 꺼냈다.

“미안해.”

이 세상에서 가장 끔찍하고 잔인한 저주로 칼리번을 옭아맸다.

“…….”

칼리번은 눈을 감았다. 벌써 비통에 찬 비명이 들려오는 것만 같다. 발목을 붙잡고 늘어지는 것은 그들로 인해 생겨날 시체들이다. 하지만 반대로, 그 시체들 또한 사랑하고 사랑받으며 무수한 희생자를 만들었겠지.

사랑이 과연 변명이 될 수 있을까? …잘 모르겠다. 칼리번은 머리가 나쁘다며 명확한 답을 미루고는 했다. 어쩌면 나약하다고 생각했던 에레즈보다 칼리번 자신이 더 약해 빠졌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에레즈 님.”

칼리번은 기꺼이 그늘로 내려온 에레즈를 바라보았다. 마치 칼리번을 추락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것처럼 아름다웠다. 흠집 하나 보이지 않았고 구석구석 공을 들이지 않은 부분이 없었다.

처음에는 그저 본능의 이끌림에 불과했다.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낙인이 찍히는 오메가와 아름다움과 유약함으로 그를 유혹하는 영악한 오메가.

영혼의 공명 같은 고차원적인 개념 따위는 없었다. 그저 눈동자 위로 비친 모습, 짧은 스침, 바람결에 실려 온 향기가 전부였다. 어쩌면 상대가 누구라도 상관없었을지도 모른다.

“다시는, 오늘 했던 것과 같은 말을 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죽지 않았기에 내가 살아남을 수 있었고, 내가 살아남았기에 당신이 죽지 않았다. 그렇게 약속은 쌓이고 겹쳐져, 더는 다른 알파라든가 오메가와는 바꿀 수 없는 유일무이한 존재가 되었다.

“평생… 곁에 있겠습니다.”

한때 칼리번은 다른 이들을 희생시켜서라도 필사적으로 에레즈를 구하려 했다. 그 때문에 방해물이 자신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그는 무너지고 말았다. 이제 칼리번은 더는 도망치지 않겠다 맹세했다.

다시는 당신을 위해서 떠난다는, 같잖은 치장을 하지 않겠다. 왕성으로 돌아가면 다시 예전처럼 인간들에게 섞여 최선을 다해 일을 돕겠다. 알파와 인간이 균형을 잡을 수 있도록 자신의 위치에서 노력할 것이다. 마물들이 오메가를 차지하기 위해 왕국을 침범한다면 온 힘을 다해 싸우겠다. 부상자는 등에 업고 시체는 수습할 것이다. 모든 것은, 왕의 영광을 위하여….

하지만 절대로 성을 떠나지도 않을 것이다. 결국 본능에 패배해 미쳐 버리고 만다면 왕을 지배할 것이다. 왕성의 알파들이 왕의 목숨으로 협박하려 든다면 그때는 왕성을 수호하는 보호막을 파괴해서라도 마물을 부리겠다. 만약 오메가인 것을 인간들에게 들킨다면, 함께 불에 태워지겠다. 혹은 그의 백성을 죽이고 함께 도망칠 것이다.

인간들의 찬양과 달리 사랑은 그리 아름답지도, 옳지도 않았다. 때로는 증오보다도 잔인했다. 역겹고 끔찍했다. 하지만 이 어리석고 이기적인 존재를 살아가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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